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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蘭亭)서재입니다~

비밀 낙서첩

웹소설 > 작가연재 > 시·수필

난정(蘭亭)
그림/삽화
nanjung
작품등록일 :
2015.06.21 08:53
최근연재일 :
2017.04.05 15:48
연재수 :
37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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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40
추천수 :
1,653
글자수 :
165,582

작성
17.04.0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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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2쪽

별을 새기다(사설시조 형식 운문소설)

DUMMY

-사설시조 형식을 가미한 운문소설-


별을 새기다


주영숙




공주가 왕위에 오르고 나자, 석공은 날마다 먹고 자는 것도 까먹어버리고 그녀의 이름만 불러대다가, 그만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다.

어느 날, 왕이 영묘사에 행차한다는 소문을 들은 석공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여왕의 애칭을 함부로 부르면서 득달같이 내닫다가 붙들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웅성웅성 떠들썩했고, 여왕이 관리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 하고 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누군지를 확인하지 않은 채로 “그 자를 따라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행렬이 절에 이르자, 왕이 불공을 올리는 동안 ‘따라온 사내’는 절 마당 탑 근처에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앉은 채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오랫동안 잠도 못 자고 음식도 삼키지 못한 탓에 탈진했다가, 이제는 드디어 소원 풀었다 싶어 마음을 놓은 까닭이었다.

이윽고 불공을 마치고 나온 여왕은 사내를 내려다보고 깜짝 놀랐다.

여왕은 가슴이 미어졌다.

‘······ 우리 다시는 이승에서 만나지 말아요. 그대도 죽고 나 또한 죽어 어느 별에서건 다시 태어날 때까지······’

여왕은 손목에서 금팔찌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는 석공의 왼손을 잡아 그 팔찌를 끼어주고는 말없이 발길을 옮기었다.

왕이 가버린 뒤에서야 잠이 깬 석공은 여왕의 숨결이 스며있을 것만 같은 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아, 나의 왕이시여······, 그 얼굴 그 모습을 딱 한 번만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오. 나를 깨우실 일이지, 왜 그냥 가시었소? 이 팔찌를 임 끌어안은 듯이 차고 다니라 그 말씀이오? 아아, 이내 몸 활활 불태울 왕이시여. 내 사랑이여······’

그러자 안타까움은 이내 가슴속 불씨가 되었고, 그것이 순식간에 온 몸으로 번지더니 컥컥 숨이 막혀왔다. 불씨는 어느새 몸 밖으로 자라 나와서는 새빨간 불꽃으로 피었다. 한 송이 불꽃, 석공의 몸이 가까스로 탑을 잡고 일어서자, 탑도 그만 불기둥이 되고 말았다. 불붙은 그의 몸은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여왕을 향해 허적허적 걸어가는데, 그 발길 닿는 곳곳마다 불꽃이 일었다.

그 후 석공 최금지는 불붙은 그 몸으로 뒹굴뒹굴 허적허적 세상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사람들은 ‘최금지’의 마지막 이름 뜻‘지(志)’에다 귀신 ‘귀(鬼)’를 붙여서 그를 ‘지귀’라 불렀다. 지귀는 곧 불귀신이란 뜻으로써, 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기에 이르렀다.



지귀는 마음 깊이에서 불이 일어,

그 몸을 태우고 불귀신이 되었니라.

저 바다 멀리 멀리로 흘러갔으니

만나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라.



***



지리산 끄트머리에서 노량해협을 가로지르는 남해대교를 건너자, 해상 다리가 섬과 섬을 이어가면서 놓여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상주면 양아리 산 4-3번지를 새김질한 내비게이션이 “국도 19호를 타고 남해읍에서 미조노선을 경유하는 12km 거리입니다.”라고 안내했고, 사천에서부터 동승한 그도 한마디 하였다.

“거기엔 옛날 부시암이라는 큰 절이 있어서 부소대골, 부소암골로 불렸다오.”

등산로가 나타났는데, 입구 왼편에선 한창 공사 중이었다.

“관광자원 개발한답시고 주차장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오.”

“관광자원이요?”

“하하하, 양아석각을 서불과차라고 딱 못 박고는······.”

“그런데 선생님,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는데요?”

난감한 표정을 하고,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걱정 말아요. 나하고 같이 가는 건 괜찮습니다. 나는 문화재 연구원이니까요.”

그가 얼른 차에서 내려 낮은 밧줄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자, 공사장 인부 중 한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의 신분을 확인하고 군말 없이 돌아갔다. 나는 짐짓 안심했지만, 애당초 길이 없었던 것처럼 가파른 산길인데다 간신히 한 사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비좁았다.

