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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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소용돌이치는 노란 색깔
미완성인 채 골방에 처넣어버리고 너에게
들어가라 들어가라고 주문을 걸어대며
몸 껍질 벗고 벗기던 아픔도 묵살하는가.
속으로만 기어들며 할퀴어대는 어둠 속
쫓기듯 휘젓던 붓질에 반딧불 이는 소리
후다닥 꿈이라는 듯 솜뭉치 몸 일으킨다.
늘 철없는 구애가 여린 마음 찔렀을까봐
다시는 못 아물 상처로 남을까봐
눈시울 바들거리며 숨죽이고 들여다본다.
꿈에나 있을 그 일이 기어코 벌어지다니
네가 내게 걸어온 말을 내가 들었다니
진노랑 너의 메아리 불현듯이 나를 감싼다.
해 아래 헉헉거리며 목을 늘인 현기증에도
미치면 미쳤지 식을 수는 없노라하던 캔버스
찬란한 밀실, 입김이 슬픔처럼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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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니(銀泥)의 발걸음
-고흐가 사촌 케이에게
칼같이 뿌리치다니, 아마도 환청인 거야
예전에 나를 비웃던 우루술라나 마찬가지로 네가 내게 그러다니, 아침 햇살같이 번져 넘실대는 불꽃 한 다발 네 머릿결이
언제나 휑뎅그렁한 내 가슴을 덮었는데
매력적인 네 남편 나의 매제 그 생전
생각에 잠기듯 눈이 초롱초롱하던 두 살배기 네 아들 나의 조카가 너의 품에 있을 때마다 웬 음울한 고통 뜬금없이 깊이 모를 우물에서 두레박 타고 올라 기어이 참을성 막바지에 도달하더라
벼랑에 머리를 박아 깨어지며 범람하더라.
내 얼굴 쓰다듬다 멈추는 네 손가락
스친 곳마다 키스해줄 그렁그렁한 눈매로
시푸른 스물여덟의 새벽길에 놓아두고
내 한 때 실연(失戀)도 네 못 돌릴 미망(未亡)도
사랑아,
칠흑어둠에 가두자, 새벽종소리로 웃자
차라리 저 교수대에 둘이 목을 걸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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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슬픔․1(헤이그에서 크리스틴이 고흐에게)
라인역 ‘와인카페’에서 두 눈길 맞부딪친
내 나이 서른두 살 운명의 어느 날
당신이 물으셨지요, 울 엄니가 아시느냐고
꼭 내 모양 이대로 우리 두 남매 낳아놓고
여자 하나 들여와 뚜쟁이노릇 하는 아들, 당신의 아들 뒤에서 굳게 입 다물고 진두지휘하시는 우리 엄니 삶의 방식을
소설 속 무용담인양 늘어놓고 나는 웃었지요.
그러하여도 새끼 입 풀칠만은 성실해야겠기에
빌어먹을 세탁장 일을 하다하다 힘에 겨워, 헐수할수없어, 거리에 나가 사내를 후리고 후리다가, 엄니처럼 낳은 아이 다섯을 엄니에게 맡긴 채, 이제 또 여섯째를 임신한 나의 배를 다정한 눈길로 쓰다듬고서 당신이 나를 웃겼지요
모델이 되어달라며 정식제안 하시었지요.
낯선 사내에게 몸 파는 것보다야 나을 성싶어
다달이 테오*가 부쳐주는 1백 프랑을 단 며칠 만에 써버려 쫄쫄 굶어도 굶어야만 작품이 나온다는 핑계로 친구들에게서 빈정거림만 당하던
당신의 사글셋방에 줄레줄레 따라갔지요.
뉴턴의 현신인 듯 느닷없이 외쳤지요.
포도주와 독한 진과 나를 뒤섞어 칵테일로 마시던 당신이 만유인력을 본 듯이
섹스가 그림의 윤활유, 맞지, 맞지, 하시면서요.
개수통 앞에서 내가 접시를 닦고 있으면
담배를 채워 넣던 파이프를 내던지고서 당신이 재료비 1프랑의 그림을 시작하시데요. 나의 두 손에 튀어나온 힘줄, 주름살들을 그리고 지우고 그리고 지우면서, 아름답다, 아름답다, 곱씹으면서요. 그래요 어쩜 우리 만남이 당신 말씀대로 발가벗은 두 영혼의 뒤엉킴일지도 몰라요.
