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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iKiri 님의 서재입니다.

붉은 눈의 아가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씁쓸한설탕
작품등록일 :
2018.07.29 16:34
최근연재일 :
2018.11.27 23:07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115
추천수 :
7
글자수 :
184,250

작성
18.10.28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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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불씨

DUMMY

우리는 침착하게 3층 제일 끝 방에서. 어느 파멸적인 여자가 백린 성냥을 떨어트려 불이 났다고 보고했고. 상황실은 개판이 되었다. 수 백장의 종이가 뿌려지며 서로에게 질책을 하다. 결국 나온 결론은 벌금을 물고 긴급 착륙을 한다는 것이었다.


화재를 진압하려고도 한번 시도해 봤지만. 이미 화재는 끔찍하게 번져 좌현 전채로 퍼질 가능성도 있었다. 특히 배기구에 불 붙은 파편이 떨어져. 비공정은 비정상적인 온도까지 상승하고 있었다. 모험가는 의무에 충실하게 낙하산을 펼치고 도망쳤지만. 특이한 몇몇만 남아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4층 2등석에 한 객실에서. 옷을 맞추고 있는 중이었다.


“비공정까지 타시다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셨는데. “


“하! 그 유명한 카리샤 말린이 드레스를 한 벌 만들어 준다는데. 광고에 쓰면 그것보다 효과적인 게 있겠나? 우리 후작령에서 가장 유명한 탈세범의 옷을 만들어 준다니. 하! 조수!“


“네!” “네. ···아. ”


나도 무심코 대답해버렸다. 그러자 옆에 소녀는 쿡쿡. 웃으며.


“손님께서는 편히 계세요!” 그리고는 아가씨의 어깨부분에 줄자를 대고는 말했다.


“언제쯤 완성될까요? 달란 말칸스 장인. “


“정장은 혼이 담겨져 있는 생물이야! 그런 생물은 독촉한다고 빨리 나올 것 같나? “


“1갈리아.”


“빨리 나오네. 돈을 양분으로 자라거든. 내일까지면 되겠나?”


“내일 오전 6시. ‘칼리샤 말린’ 금융 거래소로.” 아가씨는 드레스의 리본을 다시 다듬고는 말했다.


“오전 6시? 그건 좀···” “마운티이라의 가주를 만납니다. 그림으로 남을 만한 사건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정 곤란하시면 의뢰비는 돌려 받지 않을테니···”


“아니! 꼭 하겠네!” 편지 배달부가 그림으로 남을 일은 그리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측정 완료! 32.2 말리조라입니다!” 줄자를 들고 있던 조수가 말했다.


“괜찮네. 내가 주로 만드는 범위야.” 장인이 수치를 기입하곤 말했다.


“혹시 여벌의 옷이 있으면 빌리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장인.” 아가씨가 말했다.


“물론이지. 그 드레스도 훌륭하기는 하지만. 거리에서 그런 거 입으면 이샤라이나 종교 심문자들이 건방지다고 시비나 걸 테니 말일세. 정장이면 되나?”


“두 벌.” 가운을 입고 있던 나를 바라보았다.


“부탁드려요.” 말이 짧은 아가씨를 대신해 조금 길게 해줬다.


“자. 다음 분. 부탁드려요!” 조수가 말했다. 나는 가운을 강하게 조이곤 일어섰다. 아가씨께서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고. 방송에서는 2등석 대피를 준비해달라는 말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화재라니. 참. 정류장도 다 와가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장인이 수첩에 수치를 적곤. 투덜거리며 말했다.


“누가 백린 성냥을 떨어트렸다고 하네요. 비공정에서는 안 들고 타는 게 예의인데. 그것도 모르나!” 조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아가씨는 차를 한번 들이켰다.


