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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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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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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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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탑 (6)

DUMMY

나리아는 흐릿한 눈으로 주변의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방호복들은 서둘러 나리아를 나무에 매달았다. 교대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서두르려는 움직임이었다. 광장에 몰려든 방호복들 몇몇이 나리아를 보고 비명을 질러댔다. 멀쩡한 자들이 광기에 휩쓸리려는 자들을 옭아맸다.


“똑똑히 보아라, 저주받은 괴물은 탑의 근원, 은혜로운 불꽃으로 정화되리라!”


자신의 발아래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며, 나리아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가까이에서 보는 불은 오랜만이었다. 생각해보면 불을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피했다고 해야 옳았다. 불은 좋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누군가 외쳤고, 정말로 자신은 사람이 아닌가, 나리아는 생각했다. 8구역의 잊힌 광산에서 태어난 자신은 어둠 속을 기었고 얼굴도 모르는 여자들의 젖을 빨았다. 빨았다고 했다.


광산의 유적, 고대의 흔적에서 발생한 나리아는 그곳에 숨어든 모두의 아이였다. 그곳에서, 나리아는 타인과 자신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했다. 걸음마를 떼고 바람에 이끌려 무작정 밖으로 나와 세상을 보았을 때, 빛 아래에서 나리아는 가까스로 세상과 자신이 구분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리아에게 일종의 상실감이 엄습했다.


누구에게나 있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리아는 그것이 특별한 자각이 아님을 알았다. 세상과 자신을 잇는 탯줄은 누구나 평등하게 끊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자각은 제국도시에서는 무용한 일이었다. 기림 제국의 인간이라면 황제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삶이 발생하고 죽음으로 소거될 때까지 인간은 황제와의 탯줄을 끊을 수 없다. 황제의 논리 없이 사람에게는 삶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영원히 반복되는 유아기는 하찮게 명멸했고, 그것을 갈라내려는 반란은 덧없기만 했다.


그것을 알기에, 나리아는 스스로 특별했다. 도시의 역사에서 숱하게 있었던, 지금은 잊힌 반란들은 나리아의 안에서 응축되었다. 나리아는 그것에 공감하는 자신에게 슬퍼했고, 차라리 무지하기를 바랐으며, 끝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사람은 독립되어야 한다. 모든 질서가 옳지는 않다. 이 파괴뿐인 질서를 부정하고 올바른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어리석지 못한 나리아의 결론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나리아는 자문했다. 황제를 배척해서, 인큐베이터에서 박탈당한 인류는 괴사할 따름이지 않을까? 아마도. 나리아는 긍정에 가까운 애매한 답을 내렸고, 그럼에도 덧붙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염된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은 부활을 꿈꾸어야 한다. 이 명제에 의문은 불필요하다. 폭력적으로 배양된 삶은 이를 추구해서 오롯이 선다. 나리아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불꽃이 발끝을 핥았다. 고통은 없었다. 사방에서 불꽃이 넘실거렸다. 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리아는 오히려 춥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 없는 몸들에서, 나리아는 가까스로 이들에게 부여되어야만 하는 것을 보았다.


죽음이 아니다. 그대들도 사람이라는 세뇌는 더더욱 아니다. 이들은 자신을 긍정해야 한다. 사람은 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황제의 논리였다. 영원히 되찾지 못할 순수한 몸은 그들이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라는 절대적인 긍정만이 이들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나리아는 자신의 삶을, 이들의 삶을 욕망했다.


“불이······.”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불은 나리아를 핥아댈 뿐 태우지 못했다. 나리아는 무감정한 눈으로 발아래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손에 들어올 금속액체, 움직이는 대장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리아는 불꽃 속에서 어지럽게 흩날리며 몸과 불꽃을 막아서는 미량의 안개를 보았다.


“불이 안 붙습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고, 육삼은 떨리는 손으로 인부들을 다그쳤다.


“장작을 더 집어넣어라.”


인부들이 멀찍이서 집어던진 나뭇조각에 불꽃이 타올랐다. 나리아는 불꽃이 터져 나올 때마다 들이닥치는 옛 기억을 마주했다.


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그것은 나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친숙했다.


‘도서관의 아이, 나리아야. 너는 옛 시대의 끝자락을 쥐고 태어났구나. 어둠만이 약속된 이 땅에서, 너는 한 줌의 잿불을 짊어졌단다.’


나리아는 어둠 속에서 사방에 뻗은 일곱 개의 눈을 보았다. 그것은 언젠가 보았던 밤하늘의 일곱별처럼 보였다.


나뭇가지는 나리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린 나리아는 영문도 모르고 웃었다.


‘그 여린 불을 되살릴지, 꺼트릴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란다.’

‘네, 할아버지.’


나리아는 이미 여린 불을 제 몸으로 태우고 있다. 그러니 이까짓 불은 아무렇지도 않다. 불살라진 도서관에서 살아남은 이상, 나리아에게 태울 것은 남지 않았다.


“네, 할아버지.”


