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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蘭亭)서재입니다~

비밀 낙서첩

웹소설 > 작가연재 > 시·수필

난정(蘭亭)
그림/삽화
nanjung
작품등록일 :
2015.06.21 08:53
최근연재일 :
2017.04.05 15:48
연재수 :
37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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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5,582

작성
17.03.2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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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3쪽

뿔과 학-죽어야만 얻을 사랑(113수의 사설시조)

DUMMY

1.

(0)핸드폰이 노래했다.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2.

(1)옆이 면사무소이고 뒤가 지서였던 수미네 집.

일명 감나무집으로 불릴 만큼 그 너른 마당이 온통 감나무였다. 게다가 부엌에 우물이 있고 마당에 빨래터까지 있어 밖에 물을 긷거나 빨래하러 나갈 일이 없었는데 오히려 그런 완벽성이 여자들에게 갇혀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2)마당 전체에 그늘을 늘여 파르스름한 이끼를 군데군데에 처발라놓고 있는 감나무들은 치맛자락을 펼친 듯한 곡선 기와지붕보다 키가 컸다. 머슴 삼봉이가 감나무 등걸에다 그네를 매단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식모였던 끝년이, 그녀는 비 오는 날만 빼놓고 날이 날마다 수미엄마 민둘래의 잔소리대로,


(3)“사발 가생이에 밥풀을 반 쪼가리씩 붙여놓는 그놈의 설거지조차 억시게 큰일 한 것 모양 어깨 두들겨 감서, 몸 풀이다, 기분 풀이다, 별의별 제목을 깃발 맹키 펄럭임서, 마실 여식아들을 죄 불러들여 밀어라 땡겨라 함서, 한 중우가랭이에 두 다리가 들어갔거나 말거나 그네에 매달려서는 온 동네 잡아 쨀 듯이 깔깔거렸다.”


(4)오죽 시끄러웠으면 수미아버지가 그 감나무를 베어버린다고 서슬 퍼런 톱을 들이댔을까. 결국 끝년이의 “감나무를 베려면 나부터 죽여라”고 바락바락 악 쓰는 사생결단의 애원에 견디다 못한 삼봉이가 수미아버지를 간신히 말리고 타협을 보아, 그네 줄이 삼분의 일만 남아있게 나무 꼭대기에 돌돌 감아 짤막하게 해두었다.

하지만, 가덕도에 산다는 제 할머니를 불러온다 해도 당최 못 말렸을 끝년이.


(5)삼봉이에게 목말을 태워달라고 해서는 그 짤막해진 그네에 비집고 올라앉아 삼봉이더러 “안 밀고 뭐하노?”를 떨어뜨린 끝년이. 끝년이를 올리느라 숨이 턱에 찼던 삼봉이는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까치발을 하여 간신히 끝년이의 엉덩이를 밀어주었고, 드디어 끝년이 고년은 지붕의 기왓장을 발로 찰 뻔한 정도로 높은 곳에서의 그네뛰기에 거의 실성한 여자처럼, 아니면 극도의 오르가즘에 도달한 여자처럼, 귀를 닦고 찾아다녀도 좀체 듣기 힘들 그 특유의 웃음을 귀가 따갑게 터뜨렸고, 그래서 수미아버지는 너무도 기가 막힌 나머지, 다시는 그네 이야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6)그날도 간밤의 태풍이 감나무집 땡감을 사정없이 떨어뜨렸다. 바깥이 시끌벅적한 것을 보아 끝년이가 또 집 앞의 공터에 부뜰이를 불러들여 그의 독무대를 주선한 모양이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수를 놓고 있던 수미는, 할 수 없이 슬리퍼를 끌고나왔다.

저의 집 솟을대문 뒤에 몸을 반쯤 가리고는 유치찬란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구경거리에 눈 화살을 퍼부었다.


(7)“옵빠, 옵빠, 한 판에 두~ 개. 자아, 퍼뜩!”

끝년이가 돼지 멱따는 소릴 내지르며 선금을 제시하자, 부뜰이는 연탄불 위에서 비틀리는 오징어 시늉을 하는지 손가락 발가락을 오갈 든 고춧잎처럼 비비꼬는 틈틈이 불퉁댔다.

“배에서 껄떡구신 매구치는 소리가 나는데 우찌 흔드노? 아침 묵고 출근해스로 새참까지 처묵을라고 오징어 꿉는 노가다인줄 아나?”


(8)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 열 명 둘러선 가운데에 한 명이 길 건너 별다방의 상수였다. 1학년 때에 중퇴를 하였지만 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부뜰이는, 그래서 수미와 고등학교 동창인 셈이었고 길 건너 앞집 별다방 아들 상숙이 동생 상수는 제 누나보다 두 해 후배였으므로 수미에겐 단지 이웃 동생이었다.

 

(9)부뜰이는 수미의 쌍심지 켠 눈빛을 잽싸게 읽어냈다. 오줌을 참고 참다가 기어이 오줌보가 터질 판에야 시원히 내깔기던 중에 맞은편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에게 들킨 뒤에도 오줌줄기가 그치지 않아 쩔쩔 맸던 때처럼 가슴이 벌떡거렸다.

“하이고, 야단치는 눈 좀 봐라. 딱 샛별이다 고마. 몬산다마······”


(10)“미쳤어들······”

수미가 획 몸을 돌리는 것을 보고 부뜰이가 큰 소리로 나부댔다.

“그래, 묵을 거를 좀 가져 온나. 너랑 나랑 텔레파시가 통한다 카몬.”

“언제적 텔레파시고? 텔레파시 좋아하시네!”

 

(11)상수가 수도권 대학에 붙던 길로 서울에서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을 절단 내고 있을 동안, 상수보다 2년 먼저 서울에 올라갔던 수미도 오빠와 자취를 하다가 뜻이 맞지 않아 홀로 서기를 한다는 것이 자수장 무형문화재 80호의 문하에 들어가서 제 나름대로 부모 돈을 축내고 있는 모양새.


(12)아니, 자기 용돈 정도는 벌어가면서 꿈을 이루기 위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수가 대학생활의 첫 여름방학이라고 내려오니 수미가 먼저 내려와 있는 거였다. 한번은 상수가 “수(繡)집에도 여름방학이 있는 모양이야?”라고 넌지시 아는척했고, 수미는 “그냥 몸이 안 좋아서 몇 달 쉬러 왔어.”라고 했다. 하지만 날이 날마다 들어앉아 수를 놓는 게 그녀의 쉬는 모양새였는데, 이른바 자기 혼자만의 작품을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13)헌데 부뜰이는 수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리는 증세에 시달렸다.

아무리 끝년이 핑계를 대고는 있었지만, 부뜰이는 수미를 훔쳐보기 위하여 일쑤 수미네 앞 공터에서 춤판을 벌였고, 상수도 마찬가지였다.

상수는 자기 자신이 언제부터였는지 짐작도 못할 때부터 자기 누나와 동창인 수미누나를 좋아했다.


(14)그런데도 ‘누나’라는 보이지 않는 금줄 때문에 아직껏 한 번도 그 비슷한말도 못했으며, 해서 그의 사랑은 항상 가슴속에서만 타올랐다가 꺼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일종의 동병상련 때문이었는지, 상수는 부뜰이의 저 같잖은 행위예술에 대하여 방관했다.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부뜰이에게 수동 카메라를 들이대고 거리조절을 한다, 몰래 뒤를 밟는다하며 바쁘게 설쳐댔는데, 그 이유가 거창하였다. 대학 사진전에 출품할 사진작품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부뜰이에 대한 몇몇 소문을 모으기도 했는데 그것은 주로 다방 레지인 김양한테서였다.

 

(15)키는 평균치에서 약간 작은 축에 들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다부진 몸매 부뜰이는, 왼쪽 귀 아랫부분부터 턱의 가운데쯤까지가 발육 부진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그저 둥글납작한 형으로써, 굳이 흉을 보자면 음력 열사흘 달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16)부뜰이는 열사흘 달을 치켜 하늘로 발딱 젖혔다.

그와 동시에 배를 쑥 내미니 겨울엔 덧옷을 걸쳐 입고 여름엔 소매를 둘둘 걷어 입는 푸른 줄무늬 티셔츠가 쑥 올라가며 배꼽티가 되었다. 넘어지려는 몸을 더욱 자빠뜨리고 자기 들창코를 한 손으로 꽉 비틀어 쥐고, 아랫입술을 삐뚜름하게 말아 왼뺨 광대뼈 밑에 올려붙인 다음에, 귀신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소리를 내지르며 겅중겅중 뛰어 박자도 맞추는가 하면, 바짓가랑이를 제각각 걷어 올린 두 다리로 절뚝절뚝 빙글빙글 잘도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 기진맥진한 다음에야 털썩 주저앉았다.

