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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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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72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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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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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감금된 자들

DUMMY

“그러니까 지금 지상 형님 말씀은 이번에 비룡방과 손을 맞춰본 다음, 어지간히 합이 맞으면 그들과 영구적으로 연합하자는 말씀이죠?”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목청을 높여 물어오는 철두에게 내가 대답했다.


“대충 요지는 맞는데 단어 선택이 잘못됐다.”

“어떤 게요?”

“연합이 아니라 흡수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비룡방을 집어삼키는 거다.”


금파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내가 집무실 안에 있는 금파파와 철두, 휘 노인을 각각 일별한 후 차갑게 대답했다.


“이 늦은 밤 헛소리나 하자고 피곤한 당신들을 여기다 붙잡아 두고 있겠소? 비룡방 쪽에서 먼저 요청이 들어온 거요.”


감기에 걸린 휘 노인이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물었다.


“문주님, 지금 추문강 방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옆 방에 대기 중이요.”

“음, 그렇다면 어차피 이리된 거 당사자를 불러다 놓고 함께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가 철두와 금파파를 돌아봤다.

철두는 입이 이만큼이나 삐져나와 있었지만 금파파는 평소처럼 따듯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내가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 낭하에서 대기 중인 추문강을 데리고 들어왔다.

추문강이 모두를 향해 포권하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금파파가 추문강에게 말했다.


“내가 추문강 당신을 우리 혈화문 집무실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소이다. 하하, 하여간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추문강이 멋쩍은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휘 노인이 추문강을 향해 냉랭히 물었다.


“추 방주. 곤욕스럽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비룡방 상황을 소상히 한번 말해 보시오. 대체 얼마나 상황이 안 좋길래 이리 갑자기 백기 투항을 한다는 것인지, 내 그 경위나 좀 들어봅시다.”


철두가 한쪽 손을 들고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상 형님. 이게 저자의 간계가 아니란 법도 없잖습니까. 게다가 비룡이 이번 일을 허락했을 리가 없습니다. 추문강 저자가 아무리 현 방주의 위치에 있다지만 그는 절대 비룡의 위용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은 지상 형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철두에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지, 암, 알고말고. 철두 네 말대로 만일 비룡이 살아 있다면 오늘 이 자리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거다.”


내 말이 끝나자 철두가 집어 들던 찻잔을 떨어트렸다.

금파파가 소스라치게 놀라 내게 물었다.


“문주, 방금 무어라 하셨소? 혹시 비룡이 죽었다 말씀하셨소?”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옆에 서 있는 추문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추문강이 나와 한 차례 눈을 맞춘 뒤 모두를 향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지상이 한 말이 맞소이다. 우리 비룡방의 전임 방주이신 비룡 홍달(洪達) 형님께서는 폐관 수련 도중 불의한 사고를 당해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하셨소이다.”


철두가 재빨리 물었다.


“설마 주화입마(走火入魔)?”

“그건 아니고, 형님께선 젊은 시절 도가에 잠깐 몸담았던 경험을 토대로 평소 내공 수련시 벽곡(廦穀)을 즐겨 하셨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그 부분이 문제가 됐던 것 같소이다.”


휘 노인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그리 말해도 모르겠소, 사인을 정확히 말해주시오.”


추문강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기도 질식입니다. 사후, 목과 위장에서 단단히 뭉쳐있는 도토리와 나무껍질, 돌조각이 발견됐습니다.”


순간 누군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싸늘히 쳐다보자 집무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누군가 또 웃음을 흘렸다.

추문강이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으로 쩝쩝, 입맛을 다셨다.

내가 잠깐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철두가 뒤따라 나왔다.

우리 둘은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나갔다가 한참 후에야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내가 눈가에 흘린 눈물 자국을 훔치며 빈 찻잔에 뜨거운 차를 채워넣었다.

놀라고 또 황당한 마음에 기침을 멈추지 않던 휘 노인이 손수건에 킁, 하고 코를 풀고는 추문강에게 물었다.


“상황이 얼마나 안 좋소?”