“측정 끝! 35.9 말리 조라에요!” 조수가 줄자를 돌돌 말곤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 도망치지. 불타는 비공정에서 옷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장인은 물건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다 정리하자. 우리는 아무도 없는 빈 복도를 지나. 사람이 가득 찬 갑판으로 올라 왔다. 사람들은 밑에서 타고 있는 큰 불을 구경하고 있었고. 머리 회전이 빠른 모험가들 몇몇은 자기 식량을 비싼 값에 팔고 있었다. 제일 인기 있었던 건 옥수수였고. 착륙까지는 꽤 먼 이야기였기에 우리도 하나씩 물곤. 우리가 지른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지네요.” 조수가 옥수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은 안 멋질 겁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썩 멋지지는 않네요.” 조수가 옥수수를 깔끔히 다 먹고는···


“방금 전에는 가득했지 않았나요? 그거.” 나는 이젠 빈털터리가 된 옥수수를 들곤 말했다. 조수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우물 씹다가. 힘겹게 삼키고는.


“이제 내려야 하잖아요! 사람 많은 데서 먹을 거 들고 있으면. 민폐라고 했어요!”


“그렇긴 한데. 누가 말했죠?” “우리 스승님이 말했죠!” “그 스승님. 옥수수 들고 내리고 있는데.”


“네!?” 눈이 엄청나게 커지곤. 몇 초만에 스승님이라고 부르던 사람의 허리를 가격하곤. 고래고래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니 갑자기 아가씨가 생각나.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앞에는 사이 좋게 말다툼을 하는 장인과 조수가 있었다.


비공정에서 내리자 ‘비상 정류장’이라고 쓰여진 팻말이 보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양동이를 나르고 있었는데. 1등석은 면제였다. 나는 장인에게 받은 꽤 멋진 정장을 입었다. 이렇게 정신 없는 상황에서 사람 없는 한 군데는 찾기 쉬워 다행이었다.


다시 비공정 근처로 돌아갔는데. 조수가 눈을 초롱초롱 밝히며 나에게 다가왔다. 꽤 부담스러워서 주춤했는데. 그러자 종이와 연필을 들이 내밀며.


“이름! 정장 만들어 드릴 때, 구분해야 하니 이름 좀 알려주세요! 아. 혹시 깃펜 아니면 글자를 못 적으시거나. 아니면 에어조라 성당에서 글자 교육을 못 받으신 건 아니죠?”


“그건 아닌데. 음···” 종이에 이름을 적으며.


“그런데. 어차피 아가씨랑 같이 있는데 구분할 필요가 있나요?”


“···! 칼리샤 말린님! 이건 예상 못했는데 어쩌죠?” 지나치게 솔직한 조수는 아가씨를 보며 말했고.


“망할! 당신 머리는 콧물만 만드는 기계입니까!? 아니면 뇌가 탈부착인건가요? “ 아가씨는 조수에게 양산을 집어 던진 후 그렇게 말했다.


“전해줘요.” 나는 조수에게 종이를 건넸다.


“오! 칼리샤님, 결론적으론 성공했어요! 잘했죠?” 그렇게 떠드는 조수를 뒤로하곤. 잠시 정류장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뭐가 ‘잘했죠?’입니까! 이 머저리가! 빨리 종이나 내놔요!” 음···


“으아아! 1분동안 소중히 다듬은 머리라고요! 헝크리지 말아주세요!”


“1분? 퍽이나 소중하겠네!”


“소중하다고요! 빨리 돈이나 내놔요! 이런 부끄러운 일. 돈 같은 것도 없었으면 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자! 먹고 꺼져요!”


“꺼지라니! 너무··· 우와! 감사합니다!”


···시끄러워서 쉬기는 개뿔. 유리창 너머로 까지 잘 들려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아가씨께서는 수표 하나를 건내 주곤 종이를 건내 받았다. 그리고 그 종이를 한번 바라보곤.


“알리칸. 거기, 알리칸양! 이름 외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외웠다고요!”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아가씨를 보며 차를 한잔 마시며 바라보았고. 아가씨는 말을 이었다.


