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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조회수 :
45,387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작성
23.08.02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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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교룡곡(蛟龍谷)

DUMMY

뇌우가 몰아치는 주루 밖으로 나갔다.

평소 같지 않게 머리가 복잡했다.

가장 깔끔한 처리는 목격자 모두를 죽이는 거였다.

여느 때라면 일절 고민도 없이 애들에게 뒤를 맡기고 능소만 챙겨 사라졌을 나였다.

한데··· 내키지 않았다.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목에 걸린 듯했다.

추정컨대 아까 만난 마 대인 때문인 것 같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삶에 지쳐 잠시 잊고 살았던 사부님 무덤 앞에서의 맹세를 떠올렸다.


이번 생에선 제발 착하게 살자.


어쩌면···


마 대인과의 인연을 통해 이 시궁창 같은 흑도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흑도로 살아오며 저질렀던 그 수많은 살인과 지저분한 과거를 지우고 어엿한 사업가로 밝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쁜 여자랑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칼 맞고 죽을 걱정 없이 맘 좋게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돌아보자 철두와 백화가 주루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내가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털고는 백화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현장에서 놓친 목격자는 없었어?”

“한 사람 있었는데, 제가 쫓아가서 죽였습니다.”

“신분은?”

“그게 요새 야야장으로 많이 유입되는 뜨내기 낭인 중 하나같았습니다. 요패도 차지 않았고, 소지품에도 신분을 나타낼만한 물건이 없었습니다.”

“시체는 어딨는데?”

“주루 주방에다 옮겨놨습니다. 그나저나 지상 형님, 벌써 시간이 묘시(卯時)가 다 돼가는데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요?”


철두 역시 백화의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조금 있으면 아침 장사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할 겁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화에게 말했다.


“일단 목격자들 처리는 나한테 맡기고 백화 넌 가서 둘째 좀 데려와. 그 녀석 아마 소홍루 기생 애기(爱琪) 방에서 자고 있을 거야.”

“지상 형님. 굳이 둘째 형님까지 부르실 필요가···.”

“백화야, 내가 언제 네 생각 물었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해.”

“···네, 형님.”


백화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철두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형님, 왜 유독 백화한테만 그리 모질게 구십니까?”

“응? 내가? 언제?”

“방금도··· 아닙니까?”

“그리 보였어?”

“네, 아닙니까?”

“모르겠다. 네 말이 맞을지도. 흠, 일단 그건 다른 날 다시 얘기하고 철두, 넌 마구간으로 가서 마차 하나 끌고 와.”

“크기는 상관없나요?”

“응, 아무거나 가져와. 대신 사람들 눈에 많이 안 띄게만 조심해.”

“네, 알았습니다.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철두가 떠나자 나는 비 내리는 잿빛 거리를 한 차례 돌아본 후 손바닥에 빗물을 받았다.

한 줄기 차가운 진기를 빠르게 운용해 빗물을 특정 모양으로 얼렸다.

원하는 모양, 원하는 개수만큼 무언가가 만들어지자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오대루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포박된 사람들 앞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부하에게 지필묵을 찾아오라 이른 뒤 늙은 루주를 불러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루주는 벌써 지쳐 얼굴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의 늙은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차가운 어조로 노인장에게 말했다.


“지 노인, 구긴 얼굴 좀 펴게나. 내 장담컨대 오늘 자네 부부가 죽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을 걸세.”

“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게 뭐 있는가, 생각을 해보시게. 내가 아무 죄도 없는 자네들을 죽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응? 안 그런가?”

“···마, 맞습니다.”

“그러니 뒤에 있는 사람들도 인상 좀 펴고 나를 향해 한 번 활짝 웃어들 보시게.”


사람들이 처음엔 어색해하더니 내가 칼자루를 매만지자 즉시 억지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때마침 부하가 지필묵을 가지고 돌아왔다.

내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내 부하가 종이를 나눠주면 거기에 자네들의 이름과 신분을 소상히 적어주길 바라네. 그렇게만 해주면 오늘 여기서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쁜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야. 자, 다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는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다 적고 나면 나한테 종이를 제출하게. 제출 시 본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도 같이 내보이도록 하고 말일세.”

“아, 알겠습니다.”


지 노인과 그의 부인이 제일 먼저 내 앞에 도착했다.

나는 종이를 받아 부하에게 건넨 뒤 빗물을 이용해 만들어 두었던 빙침(氷針)을 다짜고짜 두 사람의 명치에 찔러넣었다.

내가 살수를 펼치는 줄 알고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엉덩방아까지 찧어가며 뒤로 나자빠졌다.

내가 그들을 향해 엷게 미소하며 말했다.


“두 사람의 안색을 보니 몸에 안 좋은 기운이 침잠돼 있어 내 보신 차원에서 돈 주고도 못 구할 귀한 생침(生針)을 몸에 꽂아 넣었네.”


놀란 부부가 다급히 서로의 명치를 매만졌다.

내가 할 말을 이어나갔다.


“이 생침은 생사부(生死符)란 것으로 일 년 내내 자네들 건강을 지켜주다 간혹 칠석날(7월 7일) 밤이 되면 몹쓸 발작을 일으켜 사람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네. 물론 확률은 아주 낮네.”

“······.”

“그럼에도 혹시 모르니 매년 칠석날이 되기 전 나를 찾아와 해독약을 받아가면 앞으로 죽을 날까지 큰 걱정 없이 살다 가게 될 것이네. 자, 어떤가? 내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지 않는가?”


지 노인의 늙은 부인이 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했으나 남편의 손에 입이 틀어막혔다.

지 노인이 꾸벅이며 고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좋아, 다음 사람.”