“이래 뵈도 예전엔 여기 사람 사는 동네가 있었지요.”

한참 오르다 보니 별안간 와글와글한 소리를 내며 시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길 같지 않은 길에 개울까지 흐르네요?”

“하하하, 엊그제 비가 좀 왔다고 이래요.”

개울엔 돌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아무리 비가 내렸기로, 시냇물은 원래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는 것처럼 시끌시끌한 소리로 굵직굵직한 돌들을 툭툭 치며 감싸며 춤추며, 둥그런 돌이건 각진 돌이건 깨어진 돌이건 전혀 차별을 두지 않고 사이사이에 돌, 도돌, 경쾌한 가락까지 집어넣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통 땐 물이 발목까지 밖에 안 오는데······ 이거 참 징검다릴 놓아야겠네. 최 선생, 거기 앉아서 좀 쉬어요.”

그는 마치 힘자랑이나 하듯 부지런히 징검다릴 놓기 시작하였다.

“어머나? 내가 마치 공주가 된 느낌이네.”

그러나 징검다리를 밟고 건너서도 길은 여전히 험악했고, 그는 기어이 엉거주춤 돌아앉으며 내게 등을 내밀었다.

“자아 업혀요.”

“어머나? 어떻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서 업히시오.”

나는 아이 참,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업혔다. 하기야,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산길이다. 그런데 희한하였다. 그의 걸음은 빈 몸으로 갈 때보다 나를 업었을 때가 더 빨랐다.

“뭔 축지법을 쓰세요?”

“아마도, 최 선생 몸이 날개 역할을 하는 모양이오.”

“요렇게, 요렇게 말이죠?”

내가 양팔을 활짝 펴고 방향 잡는 시늉을 하자 그는 크게 웃었다. 웃음꽃, 온 산 여기저기를 툭툭 치며 들썩여댔다.


“다 왔소.”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산 중턱에 와서야 나를 내려놓고서 그가 허리를 죽 폈다.

“무거우셨죠?”

“아니오, 날개가 무거우면 새가 어떻게 날겠소?”

“완전 새 됐네.”

“허허허, 말이 그리 돌아서 이리 되었구먼?”

“근데, 저게 그 거북바위?”

그가 빙긋한 웃음을 문 채로 머리를 끄덕였다.

왼편은 공룡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기암괴석이 있고, 오른편엔 바로 문제의 거북바위가 누워있었는데, 가로 7m, 세로 4m 가량의 화강암이었다.

올라온 쪽에서 몸을 돌려 바위를 정면으로 보면 바위 왼편 약간 경사진 곳에, 바위를 거북모양이라고 봤을 때의 왼쪽 어깨에서 등으로 흐르며 그림인지 문자인지가 음각되어있었다. 바로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남해양아리석각>이었다.

“제주도 서복전시관 광장에는 이것이 크게 판각되어 선전되고 있소.”

“예, 저도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건 분명 이 석각을 본뜬 것인데도 떡하니 제주도 정방폭포 석각의 모형이라고 광고하다니, 웃기는 일이지 뭐요. 거제 해금강에 있던 ‘서불과차’라는 석각 또한 태풍 사라호에 바윗돌이 떨어져 나갔다나 뭐라나. 그러고 보면 당시의 석각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없소. 어쨌든, 현존하는 이 양아각석이나 고증이 어려운 제주의 정방폭포 석각이나 사라호 태풍으로 떨어져 나간 거제의 해금강의 석각, 이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졌을 것으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마치 울분을 터뜨리듯 열변을 토하던 그가 잠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거북바위를 가리켰다.

“그런데 저것은 바로 가을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란 말이오. 저것 봐요. 맨 아래 왼편의 천(天), 저기서 재어보면 그림 전체가 90도 각도의 부채꼴, 즉 원의 ¼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天에서 약간 오른편 위, 저건 상(上)자 같은데요?”

“하지만 자세히 봐요. 지평좌표(ㅡ)와 천체좌표(ㅣ), 그리고 북극성(•)이 분명하오. 북(North)이라는 표시 N, 그리고 옆에 극(Pole)이라는 표시 Po가 또 있질 않는가 말이오.”

너무나 신기하였다. 희미하게 보이는 N과 Po를 더듬어보며,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사전에조차 ‘서불제명석각’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판에 영어 표기까지 있었다는 걸 알아내다니, 지금껏 아무도, 그 아무도 이것이 별자리라는 걸 언급하질 않았었다니, 미치고 팔짝 뛰고도 모자랄 노릇이다.

“지평좌표 왼편 위쪽에 있는 저거, 붓글씨 한 일자 같은 저 표시는 뭐죠?”

