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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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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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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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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마고 (3)

DUMMY

카페는 고즈넉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조용한 가운데 늙은 할머니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나리아는 베니에게 이끌려 자리에 앉은 채 눈동자만 움직여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은 적의에 가까웠다.


피를 뒤집어썼다는 충격 때문이 아니다. 그 정도로 사방에 적의를 뿌릴 만큼 나리아는 무지각하지 않았다. 지상으로 나온 순간부터 당연하게 거칠 일이었다. 다만 자신이 뒤집어쓴 피가 진정으로 사람의 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발아래에 잘린 목이 굴러도 담소를 나누던 구역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사람의 꼴을 갖추었으나 사람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나리아는 눈앞에서 찻잔을 준비하는 할머니도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시선이 아프구나.”


할머니가 나리아의 앞에 김이 솟아오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베니에게도 잔을 하나 내밀었지만, 베니는 나리아의 뒤에 선 채 곧은 시선으로 앞만을 보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나리아에게 위협이 닿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할머니는 눈가의 주름을 찡긋하더니 내밀었던 찻잔을 자신의 입가에 갖다 댔다.


“할머니는 사람인가요?”

“그게 무슨 말이니?”


노인이 나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한가한 시간에 놀러 온 꼬마를 상대하는 늙은 주인장과 같았다. 나리아는 부드럽게 휜 노인의 눈가를 보았다. 자애로움으로 넘쳐나는 시선이었다.


“저는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무언가를 보았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어째서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노인이 나리아의 투정을 듣는 듯 너그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무례한 손님에게도 역정을 내지 않았다. 나리아는 어쩌면 그것조차 기능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계된 것은 도시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의 감정과 인격조차 설계되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사람의 감정을 지니지 않았어요. 피를 뒤집어쓰고, 머리가 바닥을 굴러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요. 당신도 그런가요? 당신도, 사람이 아닌가요? 갑자기 들어온 꼬맹이가 이런 이상한 말을 하는데도 당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잖아요. 그렇게 설정된 건가요?”

“너는 그런 것으로 사람의 정의를 내리는구나.”


노인은 천천히 찻잔의 향을 음미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리아는 문득 갈증을 느꼈다. 나리아는 노인을 따라 하듯이 찻잔을 입가에 댔다. 내용물은 쓰디쓴 커피였다. 헌진이었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나리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코끝과 입에 오랫동안 향이 맴돌았다.


“우선 이 할미가 당황하지 않은 이유는,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온갖 것들을 보기 때문이란다. 개중에는 너 같은 아이도 있었지. 언젠가는,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을 보겠다며 도시 밖으로 나가겠다는 아이도 있었어. 그 아이가 꿈을 이뤘을지는 모르겠구나.”


나리아는 찻잔을 입술에 댄 채 노인을 바라보았다. 여유로운 할머니의 반응은 바깥에서 보아온 괴상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먼 과거를 떠올리듯 가늘게 뜬 시선과 옛 추억을 입에 담는 입가는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나리아는 차츰 경계심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반대로 묻자꾸나.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는 무엇이냐.”

“······누구라면 두려움을 보일 만한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했고, 정해진 말만 반복했어요.”

“내가 듣기로는, 이 도시의 기사들도 그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단다. 그 어떤 공포와 위험이 들이닥쳐도 흔들리지 않고, 훈련받은 대로 행동해 위기를 깨트린다더구나. 그렇다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더냐?”


나리아가 얼핏 베니를 올려다보았다. 노인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맴돌았다.


“······아뇨, 제가 아는 기사들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어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의 정의가 궁금하구나.”

“사람의 정의라고요?”

“그래, 무엇이 그들은 사람이라고, 또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을 하느냐.”


나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노인의 질문에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예를 들면 수많은 반례가 떠올랐고, 스스로 반례를 부정하려 해도 또 다른 반례가 꼬리를 물었다. 그 어떠한 논증법으로도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직관이라고만 대답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결론이었다. 기사, 3구역의 살덩이, 전쟁 속에 있던 6구역, 아랫구역의 삶들, 그 모두를 뭉뚱그리는 사람의 공통요소를 도출해내기 어려웠다.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 말이다. 모르겠니?”


힌트를 주려는 듯 은근한 말에 나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할머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2구역의 사람들이 사람이라고 결정할 수 있죠?”


나리아는 스스로 생떼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노인은 그런 나리아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거니? 그래,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내가 말하자면, 어디 보자······.”


노인은 잠시 시선을 들었다. 흥미로운 듯 반짝이는 눈동자는 이내 답을 찾았는지 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종보다 우선으로 보전해야 마땅한 생명이라고 대답하고 싶구나.”

“터무니없어요!”


어떤 예상보다 어처구니없는 말에 나리아는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반박했다.


“보전되어야만 하는 종이라는 사실이 사람의 근거라고요? 그 판단은 누가, 어떻게 내리죠? 그런 것만으로는 사람을 정의 내릴 수 없어요. 그건 정의가 아니라, 권력의 과시일 뿐이라고요.”

