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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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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80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작성
23.08.12 23:05
조회
852
추천
10
글자
13쪽

혈화문 문주가 되다

DUMMY

우리 둘은 중간지점에서 만났다.

추문강이 물었다.


“혹시 담배 있냐?”


나와 추문강은 담배 한 대씩을 나눠 피웠다.

잠시 뒤 추문강이 침묵을 깨고 한탄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무 많이 죽었다.”


내가 녀석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니 때문이지.”

“이 새끼가 또 시비네, 저번에 말했잖아. 먼저 쳐들어온 건 당구였다고.”

“당구가 살수도 고용했냐?”

“그, 그건 천룡회 회장 선거 때문에 미리 고용해 놓은 거였어. 이번 일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고.”


내가 잠시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근데 그 귀면쌍마 중에서 살아남은 놈, 갸 이름이 뭐였지?”

“백마?”

“응, 맞네. 백마. 그 칠현금으로 이상한 거 쏴대던 놈. 너 그 새끼 지금 어딨는지 알지?”

“왜? 죽이게?”

“당연하지. 그 새끼가 당구 죽였다며. 복수는 깔끔하게 해줘야지.”

“혹시 가르쳐 주면 우리 사이의 은원은 사라지냐?”

“사라지겠냐?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갔는데? 그리고 어차피 비룡 새끼 나오면 너 또 우리랑 전쟁 치를 거잖아.”

“야, 인마. 비룡 새끼라니, 감히 우리 전임 방주님한테.”

“시끄럽고, 일단 천룡회 회장 선거 때까지 휴전은 유지해 줄 테니까. 그런 줄이나 알고, 그때까지 목이나 잘 닦고 대기하고 있어.”

“시발 놈이.”

“간다.”


마차를 타고 야야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잠깐 창문을 내리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있는 무림맹 천상각 건물을 올려다봤다.

건너편에 앉은 철두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저 누각이 대충 108층이라던데.”

“그래? 하긴 진짜 높긴 높아 보인다.”


금파파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럽디다. 저 천상각 제일 꼭대기 층에 무림맹주가 사는데 가끔 하늘의 신선이나 선녀들이 내려와 며칠씩 놀다 간다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시커먼 먹장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천상각 꼭대기 층에서 잠시간 눈을 떼지 못했다.



*



출소 후 다음 날 저녁.


낮부터 주룩주룩 내리던 비는 이제는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동반한 거센 폭풍우로 변해있었다.

기름 먹인 흑립(黑笠)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우의도 강한 비바람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나와 철두, 혈화문 부하 셋은 말 위에서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고, 우린 묵묵히 폭풍 속 어딘가를 향해 말을 달려나갔다.


향 한 대 태울 시각이 지난 후.


나와 부하들은 야야장 북동쪽에 자리한 버려진 사찰, 현공사(懸空寺) 앞에 도착했다.

말을 탄 채로 낡고 부서진 산문을 통과해 사찰 안으로 들어섰다.

대웅전 앞 공터에 얼기설기 서 있던 무장한 복면인들이 진홍빛 등롱을 들어 올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무리 안에서 평균 키에 돼지처럼 뚱뚱한 몸집의 사내 하나가 뒤뚱뒤뚱 다가왔다.

그가 내 말의 고삐를 넘겨받더니 포권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지상 부 문주님. 저는 비룡방 3급 무사, 홍금보(洪昑珤)라고 합니다. 저희 방주님께서···.”

“잡소리 집어치우고, 녀석이 지금 어딨는지나 말해라.”


홍금보가 찔끔 놀라는가 싶더니 다시 내 눈치를 보며 주둥이를 나불댔다.


“잠시만요, 지상님.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일을 치르기에 앞서 저희 추 방주님께서 지상님께 꼭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좋아. 해봐.”

“추문강 방주님께서는 오늘 이 자리가 쌍방 합의하에 마련된 자리임을 강조하셨고, 또 본인은 이 결전의 결과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지상님, 인정하십니까?”

“아, 시발. 진짜 추문강 그 새끼다운 짓거리네. 알았어, 인정해. 됐어?”

“네, 헤헤. 자, 이쪽으로 오시죠.”


홍금보란 돼지가 사찰 뒤쪽에 있는 탑림(塔林)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돼지와 비룡방 무리들, 그리고 철두와 부하들을 문밖에 대기시켰다.

철두가 걱정스런 낯으로 내 소맷자락을 붙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으나 내가 애써 차갑게 내쳤다.

내가 불이문(不二門)이란 기울어진 현판이 내걸린 좁은 문을 통과해 탑림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빗소리에 섞인 칠현금 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탑림의 끝자락에 도착하자 드디어 귀면쌍마 중 백마와 마주할 수 있었다.

녀석은 백발의 머리를 허리까지 풀어헤친 채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아내고 있었다.

