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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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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4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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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아상(阿裳)

DUMMY

“아상(阿裳)! 아상!”


절친 아문의 부름에 깜박 잠이 들었던 아상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맞은편에 앉은 공칠이 아상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 새끼, 이거 몇 잔 마셨다고 벌써 취하냐. 어휴, 탁자에 흘린 침 좀 봐라. 정말 더러워서 못 봐주겠네. 여기요! 걸레 좀 갖다 주세요.”


졸린 눈을 비비던 아상이 공칠을 향해 되는대로 지껄였다.


“취하긴 누가 취해. 인마. 졸려서 그런 거지.”

“아니, 지금이 몇 신 데 졸려. 아직 술시(戌時)도 안 지났어.”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공칠이 너도 나처럼 몇 년 동안 야간 일만 쭉 해봐. 길을 걷다가도 잠이 든다니까.”


옆자리에 앉은 아문이 생선 살을 큼지막하게 뜯어 아상의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힘든 야간 일 그만두고 우리 하오문으로 넘어오라니까. 안 그래도 저번에 문주님하고 네 얘기 했는데 문주님이 너는 그냥 심사도 없이 받아주신대. 그리고 듣자니까 너 이번에 휴가자 명단에서도 빠졌다며? 대체 왜 그딴 대우를 받으면서 혈화문에 있냐구.”


아문의 말에 공칠이 맞장구쳤다.


“진짜? 아상이는 나중에 따로 가는 거 아니었어? 야, 아상, 정말 너만 명단에서 빠진 거야?”


친구들의 호들갑에 아상이 마시던 술그릇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으며 참았던 짜증을 터뜨렸다.


“아니, 시발, 오랜만에 술 마시러 나오라고 불러놓고는 남의 직장사는 왜 그렇게 들먹거리는 거냐? 응? 니들 오늘 나 갈구려고 불렀어?”


아문이 아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게 아니라··· 하나뿐인 절친이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으면서 죽어라, 일만 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러지.”


아문의 말에 공칠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야, 아문. 너 언제는 나보고 하나뿐인 절친이라며?”


아문이 공칠에게 한쪽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너는 잠깐 조용히 좀 하고 있어 봐, 나 오늘 우리 문주님한테 특별 임무 받고 왔으니까.”

“무슨 임무?”

“우리 아상이 하오문으로 데려오는 임무!”


아상이 빈 그릇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씨알도 안 먹히니까, 개소리 그만들 하셔. 나는 죽었다 깨나도 다시는 소매치기 생활로는 안 돌아가.”

“이 새끼, 이거 말하는 거봐라. 소매치기가 어때서? 벌어들이는 수입 대부분이 자기 거고 정해진 근로 시간도 없이 편하게 일하는 데···.”

“웃기고 있네. 상납금 못 채우면 끌려가서 두들겨 맞는 게 자유냐? 응? 그게 자유야? 아문이 너 저번에도 문주한테 얻어터져서 삼일을 집 밖으로 못 나왔잖아. 나 그때 진짜 너 죽은 줄 알았어.”

“아, 그거는 상납금 때문이 아니라 사정이 따로 있었고, 몇 대 안 맞았어.”

“닥치고 술이나 마시자고. 나 모처럼 오늘 하루 월차 낸 거야. 소중한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


공칠이 마른안주를 우적우적 씹으며 아상에게 물었다.


“근데 진짜 아상이 넌 왜 이번 휴가자 명단에서 제외된 거야?”

“제외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나는 장원에 소속되지 않고 따로 출퇴근하는 사람이니까.”

“아···.”


그랬다.

아상은 혈화문 소속이지만 정해진 시간만 나와서 일하는 비상근 근무자였다.

거기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야야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가촌에서 소를 키우며 사시는 아상의 부모님은 아상이 흑도 문파에 가입하는 걸 극구 반대하셨다.

그래서 타협한 게 비상근직이었다.

한데 그건 아상이 갓 성인이 되었을 때 결정한 일이고, 어느덧 이십 대 중반이 된 아상은 더이상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지속할 순 없었다.

친구들 말처럼 그에겐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업을 이어받느냐, 아니면 완전한 혈화문 사람이 되느냐.

아상은 선택해야 했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아상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벌컥벌컥 술잔을 비웠다.


그때 세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는 화정루(花精樓) 안으로 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포 차림의 대한들이 들어왔다.

아상, 아문, 공칠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고개까지 숙였다.

야야장 밑바닥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일종의 공통된 방어기제였다.