농악무 상모돌리기, 그 놀이를 연상시키느라고 상모도 없이 머리통을 돌렸다.

 

(17)사실 그는 입까지는 비뚤어지진 않았다.

어느 날 불쑥, 그러니까 한 2년 전에 자기 어머니가 죽고 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우스꽝스런 짓거리만 골라서 했다. 해서 사람들은 그가 머리 어디를 다쳐 바보가 되었다거나, 어머니를 여읜 것에 충격을 받아 미쳤다고 어림잡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언젠가 동네에서 펼쳐진 방송국 주관의 전국노래자랑에서 예선에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특별 출연을 한 적이 있었다.


(18)그 때에 무심코 입비뚤이 시늉을 하자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 데에 착안하여 으레 입비뚤이 행세를 할뿐이며, 자기가 비뚤어진 낯짝에다 입술을 올려다 붙이는 것은, 보리식빵에다 딸기잼을 바르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이치를 터득한 끝에 연출하게 된 일회용 퍼포먼스 캐릭터라고 했다. 그리고 입술과 마찬가지로 두 다리도 멀쩡했다. 다시 또 리바이벌하자면, 별 하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물까지 먹은 대한민국 남자 부뜰이.

 

(19)“옵빠, 옵빠, 오빠아악- 아이고아이고,”

식후소화제 삼아 나와 둘러선 사람들의 맨 앞에 끝년이가 자리 잡았다.

“배삼룡이 저리 가라다 고마 마! 옵빠, 옵빠, 우리 옵빠야아- 인자 마, 기분이다 마. 자아, 받그래이!” 하면서 그녀는 허벅지 저쪽의 물방울무늬 삼각팬티가 거반 보일 만치 치마를 까뒤집고는, 시멘트바닥이 제 집 방바닥인양 죽치고 앉아 펑퍼짐한 엉덩이로 석판화라도 찍을 듯한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땡감을 단감인양 치켜들고, 마음이 콩밭에 가 있던 투수가 한창 열이 오른 타자를 향해 건성으로 공을 던지듯이 감을 던져댔다.

저 땡감, 부뜰이 무릎을 치고 떨어져 떨어지던 길로 몸부림쳤다.

 

(20)웬일인지 수미가 다시 나오는데 빈손이었다.

“쌔빠질······ 캐도, 좋다 마! 네가 관객이라 카몬, 나야, 배가 고파 칵 꼬꾸라져도 끽소리 몬한다, 알겄나?”

어느새 끝년이 등뒤로 간 수미가 순식간에 감 바가지를 낚아챘고 녀석이 벼락같이 바가지를 덮어썼다. 마침 양팔을 겨드랑이에 꺾어 붙이고 손바닥만 요리조리 휘딱휘딱 뒤집으며, 원조 마이클-잭슨 식의 뒷걸음질에 몰입하였던 그는, 개구리처럼 팔짝 뛰어오르는 동시에 손뼉을 딱 쳤다.

“좋다 마! 똥바가진들 마다하겄나, 괜찮다 마!”

 

(21)“쯧쯧쯔······ 얌전한 기 와 저라겄노······”

끝년이가 눈을 희번덕이거나 말거나, 사람들이 구시렁거리나 말거나, 수미는 감 바가지 던진 까닭을 조목조목 소고 두드리듯이 “가! 가란 말야. 야이 바보야! 미친 놈. 천 날 만 날 빌어묵을 새끼!”라고 퍼붓는데, 그런데 자잘한 물결이 그녀의 눈에서 찰랑인다.


(22)상수 알아채고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미누나의 저 폭언은 진심이 아닐 거야. 상상하기조차 끔찍하지만, 누나는 필시 부뜰이에게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어. 부뜰일 제 밥으로 아는 끝년이와는 다른 차원으로.


3.

(23)누가 보아도 어엿한 부뜰이네 뒤뜰.

멀쩡한 산의 정강이를 자르고 난 국도를 아스팔트로 포장하고부터는 확연히 가풀막진 모양새가 드러난 대숲, 어엿한 부뜰이네 뒤뜰······ 집임자 부뜰이는 인도가 없는 아스팔트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다가 갑자기 대숲에 뛰어드는데, 그것이 그가 귀가하는 평범한 방식이었다.


(24)언젠가는 방 가운데에서 죽순이 치솟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대나무가 죽죽 뻗어 올라 천장을 뚫고 집을 반반씩 갈라놓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러기를 기다릴 만큼 대숲이 좋은 그는, 대나무 기운을 먹고사는 그것이 마냥 좋아서, 툭하면 대나무 속같이 비어버린 배를 퉁퉁 두드리며 일쑤 하늘을 향해 배꼽을 내밀고 들창코를 벌름거렸다.

 

(25)수미가 그의 비밀 통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녀는 잽싸게 뛰어 요리조리 지그재그로 내려 순식간에 목표점에 다다른다거나 하는 묘기는 없었지만, 가끔 그 지름길을 이용하였다. 그럴 때마다 상수는 미끄럼을 타듯이 대나무 가지를 휘어잡으며 아슬아슬하게 내려가곤 하는 수미를 멀찌감치 숨어 살폈고, 수미 또한 부뜰이네 집을 말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부뜰이도 수미를 몰래 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세 사람 구도와 시선은 길쭉한 삼각형이었다.

 

(26)대숲 끄트머리쯤에 다시 대울타리로 빙 둘러싸인 다섯 평 남짓한 집.

이엉이 썩어서 슬레이트로 덮은 지가 또 몇 년이 된 그 집은, 각목 열 댓 개씩을 3센티 정도 두께로 대패질하여 가지런히 붙여 만든 문 두 짝의 허리쯤에 빗장까지 지른 정지문과 방문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방문엔 그의 어머니가 고무줄이 끊어져 처박아두었던 월남치마를 각각 너비 2센티 정도의 세 가닥으로 찢어 한 갈래로 꼼꼼히 땋아 만든 손때에 절은 끈이 서낭나무에 걸린 금줄 모양 늘어져 있었고, 그 끈의 끄트머리엔 턱없이 견고해 보이는 둥그런 쇠문고리. 그 집을 ‘난쟁이 집’이라고 불렀는데,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죽 그 집에 살았고, 어머니 사별 후에도 내내 그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27)길게 잡아보았자 백 살이 고작인 인간으로서는 어림도 할 수 없는 세월동안, 쉼 없이 파도에 닦이고 구를 때마다 다른 얼굴의 하늘을 들이마신 것 같은 자갈들이, 태풍에 말끔히 씻긴 몸으로 늦여름 햇살을 받아 알알이 볕꽃을 피워낼 즈음,


(28)어른 발걸음으로 50발짝쯤 되는 거리에 혼자 떠 있는, 팥고물 콩고물에 찹쌀가루 멥쌀가루를 한 켜씩 깔되 짬짬이 호박오가리도 놓아 푹 찐 시루떡 같은 단층(斷層) 바위섬에 갑자기 눈보라처럼 몰려들어 끼룩거리는 갈매기떼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녀.


(29)그렇다면 어떤 녀석을 모델로 삼았을까?

날이 날마다 다이어트 계획을 다음으로 미룬 채 먹을 일이 생길 때마다 허리 단추를 끌러놓고 덤비는 뚱보처럼, 먹이가 목구멍까지 꽉 차서 꾸역꾸역 넘어올 것 같은데도, 습관적으로 바위틈 고둥을 찍어 깨뜨리는 저놈?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는 핑계로, 캠핑 장비도, 장비를 살 돈도 없이 바캉스 갈 계획에만 마음이 부푼 게으름뱅이 모양, 뱃속이 텅 비었는데도 열심히 깃만 다듬는 저놈?


(30)밥값에 교통비나 하는 품삯을 받는 족족 건달친구와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뜬금없이 처자식 생각이 난 날품팔이꾼처럼, 무리 속을 헤집으며 아무나 툭툭 건드려 시비를 걸다가 제풀에 펄쩍펄쩍 뛰는 저놈? 이도 저도 아니면, 혹 바위 맨 꼭대기에 오도카니 앉아 당최 안 어울리는 고독을 씹어대는 저놈인가?

핑하니 돌을 집어 던졌다. 그녀의 등뒤로 다가간 부뜰이.

 

(31)“퐁당!”

하지만 그녀는 몸만 사린다.

