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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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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10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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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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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피할 수 없는 전쟁(5)

DUMMY

이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고 있다.

선두에는 당지위와 그의 정부 호려가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든 하얗게 얼어붙은 세상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 뒤를 기동우와 칠혈랑 모개 등의 부하들이 따르고 있다.

두 개 조로 나뉜 부하들은 나효가 들어있는 개장과 불에 타 상체만 남게 된 요마를 실은 함거를 끌고 가고 있었고, 가장 후미에는 영수 사요가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묵묵히 횡단하던 중에 하얀 곰 가죽을 뒤집어쓴 호려가 양손을 비비며 당지위에게 물었다.


“가주님,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살을 에는 추위에 호흡이 거칠어진 당지위가 털모자를 고쳐 쓰며 대답했다.


“어디 가긴, 혈화문 장원이지.”


호려가 은근 새침한 투로 물었다.


“저기 가주님, 우리 그냥 거기 말고 근처 아무 데서나 쉬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당지위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호려를 돌아보더니 사박사박 몇 걸음 다가와 그녀의 눈썹에 달라붙은 고드름을 떼어주며 말했다.


“동우 녀석이 말 안 해주디?”

“뭘요?”

“묘강밀림에 있는 지부란 지부는 모조리 불태운 사실을···.”

“네? 왜요?”


당지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몸을 돌려 한 걸음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왜긴, 배수진을 치기 위해서지.”


호려가 황급히 쫓아왔다.


“아니 왜 우리가 배수진을 쳐야 하냐고요.”

“흐흐흐, 내가 무림맹주의 아내를 죽였거든.”


당지위의 말에 호려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짜증 냈다.


“젠장 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하하, 호려야. 이제부터 우리가 몸을 의탁할 곳은 야야장 밖에 없다. 그도 아니라면···.”

“아니라면요?”

“다시 죽음의 땅, 사도(死都)로 돌아가는 수밖에.”

“싫어요! 사도로 돌아갈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내 말이···. 그러니까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나를 따라오너라. 두 시진 내로 혈화문 장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세상이 온통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분간이 안 되는데 그걸 또 어떻게 장담하세요?”

“흐흐, 내겐··· 이게 있으니까. 이 구슬이 길을 밝혀주고 있으니까.”


당지위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소매에서 용심설혼주를 꺼내 보였다.

암청색 그윽한 빛무리에 휘감긴 보주는 전방 어딘가를 향해 한 줄기 휘황찬란한 오색 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한 식경이 더 지난 뒤.


당지위 일행은 한 길 높이의 갈대숲이 펼쳐진 모래사장 앞에 도착했다.

한데 아까 바다에서 불어왔던 그 무시무시한 한파가 갈대로 뒤덮인 해안사구까지 여파를 미쳤는지,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게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사구 뒤편, 나루터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하들이 개장과 함거를 끌고 모래언덕을 넘는 동안 당지위와 호려는 사요와 함께 얼어 죽은 사람들 주변을 거닐었다.

그 수가 족히 일 백은 넘어 보였고, 대부분 일반 평민들이었다.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건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나루터로 들어올 배를 기다리다 참사를 당한 듯했다.

허기진 사요가 군침을 뚝뚝 흘리며 근처에 있던 사람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자, 당지위가 대뜸 노성을 터뜨렸다.

호려가 의아해하며 당지위에게 물었다.


“왜요? 어차피 죽은 사람들이잖아요.”

“시끄러! 사요. 배고프면 저걸 먹어.”


당지위가 관목 숲 앞에 앉은 자세로 죽어 있는 송아지를 가리키자 사요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려 그것을 꿀꺽 집어삼켰다.

마침 모개와 기동우가 개장과 함거를 끌고 두 사람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부하들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모진 세월을 함께한 소중한 부하들이었다.

당지위가 녀석들을 일일이 한 명씩 돌아보며 잠시 휴식을 명령했다.

청방 무사들은 근처 관목 숲 안으로 들어가 삼삼오오 모여서 불을 피웠다.

당지위도 호려와 함께 한 곳에 자리하고 앉아 불길에 잠시 몸을 녹였다.

기동우가 개장 속 얼어붙은 나효의 기척을 살핀 후, 주군에게 다가와 물었다.


“주군.”

“응.”

“나효가 숨을 안 쉬는데요?”

