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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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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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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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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13. 언령 (1)

DUMMY

그리고 벌어진 살육 속에서, 온전히 헌진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베니뿐이었다. 이성을 잃은 후보생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팔다리가 잘리며 피를 흩뿌렸다. 나리아는 자신의 뺨에까지 튀는 핏방울을 느낄 수 있었다.


헌진답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제대로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었지만, 나리아는 코앞에서 바라보는 헌진의 살육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평소 헌진이었다면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의 칼은 본래 절제되었고 필요한 궤적만을 그었다. 가뜩이나 나리아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토록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무자비한 칼놀림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나리아는 헌진의 칼에서 요동치는 심정을 감지했다.


“무장장, 당신을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중독된 법우의 목을 쥐고 들어 올린 몸짓은 가뿐했다. 법우는 축 늘어진 채 미동도 없었다. 그저 눈동자만 굴려 헌진을 응시했다.


“없다.”


그의 눈동자는 이성과 광기를 함께 품었다. 다른 카얄란 중독자들과 같았지만 그 부분만이 달랐다. 헌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옛 동료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헌진!”


나리아가 베니를 제치고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법우는 나리아의 얼굴을 보며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좋은 씨앗이 될 게야.”

“헌진, 잠깐······.”


나리아가 헌진의 팔을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리아는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금속이 부러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리아는 사람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그의 손이 움직이려 했다.”


헌진은 법우의 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리아는 곧 그 말을 이해했다. 헌진은 나리아를 지키기 위해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옳은 일이었다. 나리아는 바닥에 쓰러진 법우를 내려다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못 볼 꼴을 보였구나, 나리아.”


헌진이 나리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했다. 새삼 내려다본 손에는 마르지 않은 살점이 묻어있었다. 지하에서 빠져나온 후, 어딘가 황망한 정신은 흐트러진 채 모일 줄 몰랐다. 답지 않은 칼을 휘두르고 말았다. 헌진은 주먹을 쥐며 손을 물렸다.


“헌진, 괜찮아요?”


나리아가 헌진의 손을 잡아주었다.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몸짓이었다. 헌진은 피로 물든 나리아의 손이 낯설었다.


“대체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내가 떨어지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냐.”

“사흘째에요. 헌진은 사흘 동안 저 아래에 있었어요.”


체감으로는 반나절도 되지 않았을 텐데, 사흘이라는 소리에 헌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만큼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어쩌면 다나가 자신의 몸에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헌진은 다나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흘에 대해서 서로 얘기할 것이 많겠구나.”

“그러게요. 그런데, 법우는······.”


나리아가 목이 부러진 채 쓰러진 법우를 내려다보았다. 채 감기지 않은 그의 눈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라가고 있었다.


“법우에게는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던 걸까요.”

“······기사단에 몸을 담았으면서도 그는 늘 기사단과 다른 방법으로 도시를 지키고자 했다. 누구도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하겠지.”

“네, 맞아요. 그들 종족의······어, 종족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고회로는 우리와 다를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 방법밖에 없다면······어쩌면······.”


나리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들이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은 명백했다. 사람은커녕 생물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미심쩍었지만, 그 부분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도시란 그들을 포함해서 도시라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해야 할 일을 해야겠구나.”


헌진은 피 묻은 손을 대충 닦아내고는 베니에게 다가갔다. 베니는 헌진을 보고 차렷 자세를 취하며 바싹 얼어붙었다. 어쩌면 저들처럼 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헌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잘해주었다, 베니.”


칭찬을 받아들이기까지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베니는 뒤늦게 손사래를 치며 헌진의 칭찬을 물렸다.


“당치도 않습니다! 기,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아니, 제 말은······기사후보생으로서 그렇다는 뜻으로······결코 제가 주제넘게 기사라는 뜻이 아니라······.”

“그거면 됐다.”


베니는 잠시 몸을 떨었다. 기사단장에게 듣는 칭찬은 그 누구의 칭찬보다 몸에 스며들었다. 조금이나마 기사라는 존재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헌진이 칼로 쌓아 올린 업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 업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의 말은 남달리 깊었다.


“저기, 그런데······.”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베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다른 후보생들 가운데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베니가 남몰래 의구심을 품었던 부분이었다. 후보생들 중에서 실력으로는 자신이 있었지만 베니는 자신이 호위에 어울리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적에 신경이 팔려 나리아를 위험에 빠지게 했고, 부주의하게 들어간 카페에는 마고가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그 모든 상황은, 어쩌면 모두 도시가 의도한 바일지도 몰랐지만, 베니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너에게서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예?”