단체 모임에 지각할세라 모처럼 물었던 용치놀래기를 눈 딱 감고 놓아준 일이 못내 아쉽던 끝에 기어코 날아오르고 있는 그 갈매기를 재빠르게 소묘하던 그녀는, 돌멩이가 몇 번이나 눈앞을 스쳐가 수면을 살짝 친 뒤에 도르르 굴러 잠기곤 하는 양을 말똥히 바라만 보고 있는데, 이윽고 돌이 자기 바로 앞에서 첨벙첨벙 빠졌다. 바닷물, 옷이고 얼굴이고 아무데나 튀어 올랐다. 그래도 그녀는 붙은 듯이 앉아 있다.


(32)학이건 참새건 갈매기건, 날아오르는 순간의 훨훨 나는 모습만 포착하여 그리면서도, 정작 자기는 다른 사람 앞에서 걷거나 움직이는 걸 꺼려하는 수미. 그런 경우가 생길 때마다 상수는 가슴이 마구 저리는 한편으로 부뜰이모양 당장 사물놀이를 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쉽사리 다가갈 수 있으니까. 그녀의 옷자락을 슬쩍 만지는 행운도 생길 것이니까.

하지만 그는 마음뿐이었다. 그저 카메라만 들고 몰래 따라다니며, 부뜰이가 수미를 건드릴 것을 염려하여, 혹시나 건드릴 때를 포착하겠다는 결심으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뒤를 밟을 뿐이다.


(33)“누고?”

제 자갈 밟는 소리에 곡조를 붙이듯이 옆구리를 옆으로 기울인 채 베토벤이라도 된 것처럼 걷고 있는 부뜰이. 어깨를 바싹 오그리며 숙인 바람에 절로 떨어지는 수미의 긴 머리채 아래로, 외로운 그림자 하나 밀려들며 차츰차츰 그녀와 포개지고 있었다.


(34)걸작이다. 대상은 몰라도 금상 깜이다.

돌멩이를 양손에 나누어든 그대로 수미 바로 앞에 서서, 배꼽이 반만치만 보이게 배를 내밀고는 머리를 발딱 젖힌 부뜰이. 부뜰이의 눈과 수미의 눈이 딱 마주치는 걸 보아버린 상수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이를 물고 침만 삼켰다.

열없이 목운동하는 부뜰이를 흘겨보는 수미.


(35)“비뚤이 너, 죽고싶나?”라며 침을 따끔하게 찌른 수미가 침착하게 연필 굴린다. 두 가닥 코팅철사에 자잘한 반짝이 박은 머리띠가 바르르 떨린다. 석류알갱이빛깔 주둥이 갈매기가 저녁놀빛깔 발가락을 살풋 내밀어 해면을 툭 치곤 제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간다.

부뜰이, 제 깜냥대로 능갈, 능갈치고 있다.

(36)“날아가삤다. 봐라, 안 없나? 저런 거 말고, 소라나 그려봐라··· 그거 예쁜데··· 언제 한 놈 잡아 주까?”

“꼴값하네? 너 같은 거한테 그런 걱정 하라카드나? 소라가 얼마나 깊은 물에 있는데, 미쳤다꼬 돌콩만한 니한테 잡히겄나?”

“하이튼, 턱 잡아스로, 니 손바닥에 턱 올려놓는다카모, 그때는 우짜끼고?”


(37)“안 가나? 세수는 생전에 안하고, 눈꼽은 더덕더덕 붙여 가지고, 저런 외계인이 어쩌다가 이 지구상에 떨어졌는가 모르겄어, 바보 천치······”

“어라라? 세수 안하는 거로 니가 봤나? 언제 봤드노?”


(38)정말 눈곱이 붙은 것 같은 눈을 쓱싹 비빈 다음에야 그녀 옆에 슬그머니 앉은 붙들, 그렇게 앉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자기 사정을 둘러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은근 슬쩍 자기 깊은 속을 털어놓는다.

“하모, 나는 외계인이다. 바보 천치다. 그래도 정수미라카는 여자가 좋은 거로 어짜노? 정수미가 죽도록 좋아서 덜컥 앓아누웠던, 비뚤이라 카는 바보를 아실랑가 모리겄다. 모리재? 니는 모르끼다. 꿈에도 몰랐으 끼다. 몬 말릴 사랑 때문에 학교까지 중퇴했던 그 사연을······”


(39)새파랗게 질린 수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부뜰.

“소원이 있다. 네 다리가 갖고 싶다······ 고마, 나한테 떼 도라.”

‘간이 부은 놈이네?’

수미는 몸에 딱 붙는 미니스커트를 즐겼다. 그녀는 일쑤, 위엔 엉덩이를 푹 덮고도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티셔츠나 블라우스에다, 아래는 입지 않았다고 착각되어질 만큼 짧은치마를 입고 다녔다. 그녀가 아무리 남 보는 앞에서 걷지 않는다 해도, 어느 날 얘기치 않게 그녀의 다리가 상수의 눈이나 부뜰이의 눈을 사로잡고는 놓아주질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40)정말 다리가 원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수미의 미니스커트 차림은 일찌감치 아버지에게서, 되도록 다른 사람 앞에서 다리를 벌려 걷지 말 것이며, 또한, 손톱에다 매니큐어 따위는 절대로 칠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를 어렵사리 받아내고서야 연출하는 조심스러운 자기표현이었다. 더구나 옷을 홀랑 벗어도 더운 여름철이 아닌가? 옛날에 황진이가 자기 때문에 몽달귀신이 된 총각의 관 위에 자기가 입던 속저고리를 덮어주어 그 혼을 달랬다고는 하지만, 그렇지만 수미는, 자기 이상향이 황진이일망정, 그래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녀석의 얼토당토않은 주문엔 도저히, 눈곱만큼의 마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스케치북을 펄쩍 덮은 길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눈에 퍼런 불꽃이 일렁이는 것만 같다.


(41)“쥑이 삔다 고마! 안 쥑이모 내가 사람이 아이다.”

수미는 이를 앙다문 채 부뜰이에게 돌을 집어던졌고, 부뜰이는 히히 웃으면서 요리조리 돌을 맞아주었다. 맞아서 피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의 냄새가 묻은 거라면 무엇이든 다 환영인 부뜰.

“기브 미, 돌몽새이(돌멩이)!”

부뜰이는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며 모래밭으로 내달았다.

“오라잇! 던져, 던져, 오오 케이! 아이코, 스트~라이크! 파울-볼입네다-”


4.

(42)가끔씩 수미네 집 대청마루를 기웃거리는 부뜰.

골마루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이 있어서인가, 아니, 아니, 실이 날아갈까 봐 그러는가, 선풍기도 끈 채로 대청마루 한 귀퉁이에 앉은 그녀.

골마루 들머리쯤을 등지고 수틀 앞에 잔잔한 그림 한 폭.


(43)북처럼 팽팽하게 맨 수틀 위에는, 너무 작아 그 빛살로만 형체를 알 수 있는 예리한 바늘이 휙 치솟았다가, 치솟은 즉시 진한 놀빛 본견 공단바닥을 사정없이 째고 숨고, 다시 날카롭게 번뜩이며 솟구치고 흡사 칼날을 꼿꼿이 세워 하늘을 핑핑 날아다니는 무협영화 속의 무예 시합이 벌어지는데, 바늘귀의 실이 바늘 가는 대로 외가닥 주름을 살랑살랑 잡으며 오르내리는 건, 마술사 마술 시범인양, 물밖엔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물결에서 후다닥 정어리 낚아채는 물수리의 날갯짓 같기도 하다.


(44)바늘 잡은 손끝에서 배어 나온 땀 때문에

찌를 때마다 빽빽 외마디 비명을 지르던 공단은, 아픔을 초월하다 하다 드디어 하늘이 되고, 그 하늘에다 학의 깃을 문신처럼 새기고, 그러는 사이에 부뜰이는 수미가 수놓은 학을 타고 아득한 천상계로 날아가는 환상에 빠져들었다가, 기어코 끝년이에게 걸려 쫓겨, 쫓겨나곤 하였다.


(45)끝년이는 번번이 그의 뒷덜미를 불끈 움켜쥔 채 목이 바짝 졸리다 못하여 혓바닥이 빠져 나올 지경으로 끄잡아 올려서는, 제 입에 그 귀를 들이대고 귀지를 훅훅 불어가며 지분거렸다.


(46)“옵빠야! 요기 있는데 오데서 찾는 공?

밤에 갈테이까네, 집구석에 가서 처박혀 있어. 하이고 우리 옵빠는 우째 사흘로 몬 넘가노?

구엽은 우리 옵빠가 시도 때도 음시 밝히싸서 내사 마, 몬산당.”