마침 주방을 빠져나온 화정루 루주가 다소 경직된 얼굴로 대한들을 맞았다.

대한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대뜸 루주의 멱살을 움켜잡더니 그 상태로 루주와 함께 2층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대한 중 두 놈이 남아 계단 아래를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대장을 따라 2층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루 안 손님들은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아상이 고개를 잔뜩 수그린 상태로 친구들에게 속삭였다.


“저 새끼들 누군데 감히 혈화문 영역에서 행패지?”


아문이 소리 죽여 대답했다.


“고리대금업자들이라 혈화문도 소용없지. 빚 받으러 온 걸 텐데.”

“빚?”

“아니 돈을 빌리려면 혈화문에 빌리지, 왜 저 사람들한테 빌렸대. 저 사람들 소중원 사람들 같은데.”

“사정이 있나 보지. 근데 아문이 너 저 사람들 누군지 알아?”

“잘은 모르고 나도 소문만 들었어. 제갈세가 쪽 사람들인데 거의 원금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이자에 하루라도 연체하면 가족은 물론이고 지인들한테까지 찾아가서 험하게 행패를 부린데.”

“하, 돌로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사채업자 새끼들. 시발, 술맛 다 떨어졌다.”

“그럼, 우리 이만 다른 데로 갈까?”

“그러자.”

“이왕 갈 거면 홍등가로 가자, 오랜만에 여자애들 옆구리에 끼고 공자님 흉내나 내보자.”

“그럴 돈은 있고?”

“나 같은 백수는 없어도 니들은 있잖아.”

“시끄럽고 그냥 가서 해장이나 하자.”


아상 일행은 그렇게 화정루를 빠져나왔다.

한데 녀석들이 화정루 앞 숲길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데, 화정루 입구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도포 차림의 말쑥하게 생긴 서생 하나가 아까 그 제갈세가 사내들에게 양팔이 꺾인 채로 끌려 나오고 있었다.

뭔가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 사내는 동네방네 다 들리게 큰 소리를 바락바락 내질렀다.


“아니, 이보시오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내가 어떻게 그 많은 술을 혼자서 다 마신단 말이오. 여기가 무슨 기루도 아니고, 응? 아니 진짜 이유라도 말해 주시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당장 팔을 놓으라니까! 당신들 이러다 진짜 큰코다칠 수도 있어! 사실 나는 일반 서생이 아니라 혈화문 소속 사람···.”


순간 제갈세가의 우두머리가 솥뚜껑만큼 커다란 주먹을 사내의 복부에 내리꽂았다.

사내가 배를 움켜잡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때 화정루 루주가 밖으로 나왔다.

수염이 송곳처럼 뾰족하고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우두머리 사내가 루주를 향해 이글거리는 안광을 쏘아냈다.

루주가 바들바들 떨리는 음성으로 우두머리를 향해 물었다.


“제, 제갈윤(諸葛輪)님, 그럼 이것으로 이번 달 이자는 해결된 거··· 맞죠?”


제갈윤이라 불린 자가 문득 멀찌감치 서 있는 아상 일행을 의식하고 그들을 돌아봤다.

아상과 친구들이 서둘러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제갈윤이 다시 루주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한 화정루 루주의 뺨을 연거푸 세 차례나 후려갈겼다.


팍, 팍팍!


루주의 입과 뺨이 순식간에 원래 크기의 두 배로 부어올랐다.

제갈윤이 말했다.


“일주일 뒤 다시 올 테니까 그동안 이자를 마련해 놔.”


그가 그리 말하고는 근처에 대기 중이던 인력거 하나를 불러서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내를 태웠다.

제갈세가 사람들이 인력거를 앞뒤로 호위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상이 걸음을 멈추고 아문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끌고 가는 거지?”


아문이 부은 뺨을 부여잡고 가게로 들어가는 화정루 루주를 보면서 대답했다.


“저거 루주가 끌려간 손님한테 자기 빚을 덤탱이 씌운 거 같은데?”

“응?”

“술값으로 덤탱이 씌웠다고.”

“아니, 그러면 돈만 받아내면 되지, 왜 사람을 패고 또 끌고 가기까지 하는데?”

“손님이 지금 돈이 없으니까 집으로 찾아가서 받아내려는 거 아닐까?”

“모양새가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순간 공칠이 무언가 생각난 듯 헉, 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아상과 아문이 동시에 공칠에게 물었다.


“왜?”