“걱정하지 마. 녀석은 살아 있어.”

“하면···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혈화문이 나올까요?”


당지위가 용심설혼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의 강도를 살피더니 차분히 대답했다.


“한 반 시진이면 될 것 같다.”


그러자 기동우가 잔뜩 불안한 낯으로 물었다.


“주군, 정말로 녀석들이 우리를 손님으로 받아줄까요?”

“당연한 소릴, 왜 쓸데없이 묻는 게냐?”

“그게 아무래도 저는 좀 불안한데···.”


당지위가 모닥불 속에 관목 가지를 분질러 넣으며 대답했다.


“탁단봉의 심장이 우리에게 있는데 무엇이 불안하단 말이냐.”

“그러니까··· 그게. 주군, 정말로 탁단봉이란 놈을 부활시킬 수 있습니까? 요마 상태가 저 지경이 됐는데?”


기동우의 눈이 뚜껑이 없는 함거에 쑤셔박혀 있는 요마에게로 이동했다.

당지위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염려 붙들어 매라. 녀석의 심장만 무사하면 될 일이다. 너는 요마가 행여나 스스로 혈을 풀고 깨는지만 주의해서 살피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소피를 보러 나갔던 호려가 소리 죽여 달려오더니 대뜸 관목들 위로 채찍을 후려쳤다.

당지위와 기동우가 돌아보자 호려가 중지를 자기 입에 가져다 댄 채 두 사람 옆으로 쓰러졌다.

뭔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눈치챈 당지위가 요령을 빠르게 흔들자 사요가 일행의 앞을 방패처럼 틀어막았다.

녀석이 죽은 듯 움직임을 멈추자, 사요의 몸이 일순 단단한 바위처럼 변했다.

부하들 역시 모닥불 위로 빠르게 흙을 쏟아붓고는 잠시간 철저히 기도비닉을 유지했다.

세상이 금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겼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나루터 방향에서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당지위가 눈밭을 슬금슬금 기어올라 사요 옆에 바싹 엎드렸다.

녀석이 반개한 눈으로 전방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순간 하얗게 얼어붙은 나루터에 순백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달빛 아래 드러난 녀석의 정체는 당지위로선 생전 처음 보는 괴수였다.

순백의 미늘로 둘러싸인 그것은 몸집이 성인 남자의 두 배는 되었고, 꽁무니에 가죽 채찍 같은 기다란 꼬리가 달려 있었으며 맹금류의 그것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발톱을 보유하고 있었다.

채찍꼬리를 요리조리 휘두르며 나루터 안으로 들어선 백색 괴수들이 얼어 죽은 사람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너 마리에 불과했던 괴수들은 순식간에 수백, 수천 마리로 불어났다.

녀석들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위험성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괴수들이 사람의 살과 뼈를 이빨로 부숴 먹는 끔찍한 소리가 사요를 자극했는지 녀석이 갑자기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당지위가 조심스럽게 요령을 흔들어 녀석의 살심을 잠재우려 했지만, 왠지 힘에 부쳤다.

급기야 품속에 숨겨놓은 육지를 꺼내 법문을 외우고서야 사요가 몸부림을 멈추고 겨우 잠잠해졌다.


일각이 경과 한 뒤.


주변에 있던 시체를 모두 먹어치운 괴수들이 백색 미늘을 번쩍이며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하강 방향이었다.

녀석들이 얼어붙은 서하강을 이용해 북쪽으로 쭉쭉 올라갔다.

수십 장 폭의 강을 완전히 뒤덮을 만큼 그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기동우와 호려, 모개가 땅을 기어 당지위 곁으로 모여들었다.

괴수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당지위에게 기동우가 물었다.


“시발, 저것들은 또 뭐죠?”


당지위가 침음하며 대답했다.


“···마교.”

“네?”

“천마가 우리 예상보다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그럼 어쪄죠?”

“어쩌긴 뭘 어떡해. 우리는 계획대로 혈화문으로 가야지.”

“만일 저 괴수들이 길목을 가로막고 있으면요?”

“···뚫고 가야지.”


기동우와 모개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마주쳤다.

당지위가 나효가 든 개장과 요마가 든 함거를 밧줄을 이용해 사요의 등에 묶게 한 뒤, 비교적 나이가 어린 부하들을 사요에 올라타게 했다.

