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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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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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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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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9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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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97. 폐기물 (2)

DUMMY

[사쿠마한테 물어봤어.]


통신기 너머 마린의 목소리는 지쳐있었다. 나리아는 마린의 목소리 너머로 종이가 팔락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숫자야······야, 내가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라는 말 못 들었어? 다시 써와. 크흠, 아무튼, 그래서, 폐기물이랬나? 사쿠마가 알고 있는 건 없다던데.]

“그래요? 혹시 사쿠마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없어. 새로운 조직원······어, 신입? 항복병? 그런 애들을 훈련시키는 중이거든. 그리고 이거 끼고 얘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꺼림칙하다나. 자기한테는 허락되지 않은 물건이라면서.]

“그렇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단 후보생에 대해 사쿠마와 더 이야기해야 했다. 나리아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헌진이 2구역의 사태에 참전하기로 한 후 상황은 바쁘게 돌아갔다. 사병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법우와 헌진은 작전에 대해서 논했다.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헌진은 군대를 꾸렸다. 기사단 후보생은 스무 명가량이 있었고 법우의 권한으로 제국군도 동원할 수 있다. 병력의 규모는 상당했다. 5구역과 6구역처럼 전쟁을 예비하는 구역이 아니었으나, 즉시 가용 가능한 병력만 수백에 이르렀다.


또 다른 전쟁을 앞에 두고 있는 지금, 나리아는 자신이 알 수 있는 사항에 대해 집착했다. 그것이 어떠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싸워야 하는 적이 누구인지는 알고 싶었다.


“미안해요, 마린도 많이 바쁠 텐데.”

[응? 아니야, 괜찮아. 언제든지 연락해.]


마린의 반응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나리아는 마린의 어색한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마린의 속 보이는 태도는 제법 위로가 되었다.


[······뭐야, 왜 웃어?]

“아니에요, 마린도 지쳤나 보네요.”

[흥, 뭐, 그럴지도.]


마린이 힘껏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리아는 솔직한 마음으로 7구역이 그립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의 지하수로 아지트에서는 도서관을 탐닉하며 상상을 즐길 수 있었다. 적어도 그곳에서 몸은 안전했고 바깥세상을 동경할 수 있었다.


[어째 갈수록 애가 음침해진다?]

“마린, 이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웃기고 자빠졌네. 네가 어른의 뭘 알아?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썩을 숫자들을 봐. 도대체 내가 왜 구역민들 먹여 살리는 분배문제를 고민하고 있어야 하는 건데? 이런 건 너 같은 건방진 꼬맹이들이나 하는 거 아니야?]

“아하, 하긴 그런 건 마린이랑은 안 어울리죠.”

[인정할게. 난 밖에서 애들 종아리나 걷어차면서 부려먹는 게 취향이야.]

“좋아요. 그럼 제가 행정업무를 보고, 마린이 현장관리를 하면 딱이겠네요.”

[그래, 그러니까 빨리 황제 뺨이나 때리고 돌아오기나 해.]


나리아는 느닷없이 말문이 막혔다. 새삼스럽게 돌아간다는 말이 와닿지가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더 위험한 고비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모든 것을 끝내고 마린에게 돌아간다? 꿈만 같은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현실감이 없는 말이었다.


“그래요, 돌아가면요······.”


간신히 쥐어짠 말에 마린도 입을 다물었다. 불안감을 품은 희미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리아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불안감을 깨닫고 황급히 얼버무렸다.


“이만 끊을게요.”

[어, 그래.]


나리아는 통신을 끊고 턱을 괴었다. 소득이 없다면 없었지만 적어도 마린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사쿠마가 폐기물을 모른다는 것은 기사단 양성소의 해체 후에 발아한 무언가가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단순한 반발심으로 구역을 점거할 리는 없었다. 페이는 도시의 장벽을 부수고 바다로 나아가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만한 각오가 없다면 도시의 구성원으로서 반기를 들 생각은 배양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나, 2구역의 무언가가 그들을 행동하게 했다. 스스로 폐기물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이유가 있다. 나리아는 법우의 얼굴을 떠올리고, 유령과도 같았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퍼즐이 맞춰지지 않았다.


‘무언가 있을 거야, 있어야만 해······.’


기사단 후보생이 반역을 일으킬 만한 일이라. 헌진은 지금껏 만난 기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리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헌진?”


나리아는 멈칫거리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헌진이 방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라면 방문을 두드릴 리도 없다. 나리아는 복도에서 마주한 두려움을 떠올리고 움츠러들었다.


“아, 나리아님? 법우 무장장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나리아는 머뭇거리면서도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단정한 차림새의 후보생이었다. 이 건물에 있는 사람은 법우를 제외하면 모두 후보생이라고 했으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리아는 존칭을 해오는 상대방에게 취할 적절할 행동을 모르고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누구세요?”