그러자 그는 거침없이 토로하기 시작했다.

“저 비스듬한 곡선은 바로 작은곰별자리의 꼬리부분. 여기 이 북극성까지 합쳐서 작은곰의 꼬리에 해당해요. 그리고 이 곡선의 한 일자는 사실 세 개의 별을 연결하고 있소. 맨 왼쪽별이 천제성, 가운데가 서자성, 또 황후성.”

그가 북극성에다 손가락을 멈추는데, ‘나 성혈 맞아.’ 하는 듯이 손가락이 움푹 들어간다.

“황후성 다음, 꼬리를 마무리하질 않고서 뚜렷하게 독립시킨 천추성. 바로 북극성이지요.”

“아, 그러면 천추성과 황후성 사이에 천체좌표를 새기고 바로 아래에다 지평좌표를 새겼다고 추정할 수 있겠네요? 그럼, 맨 오른편, 오경석 오세창이 주장했다는 서불기례일출 중에 서(徐)에 해당한다는 저거, 저건 어떤 별자리인가요?”

“저기도 자세히 보시오.”

“아, 알파벳 P인가요?”

“그렇소. 페르세우스의 P······. 저기 뻗친 건 기린 왼발이고. 페르세우스 꼭지 지점의 저 가로선(一)과 아래의 점(∙), 저건 페르세우스 꼭지 별 하나와 카시오페이아 오른쪽 별 하나, 그리고 카시오페이아 3별의 중앙을 표시한 셈 아니겠소? 그런데 페르세우스 위쪽 양자리 사이를 좀 보시오. 저건 한자 왼 좌(左).”

“아, 그렇군요.”

“왼편에 다시 쓴다는 뜻인 성싶소만, 아무튼 이 옆은 구월(九月)하고 길(吉), 그리고 직사각형 페가수스 오른쪽엔 Po가 새겨져 있고, 저기쯤이 안드로메다 별자리. 페르세우스 왼편 가운데 한 일자 같은 그림 저 사이에 안드로메다의 A자가 새겨져 있질 않은가 말이오.”

“아, 안드로메다······ 쇠사슬에 묶인 처녀······ 안드로메다를 페르세우스가 구했죠. 아, 저기 저것이 페르세우스 별자리, 맞죠?”

“엇! 최 선생은 역시 남달라. 아무튼, 페르세우스 왼편의 불(巿)에 속한다는 저건 양자리 중앙 별 두 개와 삼각형 세 개, 그리고 물고기 왼쪽의 별 세 개와 안드로메다 오른편의 별 한 개를 그어보면 꼭 저 모양이 나오지요. 그리고 귀인이 수레를 타고 앉아있다거나 하는 등 서불기례일출의 기(起)에 속한다는 저 별자리는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혹 케페우스 별자리인가요?”

“호오, 일취월장이오. 그럼 이제 페가수스 별자리 위쪽을 볼 차례······. 많이 마모되었지만 아직 알아볼 수는 있거든.”

그는 페가수스 별자리 위쪽에 새겨진 숫자를 손으로 더듬었다.

“저건 얼마 전에 새로이 발견한 건데, 페르세우스와 양자리 사이에 새겼다가 취소하고 다시 정식으로 쓴 글자일 거요. 자세히 봐요. ‘고지 구월 십일 구월 십팔일 길신(古旨 九月十日九月十八日 吉辰)’이 아닌가.”

“요 아래 天에서 벌써 느꼈는데요, 저건 바로 별자리를 팠다는 확고부동한 표시네요. 와우!”

그는 내 감탄사를 외면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엔 이것이 십(十)으로 짐작되었는데 이즘 다시 검토해보니 구월이었소. 아무튼 9월 10일부터 9월 18일의 별자리가 관측하기 좋다, 또는 관측한 결과라는 뜻을 담은 표식 아니겠소? 결정적인 증거는 저기 저 글자, ‘김민성 공 그림’에다 ‘최금··· 석장수 새김(金玟成公 圖 崔金○ 石匠手).’······ 석장수의 이름 끝 자는 결국 못 찾았지만, 저기까지만 알아내는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소.”

“김민성? 알 것 같은 이름인데요?”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에서 맹활약한 김방경의 조부가 김민성이란 걸 근래에 찾았는데,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소.”

“아, 그럼, 동일인물 맞을 것 같아요.”

“어떻게? 무슨 이유로?”

“일전에 삼별초를 검색하다가 김방경이란 이름을 발견했었거든요. 김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구름과 안개를 들이마시는 꿈을 여러 번 꾸었는데 말이죠. 임신 중 내내 구름과 같은 기(氣)가 항상 입과 코에 서렸더래요. 그래서 그 어머니가 ‘이번 아이는 틀림없이 신선이 내려와 잉태된 것’이라고 사람들한테 말했다고 해요.”

