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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랑사람의 서재

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277 회
조회수 :
27,335
추천수 :
1,600
글자수 :
1,201,430

작성
19.12.26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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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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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글자
21쪽

Episode1 _ 미래의 아이들

DUMMY

지금, 그들은 한 거대한 나라의 왕궁, 그것도 그 중심부의 정문을 후려쳐 아주 개작살을 내놓았다.

24-1.png

이는 국가에 대한 심각한 모욕임과 동시에 크나큰 반역행위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더 달라질 것도 없다. 이미 그들 인생은 끝장이나 마찬가지니까.


성문을 부순 이 무뢰한들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이 나라에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전령들이다. 그리고 그 중요한 기밀문서는 이제 봉인이 다 뜯어진 채로 그들 수중 안에 있다.


하지만 전령이란 자가 성문을 후려칠 괴력은 어디서 났고, 오만상을 찌푸린 이유는 또 무엇이며, 뭘 전해주려면 곱게나 전해줄 것이지 어쩌자고 이 난리를 쳐놓고 있을까?


걱정 말라. 다 설명해주겠다. 이 인간들—인간이 아닌 것 둘을 포함해서—도 딱히 이런 상황을 바란 건 또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 복잡하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이 그들을 내몬 사고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는 그 이후로도 벌어질 수많은 거창하고도 소소한 파문과 변화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야기는 꽤나 길어질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들은 하늘을 등지고 말았다.


그 전에 시점을 한참 전으로 돌려 작은 이야기를 먼저 해두어야겠지.


그건 당연하지만, 이 기구한 전령 일행들—이제부터는 반역자 일행이라 불러야 할—이 어쩌다 이 시점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이다.


말하자면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날이었다.


세상은 평화로웠고 문명은 점점 회복되어 갔으며, 모두가 지난 상처에서 벗어나 점차 희망과 낭만이 보이던 시기.


굳이 꼽자면 북쪽에서 일어난 일련의 반란과 소요상태가 골칫거리라 할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진 나라님이 이를 곧 해결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략 한 사람을 제하고는, 미래에 대해 그리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인 이들은 딱히 없던 시대라는 것이다.


그 때가 멸망이 찾아오기까지 정확히 1년을 남기고 있던 때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원인은 역시 그 누군가가 멸망을 예언한 탓이며, 그 날 왕궁에서 일어났던 시잘것없는 분쟁 역시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쯤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


드넓은 대륙의 중앙부, 그 화려한 도시에서도 가장 높고 뾰족한 곳이 하나 있다.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수많은 보석과 황금이 덕지덕지 붙은 건물 하나.


그 외형에서 미뤄볼 수 있듯이, 그곳은 온 세계의 패자인 나라님이 계신 왕궁이다.


이 광대한 땅을 전부 통틀어 다스리는 그 왕국의 심장부는 그 빛이 무색하게 지금 사소한 신경전 하나로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화두란 어떤 한 사람을 중용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중용할 사람이란 국가의 이인자인 울 대신의 아들이었으며, 나라님과 울 대신은 그를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한쪽은 중용을 권유하고 다른 한쪽은 중용을 반대했는데, 이 신랄한 논의 내지 말싸움이 아직도 이어지는 이유는 다른 신하들이 그들의 신경전에 도무지 끼어들 엄두를 못내는 탓이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국가의 이인자, 최고 권력자중 하나인 울 대신의 아들을 중용하길 막는 간 큰 인간이란, 바로 그의 아비인 울 대신 본인이었던 것이다.


제 아들의 출셋길을 기어코 막겠다는 울의 항의에 신하들은 물론이요 나라님 본인조차 어이가 없어서, 그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말투로 거의 타박하듯이 울에게 외쳤다.


"도무지 자네를 이해할 수가 없네! 응당 부모라면 자식의 출세할 기회를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폐하. 그 아이, 하온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자격은 자네의 아들이란 점에서 있고, 능력은 그 기적을 부리는 재능이 익히 알려져 있네. 헌데 무엇이 그리 문제인가?"


"폐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계속되는 그의 반대에 나라님도 이제는 넌더리가 났는지, 결국 논의를 끝내는 마지막 수단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권위에 기댄 명령이었다.