그가 사요의 목에 밧줄을 친친 두르더니 그것을 고삐처럼 붙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려와 모개, 기동우, 나머지 부하들이 툴툴거리면서도 느릿느릿 주군의 뒤를 따랐다.



*



2백여 남짓한 혈화문 무사들이나 천여 명의 황군 병사들이나 그 근본은 무림인이다.

때문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마교 괴수들과의 전투는 초장부터 그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혈화문 사수를 책임진 육손은 그 부분이 가장 걱정이었다.

아직 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병사들의 예봉이 심히 꺾여 있었다.

사기를 끌어 올릴만한 마땅한 수단이 보이지 않았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육손은 입술을 깨문 채 무사들과 함께 수문장 이호가 있는 장원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첫 전투는 북쪽 망루와 인접한 담장 밖에서 이뤄졌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염방의 방주 종조용과 부하들은 올라가 있던 축대 너머에서 땅의 진동을 느낀 순간 바로 몸을 돌려 담장 쪽으로 도망쳤다.

북쪽 망루에서도 이상을 감지한 궁수들이 시위에 활을 먹인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2장 폭의 해자를 단숨에 뛰어넘은 염방의 무사들이 담벼락 아래로 내려뜨린 밧줄을 붙잡고 담장을 오르던 순간 갑자기 해자와 인접한 땅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파헤쳐진 땅속에서 마치 불에 그을린 듯 온몸이 검게 물든 강시들이 튀어나오더니 신공을 펼쳐 담벼락을 오르던 염방 무사들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담장 위에서 밧줄을 끌어 올리던 병사들은 순간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활을 쏘자니 아군이 맞을 것 같고, 창으로 찌르자니 거리가 애매했다.

강시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염방 무사들의 머리를 뽑아 버리거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녀석들에게 몸뚱이의 단 한 군데라도 붙잡힌 무사들은 강시들을 끝내 떼어내지 못하고 3장 아래 해자 밑으로 추락했다.

선두로 담장 위로 올라와 있던 종조용이 병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부하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해자를 향해 뛰어내렸다.

순간 어디선가 ‘자리 지켜!! 있는 자리에서 절대 벗어나지 마!!’라는 거센 외침이 들려왔다.

담장 위 무사들이 빠르게 진용을 수습한 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땐 종조용과 그의 부하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아군이 더이상 보이지 않자, 북쪽 망루에서 강시들을 향해 화살을 발사했다.

시체조각들을 한 아름씩 안아 든 강시들이 순식간에 땅굴 속으로 도주했다.

녀석들이 사라지고 난 뒤, 해자에는 시뻘건 핏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웅덩이만이 차가운 대기를 향해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북쪽 망루 쪽 상황이 육손에게 전해질 무렵, 벽력뇌화탄을 장원 곳곳에 배치하러 떠났던 철두와 강군, 하선과 황군 장교 일행이 돌아왔다.

하선은 부하가 챙겨 준 각궁을 메고 대기 중인 궁화단 무사 삼십 인과 함께 남쪽 망루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막 장원으로 복귀한 하오문 문주 봉비호와 합류했다.

육손이 빠르게 철두와 강서준 장교에게 상황을 설명하려던 순간.

뭔가가 대문에 꽝, 하고 부딪쳤다.

단상 위에서 밖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추문강이 당황한 낯으로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괴수들이 몸통 박치기로 문을 부수려 한다!”


육손과 철두가 근처에 있던 부하들에게 지시해 대문 상단에 목책을 받치게 했다.

그 사이 강서준 장군은 문 측면에 난 작은 틈새로 밖의 상황을 살폈다.

밤나무숲 방향에서 백색 요시 한 마리가 미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콰아아앙!


소리와 함께 요시가 대문을 들이받았다.

괴수는 그 자리에서 머리가 터져 즉사했다.

녀석의 바위처럼 단단한 머리에 강타당한 대문 아랫부분도 심하게 짓이겨졌다.

추문강이 다시 높이 외쳤다.


“또 온다. 이번엔 여러 마리다!”


바로 근거리에서 한 마리가 일으킨 충격의 강도를 체험한 강 장교가 화들짝 놀라 병사들과 함께 대문을 등으로 받치고 섰다.