추문강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더니 모두를 향해 말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백석교 사건이 터지기 직전, 우리 비룡방 인원은 상비 인원만 삼백 명을 훌쩍 넘었소. 비상시 운용되는 인원도 백여 명에 달할 정도였소. 한데 나와 간부급들이 무림맹 뇌옥에 갇혀 있을 때, 서쪽 청방(菁幇, 녹림) 놈들이 느닷없이 우리 영업장 여러 곳을 동시 기습했소.”

“비룡방과 청방과는 원래부터 마찰이 있었지 않소?”


추문강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하지만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또 대규모로 쳐들어온 건 처음이었소. 그때 중간급 간부들과 밑바닥 애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소. 그 후유증으로 방을 떠난 이들이 적지 않은데 더 심각한 것은 서쪽 밀림과 연결된 주요 영업장을 잃었다는 거요. 우리의 주 수입원인 밀수 길이 사실상 막혀버렸소.”


내가 차를 홀짝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거기다 최근 동해파 녀석들이 주류 사업 쪽을 치고 들어오면서 그나마 있던 소액 수입원도 무너지기 시작했지.”

“인정하오. 결국,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재정 상황이 극도로 안 좋아졌소. 현재는 애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못 주고 있는 형편이오.”

“아이고.”

“극약 처방으로 야야장 비룡방 본관 건물을 부동산에 내놓았지만, 시세만 떨어지고 있을 뿐 산다는 사람이 없소. 아마 우리와 엮이고 싶지 않아서일테지···.”


추문강의 얘기를 들은 휘 노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그는 혈화문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기에 돈 문제가 절대 남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추문강이 잠깐 말을 끊었다가 내가 건넨 차를 한 잔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긴 싫었소. 정말 끝까지 버텨보려 했소. 비룡 형님만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오시면 남은 애들 데리고 이번 천룡회 회장 선거에 모든 걸 바쳐볼 생각이었소. 하지만··· 그마저도 비룡 형님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소.”


그리 말하고는 추문강이 돌연 내게 무릎을 꿇었다.


“뭐 하냐?”

“며칠 전에 네가 홍금보한테 그랬다며. 천룡회 회장 선거에 기권할 생각이면 너한테 와서 무릎 꿇고 항복하라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애들 전부 없애버리겠다고. 사실 나 그 말 듣고 오늘까지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

“······.”

“그런데 지상아. 하늘이 내게 마지막 기회라도 주려고 한 것인지, 갑자기 그 안개위란 놈이 딱 내 수중에 들어온 거야. 흐, 내가 그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냐?”


날 대신해 철두가 대답했다.


“복수?”


추문강이 끄덕이더니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래. 적어도 우리를 가지고 논 그 새끼. 내 그놈만큼은 반드시 찾아내서 찢어 죽이고, 만일 죽이지 못하면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정말 딱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런데 막상 그리 생각하고 나니까, 만일 내가 죽고 나면 우리 방에 남아 있는 애들, 또 백석교 사건으로 5년 형을 받고 뇌옥에 수감 중인 애들. 갑자기 그 애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야.”

“······.”

“그래서 내가 정말 염치불구하고 오늘 안개위란 놈을 데리고 이지상 너를 찾아온 거다.”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멀리 있는 산사(山寺)에서 장중하고도 웅장한 범종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추문강을 일으켜 자리에 앉힌 후 모두를 향해 말했다.


“사실 내가 전에 홍금보에게 했던 그 말. 그거 빈말이 아니었어. 나는 정말로 천룡회 회장 선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비룡방을 정리하려고 했다. 무력으로 쓸어버리던지, 아니면 달래서 흡수하든지. 딱 그 두 가지 경우의 수만 생각했고, 기존처럼 어설픈 공생 관계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룡방을 정리하고 나면 그때부터 나는 천룡회 회장 선거에만 집중할 생각이었어.”


순간 집무실 안 모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휘 노인이 물었다.


“금파파에게 전해 듣긴 했는데, 문주님, 정말로 이번 천룡회 회장 선거에 나가시는 겁니까?”

“그렇소.”


그때 집무실 안으로 낮에 본 월녀(月女)라는 기녀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금파파가 그것을 받아들고 월녀를 내보낸 뒤 혼잣말하듯 말했다.