(47)그녀는 워낙 드나드는 사람이 없는 부뜰이네 집에 저 좋아하는 고등어 통조림을 화대인양 들고 가서는 부뜰이를 실컷 갖고 노는 데에 맛들인지가 꽤 오래 되었다고 소문이 나 있었고, 그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는데, 김양이 떠벌려대는 소문의 내막을 들어보자.


(48)“또 성공 못하몬, 옵빠 니는 고마 마, 시방 이 순간이 바로 제삿날이다 카는 거로 명심하거라, 알겄나?”

부뜰인 냉큼 주저앉아서 혓바닥을 뺀 다음 그녀의 발바닥에서부터 찬찬히 핥아 들어가는데, 몸에서 고등어 냄새가 나는 그녀를 천상 고등어로 생각하고, 끈질기게 핥는다. 발바닥을 다 더듬고 종아리를 거쳐 무릎을 뱅글뱅글 돌고는 점점 허벅지로 올라갈 때쯤이면, 그녀가 젖가슴을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는다.

축축한 그 숲에 다다르면, 그러면 부뜰이는 새삼스레 기겁하여 우뚝 앉아버린다.


(49)바지 지퍼를 뚫을 듯 팽팽해진 거시기. 끝년이는 번번이 속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대에 차서, 다 삶긴 고구마솥을 여는 것처럼 부뜰이의 바지 지퍼를 착 내리고서, 갓 익어 뜨끈뜨끈한 고구마를 얼른 끄집어내듯이 그것을 통째로 잡아당긴다.

그러나 임자의 한계는 고작, 고작 거기까지.


(50)어찌된 거시기인지, 끝년이 손에만 잡혔다 하면 맥을 못 춘다.

위에 거시기는 물레 밑 펄펄 끓는 물에서 뺑뺑이를 돌고 돌아 마지막 한 올까지 실을 벗어내고 맨몸뚱이만 달랑 남았다가 조리에 건져져 물기 쪽 빠진 번데기처럼 쪼그라들고, 아래 거시기는 수미아버지가 두 알 함께 거머쥐고 딸그락 딸그락 손 지압을 하던, 재작년, 혹은 작년에 깐 호두 같이 땡글땡글해져 잡고자시고 할 것도 없다.


(51)그럴 때마다 끝년이는 씨름을 했다.

부뜰이를 통째 내동댕이치고도 다시 잡아 업어치기 메어치기 호미걸이 안다리걸기, 그래도 분이 안 삭으면 마치 석삼년 만에 빠는 작업복 바지를 방망이질로 빨듯이, 부뜰이를 엎어놓고 두들겨 패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질 때쯤에야 비로소 놓아주었다.


5.

(52)제법 굵은 “매헤헤에 헤에헤에~”는 숫염소, 가늘고 고운 “맴에헤에 에에에에~”는 어미염소, 가늘고 방정맞으면서도 애처로운 “에헤해, 에헤에에에~”는 새끼염소가 어미 부르는 소리. 수미가 산에 있었다. 염소 닮은 소리로 염소에게 실험하여 화답을 받아내면서.

 

(53)“피- 요사이 비뚤이를 안 본께나 살맛이 난단 말이재? 쭈았어!”

어영부영 추석을 보내고도 달 반이 넘도록 수미를 찾아 헤매던 부뜰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중쉬어’ ‘차려’를 반복하는 걸로 앞으로 치를 수미와의 결전에 대한 채비를 마쳤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떠나간다- 홍야 홍야, 옛다 모리겄다. 띵호아 아싸 야로- 룰룰루루 룰루루루- 우, 리는 떠, 나간다아아,”

 

(54)키가 작다는 것 때문에 군 입대에 실패하여

두고두고 속에서 천불이 나던 부뜰이는, 언젠가 주워들은 옛날 군가를 개사까지는 하여 울대뼈가 툭 불거지게 뽑으며 산을 탔다. 딴에는 화려한 연예인으로서의 자기 진로를 위해서, 언제 어디서나 자기의 개성인 코믹한 성분을 끄집어내어 쉴 틈 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신조, 그래서 겸사겸사 두 팔로 활개를 치며 한 발짝 한 발짝 힘을 주었다.

 

(55)불쑥 나타난 부뜰, 몸을 빳빳이 세우고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

그녀가 식은 타박고구마 먹다 체한 듯이 놀라자, 뒤통수 슬슬 긁으면서 부뜰이 능청을 떨었다.


(56)“수는 안 놓고, 산에서, 이기, 무신 짓고?”

요 몇 달 부쩍 꿈속에 나타나 “니 다리, 나 도라”를 웅얼거리곤 하던 부뜰이었기에, 상수의 얼굴도 되었다가 부뜰이의 얼굴도 되었다가, 때로는 생판 모르는 남자의 얼굴로도 나타나는 귀신들.


(57)다리를 달라는 뜻의 말을 중얼거리는 꿈속의 귀신들.

그런 심란한 꿈자리도 해결할 겸해서 마침 아버지가 사들인 염소 가족을 떠안았고, 다시는 짧은 치마를 입지 않게 된 수미는, 무섭게 팔짝거리다가 금세 냉랭해져서 늘 하던 식대로 말을 받는다.

 

(58)“넘이사,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지, 꼴망태 들고 학굘 다니든지, 니가 와, 무슨 자격으로 졸졸 따라다님서 사람 못살게 구노?”

제 딴에는 이 부뜰일 피하느라고 염소지기까지 됐다?

“이 땅이 느거 땅가? 내 발 가지고 내 맘대로 다니는데 웬 시비고?”

꾸버덕, 부뜰이의 말에 동조하는 양 숫염소의 뿔이 아래위로 주억거린다.


(59)“남말하고 자빠졌네······ 존 말 할 때, 썩 꺼지삐라 고마.”

그녀가 폭언을 한다고 해서 약발 받을 거라면 애당초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부뜰이었다. 이미 수미에게 고백했던 대로 학교를 중퇴하면서까지 수미를 잊어 보려고 애썼던 과거는 싹 접는다 치더라도, 이십 초반의 청춘황금기에 와서까지, 여기에, 이 시점에서까지 내외를 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두 번째 신조였다.

 

(60)수컷을 향해 소금양치질 한번 안하고도 최고급 표백치약만 아침저녁으로 사용한 것 같은 이빨을 살짝 드러내어 짤막한 “에헤, 에헤헤헤,”로 내숭 만점의 추파를 던지는 암염소에게 혀를 쏙 내민 후에야 그녀와 조금 떨어진 바위모서리에 턱 주저앉은 그는, 죄 없는 억새꽃만을 낱낱이 뜯어 한꺼번에 불어 날리고는, 진지한, 사뭇 진지한 목소리를 입에 발랐다.


(61)“할말이 있다.”고 부뜰이 말하자,

그녀는 물었다 버린 땡감 보듯이 부뜰이를 바라보았다.

“학은 다 놓았나?”

“참말로, 별꼴이 반쪽이네······”

“날아가 삐렸나? 우찌 됐노? 말해봐라······ 으이?”

양미간 바짝 좁혀서 여덟팔자로 만든 그녀는 “니는,”을 탁 뱉은 후에 “따라락, 따라락,” 따발총을 쏘아댔다.

 

(62)“참말로 바본기가? 아니몬 바본 척하는 기가?

진짜 바보라몬 말이다. 넘이사 학을 날려보냈든지, 처박았든지, 염소를 멕이든지, 놀리든지, 그런 거는 세세하이 알라고 하지 마라. 근데, 좀 물어보자. 니 와, 시시하몬 절뚝거리노? 대체, 이유가 뭐꼬? 볼 때마다 절뚝거리는 그 속셈이 뭐꼬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라는지 이실직고해봐라 말다!”


(63)느긋이 “좋아스로”를 던지고 나서 부뜰이도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둣, 두두둣!” 탄알이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내 꼬라지로 좀 보거라. 군대도 초장에 미끄러졌다시피, 키는 요쯤에서 딱 멈찬 상태고, 생긴 거는 요 모양 요 꼴이고······ 그라이, 일찌감치 코미디언이나 목표 삼은 거 아니겄나. 쏘크라데스가 안 캤나? 모름지기, 사람은 제 분수로 알아야 한다꼬 말이다. 이 히얀빠꿈한 몰골에 다리까지 절뚝거린다 카몬, 하여튼, 구색 맞춰야재······ 배삼룡이 서영춘이 같이는 못 되더라도, 땅딸이 이기동이 맨치 할라캐도, 선천적으로 살이 안찌는 체질 관계상 꿈도 못 꿀 일이고,”


(64)“그라모, 구색 맞찰라고 그란다 이기라? 니, 참말로 몬 말리겄다.”