“이기적이라고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직 저는 그대가 필요합니다. 적어도 이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평상시 관계를 유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차를 비웠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고는 여전히 불타고 있는 비공정을 바라보다가 –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말했다.


“좀 쪽팔리니까 고래고래 소리 좀 지르지 마요.”


“그건 죄송하지만. 전 평생에 한번이나 만날 사람들의 평판까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아직 만날 일이 많으니까. 대답을 부탁드리지요. 알리칸양.”


“매일 ‘조수’라고 불렸는데. 그렇게 들으니 꽤 어색하네요.”


“필요하시다면, 안 어색할 만큼 불러드리죠.” 아가씨는 여전히 군주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됐어요. 조건 두개만 들어주시면 수락하죠.” 그렇지만. 처음 봤던 압도적인 권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뭡니까. 알리칸양.”


“이젠 더 이상 죽을 위기 같은 상황을 만들지 말 것. 그리고 추가 수당으로. 이번 일에서 나오는 수익에 1파센을 할당해 주시겠습니까? ”


“1파센. 승락하지요.” 아가씨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곤.


“언제 주시나요?”


“저 두대가 다 팔릴 때까지는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마운티이라는 거대한 도시니 세 달 정도 걸릴 것 같군요. 정 급하시다면 가불로 드릴 수는 있지만 이자는 때고 드리겠습니다. 은행 대출로 드릴 거니까요. ”


“저야 아씨처럼 엄청난 사람은 아니라. 그냥 집 한 채나 살 돈이 있으면 됩니다.”


“엄청난 사람이라니. 하. 그나저나 가족분들도 같이 데리고 살려면 꽤 큰집이 필요하겠군요? 하나 알아봐 줄 수 있는데. 직원에겐 50파센 할인 중입니다. ”


“···됐습니다. 그리 큰 집은 필요하지 않아요. 몇 명 안 살 것 같으니.” 나는 아가씨의 눈을 피하곤 말했다.


“······ 알겠습니다. 괜한 걸 물어봤군요.” 아가씨는 손을 놓곤.


“이제 곧 일이 끝날 겁니다. 백작에게 청구서를 주곤. 화물이 들어오는 데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한 후. 이샤라이나 대사관이 끼어들면 곤란하니까. 적절한 정치적 처리를 해놓고-“


“정치적 처리요?” 내가 끼어들었다. “뇌물의 고상한 표현이니까. 알아두세요.” 아가씨는 살짝 기침하곤.


“그 정치적 처리를 하면서, 덤으로 이 빌어먹을 편지를 전해주면. 짜잔. 전부 끝. 이제 파티를 즐기면 되는 겁니다.”


“그게 끝이면. 제가 할 일은 뭐가 있을까요?” “제 호위죠. 운이 좋으신 그대와 같이 다니는 것만으로도 생존율이 30파센은 오른 것 같습니다!”


“잘 싸우시면서. 뭐.” “제가 여러분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제가 살 땅이 사라집니다. 남부에 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소위 ‘반-휴마 해방군’이라는 친구들은 너무 꽉꽉 막혀있고. 보기 싫은 얼굴도 있어서 말입니다!”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곤 비공정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어디 가십니까?” “시체 확인!” 비공정은 화재가 거진 다 진압되고 있었다. 좌현의 일부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고. 방금 마차를 타고 온 깔끔한 정장과 안경을 쓴 한 남자가. 우리가 불이 났다고 신고 했을 때, 인생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던 비공사에게 서류 더미를 집어 던지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엮이면 반드시 보상금으로 싸울 것이니. 그들을 무시하고 배기구쪽으로 갔다.


“···?” “···엄.”


배기구에는 그을린 나무토막, 철들이 있었고. 아가씨가 방에서 나오기 전에 암살자의 손에 쥐어준 백린 성냥갑이 있었다. 문제는 중요한 시체가 없었다.