“장례식 마지막 날, 천룡회 간부들과 야야장 오대 세력의 수장들이 모두 우리 혈화문 장원에 모이잖아요. 제 생각엔 그때 상장로나 천룡회 회장이 어떤 식으로든 이번 선거에 대해 말을 꺼낼 것 같습니다.”


내가 그 말에 맞장구쳤다.


“내 생각도 그렇소. 좀처럼 만들기 힘든 그 순간을 천룡회 사람들은 결코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오.”


철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추문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지상 형님 생각은 천룡회 회장 선거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비룡방과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다.”

“그럼, 전 지상 형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맙다.”


휘 노인이 곰방대를 재떨이에 내려놓고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저 역시 문주님의 뜻에 찬성합니다.”


옆에 있던 금파파도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 한 마디를 짧게 내뱉었다.


“상동입니다.”


내가 문득 추문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문강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 시간 이후, 내 처우는 온전히 지상 문주에게 맡기겠소. 다만 두 문파가 합쳐진 후에는 우리 애들을 혈화문 사람들과 차별 없이 대우해주면 좋겠소. 그게 내 마지막 바람이오.”


내가 추문강을 향해 끄덕인 뒤, 두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래, 그럼 비룡방과의 합병 건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이제부턴 내가 자네들에게 해줄 말이 있으니 다들 피곤하더라도 조금만 집중해서 들어주길 바라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아니 되네. 명심들 하시게.”


이후 나는 나만 알고 있던 몇 가지 기밀 정보를 부하들과 공유했다.


천룡회 총관 곽규의 죽음.

그 죽음이 아직 외부로 공표되지 않고 있는 사실.

또 곽규가 생전에 내게 했던 말.

왜와 무림맹 일부 세력이 결탁한 사실.

백석교 사건이 있던 날, 나와 능소, 소추를 공격했던 살수들의 예상되는 정체.


딱 이 정도만 언급했는데도 집무실 안의 공기가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 사이에 거침없는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내가 생각해 둔 또다른 계획에 대해서도 말을 꺼냈다.

내 말이 모두 끝나자 철두가 확인 차 물었다.


“그 조홍매란 여인의 남편, 염상 채씨가 엮인 사건을 이용하자고요?”

“응, 아까 낮에 추문강이랑 내가 안개위를 통해 알아낸 진술 중에 유의미한 정보가 하나 있었다. 그게 또 채 씨가 구금돼있는 잔혹동산이랑 연결돼 있어.”


추문강이 번개처럼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아까 안개위가 봤다는 그 새끼손가락 끝에 두 개의 점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찾아내자는 거지?”


그랬다.

안개위는 자신들을 속인 작자들에게서 계획을 전해 듣던 그 순간.

눈이 가려져서 상대의 얼굴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눈가리개 밑으로 드러난 곳으로 상대의 특이한 손가락을 관찰했다.

철두가 말했다.


“새끼손가락 끝에 두 개의 점이 있는 사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서 우리가 만일 그 사람만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번 사건의 모든 전말(顚末)을 한방에 밝혀내는 거지.”


문득 금파파가 물었다.


“그럼 광에 잡아놓은 여자 살수는요? 그 여자 역시 핵심 인물이 아니었나요?”


내가 금파파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아니야, 내 생각엔 그 여자도 안개위랑 별반 차이 없는 소모품일 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여자는 문주님을 공격한 살수잖아요?”

“살수는 개뿔이. 녀석들은 처음부터 버리는 패였어. 단지 시간 끌기용이었다고. 애초에 그 패거리 안엔 내 검을 단 몇 초라도 막아낼 수 있는 녀석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구.”


잠자코 우리 말을 듣고 있던 휘 노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말입니다, 지난 한 달간 우리 혈화문 인근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이 이번 천룡회 회장 선거와 무관치 않은 것 같습니다. 곽규 총관의 죽음까지도요.”