“혹시 저거 요즘 야야장 으슥한 곳에서 벌어진다는 그 인신매매 범죄 아냐?”

“인신매매?”

“응, 요새 소중원 그 잔혹동산인가 뭔가 하는 데서 장기매매를 하기 위해 사람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있어. 최근에는 대낮에도 저렇게 대놓고 사람을 잡아간다고 하더라고. 우리집 근처 초소에 있는 무림맹 위사가 동네 사람들한테 조심하라고 말하는 거 들었어.”

“아, 시발. 무서워서 살겠냐?”

“만일 공칠이 네 말이 사실이면 저 새끼들 진짜 막장인데? 게다가 여기는 소중원이 아니라 야야장이잖아. 저거 가만히 놔두면 분명 언젠가 문제가 생길 거야. 그러다 천룡회까지 알게 되면 제갈세가는 끝장나는 거지.”

“천룡회는 회장 선거 때문에 당분간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걸. 제갈세가 놈들은 그 틈을 파고든 걸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르게 산사람 몸에서 장기를 빼내는 상상을 한 아상이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앞으로 휘청휘청 걸어나갔다.

아문이 그 뒤를 따르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아상에게 물었다.


“아상아, 근데 너 저 사람 누군지 몰라?”

“누구?”

“방금 끌려간 사람. 아까 얼핏 자기가 혈화문 사람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나만 들었나?”

“아냐, 나도 들었어.”


아상이 걸음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친구들을 돌아봤다.


“아까 그 인력거에 실려서 끌려간 사람이 자기가 혈화문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응, 그러다 한 대 맞고 쓰러졌잖아. 몰라?”

“엉, 나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공칠이 바닥에 퉤, 침을 뱉으며 말했다.


“우리 그냥 가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혈화문 사칭하는 사람들 옛날부터 많았잖아. 응? 그니까 그냥 잊어버리고 가자. 아상이 너 오늘 월차라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홍등가로 가서 신나게 놀자.”

“그래, 이왕 이리된 거 오늘 술값은 내가 쏜다.”


친구들의 말에 아상도 결국 그런 가보다 싶어 녀석들과 어깨동무하고 홍등가로 향했다.



*



다음 날 오후.


골패방으로 출근하기 전 아상은 혈화문 장원에 들렀다.

매달 있는 영업장 관련 보고 때문이었다.

휘 노인이 휴가를 가서 안 가도 별 탈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잠깐 장원에 얼굴만 비치고 출근할 생각이었다.

한데 오랜만에 들른 장원에 모르는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최근 혈화문에 합류한 무림맹 수사관 임하선과 비룡방 홍금보, 살수 출신 사사키 유이 등은 둘째치고라도 병장기를 휴대한 채 구보를 하고 있는 흑인과 몽고 사내들의 모습은 혈화문 토박이 아상에게조차 무척이나 생소했다.

문주 이지상의 명령에 따라 노예들에게 체력 단련을 시키고 있던 이호가 아상을 발견했다.

이호가 노예들에게 잠깐 휴식을 명한 후 아상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상, 어쩐 일이야? 휴가는?”

“비상근이 무슨 휴가에요.”

“맞다. 하하, 너도 나랑 똑같은 신세지.”

“아니, 이호 아저씨는 상근이면서 왜 못 가셨어요?”

“야, 나까지 휴가를 가면 장원은 누가 지키냐.”


아상이 끄덕이더니 노예들을 눈짓하며 물었다.


“누구예요? 저 사람들?”

“어? 저 녀석들? 이번에 문주님께서 환락시장 가서 사 온 노예들이야.”

“예? 노예요? 헐, 노예들이 왜 일은 안 하고 무장 상태로 구보를 하고 있어요?”

“문주님 지시사항.”

“네?”

“장원을 지키는 임무, 그게 바로 문주님이 저 노예들한테 시킨 일이야.”

“컹, 내 머리가 이상한가? 만일 노예들이 장원을 지키는 척하다가 기회 봐서 내빼면 어쩌려고요?”

“안 그래도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쳐보라고 문주님이 오늘 아침 쟤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셨어, 하하하.”

“······?”

“나도 처음엔 아상, 너처럼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문주님 말을 들어보니까 그분 말씀이 일리가 있더라고.”

“···뭐가요?”

“문주님이 저 녀석들한테 딱 석 달만 여기서 일하면 그 후로는 녀석들한테 자유를 준다고 하셨거든. 그니까 나 같아도 힘들게 도망가지 않을 거 같아.”

“헐······.”