"됐네. 이번만은 자네의 간언을 들을 순 없어. 무엇보다 그 아이를 보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네. 더 이상의 불만은 듣지 않아! 물러가게!"


끝내 울은 제 패배를 인정하고, 이 더러운 계급구조에 불만을 표하는 마냥 간단히 절을 하고 떠났다. 그의 계급이 조금만 낮았다면 목이 썰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불만이 가득한 몸짓이었다.


이후 그가 알현실을 떠나자마자 주변에서는 울에 대한 온갖 추측과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자기 자식의 출셋길을 막고 있는가?


이전부터 울이 자기 아들과 별로 좋은 부자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소문은 왕왕 돌았으나, 어디까지나 소문이었던 그 의혹이 이번에는 점차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또한 화두는 어느새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대체 어떤 아이길래 울이 그토록 남에게 내세우길 꺼려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어떤 이는 몸이 지극히 병약하다고도 말하고, 어떤 이는 술에 쩔은 망나니라고도 한다. 또 누군가는 애초에 아들이란게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지껄였다. 대략 그 자신이 성불구임을 감추기 위해 지어냈다는 따위의 상스런 소문이다.


그러나 그가 피부가 어둡고 기적에 재능이 있다는 극소수의 정보를 제하고는, 그의 아들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진 자는 없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울은 제 자식을 그 큰 집 안에 가둬두고는 바깥에 내보낼 땐 온갖 수작을 부려 타인과의 접촉을 엄중히 금하기 때문이었다.


숨길수록 알고싶은 것이 사람 마음, 어느새 그의 아들에 대한 소문은 왕궁 전체에 있어 깨나 유명한 대화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울은, 주변의 수군거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제 앞길만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삶을 살아온 방식이었다. 국가의 2인자, 왕의 뒤를 잇는 최고 권력자란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 그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울이 자신의 저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 방에서 한 청년이 넓은 거실로 나와 그를 반가이 맞이했다.


검은 머리에 적당히 큰 키, 순진한 미소와 온화한 분위기. 시원시원한 미남인 이 남자가 바로 그의 아들, 그 무수한 소문의 장본인인 하온이였다.

1-3.png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울은 고개만 슬쩍 끄덕하고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외투를 벗기 위해 그 위의 복대를 풀 뿐이었다.


복대에는 그 가문의 문양인 커다란 흑고래가 화려한 금장으로 박혀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대신들이 찾아오셨어요."


울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고개를 슬쩍 돌려 하온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뻔하지만, 그럼에도 울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더냐?"


"나라님께서 제게 맡길 일이 있으시다고······."


역시나. 그리고 하온의 얼굴은 여느 때와 같이 근심을 찾아볼 수 없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근심이 있는 것은 울의 얼굴 뿐.


"······."


"왜 그러세요? 오늘따라 표정이 어두우신데."


"너는······. 하고 싶으냐?"


하온은 잠깐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딱히 고민이 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요."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하겠지."


울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아들아. 어쩔 수 없구나."


어쩔 수가 있는가. 그가 이 세상의 가장 높은 분인 이상, 나라님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을.



***



마차는 굴러간다. 멋진 장식이 달리고 만듦새 좋은 구조를 가진 커다란 마차. 거기에 그 앞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강인하고 충실한 최고급의 가축, 돌가죽이었다.


그런데 그런 멋진 마차가 웬 한적한 시골구석에 찾아왔다.


도시에서나 볼법한 고급 마차가 시골에 왔으니 순박한 농민들의 시선을 한눈에 끈 것은 당연하다. 곧 마차의 양옆을 둘러싸고 수많은 사람이 입을 벌리며 햐 햐 감탄하고 있었다.


이런 대단한 마차 안에 든 두 사람은 누군가 하니, 그들은 황제가 보낸 그의 가신이며 보통 귀한 손님을 모시러 갈 때 파견되는 이들이다.


평소엔 고급 저택이나 대도시에 가서 손님에게 귀한 대접을 받던 몸들이라 그런지, 이런 촌동네에 파견된 게 다소 불만인 모양이다. 둘 다 인상을 팍 찌푸리고선 불평 중이다.


작게는 '소똥 냄새난다', '품위 없는 곳이다' 부터, 크게는 나랏님이 들었다간 큰코다칠 말까지. 이를테면 이런 불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야."


"또······ 또! 천벌 받을라구."


