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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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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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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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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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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88. 탑 (4)

DUMMY

린첸은 단걸음에 헌진과의 거리를 좁혔다. 헌진은 목과 배로 동시에 찌르며 들어오는 두 칼날을 느꼈다. 헌진이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섬뜩한 살의가 목덜미를 베고 지나가자, 헌진은 허공에 튀어 오르는 자신의 핏방울을 보았다. 그 너머로 마주친 린첸의 눈은 웃는 듯 가늘어졌다. 동시에 허공에서 역수로 쥔 칼날이 헌진의 얼굴에 파고들었다.


헌진은 톱니칼을 횡으로 크게 베었다. 순간적으로 가동한 회전이 칼날의 경로를 찢어발겼다. 린첸은 칼을 되돌려 헌진의 톱니칼을 받아냈다.


충격에 튕겨 나간 린첸이 벽에 두 발을 디뎠다. 헌진이 톱니칼을 되돌리기도 전에 린첸은 벽을 박차고 다시 쇄도했다. 허공에서 부딪치기가 무섭게 린첸의 칼날이 헌진의 빈틈을 할퀴었다.


칼날끼리 부딪칠 때마다 린첸의 칼은 녹을 벗어냈다. 그와 함께 린첸은 과거의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리는 듯했다. 공격은 거듭될수록 정교하고 또렷하게 헌진의 목숨을 노렸다.


기사간의 대련에서 린첸은 기피 대상이었다. 헌진은 새삼스럽게 그런 일을 떠올렸다. 린첸의 장기는 적의 품으로 파고드는 극단적인 근접전이었다. 양손에 뇌 한쪽씩을 각각 할당한 듯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손놀림은 예측할 수가 없다. 앞에서 찌르는가 싶으면 뒤에서 베려 들었고, 좌측을 막으면 아래나 위에서 꽂혀왔다. 린첸의 종잡을 수 없는 궤적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린첸과의 대련이 기피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린첸은 적을 향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극단적인 근접전이라는 말은, 적에게서 결코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적과의 전투가 한걸음 이내에서 벌어진다면 반드시 반걸음 앞으로 나섰고, 반걸음 이내에서 벌어진다면 반의 반걸음을 앞으로 나섰다.


적이 허용하는 거리 안에서 린첸은 날뛰었다. 그녀의 전투는 반드시 깨끗하지 않다. 서로의 몸을 소비하며 난자하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항상 끝에 서 있는 자는 린첸이었다.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고 그녀는 자신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은 적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헌진은 생각을 멈추었다. 짐승보다 더욱 짐승 같은 린첸을 상대로 사고는 거추장스러웠다. 헌진은 세월이 축적한 본능을 풀어헤치며 린첸의 칼을 맞받아냈다.


쌍검과 톱니칼이 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한순간 헌진은 린첸의 허점을 포착했다. 사고의 흐름이 그것을 좇기도 전에 몸이 반응했다. 헌진의 무릎이 린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린첸은 순간 허공에 떠올라 착지했고, 헌진은 다음 접근을 대비했다.


그러나 린첸은 헌진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갸웃하며 섰을 뿐이었다.


린첸의 오른쪽 어깨가 기괴하게 비틀려있었다. 린첸은 자신의 어깨를 들여다보다가 붙잡고 힘을 주었다. 비틀렸던 어깨가 우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맞춰졌다.


“린첸, 네 몸은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헌진은 린첸과 칼을 섞으며 확신했다. 그녀의 살의와는 반대로 몸은 물러졌다. 격한 몸놀림이 몸을 붕괴시키고 있다. 린첸의 무릎뼈가 흘러내리듯이 주저앉았고 귀 한쪽은 떨어질 듯이 기울어졌다. 기사의 재생력이 몸의 원형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요?”


린첸은 태연하게 허리춤에 둘렀던 가죽 주머니를 입에 댔다. 기사의 피 몇 방울이 그녀의 입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흘러내리던 몸의 윤곽이 또렷하게 바뀌었다. 린첸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입가를 다셨다.


“헌진, 옛날에 마주했던 거인을 기억하나요.”


헌진은 린첸의 말을 이해했다. 린첸이 말한 거인은 기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대원정 시기, 도시 바깥에서 기사단은 거인과 만났다. 가까스로 짐승의 꼴을 면한 거대한 존재였다. 피부는 단단했고 갈라진 틈으로 시뻘건 불꽃을 내뿜었다. 눈 여러 개는 양측의 어깨 앞뒤에 제각각 붙어있었는데, 사방에서 달려드는 기사단을 동시에 관측하고 반격해왔다.


“기억한다.”


헌진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거인과 벌인 싸움에서 잃은 기사단원 몇의 얼굴도 떠올랐다.


“헌진이 벌린 거인의 목덜미에 알베릭의 대장간이 침입해 내부를 폭발시켜서 간신히 쓰러트렸죠. 그 과정에서 요미가 전사했어요. 그리고 거인을 쓰러트렸을 때, 거인이 집요하게 기사단의 진로를 막아섰던 이유를 알게 됐죠.”


린첸은 두 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헌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걸음은 불안정했고 무릎이 덜컥였다. 헌진은 린첸을 따라 칼을 겨눈 채 신중했다.