“진짜야, 너 문주님 허튼소리 안 하시는 거 잘 알잖아.”

“그야 그런데··· 워, 진짜 대박. 저 노예들은 완전 복권에 당첨된 거네.”

“그렇지. 하하하, 암튼 아상아. 일 보고 가라. 나 애들 훈련 마무리하고 밥 먹으러 가야겠다.”

“아, 네. 이호 아저씨, 수고하세요.”


본채 건물로 향하는 언덕길에서 아상은 생각했다.

그가 아는 이지상이란 사내는 그전 문주 당홍설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예전에도 가끔 불필요한 허례허식 때문에 당홍설과 가끔 마찰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는 실속파였다.

필요하면 노예들에게 자유도 줘버리는 그런 실속파.

한데 그런 그가 문주 자리에 올랐다.

어쩌면 이번이 아상,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어젯밤 아문과 공칠은 뒤늦은 술자리에서 계속 그렇게 혈화문에 헌신할 거면 최소한 주도적으로 임금 협상이나 다시 해보라고 조언했다.

그때는 그냥 흘러들었지만, 지금은 왠지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노예들에게 저리 잘 해줄 정도면 적어도 자신은 매달 받는 월급에 은자 10냥 정도는 더 얹어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상이 그렇게 작은 꿈을 안고 언덕 끝에 다다를 무렵 식당 방향에서 갑자기 나타난 왕정정이 그를 불러세웠다.


“야, 너. 너 아상이 맞지?”

“네?”

“잠깐 일루와 봐.”


아상이 곧 왕정정을 알아봤다.

야야장 10대 미녀 왕정정을 아상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한데 왕정정은 아상보다 네 살 어렸다.

그런데도 보자마자 반말지거리였다.

살짝 빈정이 상한 아상이 얼굴을 구기며 왕정정에게 다가갔다.

한데 왕정정은 방금 장작 패기를 끝마친 임하선까지 불러서 아상과 하선 두 사람에게 식당 밖 아궁이에 올려진 가마솥을 나르게 했다.

임하선이 왕정정에게 물었다.


“이걸 어디로?”

“연무장으로요. 원래는 주먹밥을 여기서 만들었는데 너무 손이 많이 가서 그냥 노예들한테 알아서 만들어 먹으라고 하려구요.”

“아, 네.”


아상이 조심스럽게 왕정정에게 말했다.


“저기 왕 루주, 나는 지금 본채에 일이 있어서 잠깐 장원을 들른 터라, 문주님 뵙고 바로 출근을 해야 하니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왕정정이 아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뜸 두 사람에게 두꺼운 걸레를 내밀며 말했다.


“하선 씨, 뜨거우니까 손 안 데도록 조심해요. 아상이 너도.”


그러더니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엉덩이를 씰룩이며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임하선이란 자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상에게 말했다.


“나 혼자 들어도 되니까 바쁜 일이 있으면 가보시오.”

“아뇨, 같이 들어요. 딱 봐도 엄청 무거워 보이는 데.”

“하하, 그래 주시면 고맙고.”


두 사람은 뜨거운 가마솥을 양쪽에서 나눠 들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마침 맞은편에서 이지상 문주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상이 지상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지만, 지상은 옆에 나란히 걷고 있던 추문강 외 세 사람과 어떤 심각한 대화를 나누느라 아상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연무장에 도착한 아상은 가마솥을 내려놓은 뒤 이마에 땀을 닦으며 넓적한 바위를 찾아 잠깐 숨을 골랐다.

그때 어디선가 은은한 범종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보니 출근 시간이 임박했다.


“혈화문 사람이세요?”


임하선이 허리에 찬 물통을 꺼내 아상에게 내밀며 물었다.


“네. 저는 골패장 관리인 아상이라고 합니다.”

“저는 임하선입니다. 엊그제 혈화문에 새로 합류했습니다.”

“반갑네요. 한데 제가 지금 너무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그러시죠. 그럼 담에 또 뵙겠습니다.”


임하선과 헤어진 아상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왔다.

기회가 또 있겠지, 라고 애써 자신을 달래며 장원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그런데 한 반 마장쯤 걸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이호가 멀리서 그에게 돌아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아상에게 이호가 말했다.


“문주님이 보자셔. 빨리 본채로 올라가 봐. 골패방엔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내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인데요?”

“나도 몰라, 그냥 빨리 데려오라고만 말씀하셨어.”


본채 전각 앞에 도착한 아상이 대청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와 거의 동시에 아까 보았던 세 명의 남자가 옷깃을 스치며 대청을 빠져나갔다.