“그런데 김민성이 김방경의 조부라는 건 어떻게 알았소?”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敏成)의 집에서 자랐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그런데 김방경은 1212년생이고, 삼별초의 난은 1270년부터 3년간 일어났었고······.”

“굿 힌트! 이 별자리가 13세기에 새겨졌을 거라는 내 추측이 맞아떨어지는 건가?”

“아니죠. 김방경의 조부 김민성은 12세기 사람인 걸요.”

“허어 참, 도안을 한 사람이 각석을 한 게 아니라, 최 금 아무개가 각석한 것이니, 이 각석은 13세기 작품이 아니라 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소?”

“그럼 최 금 아무개는 어느 시대 누구일까요? 아아······.”

“······ 어? 혜수! 최혜수 선생!”

나는 나도 모르게 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뒤통수가 칼에 찔렸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마치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온 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내 눈앞엔 조세원 선생이 내민 스마트폰 속에서 까마득한 역사의 한 장면, 내 소설의 한 장면이 흐르고 있었다.



***



연개소문의 집 넓은 전각이 쓸고 닦고 다듬어 손님 맞을 준비를 깔끔하게 마친 그날.


“성상마마! 망극하옵니다!”

가신 소익환 총관이 관기가 가려주는 부채 뒤에서 어주를 받아 벌떡벌떡 황감하게 들이켜는 동안, 태왕께옵서는 시치미를 딱 떼시고서 아주 근엄하게 맞은편을 바라보시데요. 태왕의 맞은편엔 바로 연개소문이 앉아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연개소문의 저저 몰골이라니! 언제 어느 싸움터에서 눈알이 빠졌다는 건지, 왼쪽 눈엔 두툼한 눈가리개를 하였고, 또 오른쪽 팔은 언제 반도막이 났는지 아니면 팔이 붙어있는데도 마비가 된 건지, 붕대를 아예 대각선으로 친친 감고 불편하게 앉아있는 몰골이라니! 태왕이 보시기에 아주 가관이었소. 아무리 예쁘게 보자 해도 끔찍하고 징그러운 한편 측은지심까지 우러날 지경이었으니까 말이오.

태왕이 연개소문에게도 술잔을 내렸소.

“연 장군도 이 술잔을 받으라.”

“성상마마, 황공하옵니다.”

일단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연개소문은 관기가 받쳐주는 어주를 한 손으로 받았지요. 그러고 단번에 술잔을 비우자, 태왕께서는 사뭇 측은한 눈길로 그를 보았고, 소익환도 덩달아 연개소문에게 잔을 권하는데, 눈치 빠른 옆의 관기가 대뜸 주전자를 들더니 찰찰 넘치게 잔을 채워서는 연개소문에게 내밀데요.

“총관대감, 감사하오이다.”

또 다시 깍듯한 자세로 술잔을 받아 마시고 나서, 연개소문이 소익환에게 술잔을 돌렸소. 그렇게 몇 순배나 돌았는지 알 수 없는 중에 날도 차차 저물어갔다오. 상 위엔 아직도 술과 안주들이 즐비하게 남아있었으나 저마다 취하여 횡설수설하는 조신들. 그런데 바로 그 때, 휘딱 장막을 걷고 들어서는 한 여인이 있었다오. 흡사 그대의 젊은 날처럼, 한창 풋풋한 꽃송이 표 여인의 풍만한 육체가 홍화꽃빛 저고리와 반물빛 치마 안에서 언뜻 언뜻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데,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엇갈리는 엉덩이의 물결이 잘록한 허리 곡선과 더불어 팽그르르 돌자, 별안간 태왕을 위시한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술에서 깨어나 푸르르 머리를 흔드는데······. 아마도 모두들 여우한테 홀린 기분이었을 거요. 내가 그대에게 홀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겠지만, 파리가 들락거릴 정도로 입을 아 벌리고는 다물 줄을 모르다니, 참 가관이다 싶었소. 장내는 침 넘어가는 소리도 없이 투명한 고요가 살랑살랑 꼬리치며 흘렀고, 마치 고장 난 뚱보인형처럼 이리 삐딱, 저리 삐딱,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온 소 총관이 문득 한 군관을 불렀지요. 그리고 뭐라 뭐라고 속닥거리더니 입을 딱 벌리더라고요. 그렇게 한동안 벌린 채로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끔벅! 그러고서야 다시 입을 열어 한탄하지 뭡니까.

“그럴 수가? 저 계집이 바로?”