"나라님은 저기 수도에 계시지 우리 앞엔 안 계셔! 이게 말이 안 된단 말이야, 이런 국가의 중대사에 웬 말뼈다귀 같은 젊고 이름 없는 놈 하나를 데리고 간다는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둘이지."


"더 엄밀히 말해보랴? 떨거지 돌가죽까지 합해서 셋이지!"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가? 나라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어."


"불평 한번 해보자는 거지, 뭐. 다른 멋진 인재들이 많은데 굳이 이 촌동네에서 검증도 안된 어린 것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나? 그 하온이란 놈도 마찬가지야. 뭐 출신은 그래도 훨 낫다지만, 그 정도 나이가 되어서 어디 큰일 할 생각도 없어 뵈고······."


"닥쳐봐, 이 인간아. 이제 다 왔어."


나라님에 대한 불경죄가 도를 넘기 전에 다행히도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변과 어울리는 낡고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여보시오-!!"


가신 한 명이 나와 문을 마구 두들겨댔다. 그 세기를 보니 감정이 실린 게 틀림없다.


그런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그 이름을 크게 불러보아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둘의 짜증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거 놔봐. 문짝을 확 부숴버리게."


"자네 돌았구만. 근데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기도 해."


"누구신데 남의 집 문짝을 부순대요?"


"??"


갑작스럽게 난입한 제 3자에 가신들이 당황했다. 보아하니 집의 주인이 도착한 모양이다.


주인 없는 집에 대고 소리를 지른 게 좀 뻘쭘했던지, 둘은 괜한 역정을 내려고 집주인에게 돌아섰다.


"이보시오, 당신······."


그러나 눈에 들어온 집주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 역정은 잦아들고 소리가 급속히 작아졌다.

사라 이쁜 버전.png

집주인이 무슨 괴물 같은 건 아니었다. 19살의 여성의 나이에 걸맞은 앳된 얼굴엔 쾌활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뒤로 묶은 머리카락은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다만 평범한 사람과 다른 점이라면······.


"미안해요, 장작을 좀 패서 왔거든요."


그 등짝에 쌓인 장작들이 거의 산을 이룰 만큼 높이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1-1.png

***



두 사신은 집주인이 내 온 차를 조용히 마셨다. 그들에게 걸맞지 않는 조촐한 대접이나, 방금의 괴력을 보고나니 왠지 이마저도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라님이 저 같은 시골 농민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건가요?"


가신들이 작고 소극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마 아까의 광경에 잔뜩 쫄은 것 같다.


"···거, 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 아무튼, 자세한 설명은 나라님이 해주실 테니 일단 모셔오라고······."


"그것 참 이상하네, 그럼 알겠습니다. 나라님께서 그러셨다면 제가 할 말이 있나요, 뭐. 갑시다."


참으로 시원하게 이에 응한 집주인은, 곧 옷을 그나마 멋지고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고선 마차에 올라탔다. 이때까지만 해도 매우 짧은 여행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선.


마차를 타고 나가는 젊은 집주인을 본 주변 이웃들은 저마다 축하를 보냈다.


"나라님한테 불려 나갔다고? 이야아, 네가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그래, 내 언젠가 네가 크게 될 줄 알았어!"


"아저씨, 저 무슨 나랏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러자 옆에서 가신들이 참견하길,


"나랏일 하러 가는 거 맞습니다."


이웃들의 무수한 축하와 응원을 뒤로하고, 마차는 길을 떠나 왕궁을 향해갔다.


덜커덩거리는 진동 속에서 여유로이 웃는 집주인과 반대로, 두 가신은 이 순간이 참으로 어색할 뿐이었다.


그 적막을 깨고자 가신 하나가 집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으음, 그러니까, 성함이······."


"사라예요. 굳세게 살아라- 해서 살아라, 살아, 사라. 어머님이 그렇게 지어주셨대요."


"예, 그렇군요. 음, 제가 묻고 싶었던 건, 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세답니까? 아까 그 장작들을 어찌 드셨는지 궁금해서요."


"그거요? 솔직히 말해서 저도 모르겠는데요."


맥 빠지는 대답이다. 가신들은 이 무책임한 대답에 상당히 실망했고, 이를 알아챈 사라가 황급히 말을 붙였다.