나를 일별한 녀석이 동생의 관 앞에서 칠현금을 켜기 시작했다.

칠현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뭔지는 몰라도 분위기상 장송곡(葬送曲)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나는 죽은 자에 대한 예를 지키기 위해 녀석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 앞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빗줄기가 조금 잦아들 무렵 마침내 칠현금 위 백마의 손가락이 멈췄다.

백마가 감았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희뿌연 눈동자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섬뜩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두 사람 사이엔 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내가 즉시 쌍검을 뽑아 들고 녀석을 향해 돌진했다.

백마의 칠현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질고 악랄한 곡조를 튕겨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천둥 번개가 번쩍, 번쩍 내리쳤다.



*



약 반 각의 시간이 지난 뒤 핏물을 잔뜩 뒤집어쓴 내가 가죽신을 철퍽이며 불이문을 걸어 나왔다.

철두에게 우의와 바람막이 자락을 넘긴 뒤 깨진 항아리 쪽으로 걸어가 뒤집힌 항아리 뚜껑에 고인 빗물로 얼굴과 머리칼을 씻어냈다.

철두가 물었다.


“형님, 혹시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엉, 이거 내 피 아니야. 무탈해.”

“휴.”


그때 아까 그 돼지 새끼가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기, 지상님.”

“응.”

“저희 방주님께서 일 끝나고 나면 지상님한테 꼭 물어보라고 하신 게 있어서요.”


녀석의 말에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다른 부하에게서 마른 수건을 건네받아 머리를 닦으며 홍금보에게 말했다.


“아, 이 새끼. 진짜 웃긴 놈이네. 뭔데, 말해봐.”

“음, 만일에 말입니다. 아주 만일에 저희 비룡방이 이번 천룡회 회장 선거에 기권한다면 혹시 지상님은 저희 비룡방을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잠깐 생각 후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기권하고 나서 내가 천룡회 회장에 당선되면 그 후 너희를 어찌할 생각인가, 지금 그걸 묻는 거지?”

“네, 맞습니다. 아주 정확합니다. 제가 말주변이 별로 없습니다. 헤헤헤.”


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웃고 있는 홍금보에게 말했다.


“없애버려야지. 한 놈도 남김없이 그 식솔들까지 전부 찾아내서 다 없애버릴 거야. 여자, 갓난아기,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전부 찾아내서 모조리 없애버릴 거야.”

“······.”


내가 식은땀과 함께 통째로 얼어붙은 홍금보 녀석의 손에 은자 덩이를 쥐여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돈으로 쌍둥이 장례나 잘 치러 줘라. 그리고 돌아가면 추문강한테 전해. 똑같은 꼴 당하기 싫으면 기권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정식으로 무릎 꿇고 투항하라고. 알았어?”

“······.”


내가 홍금보의 통통한 볼때기를 툭툭 때려주고는 부하들과 함께 다시 말에 올라탔다.



*



부하들을 먼저 장원으로 돌려보낸 뒤 나는 오래간만에 죽림촌 하숙집을 찾았다.

새벽녘이라 행여 주인집 사람들을 깨울까 싶어 근처에 말을 묶어두고 집 앞으로 흐르는 냇가로 내려갔다.

간밤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꽤 불어난 상태였다.

벌거벗은 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홀로 새벽 수영을 하고 나서 다시 물 밖으로 나왔다.

젖은 옷가지를 챙겨 2층 창문을 통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몸을 닦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 짐을 챙겼다.

사실 오늘이 죽림촌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앞으로 나는 혈화문 장원에서 살아가야 한다.


출소 날 당홍설로부터 문주 자리를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무림맹 치안감 황건명과의 비밀 협상 내용을 문주에게 알린 직후였다.


그날.

천상각 뇌옥에서 출소하기 전날.


나는 황건명과의 마지막 면담자리에서 말했다.



*



“황건명,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나도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말 하시오.”

“7년 후, 혈화문과 혈화문에 속한 모든 식솔들을 전부 무림맹에 가입시켜주시오.”


전혀 예상 못 했다는 듯 황건명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 후 그가 뜨거운 찻물로 얼어붙은 입을 적신 뒤 내게 물었다.


“설사 내가 그것을 약조한다 해도 한평생을 흑도로 살았던 이들이 정파로 넘어와 이곳의 까다로운 규칙들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겠소?”

“그건 나한테 맡기고 댁은 약속만 지켜주면 되오.”

“···좋소. 7년 후, 혈화문의 무림맹 가입을 허락해주겠소. 혈화문에 속한 모든 이를 정파의 식구로 받아들이겠소. 대신, 그 후로는 천룡회와는 더이상 엮여서는 안 되오.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도 아니 되고, 또 불법적인 사업을 해서도 아니 되오.”

“고맙소.”

“아니요, 나를 믿어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소.”


나와 황건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굳게 붙들었다.