베니가 반문하자 헌진은 슬쩍 나리아를 돌아보았다. 나리아는 법우의 곁에 주저앉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카얄란의 냄새가 말이다.”

“······알고 있었단 말씀입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자들은 모두 눈을 피했고 같은 냄새가 났다. 오직 너만이 눈을 돌리지 않았고,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다.”

“그 말은 즉······.”


위험을 알면서도 나리아를 한가운데에 내버려 둔 것이 아닌가. 베니는 그런 불순한 생각을 품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헌진이 실종된 것은 사고였다.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헌진은 그 어느 상황에서라도 나리아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방치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런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굳이 호위를 뽑은 이유, 베니는 지극히 기사다운 사고방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리아님을 대신할 목숨 하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는 말이군요.”

“그래, 그러나 너는 그 이상을 해냈다.”


헌진의 계산은 단순했다. 그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리아를 대신해 희생해서 아주 약간의 시간만 벌면, 헌진이 해결할 수 있다. 헌진은 그런 방패로 삼아 베니를 골라냈다. 베니는 그 정도 역할, 또는 가치에 불과했다는 뜻이었다.


베니는 그런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기사다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지킬 가치가 있는 사람의 앞에 서는 것은 썩 나쁜 경험이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고는, 그 모든 사실을 나리아에게 비밀로 하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나리아님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됩니까?”

“기사단이 관여되었다는 사실에 혼자 해결하려 했다. 물론······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해결되었지만.”


헌진은 법우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베니는 묘한 기분이었다. 한때 상관으로서 따르던 자였지만 그의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단의 관계란 본래 그러한 것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법우와 함께 세월을 보낸 헌진 역시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받은 기사단 시술 중에는 그런 감정 요소를 제거하는 시술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2구역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법우가 죽어서 일어날 혼란은 어느 정도 되리라 보는가, 베니.”

“음, 사실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2구역의 관리는 모두 스스로 이루어지도록 짜여있고, 문제의 여지가 있다면, 아마······지휘체계를 잃은 군대가 조금 염려되는 정도입니다.”


혼란이라고 해봤자 별 볼 일 없는 수준일 것이다. 2구역의 특성상 물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인원 대부분은 사람에 가까운 인형일 뿐이다. 그러나 헌진은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갈무리되지 않은 군대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렇군.”


헌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내려와라.”


헌진의 말에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베니는 헌진이 누구를 향해 말하는지 의아했다.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헌진이 슬며시 칼을 쥔 순간, 난데없이 재형이 바닥에 착지했다.


진작에 멀리 도망친 줄 알았던 재형이 모습을 드러내자 베니는 자신도 모르게 숨어있던 재형에게 감탄해야 할지, 그것을 간파한 헌진에게 감탄해야 할지 망설였다.


“······당신이 그 소문난 기사단장이군.”


재형은 헌진을 앞에 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을 빼라. 무기를 보이면 죽인다.”


헌진이 경고하자 재형은 품에 넣은 손을 잠자코 빼냈다. 저항해봤자 무용지물이라고 직감한 것이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재형이 빈손을 들어 보이자 그의 몸을 훑던 살기가 사라졌다.


“헌진.”


그때 여전히 주저앉아있던 나리아가 헌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재형은 우리를 도와줬어요.”


헌진은 재형을 향해 직접 물었다.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어있었다. 도와주려 했다면 모습을 드러내야 했을 텐데.”

“틈을 봐서 저 아이를 내뺄 생각이었소. 은밀기동에는 자신이 있으니 말이오. 물론 당신에게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지만.”

“그 이유는?”


헌진은 재형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재형은 그 눈길을 앞에 두고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기사단장은 생각보다 커다란 존재였다. 거짓말을 하면 죄일 것이고, 허세를 부려도 죄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헌진에게는 있어 보였다.


“······어쩐지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소.”


재형은 나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짓도 허세도 아닌 솔직한 말은 스스로 의문이었다. 오늘 처음 본 소녀의 목숨을 구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얽힌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나리아를 본 순간부터 재형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렇군.”


그런 대답에도 헌진은 이해했다. 재형은 헌진의 손가락이 느슨해지는 것을 보았다. 가까스로 혐의를 벗어난 증거였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도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소름이 돋았다.


“재형이라고 했나.”

“그렇소.”

“이 도시를 임시로나마 너에게 맡기지.”

“······뭐라고?”

“무장장 없는 2구역을 베니와 함께 책임지고 관리해라. 나와 나리아는 1구역으로 가야 한다.”


베니와 재형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헌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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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108.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3) 21.07.15 2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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