"그런데 그런 말은 있었어요. 족보에 적힌 말인데, 대대로 우리 가문에서 태어난 빨간 머리는 힘이 무시무시하게 셌대요."


다소의 담소가 이뤄지는 동안 마차는 순조롭게 왕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왕궁에 도착한 후로 사라는 정신없이 이리 시키는 대로 저리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 했다.


우선 대신들과 비슷하게 화려하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이쪽저쪽 방으로 수시로 옮겨 다니며 신원확인이나 소지품 검사 같은 절차를 밟았다.


또한 여러 가지 속성 예절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하도 신신당부하며 철저히 배워서 이젠 잠꼬대도 인사 자세로 할 것 같았다.


"이제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잘 했어."


어느새 잔뜩 친해진 두 가신이 사라를 칭찬했다.


"나라님 앞에선 절대 뭐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고, 무조건 물어보는 거에만 대답해야 한다. 알았지?"


"곧 나라님이 불러서 저 안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정신 빠짝 차리고. 자! 사탕이다."


"고마워요!"


셋은 서로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곧 두 가신은 헤어질 때가 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작별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나라님의 호출은 긴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사라는 자신의 말동무가 사라진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심심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자신이 앉은 의자 옆에 흑발의 청년이 같이 앉자, 잠깐의 침묵 이후 사라는 무료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걸어봤다.


"성함이?"


"예? 아, 하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는 사라예요. 잘 부탁드려요."


그러곤 또 침묵.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기에, 사라는 애써 질문을 짜내 하온에게 또한번 말을 걸었다.


“뭣때문에 오셨는지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하온은 또다시 솔직히 묻는 말에 대답했고, 대화는 또다시 끊겼다. 이내 자기가 그리 명쾌한 해답을 내어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그가 다시 말을 이음으로써 비로소 사라가 바랬던 긴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실 저도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그저 제 도움이 필요하다길래 온 거거든요.”


둘의 대화는 서로의 친화력에 힘입어 곧 수다로 발전했고, 수다는 친목을 불렀으며, 불과 몇십분이 지나자 하온과 사라는 꼭 십년지기 친구마냥 서로를 막역하게 대하고 있었다.


"너도 열아홉이야? 나랑 동갑이네! 그러면 지금 무슨 일 하고 있어? 귀족이면 대학이라도 다니는건가?"


"...아니. 조금 부끄러운 말이지만, 아무 일도 못 하고 있어. 우리 아버지는 내가 사회에서 뭘 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셔. 혼자선 외출도 못 나가는걸."


"진짜? 세상에, 뭘 그렇게까지 하신대? 과보호하시는 건가?"


"그럼 너는 어떤 일을 하는데?"


"나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에서 밭 갈고 씨 뿌려 수확하고 살았지. 가끔 힘쓰는 일에 나가서 돈도 좀 받고."


"힘쓰는 일에 나간다고? 체격이 그리 근육질 같지는 않은데?"


"그치? 근데 이래뵈도, 힘 하나는 수십 명이 덤벼도 상대도 안 될 만큼 세단 말이야."


그때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리며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안에서는 웅웅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 분께선 부디 들어와 주십시오."



***



나라님의 알현실은 상상도 못 해 본 거대한 넓이와 드높은 천장을 가진 곳이었다. 평생 작은 마을에서 살아온 사라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장식이며 그 웅장함! 정신이 팔린 사라는 하마터면 나라님께 가는 길에서 딴 길로 샐 뻔했다.


방의 끝 중앙에는 나라님이 위엄있는 자세로 왕좌에 앉아있었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사라는 한눈에 그가 나라님임을 알아챌 수 있었는데, 그는 가뜩이나 높은 왕궁의 안에서도 또 가장 높은 계단 위에서 자리를 잡고 홀로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와 하온 둘이 나란히 나라님의 앞에 서자, 그들은 익히 연습한 아까의 인사자세를 취한 뒤 이야기했다.


"저 사라가 준엄하신 나라님을 뵈옵니다."


"저 하온이 자비로우신 나라님을 뵈옵니다."


나라님은 은은히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 옆에서는 국가의 이인자, 하온의 아버지인 울이 불안한 눈치로 하온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다. 자리에 모인 신하들의 시선 역시도 전부 울의 아들인 하온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다들 얼마나 망나니인가, 몸 상태에 하자는 없는가, 뭐 뿔이라도 안달렸나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관찰하고 있었다.