“그렇다면 개와 사람, 고양이와 사람, 그 어떤 동물과 사람 중 오직 한 종만 보전할 수 있다면, 너는 무엇을 고르겠느냐.”


나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사람을 선택하고 있었다. 이 질문은 그 자체가 함정이다. 그러나 나리아는 자신이 어떻게 반박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종의 가치를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오직 인류의 보전만을 위해 건설된 도시 안에서라면, 그 또한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3구역을 보았어요.”


테이블을 응시하던 나리아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3구역의 사람은, 사람의 형태를 갖추지 않았어요. 그들에게서는 사람이라는 종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었어요. 말을 하고, 의사 표현을 하고, 존재를 의심하고, 스스로 말미암은 고통을 느낄 줄 알았죠. 생존만이 아닌, 삶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도 할 수 있었어요.”


나리아가 노인을 노려보았다.


“할머니의 말대로라면, 종의 특성 중 근본적인 일부를 상실한 그들은 사람이라 부를 수 없겠죠.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었어요.”

“3구역 말이니? 흐음.”


노인의 미간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나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시의 원칙이 구역을 넘어갈 수 없게 한 이상, 노인은 3구역을 모를 것이다. 정보를 독점하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나리아는 그런 억지를 부려서라도 노인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어쩐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구나. 3구역의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당신이 3구역 사람들의 무엇을 안다고······.”


노인은 나리아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


나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이나마 섬뜩한 전류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들은 보전할 가치가 없으므로,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런 몸을 어떻게 사람이라고 부르겠느냐. 방사능에 유전적으로도 손상을 입었고, 커다란 변이의 요소를 품게 된 이상, 도시로서는 가치를 잃었단다. 따라서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나리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노인은 3구역을 알고 있다. 본래라면 알 수가 없는 정보였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구체적인 내용까지 언급하고 있다. 나리아의 머릿속이 경종을 울렸다.


나리아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베니가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손은 자연스럽게 칼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는 나리아를 가리듯 앞에 섰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게냐.”


노이는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유롭게 찻잔을 홀짝이는 몸짓은 자연스러웠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어떻게? 후후, 이번에는 어리석은 질문이구나. 너도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알지 못할 이유가 있겠니?”

“······황제인가요?”

“황제? 재미있는 의견이구나. 그래, 황제라면 이런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당신은 누구죠?”

“마고.”


노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마고. 나리아는 노인의 이름을 되새겼다.


노인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접시와 부딪치는 소리가 짤막하게 울려 퍼졌다. 그 사이로 마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인류를 보전할 책임을 나눈 사람이란다.”

“베니!”


나리아가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베니가 자세를 낮추며 칼을 뽑아 들었다.


“도망가요!”


본능에 따라 노인을 향해 쏘아지려던 베니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나리아가 후퇴를 명령하고 있다. 베니의 전술적인 판단은 재빨랐다. 나리아를 지키면서 카페를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해야 할 행동은 단 하나였다.


베니가 나리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을 찼다. 어깨로 부딪쳐 순식간에 문을 박살 낸 베니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에도 추격을 대비하는 시선과 칼날은 날카로웠다.


“나리아님? 대체 무슨 일이시죠?”

“몰라요! 아무튼, 위험해요! 지금은 도망치는 것만 생각해요!”

“일단 알겠습니다!”


나리아가 자신의 허리를 감싼 베니의 팔을 움켜잡았다. 베니는 전속력으로 도주하며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진 입구 너머로 눈을 감고 찻잔의 향기를 음미하는 마고의 모습이 보였다. 나리아는 사정없이 경고를 알리는 본능을 느끼며 마고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쏜살같이 떠나간 건물 안에서, 마고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못 흥미로운 만남을 곱씹는 입가는 미소를 그렸다.


“할매.”


카운터 너머에서 소녀가 졸린 눈을 비비며 서 있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 눈가가 반짝였다.


“안 쫓아가도 돼?”

“지금은 괜찮다, 디나야. 피곤할 텐데 쉬려무나. 이미 너의 본능이 놓은 아이다. 도시의 권한에서 벗어난 아이를 우리가 어찌할 수 없겠구나.”

“마음에 안 들어.”


디나가 눈가를 비볐다. 졸음에 새어 나온 눈물이 소매를 적셨다.


“무엇이 말이니?”

“쟤 말이야. 그냥 마음에 안 들어.”


마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직 도구로서 기능할 뿐인 디나가 사사로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마고는 도시에 속하지 않은 나리아를 떠올렸다.


“혹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조심하렴.”

“쟤를? 내가 왜?”

“저 아이에게도 언어 한 조각이 있더구나. 아직은 야만적이지만 말이다.”

“······어쩐지.”


디나는 대꾸하고는 다시 카운터 너머로 돌아갔다. 쏟아지는 졸음에 항복하러 가는 손짓이 흐느적거렸다. 마고는 그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는 나리아가 남긴 찻잔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이제 저 아이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자꾸나.”


마고는 흐르는 물에 찻잔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작가의말


습하고 덥고 피곤한 나날입니다. 더위 조심하며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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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89. 탑 (5) 21.06.15 25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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