“날아가 버렸나 보죠.” 내가 백린 성냥갑을 배기구에 떨어트리곤 말했다.


“그렇죠. 그렇게 보는 게 가장 맞긴 한데······” 아가씨는 찝찝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날아갔던, 타버려서 제가 됬건. 아님 저 방에 허리가 끼인 체 질식했건, 저 방에 시체가 남아있건. 죽었다는 사실은 똑같으니 상관없습니다.” 나는 창문을 바라보곤 말했다. 창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창문에 끼어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 성냥갑이 여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손은 방안에 있었으니 무슨 방법으로든 거기서 탈출을 했을 거라는 말인데.”


“앞에는 불에, 뒤에는 하늘. 허리는 창문에 묶여 있었고. 연기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을 건데 창문을 벗어나기 어려울 뿐더러··· 벗어났다 해도 그냥 떨어져서 죽었겠죠. 떨어지다 당황해서 성냥을 놓아버려 여기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가씨는 내 말을 듣더니. 잠시 생각에 잠기고는


“Oupon Pride···? 전쟁 지능? 무슨 말일까요?”


“전쟁 지능? 아. 그 여자가 말한 게 비명이 아니라 단어였나요?”


“네. 문제는 큰 연관이 없는 단어 두 개를 말했다는 점이죠. 딱히 이을만한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데.”


“뭐, 그 사람이 뭘 말했건 죽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이제 가죠. 슬슬 수상하게 보일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아가씨는 나를 따라오면서 찝찝한 듯 비공정을 몇 번 뒤돌아봤다.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에도.


“도대체 아가씨에게 이샤라이나 신성 제국은 뭐길래 그렇게 불안에 떠시는 건가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데. 그대와 전 그저 나약한 개인일 뿐이고. 지금 우리를, 아. 정확히는 저를 죽이려고 드는 것은 수천만명의 의지입니다. 수천만명이요! 북방의 살얼음과 산맥에서도 살아남고. 여신이 보좌하는 그 나라의 수천만명의 의지가 저를 죽이려고 드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빌어먹을 세금 고지서랑, 이샤라이나 신성 제국에게 추적당하면 내일 아침이라도 폐쇄될 은행 계좌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께서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강대한 힘은 이제 별 필요가 없습니다. 이거 가지고 군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젠 애초에···” 아가씨는 건물의 산 위에 있는 마운티아 가문을 바라보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이젠 기사가 수백의 병사를 쓸어내지도. 신화에 나오는 기사라도 더이상 혼자서 수만명을 막아 내지 못합니다. 총탄 한방에 생과 사가 갈리는 전쟁터에선 이제 신화 속 영웅 같은 건 나오지 못합니다.”


“의외군요. 아가씨는 영웅···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갑옷을 입었습니다.” 아가씨의 복장을 바라보았다. 정장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화살은 못 막는데요.”


“신사의 갑옷입니다. 제가 상대하는 게 이샤라이나 제국이라면. 이젠 더 이상 도망치는 건 질렀습니다. 어제는 두 명을 보냈지만, 오늘은 네 명을 보낼 것이고. 일년 후면 군대를 끌고 오겠지만. 이대로 계속 있으면 전 둘이서, 나중에는 혼자서 그들을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아가씨의 목표이십니까? 하지만··· 아가씨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지않습니까? 별 상관 없을 것 같은데요.”


“유감이지만 상관이 있군요. 3번 정도 남았습니다. 그리고, 단지 살아남는 것이 제 목표는 아닙니다.”


“그럼?”


“그건 재개약하면 알려드리지요. 그 문제는··· 꽤 심각한 거라 말입니다.”


“아쉽네요. 못 들을 게 분명할 것 같으니. ···그러면 아가씨가 그 갑옷을 입은 건, 이샤라이나에 대항할 세력을 모으려는 겁니까?”