“맞다. 몬 말리는 청춘이다.”를 곱씹은 그는 비장의 공포탄을 날렸다. 슬픔색깔이 곰팡이처럼 슬어있는 그런 탄알로 “내 몸에다가 니 다리로 달몬, 참말로 끝내 줄끼다. 자연적으로 절뚝거릴 거 아인가배? 부탁인데, 니 다리, 나하고 바꾸자. 내 평생소원이다.”

 수미가 남은 탄알을 모조리 써버렸다.


(65)“또, 또, 지랄병이 도졌네! 야이 바보새꺄!

전생에 남의 다리하고 무슨 한이 맺혔나? 하필이면 달라카는 기 다리고? 하이고오, 내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거든 봐라.

너같이 짜리몽탕한 다리를 내 몸에다가 바꽈 붙일 꿈이라도 꾸는가!”


(66)“그라모 찬물 묵고 정신 차리야재······ 연습이나 해야재. 맞다, 세상만사,

연습 없이는 마마, 말짱 도루목이다 고마. 실실 시작해 볼까?”

수미 바로 앞에 벌떡 솟구친 그는 양팔을 짝 펼쳐 심호흡부터 했다. 그리고 단 한명 관객에게 넙죽 인사를 찍어 올리곤 고개를 발딱 젖혀 들창코를 그러쥐었다. 그는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다가 점점 넓은 곳으로 뒹굴며 나아갔다. 양지에 누워 계시는 수미의 증조부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올 만큼 신들린 듯이, 말없이 구르고 굴렀다. 관성의 법칙을 실험하듯.

 

(67)어느새 염소를 몰아 저만치 마을로 내려가고 있는 그녀.

부랴부랴 제 몸을 붙든 부뜰이는 청미래 열매 한 송아리를 꺾어들자마자 발에다 오토바이바퀴를 단 듯이 그녀를 따라잡았다. 머리에 꽂힐락 말락하던 청미래, 이내 허공으로 튀어나가 휘청 맴돌고 사라졌다.

 

6.

(68)그러고 며칠 뒤.

 “야아~ 야아!”

 벼랑 위에 선 채로 바다를 내려다보는 수미의 뒷모습에 대고 부뜰이가 소리 지른다. 그렇게 부르면서 올라가고 있다.

부뜰이 반의반쯤도 오르기 전에 없어진 그녀.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


(69)헐레벌떡 절벽 꼭대기에 다다라 납작하게 엎드린 부뜰.

까마득한 벼랑 아래에 쉴새없이 눈 화살을 쏘았다가 허깨비를 본 게 아닌가 싶어 다리를 꼬집지만 분명 수미 목소리, 새겨들을수록 분명한 수미의 목소리가 끝없는 메아리로 변해 그의 귓속을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괴물이었나? 네가 절벽 아래로 피할 만큼······

 

(70)오만상 찡그리며 불평하다가 곧장 몸을 일으킨 그는, 나뭇가지에 살을 찢기고 바위에 부딪치면서도 오로지 벼랑 아래로 가는 길만을 더듬는다.

자기네 대숲을 뚫던 익숙한 몸짓으로 이리저리 내닫는다.


(71)“아으~ 아으~”

“야이 바보야~~ 이~~ 바보야~~”

 마치 노래처럼 바보를 읊어대던 그는 다행히 편편한 풀밭에 뒹굴어있는 수미를 찾아냈다. 그녀의 얼굴빛깔이 백짓장 같았다.


(72)볼에 패인 동백꽃잎모양의 상처가 유난히 또렷하였다.

동백꽃잎이 뚝뚝 피눈물을 흘렸다. 아니, 부뜰이가 동백꽃잎에 떨어뜨린 눈물이었다. 핀 채로 툭 떨어지던 동백꽃처럼 그렇게 간 걸까? 엄습하는 무섬증에 미친 듯이 흔들어대자, 그녀가 눈을 반짝, 목숨 다된 촛불이 마지막 순간에 활랑 피는 것처럼 눈을 반짝 떴다.

부뜰이 탄성 질렀다, 탄성을 지르며 자꾸자꾸 흔들었다.

 

(73)“살았네! 인자 살았네. 안 죽었다, 안 죽었어!”

그녀가 한숨 푹 쉬고 다시 눈을 감아버린 후에야 스르르 손을 놓은 부뜰이, 끝까지 외면당하는 것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부랴부랴 나무등걸 밑이나 덤불 사이에 흔전만전한 작살나무 갈잎을 끌어 모은 위에다 수미를 누인 뒤에, 떡갈나무 잎새를 비교적 큰놈으로만 골라 어긋맞게 겹치고 오목하게 잡아, 그 잎사귀를 싸리나무 실가지로 지른 나뭇잎 바가지를 들고 이리저리 뛰었다.

어디쯤 옹달샘이나 실개천이 있으리라.

 

(74)하늘엔 별이 하나 둘 나타났지만, 들리는 소리라곤 갈래갈래 뒹굴다가 바위를 쳐대며 몸서리치게 고함지르는 파도소리, 그 소리에 간간이 섞여 들려오는 염소들의 울음소리, 그뿐이었다. 그는 덜덜 떠는 그녀에게 푸른 줄무늬 티셔츠를 벗어 덮어주었다.

눈을 뜬, 한참만에야 눈을 뜬 그녀가 부뜰이의 배꼽을 슬쩍 외면하고 입을 뗐다.


(75)“너, 학교 다닐 때는 안 그랬는데······입비뚜름이 시늉은 와 했드노?”

전혀 안 다친 사람 같이 태연한 말투.

“안 아프나? 되기 아푸낀데?”

그는 열사흘 달을 하늘에 띄워 한 바퀴 돌려 내리곤 팔다리 쓱쓱 흔들며 국민체조를 한다.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 으스스 떨려오는 걸 감추기 위해서······ 눈치 차린 수미가 쌀쌀맞다.

 

(76)“야~ 옷 가져가 입어라, 이가 설설 긴다 고마.”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이가 어데 있노? 춥은데 그거라도 덮고 있어라 고마!”

그녀가 한 순간 이맛살을 찡그리다 말고 가만히 부뜰이를 부른다. 

“말이야, 저 별 말이야, 참 또롱또롱 하다. 이리 와서 누워 봐.”


(77)부뜰이는 수미 옆에 가만히 누웠다.

웃통을 벗었는데도 몸이 절로 후끈해졌다. 행복감이 온몸에 퍼졌다. 수미는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거나 말마디마다 끙끙 앓아서 남의 가슴을 콕콕 찔러 후비면서도, 아파서 내는 소리와 말을 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일인 것처럼 태연스레 카시오페이아 별자리 전설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잊는다. 말을 하다 보면······아픈 거를······잊아······ 뿐다.”

 

(78)별만 헤아리자는 수미는 끝년이하곤 냄새부터가 달라, 입안과 콧속이 단번에 상큼해지는, 그럴 수 없이 기분 좋은 파래냄새다. 밤이 깊었다는 것 말고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을 즈음, 두터운 밤의 장막 저 끝에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고, 때마침 플래시 불빛이 마치 등댓불인양 검은 하늘을 자로 재듯 오락가락하였다.

 

(79)발딱 몸을 일으킨 부뜰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자, 수미는 별안간 이마에 심줄을 세웠다. 

“우리는, 죽은······ 기다 고마. 이대로, 별이나 세알림서, 죽어삐자!”

그는 나발로 만들던 양손을 뒷짐 진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불뚝거렸다.

“내사 몬 죽는다. 백년은 살아야재, 니 맘대로 내가 와 죽노?”

수미는 머리만 약간 흔들다 말고 코웃음 쳤다.

“그 꼬라지로 백년을 살 끼라고? 상상만 해도 웃긴다야.”

그녀가 쉬엄쉬엄 한숨 가득 서린 목소리를 뱉었다.

“와 백년뿌이고? 코미디언이 되든지, 개그맨이 되든지, 천만년 사람 웃김스로, 그래, 그래라, 너는 꼭 살거라······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80)부뜰이의 고함 소리에 지체 없이 현장에 달려든 상수.

그는 2학기 개강 이후로 개교기념일과 주말이 맞물린 참에 집에 내려와 있던 중에 수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거였다. 상수가 수미의 어깨 밑에 손을 넣자, 그녀는 자지러지듯이 비명을 질렀다. 가까스로 눌러 참고 있던 통증이 총궐기를 하는 것처럼 치민 거였다.

“뼈가 뿔라졌능갑재?”

“저놈의 난쟁이가 밀었든갑재?”

재수생 종식이와, 시도 때도 없이 종식이를 불러내어 종식이 어머니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상수 친구 팔도가 거들고서야, 그러고서야 간신히 수미를 들쳐 업은 상수는 이를 부드득 갈며 산이 겹겹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 질렀다.