총관께서 상당히 놀란 기색인 걸 알아차린 군관은 사뭇 우쭐거리며 나머지 정보를 나불대기 시작하는데, “원래 여 검객이었다고 하던뎁쇼. 어떤 싸움터에서 만났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요. 아참! 전에 돌궐에 갔을 때에 만났다던가, 아마도 이 주연에서 칼춤을 출 것이라고 하던뎁쇼?”

“무어야? 칼춤이라고? 검무······. 혹 자객이란 말인가?”

소익환은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하나 불순분자의 싹을 점찍기 시작했는데, 그의 취한 눈에는 저놈이 그놈, 그놈이 또 이놈 같아서 도시 종잡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소.

태왕은 관기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기도 모르게 체신머리를 놓치며 무아지경에서 허우적거리는 참이었고, 다른 신하들도 끼리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 연개소문 역시 술에 걸신이라도 들린 듯 쉴 새 없이 술잔을 돌리고 있는 모양새.

‘허허 참, 부질없는 걱정, 쓸데없이 뭔 걱정······. 어디까지나, 내 쪽이 갑이야. 나는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은밀히 측근을 불렀었거든. 정예병 수백 명으로 이 연회장을 포위하라고 지시를 해둔 거라, 이 말씀이야.’

그랬소. 소익환은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여 연개소문 일파를 남김없이 주살할 계획이었던 거요. 하기야 태왕으로부터는 이미 윤허를 받아놓았으니까요.

‘흐흐흐, 거사를 진행할 꼬투리만 잡혀라!’

그런데 갑자기, 떠들썩하던 장내가 조용해졌지 뭡니까. 여 검객인지 뭔지 하는 계집. 바로 그대의 젊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그 여자가 양손에 번쩍번쩍한 장검 두 자루를 나눠쥐고는 날렵한 걸음걸이로 다다다, 다다다 다다~ 연회장 한 가운데로 달려들고 있었거든요. 초승달처럼 예리하고 긴 칼이 휘딱휘딱 날을 세우며 사람 간담을 오그라뜨리는데,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여인의 칼춤을 주시하던 소 총관이 얼른 태왕의 뒤로 다가가더니 무슨 귓속말을 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은 장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데,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북, 장구, 해금, 피리, 날라리 한 쌍의 음률에 맞추어 칼춤을 추는데, 눈 깜짝할 새 음률이 그녀의 칼춤을 따라잡아 요리조리 허공을 조물조물 주름잡았다 폈다 노닐다가, 한 순간 음률을 저 혼자 노닐게 해놓고, 여인은 사뿐사뿐 발을 떼어놓으며 화르르 옷자락을 날리며 온 몸 비비꼬며 파르르 뛰어오르다가 순간순간 쟁강 쟁강 칼을 부딪치다가, 두 개의 칼로 현란한 돌개바람을 만들어 보이다가, 앉았다가 섰다가······, 도대체, 잠시잠깐이라도 관객이 한눈파는 짬을 허용하질 않는 여인의 몸놀림. 아니, 날갯짓. 아니면 뭇 시선들을 사로잡아 제멋대로 요리하는 칼춤. 도대체, 숨소리조차도 몰수당한 장내에, 오로지 삼현육각 음률과 더불어 쟁강 쟁강, 쟁, 쟁, 부딪치는 장검소리만이 득세하고 있더니, 점점 가락이 빨라지며 그녀의 검무도 가속도를 붙여 열정적인 호흡으로 돌아갔는데, 춤이 차츰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여인의 걸음걸이는 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 차라리 날아다닌다고나 해야 할까, 그런 걸음새로 장내를 한 바퀴 휘돌아간 여인은 그런데 눈 깜짝할 순간 태왕 앞에 탁 몸을 들이댔다오. 확 숨을 거두어들이며 기겁하는, 아니면 황홀감에 겨워하는 왕 앞에서, 감히 장검이 섬광을 그으며 허공을 쪼개더니, 그렇게 한 마리의 새처럼 아슬아슬 멀어지고, 멀어졌는가 싶었다가 금세 태왕의 눈앞에다 강렬한 빛살을 쏘아대더니······. 그녀 얼굴엔 내내 웃음이 물들어있었는데, 어찌 보면 지극히 상냥한 웃음, 어찌 보면 감히 임금을 조롱하는 웃음, 또 어찌 보면 ‘아주 재미나 죽겠네.’ 하는 깨소금표 웃음······. 드디어 태왕이 여인을 턱 잡으려하자 어느덧 저만치 물러서서 뱅뱅 돌고 있는 계집!

