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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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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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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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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96. 폐기물 (1)

DUMMY

문 앞에서 나리아는 멀찍이 선 사람 몇을 보았다. 기사단 후보생일 것이다. 그들은 경계근무를 서듯 바싹 긴장한 채 서 있었다. 헌진이 이곳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그들 사이에 퍼진 탓이었다. 나리아가 보기에 군대는 아니고, 기사는 더더욱 아닌 집단이었다. 그러나 마린이 이끄는 밤까마귀와 닮은 조직력이 있었다.


나리아는 기사단 후보생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7구역에서 사쿠마는 일당백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단 한 명의 기사단 후보생만으로도 전투의 판도가 바뀌었다. 저만한 숫자가 있다면 전쟁의 판도도 바꿀 것이다. 어쨌든 나리아가 보기에는 기사단이든 후보생이든 그 자체가 흉기였다.


그들과 마주치는 것은 꺼림칙해 나리아는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 끝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았다.


나리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다. 나리아는 기사단 후보생만이 아닌 자가 이 넓은 건물에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아이가 분명했다. 그러나 나리아는 소녀와 눈이 마주치고 어딘가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히 표정 하나 없는 다른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멀찍이서 바라보는 거울 같은 느낌이었다.


나리아는 고개를 돌려 복도에 선 후보생들을 보았다. 그들은 나리아의 시선조차 깨닫지 못한 듯이 목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고요함보다 적막한 느낌에 나리아는 어쩐지 소리를 질러도 그들이 깨닫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나리아에게 걸어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지만 나리아 앞에 이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리아는 그 무심한 눈동자에 억눌려 움직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힘겹게 고개를 돌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이쪽으로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마치 소녀 주변의 공간이 외따로 떨어진 듯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 가위에 눌린 듯한 감각이 순식간에 엄습했다.


“이상하네.”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는 그 상태로 굳어진 양 무표정이었다. 나리아는 이 소녀가 어떠한 표정도 지어본 적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소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나리아는 그 시간이 한순간 같기도, 한세월 같기도 했다.


“너는 폐기물이 아니네?”


소녀가 나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리아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폐, 뭐?”

“아니면 혹시······.”


소녀의 고개가 느닷없이 고개를 돌렸다. 복도 너머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리아의 시선도 소녀를 따라갔다가 되돌아왔다. 그 순간 소녀는 이미 사라진 채였다.


“나리아.”


복도를 꺾으며 헌진이 다가왔다. 나리아는 그제야 잊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소녀와의 만남은 아주 잠시였지만 악몽이라도 꾼 듯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리아의 기척을 그제야 느꼈는지 다른 사람들도 나리아를 돌아보았다. 후보생들이 헌진을 보고 뻣뻣하게 자세를 굳혔다. 아무도 소녀를 눈치 채지 못했다. 심지어 소녀와 함께 있던 나리아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나리아는 자신이 방금 막 방을 나왔을 뿐이며, 그 찰나의 순간에 환각을 봤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진.”

“방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냐. 무슨 일이지?”

“여기 누가 있지 않았어요?”

“누가 있었다고? 내가 감지한 기척은 네가 계속 여기에 서 있었다는 것뿐이다.”


나리아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같은 건물 안에서 헌진이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유령 혹은 귀신. 나리아는 자신이 아는 초현실적인 존재를 상정해보았다. 위협도 느끼지 않았고 마주했을 때는 아름다움마저 느꼈지만, 지나고 나니 그조차 영문 모를 공포로 느껴졌다.


“괜찮냐. 땀이 많이 나는구나.”


헌진이 나리아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흠뻑 흐른 땀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나리아는 부드럽게 헌진의 손을 밀어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은 나리아의 버릇이었다.


“괜찮아요. 아까 덜 토했나 봐요. 조금 어지럽네요.”

“들어가서 쉬자. 제법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언뜻 돌아본 복도 끝에는 작은 그림자가 어렸다. 나리아는 불안한 얼굴로 헌진을 올려다보았다. 헌진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폐기물이라고 한다.”


헌진의 말에 나리아는 흠칫했다. 소녀에게서 들은 불길한 단어였다.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단어가 헌진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폐기물이요?”


나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헌진은 풀다가 멈춘 짐 더미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나리아에게 내밀었다. 식수와 음식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헌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법우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2구역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것은 내전에 가까운 양상이었다. 6구역에서 4구역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구도였지만 이번에는 그 내용이 사뭇 달랐다.


“2구역의 절반에 이르도록 카얄란이 퍼져있다고 하더구나.”

“카얄란이라니.”