그 얘기를 내게서 전해 들은 당홍설은 모든 걸 내 뜻에 맡긴다고 하였다.

다시 만난 그녀는 이미 예전의 당홍설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게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그간 그녀가 죽인 사람들의 원혼이 그녀에게 복수한 것이라 믿었다.

당홍설은 이미 불가로의 출가를 결심한 상태였고 내가 출소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그게 나름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불가로 귀의하면 아편과는 영영 멀어질 터였다.

만일 당홍설이 보고 싶어질 때면 언제든 그녀가 있는 사찰로 찾아가 멀리서라도 그녀를 지켜볼 수 있었다.



*



죽림촌을 떠나 혈화문 장원에 도착했을 때 한 대의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홍설과 시녀 소소가 탄 마차였다.

내가 말에서 내려 마차의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당홍설을 얼싸안았다.

당홍설이 내 품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지상아, 부디 뜻하는 바를 꼭 이루거라. 너무 많은 살생은 피하도록 하고.”

“네, 누님. 누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살아생전 많은 불덕(佛德)을 쌓으시길 바랄게요.”

“오냐, 고맙다. 그리고 또 이 누이의 어깨를 짓눌렀던 이 모든 걸 받아줘서 너무나도 고맙다.”

“아닙니다. 제가 더 고맙죠. 누님이 아니었다면 저희 삼 형제는 그때 그 굴다리 밑에서 굶어 죽었을 거예요. 여지껏 돌봐주신 은혜 정말 감사드립니다. 누님.”


그렇게 당홍설이 혈화문을 떠났다.


점심 무렵 내가 비상소집령을 내려 혈화문에 속한 모든 이를 장원 안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대청 안과 밖을 가득 메운 식구들을 향해 목청 높여 말했다.


“누군가는 벌써 소식을 들었겠지만, 어제 혈화문 문주 당홍설님이 내게 문주 자리를 위임하셨다.”


군중이 잠깐 수군대다 금세 조용해졌다.


“너희도 잘 알다시피 혈화문은 지금 재정 상태나, 인적, 물적 자원 상태까지 상당한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한 이유로 이번에 내 문주 즉위식은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백석교 사건 때 죽은 많은 형제를 위해 앞으로 삼 일간 장례식을 성대히 치를 예정이다. 야야장 사람들한테도 이를 널리 알려서 최대한 많은 손님이 혈화문을 방문하도록 할 것이다.”


내가 금파파가 건넨 차 한잔을 홀짝인 후 말을 이었다.


“성대한 장례식을 통해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도록 할 참이니 너희는 장례식 기간에는 살인이나, 다툼을 일절 멈추고 장례식 손님을 대접하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라. 삼 일 후, 장례식이 끝나면 부상이 심한 자들 순으로 혈화문에 속한 모두에게 10일씩 유급 휴가를 보내주도록 하겠다. 이상이다. 해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혈화문 사람들이 고성을 내질렀다.

누군가가 앞장서 외쳤다.


“와, 와, 와아아아아.”

“새로운 혈화문 문주님 만세!”

“이지상 문주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이 백여 명에 가까운 혈화문 식구들이 합창하듯 만세 삼창을 외쳐댔다.

내가 애써 외면하지 않고 대청 아래로 내려가 식구들 손을 하나하나 붙잡았다.

이번에 가족을 잃은 어떤 이는 품에 꼭 안아 주었다.


그렇게 혈화문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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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화문(梨花門) 23.08.29 524 8 16쪽
25 노예시장 23.08.28 574 9 17쪽
24 천룡회 회합(2) 23.08.26 552 8 13쪽
23 천룡회 회합(1) 23.08.25 550 10 13쪽
22 당면한 위협 23.08.24 564 9 14쪽
21 문득 깨달은 사실 23.08.23 578 8 14쪽
20 진실을 향한 욕망보다 강한 건 없다 23.08.22 593 8 15쪽
19 혈화문 출판사 23.08.21 605 9 13쪽
18 감금된 자들 23.08.19 638 9 19쪽
17 조홍매(趙红梅) 23.08.18 641 10 15쪽
16 뜻밖의 손님 23.08.17 731 9 16쪽
15 환술의 게이샤 23.08.16 768 9 13쪽
14 진소추의 화섭자 23.08.15 773 12 15쪽
13 백화(白華) 23.08.14 813 10 15쪽
» 혈화문 문주가 되다 23.08.12 853 10 13쪽
11 출소 23.08.11 884 11 16쪽
10 뇌옥 23.08.10 892 12 14쪽
9 난전 23.08.09 926 12 13쪽
8 함정 +2 23.08.09 909 14 14쪽
7 매복 23.08.08 981 12 13쪽
6 대국(對局) 23.08.07 1,113 13 13쪽
5 당구(唐嶇) 23.08.04 1,237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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