한동안 느려졌던 가락이 다시 급해지기 시작하자, 바로 그때, 영류태왕의 바로 뒤에서 양손에 장검을 휘두르며 나서는 자가 있었소. 소익환. 언제 술이 깼다는 말인지, 그는 아주 당당한 걸음새로 나오고 있었소. 하기야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검무실력을 지닌 소 총관 아니겠소.

여기저기서 짝, 짝, 짜자작, 하나 둘 시작한 아첨표 박수소리가 어느새 우레 소리로 둔갑하여 터져 나오는 중에, 슬쩍 길을 열어주다가는 막아버리고, 막아버렸다가는 다시 좍 열어주면서, 황홀한 쌍검무가 펼쳐지는데, 그러다 소익환이 여인의 칼을 피하는척하면서 성큼 연개소문 앞으로 접근했소. 금시라도 연개소문의 머리를 내려칠 듯이 그의 칼날이 작열하기 시작했지요. 온 장내에 팽팽해진 긴장감. 그 순간, 연개소문의 머리 위에서 어지러이 춤추던 소익환의 칼이 섬광을 그으며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아, 그런데, 금세 창~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과 더불어 칼이 허공에서 멈춰버리질 않겠소. 여인의 칼이 소익환의 칼을 막고는 그대로 허공중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그 말씀. 하마터면 내가 뛰어들 뻔 했지만 나는 꾹 눌러 참았소. 그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꼼짝 없이 자리를 지켜라, 그것이 가야시대고 신라시대고 고구려시대고 또 고려시대고 간에, 늘 변함없는 내 소임이었으니까요.

어쨌건 검무는 계속되고, 소익환이 완력으로 여인을 밀어붙이며 성큼 성큼, 또 다시 연개소문에게로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그동안 음률도 검무도 점점, 점점, 휙휙, 휙! 휙! 숨이 가빠졌고, 여인이나 소 총관이나 땀을 비 오듯이 흘렸고, 그리고 찰나. 쨍강! 와르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연개소문 바로 앞의 상이 쩍! 두 동강 나는 그 순간, 소익환의 칼도 엎어지는 상과 함께 떨어졌는데, 그런데 연개소문은 이미 뒤로 물러 앉아 있는 거였소. 하마터면 머리통이 쩍 갈라졌을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는데도, 그는 눈도 깜짝하질 않고 있었던 거요.

여인이 칼을 세워든 채 연개소문을 호위하고, 소익환이 마치 실수라도 했다는 식으로 허우적허우적, 과잉변명의 과도한 몸짓을 하자, 연개소문은 “소 총관! 그대의 검무는 천하제일이라 들었는데, 그게 뭐요? 사람이나 잡을 망나니의 칼춤이던가? 으하하하하! 대단히 무섭구먼!······. 아웅~ 에고 무서버라······.”하고 비아냥거렸다오. 그러자 소 총관은 칼을 집느라고 비스듬히 엎드린 채로 으르렁거렸지요.

“이, 이, 무도한 개소문! 네 감히 성상마마를 행차하시라 해놓고서 불장난을 꾸몄으렷다!”

“허허허! 내 할 말 네가 하는구나! 너야말로 극악무도한 놈! 이 많은 사람들이 개소문의 머리통 대신 상이 반도막 나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거늘!”

“네 이놈! 살아남지 못하리라!”

연개소문과 소익환이 대판 시시비비를 따지고 나오자 장내의 조신들도 안절부절못하는 중에, 드디어 태왕께오서 앞에 놓인 수랏상을 탕탕 두드리시며 호령하시었소.

“대체 뭣 하는고? 어서 저 무도한 역적 놈을 잡아 대령하지 못할까!”

그 역적이 누구인지 참 헷갈리는 판국이었소만, 아무튼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 소 총관이 왕 앞에 부복하였소. 연개소문? 그야 뭐 멀뚱멀뚱하게 ‘구경이나 하며 떡이나 먹자’ 하고 가만 앉아있더라고요.

“성상마마······.”

“성상이고 나발이고, 뭘 우물쭈물하시오?······ 어서, 아, 어서 빨리 저, 저, 역적이나 잡아 대령하지 못할까!”

벙하니 연개소문을 바라보던 소익환의 몸이 저절로 와들와들 떨리는데, 섣불리 어째 볼 위인이 아닌 연개소문. 팔 한쪽과 눈 한쪽을 잃은 몸이지만 그의 외눈에선 웬 살기가 빛다발처럼 뻗쳐 나오고 있었소. 하지만 지엄하신 태왕마마의 명령. 소익환은 주춤주춤 연개소문에게로 다가가 목소리에 힘을 잔뜩 실어서 외치는데, 별로 크게 나오질 못합디다.