애당초 조마조마하던 일이지만, 이토록 크게 벌어질 줄이야.


(81)“저, 저, 패 쥑일 놈. 저놈을 잡아라!”

팔도가 와락 덤벼들어 부뜰이를 찍어 누르고 있는 새에 종식이는 칡덩굴을 찾아오고, 부뜰이의 팔다리가 금세 꽁꽁 묶이고, 그들은 마치 사냥을 마친 아마존 정글의 헌터처럼 기세가 등등하였다. 따로따로 묶인 부뜰이의 팔다리가 옆가지를 대강 추려낸 솔가지에 한데 모여 묶였고, 두 사람이 그 솔가지의 양끝을 각각 어깨에 걸머지고, 자그마한 몸피는 고슴도치처럼 말려 이동을 시작했다. 발이 네 개씩이나 되는 염소들은, 다리 두 개를 가졌지만 간단히 매달려 가는 그가 부러운 듯이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밤길을 조심조심하여 더듬었다. 터덜터덜 산을 내려갔다.


(82)“아이다~ 이거는 연극이 아이다. 와이카노! 날로 와이라노~”

미칠 것만 같은 부뜰이는 후배들에게, 애원하고 애원하지만,

“시끄럽다 고마!”

팔도가 그의 얼굴에다 느닷없는 플래시를 들이댄다. 섬광이 눈을 후벼 파면서, 그의 머릿속으로는 이 희극의 끝이 불 싸지른 듯 지나간다. 장작개비에 기름이 끼얹어지고,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물이 펄펄 끓고, 그리로, 보잘것없는 짐승 한 마리가 운반되고 있는 장면······ 그는 온 내장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의 말도 울음도 그들에겐 그저 잠시 후 도살될 짐승의 부질없는 버둥거림에 불과할 뿐.

 

(83)“인생이 불쌍타, 상수야 고만해라.”

한 서너 개비 줄담배를 피우시던 수미아버지는 부뜰이가 맞을 만큼 맞고 나서야 그를 축구공 삼아 뻥뻥 까던 상수를 달랬다. 부뜰이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다가, 저절로 입술이 비뚤어질 만큼 어금니를 꽉 깨문 채 피로 얼룩진 푸른 줄무늬 티셔츠를 벗었다. 수미 체취가 올올이 서린 기념품이었다.

“앞으로 이 근처에 한 번만 더 얼씬하면, 그 때는 마, 콱 쥑이삔다!”

수미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수가 부뜰이에게 금족령을 내리고, 티셔츠 고이 품고서 아무에게나 꾸벅 꾸벅, 꾸벅이고 나간 부뜰.

 

(84)어느 휴게소던가, 남자 소변기 위에 표어처럼 붙어있던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한동안 무대 위에서 뒤뚱거리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연극배우인양-이라고 한 셰익스피어의 그 말처럼, 그는 딱 하나 딱 하나 살맛이던 쇼의 마지막 장면으로 외등 불빛에 제 그림자를 툭 떨어뜨려 밟고 밟았다. 그러면서, 일생일대의 무대였던 감나무 집 앞 공터를 단숨에 뺏어간 금족령이 원망스럽긴 했지만, 고등어, 다시는 안 먹어도 다시는 핥지 않아도 되리라는 한 가닥 희망이 그나마 그를 달랬다.

 

(85)수미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몇 개월간 누워 있다는 것도, 그녀가 깁스를 풀기도 전에 서울로 가버렸다는 사실도 풍문으로만 들었지만 그 이후의 소식은 도무지 알아내지 못한 부뜰. 이유는 금족령을 당한 때를 기점으로 다시는 고등어를 쳐다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수미에 대한 정보통을 완전 먹통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7.  

(86)저거는 허깨비가 아니면 사람이렷다?

물귀신같이 머리를 산발한 채 한 손엔 회초리, 한 손엔 돌멩이를 들고 “도라, 나 도라 고마!”를 한도 끝도 없이 씨부렁대며 그 입심으로 살아온 부뜰이는, 눈두덩 화끈거리도록 눈을 비비고 또 비벼댔다.

 

(87)마치 엊그제도 저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저토록 천연덕스레 앉아 잿빛 물안개가 하늘과 바다 사이에 천천히 날줄을 치고 있는 가물가물한 바로 저기서부터 희번덕희번덕 몸을 뒤척이며 제가끔 몰려들었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아나곤 하는, 은빛비늘 덩어리가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 같은 현란한 물결 춤을 보고 있던 그녀가, 머리를 휘젓다가는 천천히 자갈 하나 주워든다.

 

(88)그녀의 돌이 물위를 미끄럼 치다 말고 퐁당 가라앉고

“잘해, 잘해!”

아이가 손뼉을 치자 파래냄새 묻은 바람이 그 머리칼을 날리며 맞장구친다.

언제 딸까지?

그녀의 뒷모습만이 눈에 가득 찼다가 아이의 깔깔거리는 소리에 언뜻 정신이 든 부뜰이는, 납작한 돌멩이 두 개를 골라 그들 뒤로 다가간다. 돌은 번차례로 날아가 각각 수면을 날름날름 핥았다가 톡 톡 튀어 긴 미끄럼을 타고는, 남자선수와 여자선수 둘이 빙판 위에서 아이스쇼를 하듯 뱅뱅, 뱅, 뱅글뱅글 돌다 물방울 하나 없이 사라진다.

 

(89)부뜰이는 짝짝이로 걷어 올린 바지 꼴이나 작달막한 키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그의 기찬 돌팔매질에 화끈 놀라 돌아보는 그녀는, 그녀가 수년 전 어느 밤에 얘기해주었던 카시오페이아 여신 그대로다.

 

(90)가슴이 마구 벌떡거려 도대체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는 부뜰. 서로 우물쭈물 하고 있는 사이에 모래펄 저 멀리에서 떼거리로 몰려오며 목청 높여 합창을 해대는 아이들.


“비뚤아, 부뚤아, 뭐 하아노! 비뜰아, 부뚤아, 날 잡아아라!”

옆으로 나란히 줄을 서서 발을 굴러 박자까지 맞춰가며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아이들은 돌멩이, 꼬챙이, 플라스틱 칼, 에어 건, 또 물딱총에다 요요, 심지어 플라스틱 새총까지 거머쥔 모양이다.

 

(91)“꼼짝 마라!”

스스로도 깜짝 놀랄 명령을 벼락같이 내린 그는, 숨이 깔딱 넘어가게 급한 나머지 옛날 수미 앞에서 으레 하던 절뚝발이 짓도 생략했다.

“훠어이! 훠어이!”

마치 참새떼를 쫓는 것 마냥 회초리를 씽씽 소리나게 휘두르는 그가 무서워진 아이들, 성난 멧돼지같이 돌진하는 그의 서슬에 뿔뿔이 흩어졌다.

“옴마야아-”

달아나는가 싶다가도 되돌아와서 날뛰는 아이들의 극성을 빤히 아는 부뜰이. 열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는 끈질기게 아이들을 쫓는다.

 

(92)“요놈의 짜슥들······ 몬 나오겄나, 문디~ 짜슥들!”

골목골목에 숨어 동정을 살필 아이들의 습관이 머릿속으로 보인다. 상대방이 안심하고 어슬렁거릴 때를 노렸다가 불시에 튀어나올 아이들. 그래서 부뜰이는 오늘따라 안 쓰던 머리를 쓴다. 아이들의 예상을 뒤엎어버린다. 쏜살같이 달려 큰길로 빠져나가 자기네 집 뒤뜰에 간단히 몸을 숨기기.······대숲은 한층 울창해져서 지난 태풍에도 끄떡없이 언덕을 지켜냈다. 방에 들어간 부뜰이는 끈을 하나 찾아 산발한 머리를 대강 쓸어 불끈 묶었다.

해일이 통째로 핥았어도 무사한, 천연기념물 같은 오막살이에서.


(93)“또 왔어!”

아이가 짤막하게 종알거리더니 머리를 팍 숙이고, 파도에 밀려온 조개껍데기 줍기에 정신 팔았던 아이, 아이를 두고서 서편 하늘 구름을 일일이 환상빛깔로 불들이던 햇살, 햇살이 불현듯 작은 그림자 하나를 자갈 위에 뉘고 주춤주춤 늘어뜨려 여인에게로 밀어 보내고.


8. 

(94)수미가 상수와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었던가?

그럼 저 아이는 상수의 딸인가?