대청에 나와 그들을 배웅하던 지상이 아상을 발견하고 말했다.


“야, 아상. 너 왔으면 내 얼굴을 보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

“네? 아, 네.”

“집무실로 가서 기다려. 화장실 좀 들렀다 올 테니.”

“네, 문주님.”


아상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데 안의 분위기가 당홍설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집무실 한쪽에 웬 침상이 놓여 있었고, 중앙에는 큼지막한 대리석 탁자가 문주님 책상과 마주한 채, 여러 개의 가죽 의자 사이로 우람하게 버티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방금까지 피웠던 것으로 보이는 담배꽁초들이 재떨이에 수북하게 꽂혀 있었고, 그 옆으로 기분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 한 대가 황금빛 향로 위에서 천천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상이 바짓자락을 그러쥔 채 구석에 놓인 작은 의자에 가서 앉았다.

얼마 후, 지상이 돌아왔다.

아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상 뒤로 왕정정과 추문강도 들어왔다.

지상이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왕정정에게 홍차를 내오라 시켰다.

지상이 화섭자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아상에게 물었다.


“한 대 피울래?”

“아, 아뇨. 저 담배 안 해요.”

“그랬나?”


지상이 추문강에게 담배를 건네더니 그를 향해 사납게 말했다.


“야, 너, 시발. 그 새끼들이 태백객잔을 노린다고 나한테 미리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니야. 응?”


추문강이 똥 씹은 얼굴로 지상의 시선을 회피했다.

지상은 지금 추문강이 오후에 데리고 나타난 아까 그 세 남자 때문에 뿔이 많이 난 상태였다.

그들은 한때 비룡방 간부 생활을 했던 사내들로 혈화문과 합치자는 추문강의 명을 거슬러 비룡방을 떠나 독립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오늘 지상을 찾아온 이유는 지상에게 자신들의 지분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녀석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소유했던 비룡방 영역을 온전히 혈화문에 넘기는 대신 과거에 죽은 당구가 운영했던 태백객잔의 소유권을 요구했다.

추문강이 시선을 벽으로 향한 채 담배 연기만 연신 뿜어대고 있는데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땀에 흠뻑 젖은 임하선이 들어왔다.

아상의 생각에 그는 또 어디선가 심한 노역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임하선이 구석에 있는 아상에게 아는 척을 하며 가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상이 임하선에게 딱딱하게 물었다.


“야, 임하선. 넌 혼자 일하냐? 어떻게 볼 때마다 땀에 절어 있어?”

“아, 그게 조금 전 집무실로 올라오는 길에 망루 공사하시는 인부들이 잠깐만 도와달라고 해서 가서 돌 좀 나르고 와서 그렇습니다.”

“아니 니가 그걸 왜 도와?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응?”

“······.”

“하하, 미치겠다. 그래, 공사는 어느 정도 진척됐디?”

“그 사람들 말로는 비만 안 오면 앞으로 2, 3일 후엔 완공된답니다.”

왕정정이 찻주전자를 가지고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상이 그녀를 보자 바로 아상에게 말했다.


“아상아. 잠깐 팔선탁 쪽으로 와봐.”


왕정정이 차를 따르고 바로 나가려는 데 지상이 왕정정도 불러세웠다.


“정정이, 너두 거기 앉아.”


지상이 팔선탁 서랍에서 꺼낸 종이를 각각 아상과 왕정정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이게 뭐죠? 문주님?”


지상이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계약서야. 앞으로 소홍루에서 나오는 수익의 3할을 너희가 갖고 운영 방식은 우리 혈화문에 맡기겠다는 계약서. 읽어 보고 자기 이름 옆에 날인 해.”


왕정정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계약서를 차분하게 읽어나갔다.

아상은 지상의 말을 듣고도 영문을 몰라 일단 계약서로 눈을 돌렸다.

한데 신기하게도 문주님의 말처럼 계약서 안에 진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소홍루 루주 자리에 적혀 있었다.

왕정정이 가늘고 기다란 아미를 초승달처럼 둥글게 말아 올리며 지상을 불렀다.


“오라버니!”

“응.”

“한자가 어려운 게 너무 많아요. 오라버니가 대신 읽어줘요.”

“이리 가지고 와. 설명해줄게.”


왕정정이 지상에게 계약서를 건넨 뒤 그의 등에 탄탄한 가슴을 밀착시켰다.

지상이 그녀에게 설명했다.