“그대는 정녕 성상마마의 분부를 못 들었는가? 어서, 냉큼, 마마 앞에 부복하지 않으면······. 사, 살아남지 못할 터!”

“와하하! 살아남지 못한다? 하하하하! 으 하하하하!”

연개소문이 또 미친 듯이 웃어대자 반사적으로 긴 칼을 집어 들어 연개소문에게 겨눈 소 총관. 칼날이 번쩍이고 있었지만 연개소문은 여전히 하나짜리 눈으로 빛살을 쏘며 꼼짝을 안 하고, 소총관은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빨리 이 자를 포박하라!” 하고 거듭거듭 소리쳤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소. 차츰 불안해진 소 총관의 손이 중풍 환자처럼 떨어대는데, 연개소문은 말없이 강렬한 눈빛으로 소 총관의 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소.

“이놈들아! 어디 있느냐! 어서 나와라! 어서! 이 역적 놈을 잡아라!”

발악에 가까운 소 총관의 호령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마침내 군사들이 우루루 몰려왔소.

“허허허, 그럼 그렇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서, 소익환은 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소. 그런데, 아아 그런데, 하나같이 모르는 얼굴들이라니! 호기롭게 두리번거리다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소 총관. 그는 푸르르 머리를 흔들었소. 완연 탈색된 얼굴로 힘없이 칼부터 떨어뜨린 소익환은, 철퍼덕! 자기가 지린 오줌을 깔고 앉아버렸다오.



***



웬 남자가 거북바위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가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그는 거북바위에 퍼질러 앉은 채로 돌을 쪼아 갈닦이를 하면서 무슨 주문을 외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신성한 바람이 내 몸을 툭툭 치며 산들산들 말을 걸어오는데, 올라오면서 쌓인 피로감이 저만치 달아나다말고 꼬리를 감추었다.

‘언젠가 그대가 다녀간 뒤로는 날마다 기다렸는데······.’

나는 끌리듯이 다가가서 남자를 살폈다. 그는 연신 돌을 쪼며 갈며 계속 주문처럼 말을 하고 있었는데, 움쩍거릴 때마다 그의 왼손목이 빛을 발하였다.

금팔찌 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반짝였다.

“거기서 뭘 하세요?”

나의 목소리가 온 계곡을 메아리 되어 물결치자 그제야 남자가 몸을 일으켜 나를 돌아보는데, 순간, 금팔찌가 찌르는 듯 빛을 뿜어대더니 그의 온몸이 활활 타올랐다.

“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는 새 불꽃은 금방 꺼졌다. 사내도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내 소설 그대로인가······. 그러면 저 팔찌는 선덕여왕께서 내리신 팔찌 아닌가.······ 앗! 지귀?’

아직도 불타고 있는 눈을 하고서, 그는 입도 달싹하지 않은 채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영묘사에 불까지 낸 이 몸이 안쓰러우셨든지, 왕께서는 어느 날 대뜸 소인더러 수미산을 닮은 첨성대를 지으라고 하셨지요. 그곳이 바로 왕이 영원히 묻힐 무덤이라고, 첨성대가 바로 도리천이 될 거라고, 간절히 부탁하시었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그대는 자장대사와 함께 하늘의 뜻을 살피는 천문대를 짓자는 명분을 내세우셨고, 물론 그 임무를 소인에게 주시었지요. 그런데 옥문곡 전투에서 공을 세운 알천공은 자신이 첨성대를 책임지고 짓겠다며 큰소리치고 나섰는데, 기어이 자기 맘대로 첨성대 짓는 일을 가로맡아 진두지휘를 시작하였었는데, 거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첨성대는 폭삭 무너져버렸습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 일은 어차피 알천공의 소임이 아니었으므로 하늘이 가만 두질 않았던 게죠. 그래서 다시 소인이 불려가서 첨성대를 완성하였사온데, 첨성대를 완공한 감격적인 그 순간, 아아, 알천 그 사람은 말도 아니 되는 구실로 소인의 눈을 불로 지져 멀리 내쫓더군요. 생각만 하여도 끔찍합니다. 가슴에서 일어났던 불길이야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와서 더듬더듬 별자리를 새기면서 아물어가고 있지만, 백제의 개로왕이 도미의 두 눈을 빼버렸던 것처럼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형벌로 가해진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너무도 뜨거워서 나는 길길이 뛰면서······’

불타는 그 시선이 내 몸에 가득 번져서 순간적인 신열을 일으켰고, 나도 마음으로 말해보았다.

‘그런데 우리 마음과 마음으로 말을 주고받는 거군요?’