“별다방에 별이 떴든갑다.······”

앉은 채 뒷걸음치는 아이에게 입술을 삐뚜름하게 말아 올려 보인 그는, 뒤뚱뒤뚱 오리걸음으로 다가가서 “그런 줄도 모르고, 날마다 보고 싶어스로”를 허공에 싣는다. 아이는 수미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어 머리만 갸우뚱하고, 부뜰이는 머리를 자갈밭에다 거꾸로 처박고서 종아리 알통이 바짝 당기도록 한껏 뻗친 다리사이로 아이와 눈을 맞추며 해죽거려본다.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그랬지만, 눈물은 흘러내릴 길도 없으면서 주책없이 솟아난다.


(95)부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대뜸 그런다.

“닐로 타기서 그런지 참말로 이쁘다.”

한 순간 멍하였다가 예전이나 마찬가지로 닦달을 시작하는 수미.

“사람들이 닐로 미쳤다 카드라, 와 계속 이러고 사노? 와 사는데?”

‘몰라서 묻나?’를 실은 채 거꾸로 올려다보는 부뜰이의 눈길을 저녁놀 바라보는 걸로 간단히 따돌린 그녀가, 이번엔 청문회장에 앉은 것처럼 묻는다.


(96)“그 세월이 얼만데, 이날 이때까지 뭐 한다고 못 뽑혔노? 뭐 했노?”

“용빼는 재주 있나?”

“넌 그런 게 몸에 배였는데 어째 한 번도 티브이에 진출 못했노? 머리에 염색도 하고, 탈색도 좀 시켜보고 그러지.”

잘방이던 바닷물이 수미 눈에 비쳐들었다.

“학은······ 우찌 됐노? 다 놓았나? 아이몬 날아가삤나?”

“차암 나 몬 말리겠네······ 근데 너······ 옛날 그때 일, 생각나나?”

“······”

“내가 자살 기도했던 그 일 말이다.”

“자살은 무신······ 날 피할라고 뛰어내린 거 아니었나?······ 말이 나왔으이 말인데, 너도 참, 내가 그만치 싫고 무섭드나?”

“아니다······ 니가 믿을란가 몰라도, 나는, 정말로 자살할라캤던 기다.”


(97)“참말이가? 니, 와 그랬노?”

“다시 태어날라고······”

“니도 참, 나만큼 별종이네?”

“그것도 모르고 상수가, 닐로······ 날마다, ······니한테 용서를 빌고 싶었다. 나는, 이대로는 몬 산다. 미안해서······”

“니, 그라모, 자살할라꼬 염소 멕이러 댕겼나?”

그녀가 조금 웃는 것 같았다.

“사실은, 너를 피해서 산에 댕긴 거다. 마침 아버지가 염소 가족을 사 오셨길래······”


(98)“내가 무섭드나?”

그녀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나 땜에 학교도 중퇴했드람서? 그 말 듣고 소름끼치더라. 밤마다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와? 꿈속에 내가 나타나서 몬 살그로 하드나?”

뜻밖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미.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수미의 꿈속에 나타났었다는 게 이토록 위로가 될 줄이야······ 부뜰이, 또 그 증세에 시달린다. 가슴이 마구 벌렁벌렁, 벌렁거리는 병이 도진 거다.

상대방 마음풍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미는 자기 할 말만 또박또박,


(99)“하여튼, 무엇이든지 사과 표시를 해야겠는데, 어째야 되는지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수는 다 놨나? 학은······ 그 학은······ 어쨌노 말이다.”

“그게 그리 중요하나?”

그는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걷는다. 그리곤 몸을 획 돌려 그녀가 앉은 곳으로 뽀르르 쫓아가, ‘남철 남성남의 개다리 춤’ 흉내를 내다가 뚝 그친다.

“중요하다. 말해라.”

“자유다. 수를 다 놓든 말든, 학은 언제나 자기 자유대로 훨훨 날아간다. 그게 내 직업이다. 학을 수놓아서 날려 보내는 게 내 평생 직업이란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만 중요하다.”

 

(100)자갈을 툭툭 차면서 부뜰이 구시렁거린다.

“정 그라몬, 그 때 말하재? 다시 태어나스로, 천년만년 알콩달콩 살자카재, 와 십 년이 다된 이 마당에 와서 새삼스레 미안타 카노? 별다방에 별똥별까지 앵기주고······ 하여튼, 됐다 마······ 그 일이 정 미안하몬, 낼 아침에 우리 집에 와라. 너한테 꼭 보여 줄 끼 있다.

기념품, 기념품이라고 해두자. 네가 꼭 와야 되겄다.”


(101)“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일 올라가거든.”

“알아서 해라 고마!”

수미를 그대로 남겨둔 채로 종종걸음 치다가, 그 때 이후로 깊이 넣어두었던 티셔츠를 떠올린 부뜰이. 어디까지나 기념품에 불과하지만, 선물, 그래, 너한테 다른 선물을 하나 해야겠다. 네 결혼선물이든, 네 딸에 대한 선물이든, 어쨌든 나는 너에게 선물을 주리라. 그런데 너는 나한테 무얼 줄래?

 

9.

(102)달라캤재? 가져라. 얼마든지 가져 봐라.

그녀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있다. 다리 두 개가 나란히 학의 날개빛깔을 띄고 눈앞에 있었다. 그는 그녀의 두 다리를 부둥켜안고 열사흘 달 얼굴을 비벼댔다. 그리고 살살 핥기 시작하자 파래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는 파래를 계속 뜯어먹었고, 파래의 싱싱한 향은 어느 결에 입과 콧속에 한가득 찼다가는 조금씩 목구멍으로 꼴딱 꼴딱 넘어갔다.

풀벌레 자지러지는 소리로 그녀가 울고 있다.

 

(103)그런데 없다. 그녀가 남긴 파래향기가 아직도 온 몸에서 풀풀 묻어나고 있는데, 퍼뜩 깨고 보니 그녀가 없다.

“이놈에 기념품이 어데 있더라······ 아, 요기 있네!”

한 십년, 그때 후로 한 번도 빨지 않았던 푸른 줄무늬 티셔츠를 꺼내 입은 그는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방팔방 어디서고 몰려드는 수미의 향기, 그 파래냄새에 온몸이 저릿저릿하였다.

그러나 향기는 있되 몸은 없고, 깊은 밤바다만 서서히 너울을 일으키며 그를 반겨주었다.

  

10.

(104)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세찬 바람에 어지러이 휘몰려 다녔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 오는 걸 무릅쓰고 부뜰이네 집에 도착한 수미는, 획 뒤집히는 우산을 간신히 모아 옆에 세우고 추녀 밑으로 비를 피했다. 그녀 앞에는 창호지가 죄 뚫려 문살이 앙상히 드러난 방문과 녹슨 쇠 문고리가 낯 두껍게 버티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방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풀쩍 열리며 매캐한 흙내와 곰팡내가 엄습했다. 숭숭 뚫린 문구멍 사이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가 있었던 그 냄새들은, 그녀가 문을 열어주기를 학수고대했다는 듯이 덤벼들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 순간, 철벅철벅 뛰는 소리 그 소리에 끼어 시끌벅적한 아우성이 빗줄기 사이사이를 비집으며 쳐들어오고


(105)“바보가 죽었다! 미치갱이가 물에 빠졌다!”

황급히 우산을 집어든 그녀는 조바심치는 마음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그가 몹시 탐을 내던 그녀의 다리가 물이끼색깔 우산 밑에서 갈라도 갈라질 리가 없는 빗줄기를 연신 갈라댔다.

그 날개 활랑 화라랑 펼치며 비상을 꿈꾸는, 오래 움츠렸던 한 마리의 학.

 

(106)“그랬드나? 그거였드나? 네 마음이 그랬드나?”

그 말이 그녀 목젖을 찢고 나와 빗속에 흐느적거렸다. 빗물은 마치 부뜰이의 혓바닥인 듯이 그녀의 다리를 핥고 핥았다. 다리를 달라던 비뚤이의 못 말릴 사랑이, 그녀가 뛰는 발짝마다 빗물이 되어 그녀의 온몸에 뛰어들었다. 그녀의 눈앞을, 짐승처럼 매달려가던 그의 모습이 가로막았다.

매달려, 매달려가면서도 그녀를 걱정하던 짐승같이 순한 그 눈망울이 어질어질 흔들리면서 그녀를 잡아당겼다.


11. 

(107)방파제 끄트머리엔 그가 눈을 꼭 감은 채로 반듯이 누워 있다.

“잘난 고동을 뭐 할끼라고, 당최 안 놔!”

사람들은 비뚤이가 근래에 잘 입던 잿빛 단색 티셔츠가 아닌 옛날의 푸른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도 알아차리지를 못한 채, 그 손이 꽉 붙들고 있는 큼지막한 소라고둥에만 관심을 모았다.