헌진은 2구역의 과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기사단 양성소가 제 기능을 상실한 이후, 모든 후보생이 각 구역의 제국군에 배치된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영광과 명예의 기회를 돌려받기 위해,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2구역에 잔류했다. 모든 자가 사쿠마처럼 도시에 순종적이지는 않았다.


당시 2구역은 무법지대였다. 배치된 기사는 없었고, 일반병을 이끄는 집정관으로서는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후보생에 불과하다고 하나, 기사단의 훈련과 시설 몇 단계를 거친 자들이었다. 숱한 사선을 넘은 그들은 제국군으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예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힘을 지닌 자들을 통제할 수단을 남겨두어야 했다. 그렇기에 나리아는 이 또한 황제가 의도한 바라고 생각했다. 침묵한 황제를 대신해 법우가 2구역으로 내려오고,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미 그들은 뿌리 깊게 2구역 각지에 퍼진 뒤였다.


도시는 급격하게 양분되었다. 법우가 자리 잡은 본거지를 기점으로 남부는 나리아가 본 것처럼 평화로웠다. 절반의 구역을 평정하는 것조차 제법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반면에 북부는 기사단 후보생들이 저마다의 세력을 갖추고 다툼을 벌였다. 일부에서는 황제가 아닌 저들만의 대장을 따른다고 공공연히 떠들기까지 했다.


“민간인들은요? 모든 사람이 자기 세력을 고르지는 않았을 거 아니잖아요?”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7구역의 뒷골목을 생각해봐라. 범죄조직은 양지로 나서지 않고 음지에서만 살아갔다. 그와 같은 삶이 이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나리아는 그 후 각 세력의 움직임이 훤하게 예상되었다. 난립한 조직을 내세워 그들은 보호를 명목으로 주민들을 포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2구역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7구역에서는 불안정 속에서 기림 제국이 흘리는 부산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배급식, 술, 마약, 쾌락. 7구역의 범죄조직은 그들 나름대로 추구할 만한 가치를 그곳에서 발굴해냈다.


그러나 2구역은 작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안정적이었다. 음습한 부산물이 흐를 공간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황궁을 목전에 두고 있는,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만이 존재 목적으로 보이는 구역에서 세력싸움을 벌일 만한 근거는 없었다.


“거기서 카얄란이?”


나리아의 결론에 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력 하나가 급속도로 다른 세력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카얄란이라고 하더군. 법우는 그들이 공멸하거나 균형이 기우는 순간을 노리려고 했지만, 그럴 틈조차 없다고 했다.”


카얄란은 단순한 마약이 아니었다. 나리아는 카얄란을 복용하고 광기에 물든 5구역의 병사들을 떠올렸다. 7구역에서는 중독 끝에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중독성과 광폭화로 요약되는 그 효과는, 무기로 활용하자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안쪽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잔잔한 호수 밑에는 무엇이 썩어있을지 모른다는 거군요.”

“그래,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폐기물이란 게 뭔데요?”


나리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서 배어 나오는 불안감을 느꼈는지 헌진은 다소 의아한 태도였다.


“지금 북부의 세력권을 차지한 조직의 이름이다.”

“폐기물······조직에 붙일 이름이 아닌데요.”

“그 이름이야말로 그들이 규정한 정체성일지도 모르지.”


스스로 폐기물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나리아는 몰래 쥔 주먹을 꽉 쥐었다. 소녀는 그 폐기물과 연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을 나리아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리아는 어쩐지 넘지 말아야 할 선의 이정표를 본 느낌이었다.


“그래서 법우가 뭐래요?”

“······구역 진압을 도와달라고 하더군.”

“할 수밖에······없겠죠?”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려면.”


헌진은 담담하게 자신의 한계를 말했다.


“지금의 나로는 후보생 전원에 법우까지 가세한다면 상대할 수 없다. 그리고 폐기물이 바깥으로 튀어나왔을 때, 2구역 사람들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한다.”

“그래요, 그렇겠죠.”

“나리아, 답지 않구나.”


나리아가 문득 고개를 들자 헌진의 똑바른 시선이 보였다.


“무엇을 걱정하는 거냐. 여기에는 기사도 없고, 짐승도 없다. 기사는 오직 기사만 상대할 수 있다. 후보생은 기사를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이 헌진의 위로였다. 나리아는 그제야 슬쩍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이곳에는 헌진이 있다. 유령이나 귀신조차 베어 보일 무력이다. 그런 기사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나리아는 다른 구역도 아닌 이곳에서 자신이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리아는 떨쳐내지 못하는 진득한 불안감을 느꼈다.


작가의말

좋은 주말 보내세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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