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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조회수 :
45,288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작성
23.08.30 11:09
조회
526
추천
9
글자
17쪽

천자(天子)

DUMMY

특이하게 생긴 적색 궐련을 꼬나문 황건명이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고에 의하면 백화(白華)가 목격된 곳은 여기 대도무문의 북서 관문 용문(龍門)과 돈황(敦煌) 시내, 마지막으로 화염사막(火焰沙漠)으로 향하는 고도(古道) 상이었소.”


추문강이 말했다.


“그럼, 녀석이 벌써 중원을 완전히 빠져나갔다는 소린데···.”


내가 얼음을 동동 띄운 홍차를 한 잔 마시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녀석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기다렸다가 그때 잡으면 돼. 한데 그러려면 그때까진 계속 수배령이 유지돼야 하는데···.”


내가 황건명을 바라보자 그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소. 그리 처리해 두겠소.”


황건명이 지도를 접어 품에 넣더니 이번엔 낯익은 용모파기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그것은 내가 앞서 황건명에게 보낸 서신에 동봉한 것으로 저번 날 나를 습격한 사천화로 위장한 흉수의 것이었다.

황건명이 말했다.


“무림맹에 있는 일반 범죄자들의 자료와 아무리 대조해도 그 전적이 나오지 않길래 혹시나 해서 마교(魔敎) 쪽 인사들 자료를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이자의 행적이 발견됐소.”


나와 추문강이 바싹 긴장한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이자의 이름은 나효(羅梟). 별호는 육각오공(六脚蜈蚣)이고 과거 마교 내 불사련(不死聯)이라는 조직에 간부였소. 그는 오행나이생마장(五行那移生魔障)이라는 고대 술법을 이용해 죽은 자의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산자의 육신에서 영혼을 뽑아내는 기괴한 짓을 하고 다녔소. 녀석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보고된 건 10년 전으로 무림맹 마교척살대(魔敎刺殺隊)에 의해 처단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소. 이 부분은 수정할 예정이요.”


황 대인의 말이 끝나자 몸을 거꾸로 뒤집은 상태로 땅을 기어 다니던 나효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황건명에게 물었다.


“황 대인, 지금 당신 말은 내가 그 나효란 놈의 다리를 잘라냈을 뿐만 아니라 머리통을 가르고 썰기까지 했는데 녀석이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단 소립니까?”

“마교척살대의 자료에 의하면 녀석을 완벽하게 죽이기 위해선 실력 좋은 법사의 술법과 일반 불이 아닌 진기로 만들어낸 생불이 필요하다고 하오. 그러니···.”


추문강이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그럴 가능성은 정말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 적들이 나효를 개인적으로 고용한 게 아니라 아예 마교 세력 전체와 손을 잡았다면 어떡하지?”


끔찍한 얘기였다.

하지만 녀석의 말대로 그럴 가능성은 정말 희박했다.

황건명이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마교는 30년 전 정마대전에서 일부 도망친 잔당을 제외하고 천마 포함 거의 대부분이 절멸했소. 거기다 이번 선거엔 죽은 곽규의 말대로 무림맹 세력이 참여하고 있소. 그러니 마교가 연관됐을 가능성은 0에 가깝소.”


그러더니 황건명은 나효의 용모파기 위로 다시 한 무더기의 종이 뭉치를 올려놨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의 용모파기였다.

나와 추문강은 그것들을 하나씩 집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황건명이 말했다.


“모두가 현무관 4학년생들이오. 정파 쪽에선 이미 현무칠협(炫武七俠)으로 불릴 만큼 현무관 최고의 무공을 보유한 자들이오.”


내가 황건명에게 물었다.


“칠협이라면서 용모파기는 왜 여섯 장뿐입니까?”

“나머지 한 명의 것은 굳이 넣지 않았소. 그 사람은 이미 두 분께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는 이번 천룡회 회장 선거에 후보로도 참여했소.”


추문강이 애꾸 눈썹을 치켜뜨며 대답했다.


“헐, 혹시 상관금천?”

“맞소. 그자가 바로 현무칠협 중 한 명으로 정파에선 그에게 따로 권왕(拳王)이라는 별호를 붙여줄 만큼 권법에 능한 자요.”


내가 깍지낀 손의 손톱을 물어뜯으며 황건명에게 물었다.


“흑도 가문의 사내가 현무관에 가서 권왕이란 별호를 얻을 만큼 유명해졌다. 황 대인, 혹시 상관금천이 어떻게 현무관과 인연을 맺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황 대인이 멀찍이 담배 연기를 뿜어낸 후 내 질문에 대답했다.