“베니라고 합니다. 현 시간부로 나리아 님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베니의 허리 뒤편에는 짧은 칼 두 자루가 교차하여 메여져 있었다. 나리아는 칼 두 자루를 들고 다니던 린첸을 떠올렸다. 베니도 그녀를 흉내 내듯 짧은 머리를 뒤편으로 묶고 있었다.


“경호요? 필요 없는데요.”

“네?”


나리아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베니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날카로운 모습을 유지하려 했지만 자세가 흐트러지자 순박한 모습이 드러났다.


“어, 그, 그러면 명령이······저는 무장장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베니라고 했나요? 저한테는 헌진이 있으니까요.”

“그게, 헌진께서도 허락하신 일인지라······.”

“네?”


아무래도 당사자가 없는 장소에서 어떠한 합의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나리아는 곧 헌진의 의도를 깨달았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나리아에게 밀착해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리아가 보인 두려움이 원인일 것이다.


“······그래요?”

“네, 네에······돌아갈까요?”


베니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나리아가 베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자신의 눈으로는 베니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지만, 헌진이 임명한 역할이다. 최소한은 믿을만하다는 소리였다.


“뭐, 그러면 그러세요.”


나리아가 마지못해 허락하자 베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단단한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숙였다.


“나리아님의 안전은 제 칼을 걸고 책임지겠습니다. 안심해주시길.”


적어도 놀리는 보람은 있어 보이는 사람이다. 나리아는 문 옆에 뒷짐을 서고 경계하는 자세를 취한 베니를 훑어보았다.


“그러면 들어와서 제 말동무나 좀 해줘요.”

“네?”


베니가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명령과 계획에서 벗어난 일에는 대응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그, 그건 명령에서······.”

“경호잖아요? 암살자라든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제가 지키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제가 혼자 있게 둘 셈인가요?”


다소 심술궂게 말하는 나리아에게 베니는 쩔쩔맸다. 그러나 나리아가 애원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베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리아는 베니를 방에 들이고 잠시 복도를 살폈다.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리아는 자신의 불안요소를 확인하고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베니는 벽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심각할 만큼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럼, 제 말동무나 좀 되어줘요.”

“말동무라 하시면······.”


나리아는 법우가 마련해준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자신에게 굴러들어온 장난감을 어떻게 다룰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모르는 베니는 눈동자를 굴렸다.


“알고 있는 거나 말해봐요. 기사단 후보생과 2구역에 대해서 전부.”


나리아가 눈을 빛내자 베니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그녀가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 옛 기사단장일세.”


법우는 헌진과의 회의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헌진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저 병력의 배치와 간단한 연계를 위한 명령을 하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법우는 과장될 만큼 감탄했다.


“그렇게 보지 말게. 나도 어깨너머로 그대들의 행동원리는 배웠지만, 그 짧은 순간에 각 대원의 특징을 파악하고 요소에 배치하는 건 자네만큼 해낼 수 없어.”

“이만한 후보생들이 있으면 해낼 수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헌진이 벽에 나란히 선 대원 몇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헌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긴장한 기색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들로서도 기사와 마주한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헌진의 내력을 모르더라도 그들이 긴장할 이유는 충분했다.


“저 아이들 말인가. 내 앞에서 너무 얼지만 않으면 보다 유연한 생각을 했을 테지만, 제안을 하는 것도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일세.”


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후보생들의 습성을 알았다. 기사단은 먼저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자기 생각을 배제하고 외부에서 입력된 명령에 따르는 것이 도시 바깥에서의 생존성을 높인다. 그러지 못한 기사들은 도시 바깥에서 찢기기 일쑤였다. 바람직하다면 바람직한 태도였다.


“내일부터 행동에 들어갈 생각인데, 괜찮겠나.”

“첫 목표지는 어딥니까.”

“이곳일세.”


법우가 지도의 어느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헌진도 구역을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드높은 건물 중 한 채였다. 헌진은 구역에 선 거대한 빌딩들은 오로지 꾸미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을 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층도 존재하지 않으며, 껍데기만 휘황찬란할 뿐이었다.


“구역민들이 휩쓸릴까 봐 본격적인 진압 작전은 망설이고 있었지. 그러나 자네가 와서 마침내, 내세울 만한 무기가 생겼군.”

“저들이 못 미덥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말이 아닐세. 단 한 명이라도 잃을 수 없다는 걸세.”


법우가 후보생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후보생들을 대원이라고 불렀는데, 그 눈빛에서는 신뢰와 자애로움이 묻어나왔다.


“언젠가 도시에 이바지할 아이들일세. 그렇게 둘 수는 없지.”


헌진은 후보생들이 감격에 겨워 떠는 기색을 감지했다. 법우와 후보생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가 이어진 듯했다. 황제와는 방향성이 다르고 그래서 헌진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도시를 유지하려는 의지에 거짓은 없다. 헌진은 법우의 그러한 점만은 인정해야 했다.


“이만 돌아가서 쉬게.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슬슬 그 아이가 걱정스러울 테지.”


헌진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무인을 보는 헌진의 눈에 틀림은 없지만, 베니라는 후보생이 나리아에게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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