철두와 육손, 혈화문 무사들이 대문의 상단과 하단에 목책 여러 개를 동시에 받쳤지만, 연달아 들린 쿵, 쾅쾅, 충격음 후, 대문 한쪽 구석이 뻥 뚫리며 부서져 버렸다.


“이런 시발!”


육손이 당황해서 외쳤다.

그때 박치기로 문을 꿰뚫었음에도 아직 살아 있던 괴수 중 한 마리가 아가리를 널찍이 벌려 근처 무사 한 명의 목을 덥석 깨물었다.


“으아아아아악!”


철두가 청룡도로 요시의 정수리를 강하게 내려쳤지만, 쇳조각보다 단단한 미늘이 칼날을 밀어내듯 흘려버렸다.

발버둥치던 무사가 비명을 내지르다 급기야 머리가 통째로 요시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상공에서 뛰어내린 추문강이 황금만도의 날을 세우듯이 하여 요시의 붉은 눈깔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요시가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무사의 머리를 토해냄과 동시에 매끄러운 머리통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즉사했다.

이번엔 단상 위에서 정청하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괴수들이! 괴수들이! 떼로 몰려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땅이 진동했다.

밤나무숲을 가득 메운 백색 괴수들이 혈화문 대문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육손이 하늘 위로 공격 개시 폭죽을 쏘아 올리며 총공격을 명령했다.

담장 위에 있던 궁수들이 요시들을 향해 활을 쏘고 창병들이 길쭉한 장창을 내던졌다.

강서준 지휘관이 육손을 돌아보며 대갈했다.


“우리가 밖에서 시간을 벌 테니 최대한 빨리 부서진 문을 수리하시오!”


마침 우공이 장인들과 함께 본부 막사 뒤편에 준비해두었던 보조 대문을 가지고 구릉지를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육손이 다급히 외쳤다.


“부탁하오! 장군!”


강서준이 방패병과 검병, 창병 백여 명을 데리고 부서진 구멍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해자 위 나무다리 위에서 괴수들과 황군 병사들 사이에 총력전이 펼쳐졌다.

강서준이 칼을 사방으로 휘저으며 목놓아 외쳤다.


“몸뚱이를 노리지 말고 눈, 코, 입, 등 대가리에 있는 구멍을 노려라!”

“네, 장군님!”


차마 눈 뜨고는 지켜볼 수 없는 치열한 격전이 펼쳐졌다.

방패병들이 혼신을 다해 요시의 박치기를 막아내는 사이 창병과 검병들이 녀석들의 머리에 칼과 창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황군의 궁병들도 담장 위에서 자신들의 지휘관을 필사적으로 엄호했다.

그사이 장원 안쪽에서는 나무망치와 정을 든 장인들이 빠르게 문을 덧붙여나갔다.

병사들이 다시 후퇴해서 들어올 수 있게 약간의 틈을 남겨두고 두 개의 문을 겹 붙이기를 끝낸 우공이 육손에게 다 되었다, 보고했다.

육손이 구멍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강서준을 불렀다.


“후퇴! 강 장군! 후퇴하시오!”


백여 명의 부대가 대열을 맞춰 뒤로 성큼성큼 물러나는 데 갑자기 해자 인근 땅속에서 강시들이 튀어나왔다.

녀석들이 나무다리 위 병사들 틈을 무식하게 파고들었다.

강 장군이 강시의 팔, 다리를 자르며 녀석들의 침투를 막아내려 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강시들의 난입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담장 위 궁병들이 쏘아댄 활도 강시들에겐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 파악이 끝난 강 장군이 혼자서 비릿하게 웃더니, 비교적 나이 어린 부하들을 우선해서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빨리! 빨리!”


어린 병사들을 탈출시킨 강장군이 갑자기 자신의 몸으로 구멍을 틀어막은 뒤 남아있는 고참병들을 향해 목청 높여 외쳤다.


“황군의 병사들이여! 나와 함께 다리를 수호한다!”


피와 땀으로 범벅진 고참병들이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거친 노호를 터뜨리며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끓어오르는 투지로도 눈앞을 가득 메운 백색 괴수들의 돌격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대문 앞 나무다리 위에서 강시와 요시들의 인정사정없는 도륙이 시작됐다.

황군 지휘관 강서준 장군 역시 녀석들의 밥이 되었다.

그의 희생을 지켜본 육손이 안쪽에서 통곡의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철두가 흥분한 육손을 밀쳐낸 뒤 눈물을 머금고 구멍을 틀어막았다.