“세력, 돈, 많은 것들이 필요하겠지요. 그들이 수천만명의 의지라면. 저는 그 수천만명의 의지에 핍박 받는 이들을 끌어 모을 것입니다. 더 바빠지겠군요.”


“다음엔 좋은 사람 만나보시길. 저는 아가씨와 다르게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여쭈어봐도 될까요? 알리칸 양.” 아가씨는 나를 바라보곤 말했다.


“그냥. 제 친척들을 부탁 받아서 말입니다. 친척이라고 해 봤자, 어른들은 모두 죽었거나 실종되어 어린이 밖에 없지만··· 친하게 지내던 삼촌의 마지막 부탁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 애들마저 없으면 제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어질 거니까요.”


“‘흔적조차 없어지다니?’”


“남부 지방에 흔하디 흔한 이야기입니다. 너무 흔해서 이야기 거리도 안 될 정도고. 뻔한 이야기입니다. 전쟁터에서 벗어나다가, 이샤라이나, 혹은 반-휴마 해방군에게 포위당했는데.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몸을 받쳐 포위망을 뚫고. 자식 하나만을 탈출시킨 후··· 그 자식마저 포위망에 갇혀 처절하게 사망.”


“······”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세상을 구한다, 악을 물리친다. 그런 게 아니라 전 그저··· 제가 있었다는 기억을 소소하게 남기고 싶을 뿐입니다. 거창하게도 아니라. 단지 기억할 사람 몇몇만 있으면 충분하고요. 그렇지만···”


아가씨는 아무 말 없이 담배와 적린 성냥을 건넸다. 처음 써보는 거라 꽤 어색하게 파이프를 물었지만. 다행히도 아가씨가 불을 켜줘 별 문제 없이 피우곤.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조차 이런 시대에는 꽤 어렵네요.” 한번 더 피웠을 때. 나는 기침을 하곤.


“엄청 쓰군요. 이거.”


“괜찮습니다. 처음엔 다 그러더군요. ” 난 아가씨에게 담배를 돌려주곤.


“어쨌거나. 전 아가씨에게 돈을 받은 다음엔··· 제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아가씨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가씨와 같이 다니는 이유로 저까지 이샤라이나에게 수배 당해버리면 힘들어집니다.”


“······제가.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가씨는 고개를 조금 숙여.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실 겁니다. 아가씨. 애초에, 전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돈도 전혀 없고. 은행이라는 것도 들어 보기만 해봤지. 가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별 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아가씨는 계속 고민에 잠겨 있었고.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멈춰 있지는 않고 도시 곳곳을 다녔는데.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가씨.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만.”


“······아. 사람들이요? 음.” 아가씨는 하늘을 잠시 보곤.


“국기 게양식이군요.”


“국기 게양식이요?” 나도 아가씨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는데. 엄청나게 높은 장대에서 천천히 깃발이 올라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걸 바라보고 있었는데. 도대체 뭐하는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


“뭐하는 건가요?”


“마운티이라 국민 의회가 회기에 돌입할 때 하는 의식입니다. 이제부터 좀 시끄러워지겠군요.”


“의회요?”


“우리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칼과 총···은 가끔씩 쓰고, 주로 언변으로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마운티이라의 법률이 저기서 태어나지요. ”


“남부에는 저런 거 없었는데.”


“남부는 이샤라이나가 직접 통치해서, 이단심판관의 즉석 심판으로 끝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칼달리아는 그 미친 후작이 전부 결정하고. 애초에 저런 게 있는 나라가 그리 많지도 않아요. 마운티아가 가장 활발하고. 다른 나라는 그냥 있는 겁니다.”


“그런데 국민이라. 저 사람들이··· 어렵네요. 어떻게 돌아가는 지 이해가 안 돼요.”