눈을 가느다랗게 뜬 금파파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아마 적의 의도는 생각보다 대단한 게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그냥 단순히 회장 선거 전에 유력 후보 둘의 힘을 빼놓으려고 했을 수도 있죠. 한데 그들이 무심코 던진 돌에 우리 혈화문과 비룡방 사이에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무언가가 터져버린 거에요. 그 덕에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었고요.”


그녀의 말에 추문강이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그 조홍매라는 여자의 남편을 구하는 임무, 내가 지원할게. 아니 지상 문주님, 내가 지원하겠소. 내가 당장에라도 잔혹동산으로 달려가 그 새끼손가락에 점 두 개 있는 놈을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 오겠소.”


내가 추문강을 향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널 보낼 참이었다. 다만, 장례식 끝날 때까지는 참아라. 그때까지 너는 움직여선 안 돼. 적들이 우리가 힘을 합쳤다는 사실을 알아서도 안 되고.”

“응? 그건 또 무슨?”

“차차 설명해주마.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들 숙소로 돌아가서 내일을 대비하도록.”


마침내 긴 회의가 끝났다.

모두가 무거운 얼굴로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



새벽녘 묘시(卯時) 초입.


어디선가 나타난 흑색 무복 차림의 인영이 혈화문 장원 전각 사이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신중한 몸짓으로 어느 전각의 벽을 타고 오른 흑의인은 지붕의 용마루를 뛰어넘어 순식간에 별원(別院) 방향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별원에 있는 한 낡은 창고건물 지붕 위에서 나타난 흑의인은 지붕에 납작 엎드린 자세로 창고 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의 동태를 살폈다.

무사 중 한 사람은 의자에 앉아 쿨쿨 졸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창고건물 앞 공터를 오가며 엉성한 자세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품에서 뭔가를 꺼낸 흑의인이 창고 앞 수풀을 향해 그것을 힘껏 내던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란 무사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수풀 쪽으로 움직였다.


“거, 거기 누구요?”


순간 흑의인이 처마 자락을 붙든 채로 몸을 한 바퀴 뒤집어 창고건물 환풍구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지푸라기가 한가득 쌓여있는 창고 2층 구조물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흑의인은 아래 보이는 창고 내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창고 중앙에 있는 커다란 대들보에는 사무라이 복장의 여자 무인이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또 온몸에 사슬이 칭칭 휘감긴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 옆 2장 거리에는 들것에 실린 채로 전신에 붕대를 두른 환자가 끙, 끙, 거리며 연거푸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 사내의 손과 발에도 어김없이 묵직한 쇠사슬과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딘지 위치를 가늠하기 힘든 곳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 좀 자자, 제발, 응? 그만 좀 끙끙거려, 도대체 몇 시간째 끙끙거리는 거냐구!”


창고 바닥에 있던 지푸라기가 무언가에 의해 치워지더니 작은 쇠창살로 된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자가 구멍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로 신음하고 있는 환자를 향해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야, 이 개새끼야. 제발 잠 좀 자자고!”


그 바람에 대들보에 묶여 있던 여자 사무라이가 잠에서 깨어났다.

한데 여자 사무라이는 눈을 뜨자마자 매우 익숙한 솜씨로 발을 뻗어 바닥의 구멍을 지푸라기로 덮기 시작했다.

구멍 밑에서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유이 아가씨! 잠에서 깼소? 그럼 나랑 잠깐 대화나 나눕시다. 나 저 환자 새끼 때문에 도저히 잠을 못 자겠소.”


여자 사무라이가 짜증 난 듯 재갈 물린 입으로 남자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잘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으나 말의 어조나 여자의 표정으로 보아 어느 나라에서 쓰는 심한 욕 같았다.

남자는 여자가 욕을 하 건 말 건.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지푸라기를 덮고 있는 여자 사무라이의 발을 붙잡으려 시도했다.

