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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따라 걷다 보니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리본이 보였다. 오~ 이 리본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올레길을 시작한 처음과 달리 많았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간간이 한두 명씩 볼 수 있는 정도였는데 아마 중간에 힘들어서 많이들 포기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10코스의 끝이자 11코스의 시작이 되는 모슬포항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이 코스의 마지막 종점인가..."
좋네. 한 코스를 완주했다는 뿌듯함도 있고 멋진 자연경관들을 보면서 느낀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상진이 느꼈을 다양한 생각들을 고민할 시간이어서 좋았다.
만약 상진이 렌터카 사고가 있지 않았더라면 이 올레길을 걸을 일은 없었을 테고 자동차로 움직이며 유명한 장소들을 위주로 관광했었을 것이다. 물론 잘 알려진 장소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지만, 이 올레길을 직접 걸어본 내가 느끼기에는 제주도라는 수박의 겉만 핥은 여행이 될뻔한 것을 렌터카 사고라는 사건이 진짜 제주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거다.
진짜 제주도...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보는 제주도와 이렇게 두 발로 걸으면서 느껴지는 제주도는 매우 달랐을 테니까.
어쨌든 지금 시각이... 4시 40분 정도 되었으니까 중간에 밥 먹으면서 쉬었던 시간을 빼면 거의 7시간 가까이 걸었다는 건데, 이 상태로 다른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야 할 걸 생각하니 앞이 좀 깜깜할 정도였다.
짐을 찾으러 원래 있던 게스트하우스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와~ 성우 오빠!"
"어? 현경, 유리~ 너희도 올레길 완주하고 왔나 보네? 으아~ 난 지금 삭신이 쑤신다. 빨리 들어가서 씻고 쉬고 싶은 생각만 들어."
"아까 우리랑 계속 같이 있다가 갑자기 오빠가 계속 안 보여서 중간에 그만 멈추고 먼저 간지 알았어요."
"아... 길을 잃어서 엄한 데에서 헤매느라 고생 좀 했어."
"멀쩡해 보이시는데 엄살은... 오빠는 오늘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 놓고 온 짐만 가지고 바로 가려고. 너희는 일요일까지 리아에서 있는다고 했지? 한곳에 있는 것도 좋지만, 이곳저곳 돌아도 다녀봐."
"으... 그러게요. 실수한 거 같기는 한데 리아 게스트하우스가 좋기도 하고 다음에 올 기회 생기면 그때에는 여러 게스트하우스 돌아다녀 보려구요."
짐을 찾으러 가는 동안 게스트하우스에서부터 시작해 오늘 걸었던 올레길 10코스에 대한 이야기, 말들과 함께했던 눈치싸움 이야기 등을 풀어냈더니 두 친구 모두 웃음이 터져서 웃다 웃다 이제 울기까지 하는 모습은 내가 괜히 말했나 싶을 정도였다.
"와~ 오빠 이야기만 듣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라니... 뭔가 아쉽다. 꼭 서울 올라가서도 연락해요~"
"나중에 너희들이나 이 번호 뭐지 하면서 쌩까지 말아줄래? 기회 되면 서울에서 보자~ 남은 여행도 알차게 보내고."
나랑 같은 방을 썼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떠나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새로운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두번째 게스트하우스인 '벨리'는 제주도에서 꽤 유명한 게스트 하우스 중의 한 곳인데 다 같이 모여 쉴 수 있는 거실 벽 전체가 만화책과 소설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편안히 앉아 책들과 함께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은 꼭 찾는다는 곳이 이 벨리 게스트하우스이다. 꼭 책이 아니더라도 전체적인 인테리어가 여성들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며나 많은 여성이 주로 찾는다고 한다.
"여기가 벨리 게스트하우스인가? 확실히 듣던 데로 주인장이 인테리어에 특히 신경 쓴 게 보이네."
집으로 들어가 주인장을 찾았다.
"오늘 예약한 신성우입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하고 있던 사람이 내 말에 그제야 만들던 음식을 잠시 둔 후 나에게 다가왔다.
"신성우 씨? 반가워요. 저녁 먹기 전에 오셔서 다행이네요. 아직 식전이죠?"
"아 네. 저녁을 직접 해주시는 건가요?"
"네~ 보통 저희 게스트하우스에 오신 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해서요. 남자 숙소는 저기 파란색 문이 있는 방이에요."
거실의 수많은 책이 빽빽이 놓여있는 모습은 꽤 멋져 보였는데 책 특유의 향이 거실에 감돌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종일 걷다 보니 온몸이 먼지투성이인지라 우선 빨리 씻고 나왔더니 노곤함이 몰려왔다.
혼자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는 주인장을 보여 뭐라도 도와드려야겠다 싶어서 몰려오는 노곤함을 떨쳐내고 식당 쪽으로 갔다.
"오늘 저녁은 비빔밥인가 봐요?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밥 위에 재료들 제가 올려놓을게요."
"호호. 고마워요. 그럼 오늘 함께 식사할 인원이 우리 부부 포함해서 6명이니 숫자에 맞춰서 올려주시겠어요?"
당근, 시금치, 콩나물, 양배추, 김 가루, 오이, 버섯, 고기, 계란 후라이까지... 많이도 준비하셨구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쁜 게 먹기도 좋으니 하나하나 각을 잡아가며 밥 위에 재료를 빙 둘러쌓고 마지막으로 계란 후라이로 덮어 놓으니 어디 내놓아도 안 빠질 비빔밥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6개를 준비하는 동안 주인장은 여자 숙소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불러왔다.
주인장과 주인장의 지인처럼 보이는 사람 그 뒤로 서로 친구처럼 보이는 여성 두 명이 같이 나왔다.
그중에 주인장 지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유독 활발했는데 비빔밥을 보자마자 한소리 했다.
"와~ 진짜 이 비빔밥 먹다 배 터져 죽을 수도 있겠는데? 언니! 손 너무 큰 거 아니야? 이러다 살림 거덜 나겠어~"
"내 살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많이 먹기나 해. 아까부터 배고프다고 찡찡 했잖아."
"찡찡은 무슨... 어? 우와... 이건 뭔 그림 같은 상황이야? 어디서 저런 친구가 튀어나왔어? 누구야?"
저런 친구가... 날 의미하는 거 같은데요. 너무 제 앞에서 대놓고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오늘 게스트하우스에 온 손님. 나 혼자 하는 거 보고 옆에 와서 도와주더라 누구랑 다르게 말이지. 잘생긴 친구가 마음도 이쁜 게 아들 삼으면 딱 좋겠어."
"남의 귀한 아들을 어디서 그렇게 날름하시려 해? 아무튼 형부만 오면 되는 거 아냐? 어디 갔어?"
"너도 오고 해서 술 살 겸 겸사겸사 장 보러 보냈어. 곧 올 때 됐어. 성우 씨 잠깐 이리로 와볼래요."
위생 장갑을 벗고 갔더니 나와 여성 세 명을 소개해주었다.
"우선 이 남성분은 오늘 유일한 남성 손님. 신성우 씨."
"안녕하세요. 23살 신성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세 여성분은 문지영, 정소라, 이주희."
낯이 익네... 어디서 봤지?
"반가워. 문지영 나이는 비밀. 어차피 나이 차이 많이 나니 큰 누나라고 불러."
문지영... 문지영...? 어? 설마 그 문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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