슬픔이 아름답다니, 생각수록 이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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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고흐의 동생이면서 절대적인 후원자. 1890년 7월 29일에 형 고흐가 죽자 그 충격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음해 1월에 결국 숨을 거두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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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슬픔․2
하루 단돈 1프랑 짜리 모델이지만 정중하게
빨래구덕보다야 행복일 거라고 얼버무리고서 그날 아침엔 별스레 온몸 실핏줄을 가닥가닥 퉁기던 갓 끓인 커피 향에 그만 혼을 빠트리는 바람에 꿈인 듯 믿을 수 없게 건져 올린
드로잉, 마취한 고통, 리얼리즘 겨냥 작인데
늘어진 허벅지에 닿을락말락한 서러움
바람 빠져가는 풍선, 풍선 같은 젖가슴 아래 헐수할수없던 풀씨가 뿌리내려 날로 달로 자라나는 삭막한 자궁동산을 슬쩍 적시고
입맞춤, 볼썽사나운 발등의 심줄을 덮다가
말라빠진 어깨를 쓰다듬고 놓아버린 맥
등뼈 조금 아래에 나릿나릿 흘러내린 몇 가닥 머릿결을 두고 뼈마디 앙상한 손으로나마 가리려던 얼굴, 얼굴이 용인민속촌 무명화가의 손에서 도려지고 지져졌구나.
모서리 벗겨져버린 한 쪼가리 피나무
미슐레*의 말을 곱씹고 되씹으면서도 그냥
가난은 남의 일이고 슬픔*은 아름다움의 사촌이라고 여물게 위장하였던 그의 배짱을 빌려 나도 당신에게 파란나비*라는 닉네임을 지어드렸고 당신도 크리스틴이 고흐 대하듯 기뻐할
원수의 카드결재일 사흘이나 남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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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레(1798~1874):프랑스의 역사가. 고흐는 크리스틴을 모델로 한 그의 작품 ‘슬픔’ 밑에 “어찌하여 여기 다만 혼자서 절망에 빠진 여자가 있는가”라는 미슐레의 말을 적어 넣었다.
*슬픔(비애):여섯 번째 임신(아버지 불명인) 중인 크리스틴을 모델로 한 고흐의 드로잉 작품(1882).
*파란나비:3급 지체장애인의 몸으로 각각 아비 다른 아이를 낳아 혼자 도맡아 키우다시피 하고 있는, 필자의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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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고 싶은 여자
언제부턴가 마술에 걸려버린 모습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와 딱 한 발짝 뒤에 바싹 붙어 섰기에 불현듯 몸을 빙글 돌려 들여다본다. 불을 붙여도 타오르지 않을 촛불, 마르고트*여
귓속에 뒤엉켜 숨은 서러움이 후벼 파인다.
끝끝내 외면당하여도 좋다, 좋다, 좋지만
하지만 이 순간만은 불같은 키스를 하고 싶어, 못 하면 그냥 이대로 숨이 막힐지도 몰라
그대가 생떼를 쓰며 내 몸을 허물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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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고트는 고흐보다 열 살 연상으로 고흐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마르고트 집안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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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청
나만 보면 내 귀를 달라 달라고 보채며
동그란 귀 하나만 주면 내 무릎에 앉아주겠다던, 앉았다간 기어이
무릎이 으깨지고 말 통통한 내 비둘기
초대해놓고 옥신각신하던 고갱과의 일상도
별의별 요망한 속삭임도 귀찮아, 면도날 꼿꼿이 세운 거울을 잘랐다, 귀를 잘랐다, 말끔히 물에 씻고 예쁘게 포장하여 너에게 바쳤다.
비둘기, 감전되었다 절절한 나의 사랑에
자화상을 그린다, 상이군인처럼 붕대를 감고
고작 귀때기 하나보다는 굶기 대회 나가 특별상 받을 주름사이에 핏발 선 눈 두 개만은 곧 죽어도 죽을상이 아닌 얼굴, 얼굴을 가지라고 할 참이다
모두가 떠나갔기에 오히려 살맛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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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라셀’이라는 이름의 주점 여인 별명. ‘아를르의 노란 집’시절 고흐의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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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보리밭
어머니 자궁같이 포근한 흙바닥에
핏기 가신 얼굴을 묻고 하릴없는 나의 당신
못 잊을 어제 정오로 부질없이 날아가
불붙은 불쏘시게, 태양 가리며 저승사자
구름 한 장 남김없이 불질러먹어도 바싹 마른 옥수수 수염, 그 머리칼에 콧속에 입속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몰아칠 찰라 저것들을 캔버스에 가둡니다.
허공에 꽃잎 뿌리던 낱낱의 기억마저도
어둠자락 한복판 회오리, 회오리처럼
귀가 하나 모자란 몸이 제 몸을 두들겨 패어도, 차마 못 남긴 이별 메시지를 물고 가는 얼빠져 얼도 없는 까마귀는 까마귀들이 아니고
사실은 뼈마디마디 삭힌 잿물로 만든 물감
무수한 그림을 토해내고 남은 빈껍데기
지울 것도 없는 제 그림자를 지우는 몸을 두고 비로소 나의 당신이 길을 찾습니다.
별보다 많은 저 이름, 이름에 이름을 뒤섞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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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37세인 1890년 7월 26일에 이 작품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을 마지막으로 그렸으며, 다음날인 27일에 다른 밭에서 권총을 옆구리에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으며, 29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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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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