곧 나라님 역시 이를 인지하고는 잠깐 헛기침을 해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고, 이어서 하온과 사라에게 본론을 전하기 시작했다.


"짐이 그대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그대들이 해 주어야 할 큰일이 하나 있어서일세."


그 때 옆에서 신하 한 명이 엄중히 봉해진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왕이 이를 들고 직접 계단을 내려갔으며, 당황한 호위기사의 만류를 뿌리치고는 그의 손으로 하온과 사라에게 이를 건네었다.


"이 상자 안에는 이웃나라인 투르나에 보낼 서신이 들어 있네. 그 내용은 기밀이라 투르나의 나라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열어봐선 안 돼. 그리고 워낙 중요한 문서인지라 오히려 소규모로 은밀히 전해질 필요가 있다네. 그러니 부탁일세. 자네들끼리 이웃나라로 여행객인 척 가서 이 서신을 전해 주게나."


이에 하온이 감사히 받으며 물었다.


"저희들만 가는 것인가요?"


"아닐세. 동행할 것이 하나 더 있지. 순종적인 돌가죽 하나를 자네들에게 주겠네."


갑작스레 주변에서 웅성댐이 조금씩 들렸다. 그러나 돌가죽이 뭔지도 모르는 두 젊은이는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셋이서 가는 것이 좋겠어. 그러면 눈에도 쉽게 띄지 않을 테지... 이제 이 서신을 받게."


그 때 옆에서 조용히 보고 있던 울이 앞으로 나왔다. 또 불만이 있나 싶어 나랏님은 하마터면 짜증을 낼 뻔했으나, 그가 한 행동은 전혀 생각에 없던 의외의 것이었다.


울은 나라님에게 무릎을 꿇더니 짧고 굵은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소신도 이들과 동행하기를 청합니다."


단번에 알현실이 신하들의 웅성댐으로 가득 찼고, 분위기는 갑작스럽게 시끄러워졌다.


이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모두가 어이를 잃었고, 이는 나라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나라님은 말했다.


"자네의 위치는 알고 있겠지, 아닌가 울 대신?"


"잘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나 다음가는 권력자이기에, 나로서는 자네는 유능한 부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큰 세력 탓에 견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네. 난 우리가 서로 이를 잘 알고 또 각자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역시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큰 혼란이 올 것이고, 이로 인해 자네의 정치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위기라는 것도 아는가?"


"예."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말릴 생각이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 갑작스러운 전개에 사라와 하온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라는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자신들과 동행한다는 것에 당황했고, 하온은 제 아버지의 돌발행동에 혹여 자신 탓에 폐를 끼치는게 아닐까 염려되어 속이 탔다.


잠시 어수선한 침묵이 흐른 뒤, 나라님은 한쪽 눈썹을 올리고 가만히 울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자네의 동행을 허가하네."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오늘 생판 처음 만난 남녀가 걸어갈 길고 긴 여정이 이제 그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 세계에 얼마나 커다란 흔적을 남길지, 감이라도 잡은 자는 세상에 단 한 명 밖엔 없을 것이다.


작가의말

처음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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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Episode267_혜성 충돌(6) +2 22.05.18 39 2 8쪽
267 Episode266_혜성 충돌(5) +2 22.05.17 41 2 10쪽
266 Episode265_혜성 충돌(4) 22.05.15 33 2 8쪽
265 Episode264_혜성 충돌(3) 22.05.10 74 2 8쪽
264 Episode263_혜성 충돌(2) 22.05.03 28 2 8쪽
263 Episode262_혜성 충돌(1) +4 22.04.22 43 3 8쪽
262 Episode261_고요한 역습 22.04.20 91 2 9쪽
261 Episode260_미래의 아이들(2) +2 22.04.18 61 2 8쪽
260 Episode259_미래로의 일발(3) +2 22.04.15 26 4 9쪽
259 Episode258_미래로의 일발(2) 22.04.08 43 5 7쪽
258 Episode257_미래로의 일발(1) +2 22.04.05 38 4 9쪽
257 Episode256_최후의 전쟁(5) 22.03.29 34 3 7쪽
256 Episode255_최후의 전쟁(4) +2 22.03.26 52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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