머리를 끄덕이고서, 그가 석각을 내려다보며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별자리지요. 하늘로 가는 문이랍니다.’

화라락 불꽃 일렁이던 남자의 눈이 금팔찌와 나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불을 일으키는 이 금팔찌는 사실 세 개였는데, 하나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또 하나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지녔었지요.’

‘앗! 역시 내 소설을 읽으신······? 아, 아니군요.’

‘하핫! 진정한 소설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니겠소? 미래의 그대가 <영웅, 스케치하다>라는 소설을 쓰면서 연개소문의 첫 여자 하란을 어디론가 사라지도록 설정하지 않았소? 그때 이미 대조영에게 갈 금팔찌가 정해진 것이었지요.’

‘그렇죠. 금팔찌 세 개의 원 소유자는 연개소문의 스승 을지문덕이었죠. 그가 눈을 감기 직전, 연개소문에게 금팔찌를 남기면서 한 개는 신라의 여왕, 한 개는 바로 하란에게 주었다고 말한 것이었죠.’

‘그렇소. 신라의 여왕이었던 그대 선덕.’

‘저요? 제가 선덕여왕?’

황당한 내 속은 아랑곳없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선덕은 그 팔찌를 보잘것없는 이 최금지에게 주시었고, 남몰래 연개소문의 딸을 낳았던 하란은 자기 외손인 대조영에게 그 팔찌를 준 것이었소. 그리고 대조영의 그 팔찌는······’

‘아아, 그 금팔찌를 합천박물관에서 보았었지요.’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 별안간 그에게 안긴 나는 몸을 돌려 그의 눈 주변을 어루만졌다. 수정처럼 투명한 눈물이 그의 눈에서 뚝 뚝 떨어져 내 손등에 굴렀다. 그러다 문득 거북바위에 새겨진 별자리를 어루만지며, 그가 속으로만 말했다.

‘이것은 사실 김방경의 조부 김민성이 어떤 꿈을 꾸고 나서 그린 것이오. 그리고 손자 김방경이 태어났고······ 조부 김민성은 방경을 데려다 키웠는데, 그런데 방경이 아주 별났다오. 조금만 자기 배짱에 맞지 않고 부아가 치밀면 으레 거리에 나가 드러누워서 뒹굴뒹굴 발버둥이를 치며 울었다오. 방경이 울면 아무도 못 말렸는데, 세상에, 오가는 소와 말도 그를 슬슬 피해서 다녔다 하오. 방경이 대여섯 살 되었을 때까지도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지곤 했는데, 어느 날 궁리궁리하던 조부 김민성이 바로 그 별자리, 태몽을 그린 그림, 그것을 방경에게 주자, 방경이 그만 울음을 뚝 그쳤더랍니다. 그것이 하늘문이라오. 내가 새기고 있는 가을하늘 별자리···.’


참으로, 생각할수록 알쏭달쏭한 말을, 그는 나를 안은 채로 후후 귀밑머리를 불어가며 속삭이고 있었다.





이상-

글자수로는 14500자, 신국판 책 페이지로는 19쪽, 200자 원고지로는 79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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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蘭亭)주영숙은 퓨전아티스트이며 국문학박사이다. 시집, 장편소설, 소설집, 시조집 등의 저서가 다수 있으며, 인문 교양도서로 《사설시조조 한국소설》, 《작품으로 읽는 연암박지원 소설편(2012 문광부선정우수교양도서)》,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작품으로 읽는 연암박지원 산문 시편)》 등이 있고, 2013년엔 “과제명-한국현대소설에 드러나는 사설시조 형식(The Form of Saseol-Sijo appeared in Korean Modern Novels)” 으로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지원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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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 새 창세기를 위하여 16.07.01 511 3 1쪽
366 멀어지는 너 16.06.30 1,170 2 1쪽
365 춤추는 돌멩이 16.06.29 426 1 2쪽
364 그건 뜬소문 16.06.29 741 1 1쪽
363 이카로스의 날개 2 16.06.28 452 2 3쪽
362 이카로스의 날개 1 16.06.28 961 3 2쪽
361 김장 16.06.28 451 2 2쪽
360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보리밭 +2 16.06.27 1,202 3 2쪽
359 환청 16.06.26 408 3 1쪽
358 오해 16.06.25 435 2 1쪽
357 키스하고 싶은 여자 +4 16.06.24 587 3 1쪽
356 고백 16.06.23 446 2 2쪽
355 모델 16.06.22 544 2 2쪽
354 은니(銀泥)의 발걸음 16.06.21 620 2 1쪽
353 날개 16.06.20 623 2 1쪽
352 이산가족, 샌드위치맨 16.06.19 395 2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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