“두 분 다 상관금천이 상관세가의 직계가 아닌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거요.”


추문강과 내가 끄덕였다.


“원래 상관금천은 방계 중에서도 아주 먼 집안사람으로 상관금정과는 거의 남이라 해도 무방한 자였소. 한데 상관금천의 집안은 대대로 장손의 명이 짧은 불운을 타고 났소. 해서 상관금천의 부모는 아들이 건강히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가 다섯 살일 때 소림사로 보냈소.”

“······.”

“소림사에서 금천은 뜻밖에도 무공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고 결국 현무관으로 차출되어 오늘날 현무칠협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이요.”


내가 황건명에게 따지듯 물었다.


“내 알기로 현무관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흑도 집안 출신은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상관금천이 그 부분을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지상 문주의 말이 맞소. 해서 나도 그 경위를 꼼꼼히 캐보았는데 상관금천은 일단 아주 어린 나이에 소림사에 입문했고, 또 소림사 주지의 특별 추천이 있어서 그 부분을 통과하였소.”

“······흠.”

“암튼 이 상관금천과 관련한 소식은 금세 상관세가 직계들의 귀에 들어갔고 현 천룡회 회장인 상관금정의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했던 그들은 상관금천을 데려와 가주 자리에 앉혀버리는 아주 과감한 선택을 해버린 것이오.”


내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럼 곽규의 말이 맞긴 맞았군요.”

“그렇소, 모르긴 몰라도 대도무문의 무림맹 세력들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상관금천의 선거를 도울 것이오.”


내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 마디를 튕기고 있는데 황건명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지상 문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갈근은 언제 처리할 참이오?”


황건명은 앞서 내가 보낸 서신을 통해 제갈근이 이번 백석교 사건의 배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잠깐 뜸을 들인 후 질문에 대답했다.


“선거 기간에는 처리할 수 없습니다. 황 대인 당신도 알다시피 천룡회 총관직은 장로들의 추천과 지지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자립니다. 제갈근이 도대체 어떻게 그들의 지지를 얻어냈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지금 제갈근을 손댔다간 장로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추문강이 내 말을 부연했다.


“장로들의 미움을 사면 그 즉시 회장 선거는 물 건너가버리는 거지.”


황건명이 끄덕이며 물었다.


“만일 제갈근이 상관금천을 적극적으로 돕는다면 선거에는 지장이 없겠소?”


내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지금 걱정되는 건 제갈근 하나만이 아닙니다.”


추문강이 누군가의 이름을 짧게 언급했다.


“마츠시타 시하.”


내가 추문강과 황건명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녀 역시 제 걱정거립니다. 나는 아스카 왕국의 공주가 라동해와 갑자기 결혼한 저의도 의심스럽고 또 어떤 식으로든 그녀가 제갈근과 협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건명이 말했다.


“시하 군주가 만일 제갈근과 협력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백석교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었으니, 지상 문주, 당신의 추론이 맞을 거요. 하면 시하 군주와 라동해의 결혼은 우리의 의심을 피하고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위장 결혼일 수도 있겠군.”


내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라동해는 위장 결혼을 대가로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받기로 했을 겁니다.”


순간 뭔가 생각난 듯 추문강이 무거운 어조로 우리에게 물었다.


“만일에 말이야. 상관세가와 제갈근, 마츠시타 시하, 라동해가 모두 한통속이라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나와 황건명 둘 다 안색을 굳히고 입을 다문 채 추문강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대답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그때였다.

갑자기 찻집 지붕 위에서 쉬이이잉- 하는 하나의 부드러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소리였다.

이후 같은 소리가 연속해서 두 번이나 더 들려왔다.

얼마 후 밖에서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들리더니, 곧 들짐승 뿔로 만든 커다란 각궁(角弓)을 멘 사내가 찻집으로 들어와 황건명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대인, 염탐꾼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10장 거리까지 다가와 활을 날려 셋 중 둘을 잡았으나, 둘 다 혀를 깨물고 자결하여 신분을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응, 그만하면 되었네. 하선이 자네, 이쪽으로 와서 이분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하게.”


황 대인이 각궁을 들고 나타난 자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지상 문주, 추 방주. 이 친구는 임하선(林河璇)이라는 무림맹 수사관으로 내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오.”

“임하선입니다.”


나와 추문강은 임하선 수사관과 악수까지 하며 인사를 나눴다.

황건명이 말했다.


“지상 문주, 인제 와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문주께서 보낸 서신을 천상각 안에서 누군가 먼저 열어 보는 불상사가 발생했소.”

