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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랑사람의 서재

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277 회
조회수 :
27,360
추천수 :
1,600
글자수 :
1,201,430

작성
20.09.23 12:58
조회
60
추천
4
글자
7쪽

Episode121_더 깊은 내부에서(10)

DUMMY

이제 사루비 혼자 남았다. 이 잠시동안의 적막을 즐기고자 사루비는 문짝에 등을 맞대고 숨을 골랐다. 반대편에서 수시로 쾅쾅소리를 내며 문을 두들겼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이 정도도 고요한 축에 들었다.


주어진 아주 짧은 휴식 속에서 사루비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흡연자였다면 담배라도 필 수 있었을텐데. 말동무가 있다면 폼이라도 잡을 수 있고. 하지만 그에게 남은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쓸모없는 잡생각만이 이 외로운 돌가죽을 달랠 뿐.


오늘 나는 죽을까? 사루비는 생각했다.


...아마 그러겠지. 사루비는 인정했다.


이미 만신창이인 이 몸뚱이로, 저 너머 수많은 적을 홀로 상대한다면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하다. 거기에 등 뒤에서 자신을 치료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도, 제 손으로 떠나보내지 않았던가.


그런 와중에 자기희생이라니, 참 답지않은 짓을 했다 싶었다. 여정을 떠날때만 해도 그는 이럴 작정은 전혀 아니었는데. 하온과 사라 옆에서 지나치게 변질되버린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놈도 약속을 안지켰잖아.”


하온, 이 놈이. 이제 존댓말은 안 쓴다고 해놓고 은근슬쩍 툭 툭 말끝에 요 자를 붙였다. 그 생각을 하니 슬쩍 웃음이 나온다. 그럼 사루비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그 녀석이 뭐라 할 말은 없으리라.


“푸훗...”


물론, 그렇게 따지면 사루비에게도 지키지 않은 약속이 많이 있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제대로 말할 수 없다면 이대로 묻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적은 점차 사그라들고 소음이 주변을 채웠다. 계속 밀어붙이던 문은 이제 깊게 금이 가 파멸을 앞두고 있다.


사루비는 문에서 등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 대면할 이들을 위해 준비하며 서서히 숨을 내뱉었다.


문이 부서진다. 그 단단하던 철판은 이제 산산조각이 나 파편을 흩날리며 문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다. 완전히 뻥 뚫린 입구 너머로 적들이 본 것은 웬 돌가죽 한마리 뿐이다.


사루비는 가슴을 펴고, 꼿꼿이 목을 치켜들며 당당히 적들을 맞았다. 그 앞의 암살단들과 병졸들은 기대했던 빨간 머리와 검은 머리 남녀의 부재에 꽤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들의 놀란 눈빛을 보며 사루비는 어떠한 쾌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을 잔혹하게 유린하고 토막내려 덤벼들겠지만, 그 모든 끔찍한 일도 결국은 암살단의 계획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라는 것이 어쩐지 즐거웠다.


사루비는 이 인간들의 속셈에 휘말리지 않고, 반대로 커다란 엿을 하나 먹여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최후를 받아들이기도 한결 편해질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죽기 직전의 생물이 그 끝에서 모두 느끼게 된다는 최후의 만족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 내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


그래서 손을 뻗고, 어깨를 한껏 펼치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허파에 숨을 한가득 들이쉰 후,


용맹스레 울부짖었다.


하온과 사라에게 받은 또다른 소중한 것 하나, 막말을 내뱉을 권리를 행사하면서.


“모두 덤벼라, 개자식들아—!!!”



***



사루비를, 소중한 친우 하나를 내버린 채, 하온은 사라를 업고는 필사적으로 발을 움직이며 건물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눈물이 차오르고 속이 답답해 숨쉬기 힘들 정도였다.


구멍이 휑히 뚫린 연구소 안의 모습은 초라했다. 분명 이전까지는 드넓은 구조 아래 놀라운 설계를 보여주던 미궁은, 앞면과 뒷면을 잇는 통로가 생겨 속임수가 드러난 순간부턴 그 혼란스런 재치를 모두 잃고 지극히 평범한 건물로 돌아가버렸다.


구멍의 끄트머리에서는 전투의 혼란에 휩싸인 병사들이 뒤엉켜 있었는데, 그들은 지나치게 싸움에 열중한 나머지 바깥으로 달려나간 조그만 인간 하나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서로에게 맹렬히 증오를 투사하는 돌가죽과 인간을 뒤로하고, 하온은 발에 불이 붙도록 다리를 놀렸다.


하지만 하온은 끝까지 미련을 끌어안은 채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각 벽면마다 둥그렇게 난 구멍이 겹쳐지고 겹쳐진 그 끝에, 그들을 위해 문을 틀어막고 굳건히 서있는 사루비가 보였다.