그가 눈짓하자 장인들이 달려와 망치질을 해댔다.

그러는 사이에도 밖에선 죽어가는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늘에선 다시 바람이 불고 눈발이 휘날렸다.

위기에 휩싸인 건 대문 쪽만이 아니었다.

담장 위에서도 끔찍한 혼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산처럼 쌓인 동료 괴수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온 요시들이 담장을 지키는 병사들과 혈화문 무사들을 채찍꼬리로 낚아채서 밖으로 내던졌다.

무사들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괴수들의 꼬리를 피해 녀석들을 담장 밖으로 힘겹게 밀어내야 했다.

정청하가 광풍신법을 펼쳐 담장 위를 날아다니며 요시들의 사나운 꼬리를 최대한 베어나갔지만, 문득 핏물로 얼룩진 단상에 내려서다 한쪽 발이 미끄러졌다.

순간 번개처럼 날아든 채찍꼬리가 그녀의 우측 어깨에 친친 휘감겼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꼬리는 감기는 것만으로도 불에 덴 것 같은 뜨거운 고통을 안겨주었다.

정청하가 어깨 쪽으로 자하신공을 끌어올려 요시의 꼬리 공격을 버텨냈지만, 괴수의 괴력에 질질 끌려다녀야 했다.

그녀가 급기야 검까지 놓쳐버렸다.

근처에 있던 병사 하나가 그녀의 검을 줍다가 요시에게 어깻죽지가 물어뜯겼다.

쓰러지는 병사 앞에서 정청하가 울부짖었다.


“아아아아악!”


저만치서 단상 밑으로 떨어져 내린 요시를 상대하고 있던 추문강의 귀에 청하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눈깔이 뒤집힌 그가 요시를 수문장 이호에게 맡겨둔 채 미친 듯이 청하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청하를 붙든 괴수가 몰려드는 병사들을 피해 담장 밖으로 몸을 날려버렸다.

녀석의 꼬리에 청하가 휘감겨 있었다.

높은 허공 위에서 추문강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던 청하가 그대로 담장 뒤로 사라졌다.


“안돼!!! 청하!!! 청하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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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말의 혈화문(6) 23.12.30 96 3 17쪽
92 종말의 혈화문(5) 23.12.20 96 3 16쪽
91 종말의 혈화문(4) +1 23.12.17 94 3 16쪽
90 종말의 혈화문(3) 23.12.16 93 3 15쪽
89 종말의 혈화문(2) 23.12.15 104 3 14쪽
88 종말의 혈화문(1) 23.12.03 145 1 18쪽
87 피할 수 없는 전쟁(8) 23.11.27 153 2 14쪽
86 피할 수 없는 전쟁(7) 23.11.25 148 4 13쪽
85 피할 수 없는 전쟁(6) 23.11.22 150 2 18쪽
» 피할 수 없는 전쟁(5) 23.11.19 165 3 18쪽
83 피할 수 없는 전쟁(4) 23.11.15 170 2 19쪽
82 피할 수 없는 전쟁(3) 23.11.13 176 3 17쪽
81 피할 수 없는 전쟁(2) 23.11.12 189 3 14쪽
80 피할 수 없는 전쟁(1) 23.11.08 217 3 15쪽
79 그날의 기억(2) 23.11.06 215 2 21쪽
78 그날의 기억(1) 23.11.04 200 3 16쪽
77 여후의 장례식(6) 23.11.02 226 3 20쪽
76 여후의 장례식(5) 23.10.31 235 3 19쪽
75 여후의 장례식(4) 23.10.29 232 5 15쪽
74 여후의 장례식(3) 23.10.27 225 5 14쪽
73 여후의 장례식(2) 23.10.25 259 5 17쪽
72 여후의 장례식(1) 23.10.24 303 5 17쪽
71 야야장 사람들(5) 23.10.22 270 5 16쪽
70 야야장 사람들(4) 23.10.20 253 6 14쪽
69 야야장 사람들(3) 23.10.19 266 5 19쪽
68 야야장 사람들(2) 23.10.17 272 5 14쪽
67 야야장 사람들(1) 23.10.16 258 4 16쪽
66 중간 결산(2) 23.10.15 249 4 15쪽
65 중간 결산(1) 23.10.13 306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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