“감히 누가 말입니까.”

“나도 모르오. 하지만 이번 일로 적대세력이 이미 천상각 내부까지 깊숙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소.”

“그럼 앞으론 서로 어떻게 연락을···.”

“해서 내가 오늘 부득이 이 친구를 이 자리에 대동한 것이요. 지상 문주, 다소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이 하선이란 친구를 곁에 두고 나와의 연락책으로 활용해 주었으면 좋겠소.”


황건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추문강이 정색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황건명을 노려봤다.

내가 황 대인에게 물었다.


“지금 대인께선 무림맹 사람을 혈화문 내에 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렵겠소?”

“당연히 불가하지요. 내가 지금 당신과 임시로 협력하고 있지만, 엄연히 나와 당신은 속한 세상이 다릅니다.”

“지상 문주, 지금 문주가 어떤 부분을 걱정하고 있는지 내 잘 알고 있소. 내가 그 부분은 최대한 양보할 것이고 또 하선이 이 친구에게도 십분 감안하여 처신하라 명할 것이요.”


추문강이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황건명에게 따지듯 물었다.


“황 대인, 나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기 전에 지상에게 대충 설명을 전해 듣고 왔지만 내 마음속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소.”

“편히 물어보시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에서 성심껏 답해드리리다.”

“황 대인, 황도로 진입하는 아편을 막는 것이 물론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황 대인 당신이 지상과 우리 혈화문을 돕는 데는 뭔가 다른 의도가 좀더 숨어있는 것 같소. 그리고 나는 당장 이 자리서 그게 뭔지 알아야겠소.”


황건명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마 지상 문주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겠군.”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소. 내 답을 드리겠소.”


황건명이 탁자 위에 올려진 용모파기 종이를 치우더니 빈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적어 보였다.

그가 천(天)자를 적은 다음 곧바로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그다음엔 맹(盟)자와 현무관(炫武官)을 연이어 적었다.

추문강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황건명이 적은 글귀의 의미를 정확히 깨달은 내가 황건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순간 임하선이라는 자가 내 앞에 부복하더니 목청 높여 말했다.


“저 임하선. 무림맹에 몸담은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황 대인께 자청하에 이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지상 문주님께서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전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0년을 수사관으로 살아오며 흑도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부합니다. 지상 문주님과 함께하여 알게 될 혈화문의 비밀이나 사정들은 황 대인은 물론이고 무림맹 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내가 잠시 고민 후 임하선에게 말했다.


“그래, 어차피 자네 말고는 마땅한 연락책이 없으니 내 속는 셈 치고 한번 자네를 믿어보겠네. 하지만 만에 하나 자네에게서 어떤 불손한 의도가 느껴지는 날엔 자네가 아무리 황 대인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일세.”

“알겠습니다.”


내가 추문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서 안개위를 데려와.”

“나 황대인 말 아직 이해 못했는데···.”

“나중에 말해 줄 테니 빨리 안개위나 데려와.”


찻집을 빠져나가는 추문강을 보며 황건명이 내게 물었다.


“지상 문주, 서신에 안개위가 혈화문에 입문을 희망한다고 적혀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내가 실소를 터뜨리며 답했다.


“어린놈이 치기로 한 말이지요.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당부를 좀 드리려 했는데 이번에 녀석을 집으로 데려가시면 녀석의 부모에게 안개위를 적어도 한 달은 감금해두라고 이르십시오.”

“음, 꼭 그리하겠소. 하하하.”

“그리고···.”

“말씀하시오.”

“잠깐 이쪽으로.”


내가 으슥한 곳으로 이동해 황건명에게 따로 개인적인 부탁을 했다.

내가 얘기를 끝내자 황건명이 조용히 물었다.


“마심아라면 마영인 대인의 하나뿐인 여식 아니요?”

“맞습니다. 이번 천룡회 선거 운동이 끝날 때까지 그녀를 좀 특별히 보호해주십시오.”

“특별이라면 보통의 수준을 넘어선 보호 말이요?”

“네.”

“그럴 바엔 차라리 혈화문 장원에 들이고 보호하는 게 낫지 않겠소?”


내가 안색을 굳히며 대답했다.


“황 대인, 저는 지금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놓고 그 기준에 맞춰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상관세가나 동해파와의 전면전 말입니다.”


황 대인이 고개를 주억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나도 조금 전 두 사람한테 제갈근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를 물어본 거요. 내가 보기엔 그자가 바로 녀석들의 연결 고리요.”