“우리 앞에 있는 저 수많은 분들 중, 자기 재산으로 총기와 군복을 사 ‘국민방어군’에 입대했거나. 혹은 ‘전쟁세’라는 특수 세금을 납부했으면 투표권이라는 걸 주는데. 그걸로 자기가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들을 뽑는 겁니다. 그게 선거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세금 낭비하고, 이상한 출판회를 몇 번 하면서 친목질을 하다가. 자기를 뽑아준 사람들을 엿 먹이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투표하는 게 의회입니다. ”


“끔찍하네요. 전 그냥 마운티이라 가문이 사인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저 의회에서 또 상층, 하층이 나뉩니다. ···그런데 어차피 갈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설명은 이쯤하고. 나중에 심심하면 설명서도 나눠주니 읽어보세요.”


“오. 누가 발코니에서 나와요.” 국기가 완전히 올라가자. 깔끔하지만 위압적인 정복을 한 남자가 나왔다. 차갑고 냉철한 눈빛을 가졌지만. 사람들을 내려다보지는 않고. 국기를 바라보다가 수많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국민 의회의 의장이자, 마운티이라 가문의 가주이자, 이샤라이나 신성 제국의 후작인 마운티이라 카르신이 위대한 마운티아 국민 여러분들과 존경하는 상층, 하층 의원 여러분들께 엄숙히 98기 국민 의회의 정기회가 시작됨을 선포합니다.”


마운티아를 위해서! 에어조라를 위해서! – 수천의 사람들이 그렇게 외쳤다. 주교의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굴하지 않고 외쳤고. 몇 번 외치고 나자, 마운티아의 국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남부와는 다르네요.” 그렇게 짧게 요약할 수 있었다.


“남부는 국가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중부는 전쟁이 일어난 건지도 까먹었을 겁니다. 가끔 날라오는 이샤라이나 어로 적힌 전쟁 세금 고지서가 날라올 때나 욕하면서 기억하다가. 또 까먹겠죠.”


“아가씨는 이제 저런 곳에 가는 건가요?”


“후원인만 잘 만나면 그럴 수 있겠지만. 저, 의외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의외로라니. 전혀 의외가 아닌데. 생각보다 아가씨께서는 자존심이 강하신 성격이셨군요.”


“···제가 여전히 아르카니 가문에 있었으면-“ “없잖아요.”


“너무하네요. 상처 받았으니까 일이나 하고 갑시다.” 아가씨는 편지 봉투를 하나 건내 주며 말했다.


“아. 지금 전해주고 끝내려고요? 괜찮네요.” “마운티이라는 덜 하지만, 귀족한테 그러면 어디 끌려가서 죽기 전까지 맞고 풀려납니다.“


“그럼 뭔데요.” “초대장만 보내고 퉁 치는거죠. 그대가 넘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전 기둥 뒤에 숨어 있을 게요.”


“알겠습니다. 한 번 해보죠.” 아가씨에게서 편지를 받곤 연단에서 할 말을 마치고 사라지고 있는 마운티이라 카르신을 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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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P:1 철혈동맹] Rolling in the Deep(5) 18.11.16 38 0 15쪽
27 [EP:1 철혈동맹] Rolling in the Deep(4) 18.11.14 75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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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붉은 눈의 아가씨에 관해서. 18.11.02 82 0 12쪽
21 불씨 (1) 18.10.31 60 0 15쪽
» 불씨 18.10.28 57 0 21쪽
19 발화 18.10.26 53 1 15쪽
18 터닝포인트 18.10.24 48 0 10쪽
17 샴페인은 끝날 때. 18.10.23 48 0 13쪽
16 On The Boath 18.10.22 64 0 10쪽
15 두 사람. 18.10.21 67 0 9쪽
14 흔들리지 않는 18.10.21 42 0 20쪽
13 폭풍이 지나가더라도 18.10.21 53 0 14쪽
12 안개 속의 거리에서 18.10.14 63 1 30쪽
11 하늘의 색깔과 도시의 색깔 (7) +2 18.10.14 67 1 12쪽
10 하늘의 색깔과 도시의 색깔 (6) 18.09.30 72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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