 

(108)온몸에 삐딱 빼딱한 뿔을 달고 있는 놈은, 비뚜름히 닫힌 뚜껑 사이로 수미를 내다보다가 수미가 저를 만지자마자 냉큼 그녀의 손바닥에 안긴다.

그녀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부뜰이의 사랑이 그녀 온몸을 전율처럼 뚫고 지나간다. 같이 죽자고 했던 수미의 말이, 그 사랑이, 그 파래냄새가 겨워 부뜰이가 슬그머니 웃는다. 그녀는 목이 꽉 메인다. 황진이는 죽은 이에게 선물을 얹어 보내서 그 원혼을 달랬지만, 오히려 죽은 이로부터 선물을 받은 그녀.


(109)그녀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별일이네.”

“임자가 따로 있었네······”

대답이라도 하듯이 수미는 손에 쥔 소라고둥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보고 싶었다고, 죽도록 보고 싶었다고 하면서 슬그머니 속살을 뻗었던 놈은, 우산 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흠뻑 젖었다.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젖어서 번들거렸다.

 

12.

(110)“야아가, 비를 철철 맞고 어데 갔다 왔노? 서울에서 전화가 왔던데,”

“누군데요?”

“한상수라 카데? 여자 이름이 원, 별다방 큰아들 이름하고 똑 같더라. 누고? 수놓는 사람이가?”

“엄마도 참, 그 분, 인간문화재인데······ 어머? 그러고 보니 별다방 상수하고 이름이 같네?”

“하여튼, 되기 급한 모양이더라. 어디 출품할 작품 때문이라카든가? 우쨌든 간에, 퍼뜩 아침 묵고 올라가그로 해라. 출셋길이 열린란 갑다.”


(111)“예, 그런데 엄마, 설아는 깼어요?”

“하이고오, 말 마라. 눈뜨자마자 고모 찾아 내라꼬 집안을 발칵 뒤집어놨다 고마. 저거 에미는 완전히 뒷전이고··· 어데서 저런 기 났겄노 말다. 고모 따라서 서울 갈 끼라고 가방 싸고 난리다 고마. 고마마, 네가 조용하이 갈라몬, 첩보작전을 해야겄다.”

“딸 삼아서 데리고 갈까?”

“니 시집 갈 궁리나 해라. 천 날 만 날 들어앉아 수나 놓고 그라지 말고······아이고, 호랑이 제 말 하몬 온다더니······설아 온다······ 성질이 우째 꼭 지 고모 어릴 적 판박이다 마. 조심해야재. 저것도 무신 도깨비에 홀린 거 맹키, 부정부정 산에 올라가 몸을 날리모 우짜노 말이다.”

  

13.

(112)핸드폰을 친 사람은 고향에서 보건소 직원을 하고 있다는 상수였다.

“누님, 내가 누님을 얼마나 좋아했던 지를 아요?”

수틀 앞에서 몸을 일으킨 수미는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하며 방안을 서성인다.

“몇 십 년만의 고백을 할 참이가?”

“우리 딸내미가 뜬금없이 열사흘 달에 대해 질문을 해서······ 부뜰이 생각이 난거요.”

“몇 십 년 만에 전화를 걸어놓고, 흘러간 삼각관계는 뭐 할라고 들추노?”

보조개, 보조개 같은 상처가 동백꽃색깔로 되살아난다.

 

(113)보름달이 이지러지는 모양은 그러하다.

하현달 그믐달을 거치면서 완전히 깜깜해졌다가 다시 또 초승달, 상현달, 그리고 열사흘 달, 보름달이 되어가는데······ 딱 이틀만 여유를 주면 된다.

열사흘, 열사흘달이 완전히 둥글어지려면.


작가의말

길게 잡아보았자 백 살이 고작인 인간으로서는 어림도 할 수 없는 세월동안, 쉼없이 파도에 닦이고 구를 때마다 다른 얼굴의 하늘을 들이마신 것 같은 자갈들이, 태풍에 말끔히 씻긴 몸으로 늦여름 햇살을 받아 알알이 볕꽃을 피워냈다.

그녀는 어른 발걸음으로 오십 발짝쯤 되는 거리에 혼자 떠 있는, 팥고물 콩고물에 찹쌀가루 멥쌀가루를 한 켜씩 깔되 짬짬이 호박오가리도 놓아 푹 찐 시루떡 같은 단층(斷層)의 바위섬에 눈보라처럼 몰려들어 끼룩거리는 갈매기떼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녀석을 모델로 삼았을까? 먹이가 목구멍까지 꽉 차서 꾸역꾸역 넘어올 것 같은데도, 날이면 날마다 다이어트 계획을 다음으로 미룬 채 먹을 일이 생길 때마다 허리 단추를 끌러놓고 덤비는 뚱보처럼 습관적으로 바위틈의 고둥을 찍어 깨뜨리는 저놈?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는 핑계로, 캠핑 장비도, 장비를 살 돈도 없이 바캉스 갈 계획에만 마음이 부푼 게으름뱅이 모양, 뱃속이 텅 비었는데도 열심히 깃만 다듬는 저놈? 밥값에 교통비나 하는 품삯을 받는 족족 건달친구와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 뜬금없이 처자식 생각이 난 날품팔이꾼처럼, 무리 속을 헤집으며 아무나 툭툭 건드려 시비를 걸다가 제풀에 펄쩍펄쩍 뛰는 저놈? 이도 저도 아니면, 혹 바위 맨 꼭대기에 오도카니 앉아 당최 안 어울리는 고독을 씹어대는 저놈인가?

부뜰이는 그녀의 등뒤로 다가갔다. 돌을 집어 바다로 핑하니 던졌다.

···(중략)···

누고?”

이윽고 부뜰이는 제 자갈 밟는 소리에 곡조를 붙이듯이 옆구리를 옆으로 기울인 채 베토벤이라도 된 것처럼 걸었다. 어깨를 바싹 오그리며 숙인 바람에 절로 떨어지는 수미의 긴 머리채 아래로, 부뜰이의 외로운 그림자가 밀려들며 차츰차츰 그녀와 포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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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예문은 내가 가장 공들여 쓴 문장(주영숙, 계간소설가 2005년 봄호, 한국문인협회, p.77. <특집2-내가 가장 공들여 쓴 문장>)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원 제목은 죽어야만 얻을 사랑(주영숙, 나쁜그림, 연인, 2003, pp.99-128.)이고, 그로부터 5년 후에 또 다시 공을 들여 사설시조로 재구성하여 발표(주영숙, 화백문학 2008년 여름호, 화백문학회, pp.262-293. 화백초대작-113수 사설시조미학의 단편소설 뿔과 학 죽어야만 얻을 사랑)하였으며, 그 전문은 위 본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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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뿔과 학-죽어야만 얻을 사랑(113수의 사설시조) 17.03.24 252 2 53쪽
377 [연암편지] 경지에게 답함 1 +2 16.08.05 625 4 2쪽
376 [연암편지] 봄이 오자... +6 16.08.02 695 3 1쪽
375 [연암 시]햇살 16.08.02 709 2 1쪽
374 [연암편지]나날이 방장산을 바라보노라면 16.07.27 631 2 1쪽
373 [연암편지]엄화계에서 +2 16.07.25 655 2 2쪽
372 [연암편지]공주 판관 김응지에게 16.07.21 634 2 3쪽
371 시조론 | 아픔이라는 변주곡 이야기 +4 16.07.03 574 3 43쪽
370 사랑한다, 그 말 한마디 +4 16.07.02 756 4 3쪽
369 즉흥시 16.07.02 647 2 1쪽
368 스캔들 16.07.01 531 2 2쪽
367 새 창세기를 위하여 16.07.01 511 3 1쪽
366 멀어지는 너 16.06.30 1,169 2 1쪽
365 춤추는 돌멩이 16.06.29 426 1 2쪽
364 그건 뜬소문 16.06.29 740 1 1쪽
363 이카로스의 날개 2 16.06.28 452 2 3쪽
362 이카로스의 날개 1 16.06.28 961 3 2쪽
361 김장 16.06.28 450 2 2쪽
360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보리밭 +2 16.06.27 1,202 3 2쪽
359 환청 16.06.26 407 3 1쪽
358 오해 16.06.25 435 2 1쪽
357 키스하고 싶은 여자 +4 16.06.24 587 3 1쪽
356 고백 16.06.23 445 2 2쪽
355 모델 16.06.22 544 2 2쪽
354 은니(銀泥)의 발걸음 16.06.21 620 2 1쪽
353 날개 16.06.20 623 2 1쪽
352 이산가족, 샌드위치맨 16.06.19 394 2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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