“무리하더라도 초장에 제갈근을 죽여라, 이 말씀입니까?”

“그렇소, 행여 장로들 때문에 혈화문이 직접 나서기 뭐하면 내가 힘을 빌려줄 수도 있소.”

“일단 고민해보겠습니다.”

“뭐, 지상 문주가 어련히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내 경험상 그런 일은 빨리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효과도 크고 후유증도 적소.”

“···알겠습니다.”

“마심아 건은 내게 전적으로 맡겨두시오. 내 특별한 친구를 그녀에게 붙여 두겠소. 한데 지상 문주···.”

“네, 말씀하시지요.”

“두 사람 퍽 잘 어울리오.”

“마심아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하하, 굳이 변명할 필요 없소. 나갑시다. 저기 안개위가 오는구려.”



*



황건명과 헤어져 장원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집에 가기 싫다며 몸부림치던 안개위를 떠올리며 나는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왕정정이 따듯한 죽 한 그릇을 들고 내 침상 맡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뭐야, 네가 왜 아직도 여깄어?”


왕정정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라버니, 저 갔다가 다시 돌아왔어요. 왜 저번에 말한 거 있죠? 홍금보가 주머니에서 폭죽을 꺼내다가 우리 소홍루 주방을 홀라당 다 태워 먹은 사건.”

“어··· 그래, 기억나. 근데 그게 왜.”

“가봤더니 주방이 그대로예요. 불에 탄 모습 그대로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거예요.”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내가 왕정정에게 물었다.


“야, 그럼 너 그동안 인부들한테 수리도 안 맡기고 여기 있었던 거야?”

“···당연하죠. 저 인부들 연락처도 몰라요.”

“이런 미친.”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빨리 인부들한테 연락해서 우리 소홍루 주방 좀 고쳐줘요.”


그때 이호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데 녀석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이호가 말했다.


“문주님.”

“응, 자넨 또 왜? 무슨 일 있어?”

“저기 식당에 요리사가 한 명도 없어서 근처 밥집에 뭘 시킬까 했는데 우리 장원의 인원이 너무 많아서 한 군데도 감당할 수가 없답니다.”

“뭔 소리야. 다 휴가 떠나고 몇 사람 남지도 않았는데 그게 왜 감당이 안 돼?”

“그게 어제 문주님이랑 추문강님이 데리고 온 노예들이랑 오늘 아침에 다시 돌아온 소홍루 식구들을 다 합치면 벌써 장원에 사람이 백 명에 육박합니다.”

“······.”

“어떡하죠? 휴가자 복귀할 때까지 앞으로 계속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생각도 못 했다.

당장 밥 먹는 게 문제가 될 줄은.

내가 왕정정의 엉덩이를 밀치고 침상을 빠져나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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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잔혹동산(2) 23.09.05 415 7 17쪽
31 잔혹동산(1) 23.09.04 464 9 16쪽
30 아상(阿裳) +1 23.09.04 456 7 23쪽
29 원걸영(元傑鈴) 23.09.02 470 9 18쪽
28 능소(凌瀟) 23.08.31 498 10 14쪽
» 천자(天子) 23.08.30 527 9 17쪽
26 이화문(梨花門) 23.08.29 524 8 16쪽
25 노예시장 23.08.28 574 9 17쪽
24 천룡회 회합(2) 23.08.26 552 8 13쪽
23 천룡회 회합(1) 23.08.25 551 10 13쪽
22 당면한 위협 23.08.24 564 9 14쪽
21 문득 깨달은 사실 23.08.23 578 8 14쪽
20 진실을 향한 욕망보다 강한 건 없다 23.08.22 593 8 15쪽
19 혈화문 출판사 23.08.21 605 9 13쪽
18 감금된 자들 23.08.19 638 9 19쪽
17 조홍매(趙红梅) 23.08.18 641 10 15쪽
16 뜻밖의 손님 23.08.17 732 9 16쪽
15 환술의 게이샤 23.08.16 768 9 13쪽
14 진소추의 화섭자 23.08.15 774 12 15쪽
13 백화(白華) 23.08.14 813 10 15쪽
12 혈화문 문주가 되다 23.08.12 853 10 13쪽
11 출소 23.08.11 884 11 16쪽
10 뇌옥 23.08.10 892 12 14쪽
9 난전 23.08.09 927 12 13쪽
8 함정 +2 23.08.09 909 14 14쪽
7 매복 23.08.08 981 12 13쪽
6 대국(對局) 23.08.07 1,113 13 13쪽
5 당구(唐嶇) 23.08.04 1,238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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