“네가 이 계약서에 서명하면 너는 루주 자리를 저기 앉아있는 아상한테 넘기는 거야.”

“헐, 말도 안 돼.”

“들어봐. 아상은 너 대신 소홍루를 맡아서 운영하고 기본급 외 운영비와 인건비를 제외한 소홍루 수익의 3할을 받아가는 거지. 근데 그건 정정이 너도 마찬가지야.”

“일 안 하고 3할요?”

“응.”

“왜요?”

“네가 건물주니까.”

“아하. 그럼 나머지 4할은 누가 가져가요?”

“3할은 혈화문이 먹는 거고 1할은 내 거.”

“헐, 나빠요.”

“어쩔 수 없어, 난 혈화문의 문주니까. 야, 아상. 넌 어때?”


아상이 어깨를 들썩이며 콩알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지상에게 대답했다.


“조, 조. 좋아요. 문주님.”

“그래, 너도 이제 큰일 할 때가 됐잖아. 그러니까 한 번 맡아서 잘 해봐. 계약 기간은 5년인데 이후 별문제 없으면 5년씩 연장해줄게. 그사이 돈 모아서 네가 다른 주루 하나 인수하고 거기에 바지사장 꽂아 놔도 되고. 응? 최대한 아상 네 편의 봐줄 테니까, 수익 한번 잘 올려 봐.”

“네, 감사해요. 문주님.”


정정이 지상의 볼을 꼬집었다.


“난 아직 한다고 말 안 했는데.”

“할 거잖아.”

“맞아요.”

“가서 날인 해.”


지상이 추문강을 불렀다.

쓸쓸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추문강이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지상이 말했다.


“태백객잔 줄게.”

“진짜?”

“응, 결국, 그 자식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간섭을 최대한 덜 받는 사업장이잖아. 그래서 외곽에 동떨어져 있는 그 객잔을 원하는 거고.”

“그렇지.”

“알았어. 소유권 완전히 넘겨 줄 테니까 네가 가서 애들한테 말해주고 와.”

“큭, 고맙다, 지상아. 내 체면 살려줘서.”

“알지, 알아. 한데 진짜 이런 건 좀 미리 말을 해주라. 응? 닥쳐서 사람 당황하게 하지 말고.”

“응, 명심할게.”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자, 지상이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아, 배고프다. 식당 가서 밥 먹어야겠다.”


그때 아상이 지상을 조용히 불렀다.


“문주님.”

“응.”

“그게 저··· 어제 좀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무슨 일?”

“어제 제가 친구들과 그 외 소중원 가는 길목에 있는 화정루라는 작은 술집 있잖습니까,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47 jo****
    작성일
    23.10.01 09:57
    No. 1

    이 소설 보고 있으면 무림인 하류인생이 좀 짠하게 보이는거 같아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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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잔혹동산(1) 23.09.04 460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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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원걸영(元傑鈴) 23.09.02 465 9 18쪽
28 능소(凌瀟) 23.08.31 491 10 14쪽
27 천자(天子) 23.08.30 521 9 17쪽
26 이화문(梨花門) 23.08.29 520 8 16쪽
25 노예시장 23.08.28 565 9 17쪽
24 천룡회 회합(2) 23.08.26 544 8 13쪽
23 천룡회 회합(1) 23.08.25 548 10 13쪽
22 당면한 위협 23.08.24 560 9 14쪽
21 문득 깨달은 사실 23.08.23 574 8 14쪽
20 진실을 향한 욕망보다 강한 건 없다 23.08.22 589 8 15쪽
19 혈화문 출판사 23.08.21 601 9 13쪽
18 감금된 자들 23.08.19 632 9 19쪽
17 조홍매(趙红梅) 23.08.18 633 10 15쪽
16 뜻밖의 손님 23.08.17 725 9 16쪽
15 환술의 게이샤 23.08.16 764 9 13쪽
14 진소추의 화섭자 23.08.15 768 12 15쪽
13 백화(白華) 23.08.14 809 10 15쪽
12 혈화문 문주가 되다 23.08.12 848 10 13쪽
11 출소 23.08.11 880 11 16쪽
10 뇌옥 23.08.10 887 12 14쪽
9 난전 23.08.09 923 12 13쪽
8 함정 +2 23.08.09 905 14 14쪽
7 매복 23.08.08 976 12 13쪽
6 대국(對局) 23.08.07 1,108 13 13쪽
5 당구(唐嶇) 23.08.04 1,231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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