“그 거인의 뒤편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거인의 시체가 있었어요. 거인은 그저 죽은 동족들을 지키고 싶어 했을 뿐일지도 모르죠.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사단이 조금만 더 멀리 돌아서 갔으면, 거인은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기사의 입에서 전투의 감상은 쉽사리 발설되지 않았고, 따라서 금방 잊혔다. 헌진은 대원정에서 치른 숱한 전투들을 짤막한 개요와 애도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긴 세월을 지나 린첸의 입에 오른 감상은 명확했다.


“이 소리가 들리나요.”


린첸이 자신의 귓가에 손을 댔다. 헌진도 린첸과 마찬가지로 이미 탑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탑 아래에서는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고, 쫓거나 쫓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죠? 저는 평생을 명령에 따라 살았어요. 우연히 살아남은 저에게 당신이 기사가 되라고 했기에 기사가 되었고, 강해지라고 했기에 강해졌고, 이 탑을 지키라고 했기에 지키고 있죠.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요.”


린첸이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흐렸다. 피의 효과가 떨어졌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의문을 느낄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는 삶인데. 거인을 쓰러트리고 그걸 의문 삼은 적은 없었죠.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불현듯, 마침내, 또는 기어코, 떠오른 의문은 머릿속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죠.”


린첸의 왼쪽 칼이 헌진을 겨누었다. 오른쪽은 바닥을 향해 늘어뜨렸다. 헌진은 린첸의 수십 가지 전투 자세 중 그와 같은 자세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오른쪽 팔의 근육이 녹아내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린첸은 개의치 않아 했다.


“이미 저들이 죽은 자들이고 이곳이 무덤이라면, 저는 죽은 자를 지키는 거인이 되어야 하겠죠.”


헌진은 천장에 매달린 기사의 숨이 끊어지는 소리와, 린첸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를 함께 들었다. 그리고 칼을 들었다. 그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린첸의 머릿속에 심어진 황제의 의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기사의 피만이 이곳의 생을 삶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린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하려 할 것이다. 린첸은 이제 기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탑의 주인이자, 구역의 사람들을 책임지는 탑 그 자체였다.


“돌아가소서, 폐하, 돌아서, 더 큰 죽음을 막아내소서.”


린첸이 흐릿하게 중얼거리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헌진은 위에서 들이닥치는 린첸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방호복이 뻗은 손이 나리아의 다리를 움켜쥘 뻔했다. 나리아는 힘껏 그 팔을 발로 쳐내며 창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이들이 어째서 습격해오는지는 알 수가 없다.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모습은 비이성적이었으나 애초에 그들의 모습에 이성의 척도를 잴 수는 없다. 나리아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생각보다 침착할 수 있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비명을 질러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리아가 창살을 힘껏 밀어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품속에 있던 단검을 들어 내리쳤다. 자잘한 부분은 떨어져 나갔지만 두꺼운 부분은 칼날조차 박히지 않았다.


방호복이 좁은 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머리를 감싼 유리가 금이 가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였다. 나리아는 그들의 기이한 살의에 엉거주춤 칼을 겨누었다.


“물러나요! 베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잡아, 저걸 잡아! 저게 사람이다! 잡아야 해!”

“당신들도 사람이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방호복들이 밀고 들어오자 창살이 부러지려 했다. 나리아는 이 이상 뒤로 물러설 곳도 없자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쥘 뿐이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나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움직이는 대장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자그마한, 손톱만큼도 되지 못하는 크기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리아가 몸을 기댄 창살을 긋고 지나가자,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히 창살은 부러졌다.


얼결에 몸이 기울어 바닥에 머리를 찧은 나리아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나리아가 빠져나오자 감옥을 되돌아오려는 방호복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고마워!”


나리아는 대장간을 향해 그런 말을 해도 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일단은 내뱉고 달렸다.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이 마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방호복의 걸음은 느렸다. 땅 위를 출렁이며 달리는 몸으로는 나리아의 뜀박질조차 따라잡지 못했다.


문제가 있다면, 방호복은 지치지 않았다. 나리아는 얼마 뛰지 않았는데도 급하게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곳의 공기는 무거웠다. 나리아는 애써 벌려두었던 거리가 다시 좁혀지는 것을 느꼈다. 소란이 벌어지자 다른 방호복들도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들도 지금 쫓아오는 방호복들처럼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방이 조여오는 듯했다.


“무슨 일이냐.”


나리아가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육삼이 다가왔다. 나리아는 육삼의 명찰을 발견하고 내심 안도했다. 그라면 유일하게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육삼! 저 사람들, 저 사람들이 이상해요!”

“저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육삼이 방호복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들이 주춤거리며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나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육삼이 나리아에게 다가와 어깨를 손으로 붙잡았다. 이상하리만치 힘이 들어간 손이었다.


“네가 온전한 사람의 꼴이라는 것을 말이다.”

“뭐라고요?”

“가져야만 했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눈앞에 두면,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이지. 욕망하거나, 혹은 제 욕망에 파괴당하거나.”

“육삼?”


나리아가 인상을 썼다. 육삼은 나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 속에서 무언가가 급격히 떨리고 있었다. 나리아는 그것이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삶을 파괴할 수 없다. 따라서.”


육삼의 곁으로 다른 방호복들이 다가왔다. 육삼이 나리아의 양쪽 어깨를 굳게 짓눌렀다. 방호복들이 저마다 나리아의 몸을 붙잡았다.


“너를 파괴해야겠다.”


사방을 감싼 방호복에 나리아의 숨이 막혀왔다.


작가의말

즐거운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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