그 문은 곧 반대편에서의 맹렬한 충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고, 적들은 사루비와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이후의 일은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지나간 통로 뒤로 다른 인간과 돌가죽들이 뒤섞여 밀려들어갔기에, 내부의 광경은 모조리 가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루비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하온과 하온의 등에 업힌 사라, 둘 역시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있다.


바깥에 나오자마자 하온은 난잡한 전장을 가로지르며 최대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묵묵히 내달렸다. 그런다고 그를 알아챈 적들이 몰려오는 걸 막을 수는 없대도 말이다.


사라의 몸은 그동안 눈으로 느껴온 것보다 훨씬 가벼웠지만, 그럼에도 하온이 마음껏 내달릴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는 못했다. 오히려 근육이 있으니 같은 키의 평범한 여성보단 무거운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녀를 업고 온 힘으로 뛰려니 이미 한참 전부터 하온은 자신의 지구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무릎은 연속되는 충격에 비명을 지르고 발가락 하나하나가 짙은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그런 고통스런 질주마저 조만간 막히게 생겼다. 그를 둘러싼 무수한 인간들이 시퍼런 눈을 뜨고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돌가죽 역시 마찬가지다. 망할, 연구소까지 도달하는 길에 반역자들은 너무나 많은 주의를 끌어버렸다.


사방 모두가 적, 아군 하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하온은 비틀대는 발을 처절하게 움직여 달렸지만, 그렇다고 포위를 피하기는 역부족이어서, 터질듯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사라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사라는 대체 어떻게 된걸까. 죽었다 하기엔 심장박동이 느껴지고 살았다 하기엔 뒷목에 숨결 하나 닿지 않는다. 대체 왜 그녀가 쓰러진걸까? 하온이 장치를 만졌을 땐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사라··· 일어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포위망은 좁혀진다. 그를 향해 공적을 세우고자 하는 병사들이 몰려와 앞다투어 무기를 들이댄다.


화살비가 내린다. 그의 팔과 어깨, 배에 박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던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러나 이제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라...”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하온은 겨우내 말을 끌어올려 입 밖에 내었다. 이것이 지금 그가 말할 수 있는 마지막 대사란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네가 필요해.”


하온의 혀가 떨리며 만들어낸 음파는 공기를 타고 진동하여 사라의 귀에 들어간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의 한계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제 힘으로 서있을 수 없었으니까.



***


자신이 제 힘으로 서있는지, 아니면 공중에 둥둥 떠있는지도 분간이 안가는 이 기묘한 장소 한복판. 그 가운데에서 새빨간 머리칼을 가진 여인 하나가 어떤 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작가의말

다음 화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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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Episode128_파장(2) +3 20.10.09 44 3 12쪽
127 Episode127_파장(1) +5 20.10.05 59 4 10쪽
126 Episode126_시험기동 +2 20.10.02 52 5 10쪽
125 Episode125_더 깊은 내부에서(14) +2 20.10.01 66 5 11쪽
124 Episode124_더 깊은 내부에서(13) +2 20.09.27 62 4 12쪽
123 Episode123_더 깊은 내부에서(12) +2 20.09.25 56 5 8쪽
122 Episode122_더 깊은 내부에서(11) 20.09.24 56 4 9쪽
» Episode121_더 깊은 내부에서(10) +2 20.09.23 61 4 7쪽
120 Episode120_더 깊은 내부에서(9) +3 20.09.20 56 5 14쪽
119 Episode119_더 깊은 내부에서(8) +3 20.09.17 67 5 16쪽
118 Episode118_더 깊은 내부에서(7) +2 20.09.15 61 5 13쪽
117 Episode117_더 깊은 내부에서(6) +4 20.09.12 59 5 9쪽
116 Episode116_더 깊은 내부에서(5) 20.09.11 95 5 8쪽
115 Episode115_더 깊은 내부에서(4) +4 20.09.09 74 5 9쪽
114 Episode114_더 깊은 내부에서(3) 20.09.06 55 5 11쪽
113 Episode113_더 깊은 내부에서(2) +2 20.09.04 64 6 7쪽
112 Episode112_더 깊은 내부에서(1) +4 20.09.02 65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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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Episode110_대전투(18) +4 20.08.29 60 6 8쪽
109 Episode109_대전투(17) +4 20.08.27 75 6 12쪽
108 Episode108_대전투(16) +4 20.08.23 64 5 8쪽
107 Episode107_대전투(15) +2 20.08.21 63 4 10쪽
106 Episode106_대전투(14) +4 20.08.18 95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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