나리아는 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속삭였다. 옛 기억과 결별할 때였다. 나리아가 불꽃 속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넋을 잃고 불꽃 속의 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때 탑의 최상층이 괴성을 질렀다. 꼭대기의 한 축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방호복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여전히 탑은 굳건했지만, 머리가 날아가는 모습은 그들의 근간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박살이 난 탑의 벽을 뚫고 두 그림자가 추락했다. 헌진과 린첸은 공중에서 서로 뒤엉켰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린첸의 시선은 탑의 머리에 고정되었다. 지금까지 지켜온 탑이, 삶의 한 축이 무너지는 장면은 견뎌낼 수 있을 것이 아니었다. 그 광경은 어느 공격보다 효과적이었다.


두 기사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가운데, 나리아는 불에서 걸어 나왔다. 움직이는 대장간이 나리아를 감쌌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리아는 느낄 수 있었다. 액체금속은 불을 쳐내고 몸을 묶은 나무를 베어냈다. 작은 발이 불타는 나뭇가지를 밟고 땅을 디뎠다. 나리아는 똑바로 서서 정면에 있는 육삼을 바라보았다.


그슬린 자국만이 남은 나리아는 불을 감싼 어둠 속에서 유달리 하얗게 빛났다. 아직은 색을 볼 수 있는 시신경을 지닌 이들은 어둠 속의 백금을 보았다.


“육삼. 아니, 당신에게는 번호 이전의 이름이 있었을 테죠.”


나리아가 한걸음 내딛자, 육삼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육삼이 아닌 당신에게 말할게요. 저를 따르세요.”


나리아는 귓가의 통신음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헌진과 나리아는 다른 세상에 속했다. 두 기사가 떨어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리아는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당신이 당신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제가 약속할게요.”


불이 피어오른 자리에 두 기사가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흙먼지와 잔불이 흩날렸다. 저장되었던 기사의 혈액이 사방에 쏟아져 내렸다. 흩날리던 불꽃은 피에 맞아 증발했고, 나리아 역시 얼마간 붉어졌다.


흙먼지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헌진의 톱니칼은 린첸의 심장에 박혀있었다. 린첸이 독한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지는 탑의 파편, 구멍 뚫린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뒤로하고, 나리아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물이 흐르는 얼굴을 육삼의 유리창에 맞댔다.


“이 도시를 부정해서, 당신을 긍정할게요.”


육삼은 그 말을 쳐내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탑은 무너졌고, 그들의 기사는 추락했다. 그리고 불을 걸어 나온 나리아는 이 모든 상황을 관장하는 듯 태연했다.


린첸의 손이 허공을 향해 뻗었다. 탑을 움켜쥐려는 듯했다. 헌진은 심장에 박은 칼을 뽑아냈다. 린첸의 몸이 움찔 흔들렸다.


“탑, 탑을 유지해서, 하루라도, 하루라도 더 이 도시를······.”


린첸의 손이 헌진을 향했다. 헌진은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손을 잡았다.


“헌진, 탑을, 도시를, 저를 베어서라도, 부탁······.”


린첸의 몸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오염되었다지만 급속도로 빠져나간 피를 대신해 독기가 들어찼다. 기나긴 세월을 견뎌온 기사의 몸조차 온몸으로 독기를 받아들이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순서가 틀렸다, 린첸.”


헌진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바닥을 베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벤 손바닥에서 핏물이 흘러 린첸의 입술과 상처를 적셨다.


“우선은 네가 살아야, 탑이 살 수 있는 것이다.”


헌진은 피를 건네며 다른 손으로는 린첸의 심장을 헤집었다. 상처를 헤집는 손길에 린첸의 몸이 들썩였다. 몇 개의 뼈를 뽑아내고 내장을 들춰내자, 희미하게 박동하는 심장이 드러났다.


“탑이 되어라. 필요한 지식은 너의 머릿속에 있다.”


헌진이 손상된 심장을 뽑아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방호복들이 비명을 질렀다. 헌진은 새까맣게 죽은 심장을 잔불 속에 던졌다.


“탑의 기사 린첸, 너에게는 아직 죽음이 도래할 수 없다. 죽음을 거부해라. 부활한 자만이 이들을 이끌 자격이 있다.”


헌진의 말은 간신히 이어진 통신 너머로 들려온 나리아의 말을 받아내고 있었다. 나리아는 도시에 속하되 구역에 속할 수 없는 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사람들을 이끌 몸이 필요했다. 따라서 헌진은 린첸에게 삶을 부여하고자 했고, 죽게 두고 싶지 않았다.


“살아라.”


헌진의 칼이 자신의 가슴을 그었다. 두 개의 심장 중 하나를 뽑아내는 동작은 신속했다. 핏물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내렸지만, 헌진은 침착했다. 심장을 바친다. 이들을 해방시키려는 나리아의 말은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헌진의 심장이 린첸의 가슴 속에 박혔다. 바깥에서도 거칠게 뛰던 심장은 곧 새로운 보금자리를 인식했다.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피가 스스로 린첸의 혈관을 찾아갔다. 린첸의 몸은 헌진의 심장을 받아들였다. 순식간에 재생된 심장의 자리는 곧 온몸으로 새로운 피를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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