남자가 자신의 손을 걷어차는 여자 사무라이의 발을 피해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유이 아가씨. 제발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요. 내가 오늘은 그 이지상이란 놈에 대해 저번에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전부 다 들려주겠소. 이지상, 그놈의 정체는 악귀요. 피를 불러오는 악귀가 아니라, 그야말로 재수가 옴 붙은 악귀란 말이요. 녀석과 함께 있으면 마른 하늘에서도 날벼락이 친다오. 거짓말이 아니오.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여자가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마구마구 내저으며 쇠창살 구멍 안으로 흙무더기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남자는 흙을 먹을지언정 결코 그 시끄러운 입을 다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유이 아가씨. 안타깝지만, 나는 당신과 달리 범죄자가 아니요. 고로 나는 여기에 갇혀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소.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니께선 나와 형제들을 모아놓고 항시 말씀하셨소. 자고로 청렴결백한 사람만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본적이 없소. 듣고있소?”


그때였다.

창고 2층에 숨어있던 흑의인이 남자가 붙잡고 있던 쇠창살 위로 몸을 떨어트렸다.

우연인지, 의도 한 건지 몰라도 흑의인의 발이 쇠창살 밖으로 빠져나온 남자의 손 위에 내려섰다.


“아악, 시발, 이 개새끼야, 지금 무얼 밟고 있어? 아파, 빠, 빠, 빨리 발 좀 치워줘!”


흑의인에게 손가락을 밟힌 남자가 지하에서 고성을 내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흑의인이 발을 들어 남자의 손가락을 놓아 주었다.

한편 여자 사무라이는 갑작스러운 괴한의 출현에 놀라 몸을 잔뜩 움츠린 상태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괴한의 그것에 지지 않았다.

그때 창고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고 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 두 사람이 칼을 빼 들고 창고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런데 흑의인과 정면으로 마주친 무사들이 복면을 벗은 흑의인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고양이 앞에 쥐라도 된 것 마냥 저 자세로 변했다.

무사들이 흑의인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꿀밤 한 대씩을 처맞았다.

흑의인이 그들을 향해 뭐라 한 마디를 내뱉자 두 사람이 즉시 몸을 돌려 창고를 빠져나갔다.

혈화문 문주 이지상이 창고 한켠에 놓인 납작한 의자를 가져와 여자 사무라이와 바닥의 쇠창살 구멍 사이에 자리하고 앉았다.

그가 구멍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이, 두문택(杜文澤). 그간 잘 지냈나? 어째 못 본 사이 말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응? 야, 갑자기 왜 대답이 없어? 두문택, 새 작품 많이 썼어?”


그랬다.

지금 이 창고건물 지하에 갇혀 있는 남자가 바로 ‘과부의 뜨거운 밤’의 작가 두문택이었다.

한데 조금 전까지 미칠 듯 시끄러웠던 두문택은 내가 나타나자 땅속으로 꺼지기라도 한 것 마냥 작은 숨소리조차 내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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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능소(凌瀟) 23.08.31 498 10 14쪽
27 천자(天子) 23.08.30 526 9 17쪽
26 이화문(梨花門) 23.08.29 523 8 16쪽
25 노예시장 23.08.28 573 9 17쪽
24 천룡회 회합(2) 23.08.26 552 8 13쪽
23 천룡회 회합(1) 23.08.25 550 10 13쪽
22 당면한 위협 23.08.24 564 9 14쪽
21 문득 깨달은 사실 23.08.23 578 8 14쪽
20 진실을 향한 욕망보다 강한 건 없다 23.08.22 592 8 15쪽
19 혈화문 출판사 23.08.21 605 9 13쪽
» 감금된 자들 23.08.19 638 9 19쪽
17 조홍매(趙红梅) 23.08.18 640 10 15쪽
16 뜻밖의 손님 23.08.17 731 9 16쪽
15 환술의 게이샤 23.08.16 768 9 13쪽
14 진소추의 화섭자 23.08.15 773 12 15쪽
13 백화(白華) 23.08.14 812 10 15쪽
12 혈화문 문주가 되다 23.08.12 852 10 13쪽
11 출소 23.08.11 884 11 16쪽
10 뇌옥 23.08.10 892 12 14쪽
9 난전 23.08.09 926 12 13쪽
8 함정 +2 23.08.09 909 14 14쪽
7 매복 23.08.08 980 12 13쪽
6 대국(對局) 23.08.07 1,113 13 13쪽
5 당구(唐嶇) 23.08.04 1,237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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