그렇게 목격자들 모두의 가슴에 빙침을 쑤셔 넣었다.

사실 이 빙침은 현명신장(玄冥神掌)의 차가운 진기를 이용해 만든 것인데 지속시간이 반 시진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의심할 리 없었다.

일단 이리 해놓으면, 행여 일이 잘못돼 저들이 무림맹의 심문을 받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해도 쉬이 입을 열 가능성은 희박했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 백화와 철두가 둘째 진소추와 함께 돌아왔다.


나는 백화에게 주루를 정리한 뒤 장원으로 복귀하라 이르고 주방에 있던 시체 한 구와 거의 초주검 상태인 조문락을 데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능소를 업은 소추까지 마차에 오르자 마부석에서 철두가 지붕을 두드리며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지상 형님.”

“교룡곡(蛟龍谷)으로 가자.”


마차 안에서 능소의 혈을 짚어 녀석을 깨웠다.

녀석은 깨어나자마자 내게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그러다 어깨너머로 차갑게 쏘아보는 둘째 소추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천하의 망나니 능소도 둘째 진소추 앞에서는 순한 어린양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을 등에 업고 젖동냥을 해서 키워낸 사람이 바로 소추였다.


소추는 평소처럼 입을 다문 채 긴 침묵을 유지했다.

그의 애인 애기(愛琪) 와 경극이라도 하다 온 것인지 얼굴에는 여자처럼 분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고 입술에도 붉은 연지가 반쯤 칠해져 있었다.

녀석에게서 풍기는 분 냄새가 거슬려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만큼 빗줄기가 거셌다.


얼마 뒤 마차가 교룡곡에 도착했다.

밀림처럼 우거진 숲 곳곳에서 교룡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피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소추가 녀석의 교근사(蛟筋絲)를 이용해 숲 주변에 진(陣)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와 철두, 능소는 시체들을 꺼내 놓고 작업할 준비를 끝마쳤다.

그때 갑자기 재수 없는 일이 터졌다.

죽은 줄 알았던 조문락이 깨어났다.

조문락이 신음하며 말했다.


“혹시 거, 거기··· 혈화문의 지, 지상 부 문주 아니시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문락이 나를 알아봤다.

나는 검을 꺼내려던 움직임을 잠시 거둬들였다.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철두가 칼을 들고 조문락 뒤로 이동하자 내가 얼른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런데 그 순간 능소 새끼가 호리녹적(狐狸綠笛, 피리)으로 조문락을 향해 독침을 발사했다.

까앙― 소리와 함께 내 홍사검의 검날이 녀석의 독침을 튕겨냈다.


“아니, 형님. 그걸 왜 막소? 어차피 처리해야 할 놈 아니요?”

“넌 좀 가만히 닥치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시발.”

“뭐?”

“아니요.”


내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조문락에게 다가갔다.

마비되어 팔, 다리를 전혀 쓸 수 없는 조문락이 고개만 쳐들어 내 발에 머리를 비벼댔다.

그를 내려다보는 동안 머릿속에 ‘착하게 살자’라는 말이 수없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 살려주시오. 부 문주. 내 목숨만 살려주면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제, 제발. 이렇게 비오. 집에 사랑하는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소. 제발, 부 문주. 날 좀 살려주시오. 흑흑흑.”


순간 검집을 빠져나간 홍사검이 조문락의 심장을 꿰뚫었다.

조문락이 일검에 즉사했다.


잠시 뒤 둘째 소추가 진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우리 넷은 마차에서 꺼낸 연장으로 시체를 조각냈다.

교룡들이 고기를 삼켰을 때 목에 걸리지 않도록 뼈까지 아주 잘게 잘게 토막 냈다.

빗속에서 야명주(夜明珠) 하나 밝혀두고 작업을 끝마치기까지 반 시진이 조금 넘게 소요됐다.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고기 조각을 크게 네 덩이로 나눈 뒤 각자가 한 덩이씩 챙겼다.

소추가 설치한 교근사 진 가장자리로 이동하자, 진 밖에서 교룡들이 목을 쭉 뽑은 채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몸집이 가장 큰 놈에게 머리통 두 개를 연달아 던져준 후 나머지는 여기저기 흩뿌렸다.

교룡들은 고기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뼈째로 모두 먹어치웠다.

그렇게 모든 작업이 마무리됐다.

행여 남긴 조각은 없는지 일일이 확인까지 한 뒤 우린 교룡곡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마차에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철두가 노상에서 장사를 준비 중인 만둣국 가게 앞에서 마차를 멈춰 세웠다.

육수 맛이 제법 일품인 노점상이었고 우리 형제들의 단골집이었다.

만둣국이 준비되는 사이 우린 가게 앞 냇가로 내려가 피 묻은 손과 몸을 씻어냈다.

이후 우리는 탁자의 동서남북을 차지하고 앉아 조용히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됐을 때 내가 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애들아, 나 아무래도 혈화문에 몸담을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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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피할 수 없는 전쟁(3) 23.11.13 182 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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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여후의 장례식(2) 23.10.25 265 5 17쪽
72 여후의 장례식(1) 23.10.24 309 5 17쪽
71 야야장 사람들(5) 23.10.22 272 5 16쪽
70 야야장 사람들(4) 23.10.20 256 6 14쪽
69 야야장 사람들(3) 23.10.19 270 5 19쪽
68 야야장 사람들(2) 23.10.17 276 5 14쪽
67 야야장 사람들(1) 23.10.16 262 4 16쪽
66 중간 결산(2) 23.10.15 253 4 15쪽
65 중간 결산(1) 23.10.13 311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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