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에필로그
프란시아 왕국 남부 네스.
일년내내 따뜻한 날씨로 유명한 곳이었다. 겨울에는 춥지 않고 여름에는 또 덥지 않는 곳이었고, 아름다운 해변가는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었다.
탁탁탁-.
긴 복도를 빠르게 걷고 있었다.
네스의 자랑인 흑룡 기사단의 수장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작 각하!”
문을 벌컥 열고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영웅 바란 단테스에 대하여.
저자 제라르 오베르탕.]
두꺼운 책을 안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의사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주군의 모습에 로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란 단테스 드 네스 공작.
대륙 유일의 펜타 체인의 기사이자 마룡으로부터 대륙을 지켜낸 영웅.
대륙에서 교황과 더불어 가장 추앙받는 존재이자 살아있는 신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
그러나 지금 로빈의 눈앞에 있는 그 영웅은 그저 흔한 귀족 아저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솔직히 좋은 집과 좋은 집무실에 있으니 귀족 아저씨지 그런 배경이 아니라면 동네 한량과 아주 유사한 모습이었다.
“각하.”
“왜?”
“손님 왔습니다.”
“없다고 해.”
귀찮다는 나가라고 손짓을 하고 돌아눕는 바란의 모습에 로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베르탕 백작입니다.”
“뭐?”
세상 귀찮던 몸놀림을 보여주던 바란이 몸을 일으켰다.
“왜 그걸 늦게 말해.”
“아······.”
“이런 중요한 일은 바로 말해야지. 쯧쯧.”
혀를 차며 바란이 로빈 못지않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의 발걸음은 최근 들어 가장 가벼웠고 가장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응접실에 도착한 바란이었다.
“왔는가?!”
바란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 건너편에는 마법사 한명이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이지. 네스라는 천국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지.”
바란이 자리에 앉았다.
“다른 이들은 잘 지내고 있는가?”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라르가 자신이 만났던 옛 동료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었다.
스토벨은 교황의 명령으로 스테노마레를 추격하였고 오랜 추적 끝에 얼마전에 스테노마레를 잡아 교황청으로 귀환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에베르는 프란시아 대사제로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 있는 이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당연하지.”
로빈을 비롯해 게랭, 벤, 가빈은 네스에 정착하여 네스 공작군의 지휘관으로서 복무하고 있었다.
페키르는 뒤늦게 오러 유저가 되어 현재 기사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늦은 나이에 각성한 탓에 대성하기는 어려워도 싱글 체인의 기사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자. 이제 가장 중요한 게 남았군.”
인사말이 오가고 바란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제라르를 보았다.
“너무 급하시군요.”
“급하네. 시간이 없어. 그래 내가 부탁한 물건은 구해왔는가?”
바란의 질문에 제라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란의 얼굴에는 그동안 보지 못한 엄청 화사한 미소가 지어졌다.
“제가 누구입니까? 정말 어렵게 구해왔습니다. 대륙의 모든 연금술사에게 욕 먹을 각오를 하고 구했습니다.”
“오호!”
제라르가 품에서 귀중하게 앰플 하나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검은색 액체는 찰랑거리는 앰플에 바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너무 작은 거 아닌가?”
“비약이지 않습니까? 제작자의 말로는 최소 한달은 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일단 써보시고 괜찮다면 제가 더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바란이 귀중한 보물을 만지듯 앰플을 소중하게 잡았다.
“이게 자금만치 100골드짜리입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지 않은가?”
엄지손가락만한 앰플에 들은 검은 액체의 값이 네스의 집값보다도 비쌌다.
지금 바란에게는 전재산을 주고서라도 구해야만 하는 비약이기도 하였다.
“많은 신경 쓰이신 모양입니다?”
“머리에 물이 닿는게 두려울 정도였네. 아니 바람만 좀 세차게 불어도 머리카락이 우수수하고 빠지네.”
바란이 슬픈 눈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굵고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그 두께가 얇아져 있었다.
입김에도 힘없이 찰랑거렸고, 그중에서도 나약한 존재는 아무런 저항 없이 빠졌다.
“하루에 세 번씩 한 방울을 머리와 두피에 골고루 발라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한 표정에 제라르는 그간 자신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라르가 100골드라는 어마어마한 큰 돈을 들여서 가져온 저 비약은 바로 탈모치료제였다.
* * *
다음날.
“이런! 망할!”
공작의 침실에서는 평소와 듣기 힘든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란 침실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페키르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울 앞에 선 바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공작 각하?”
페키르는 방 안의 공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제라르는 어디 있지?”
“아마 배정된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겁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게 어디이지.”
“그게······.”
쾅-.
방의 위치를 듣자마자 바란의 신형이 바란처럼 밖으로 나갔다.
찰나였지만 조금은 달라진 공작의 외모를 확인한 페키르가 공포스러운 얼굴로 수하를 불렀다.
“당장 기사단장님을 불러와라! 큰일이다!”
* * *
평화로운 네스 공작의 저택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나 실드!”
콰앙-!
다급하게 마법 방패를 만든 제라르가 전해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바닥을 구르기가 무섭게 제라르는 필사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죽여버리겠다!”
그의 앞에는 이성을 잃은 괴물이 날뛰고 있었다.
“공작 각하!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아니! 다 알고 있었어!”
괴물의 몸에서는 엄청난 살기가 제라르에게 날아왔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암살 시도인가?”
“네?”
“쪽팔려서 죽게 할 심산이었지?”
“그럴리가요.”
바란이 가진 위상을 생각하면 제라르와 같은 소심한 인물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바란의 상태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자신이 연금술사한테 사기를 당한 모양이었다.
“제가 당장 그 연금술사를 잡아오겠습니다.”
“닥쳐라.”
바란은 자신의 눈앞에 날리는 소중한 모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햇살이 좋은 봄날 민들레 씨앗이 날리는 듯하였다.
“지금 내 상태가 제대로 보인다면 순순히 내 검에 죽어라.”
제라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봤지만 봤다고 말할 수 없었다.
바란의 이마는 하룻밤 사이에 제라르가 보아도 확실히 넓어져 있었다.
당사자인 바란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어제 제라르가 가져다준 비약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라르 오베르탕 백작.”
바란의 음성은 그 어느때보다 차가웠다.
“네스 공작 암살 사건의 주범으로 즉결심판하겠습니다.”
“공자 각하! 그 무슨!”
“사형이다! 이 새끼야!”
바란의 검에 실린 푸르른 마나가 사납게 아가를 벌리며 제라르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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