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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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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57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작성
23.11.0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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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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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21쪽

그날의 기억(2)

DUMMY

“세 가지 무기를 모두 획득한 뒤, 한 가지 시험을 통과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신계에 들어설 수 있다. 신이 되면 영생은 물론이고, 차원과 시간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으며 영원히 인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 천계에선 그자를 절세천마라 부르며 여래조차 그의 행동에 간섭할 수 없다.”


이 말을 내뱉은 뒤 여불선이 슬그머니 지상의 손을 놓아주었다.

지상이 여불선을 바라봤지만, 그가 고개를 팍 수그리고 있어 얼굴 표정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여불선이 고개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석벽에 적힌 글을 모두 읽어내린 우리 형제들은 잠시간 얼이 빠져 있었다. 그만큼 글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충격적이었다. 한참 후, 뒤쪽에서 쉭, 소리가 들리더니 구검 대사형의 검이 천마의 목을 잘랐다. 한데 떨어진 천마의 머리에서 복면이 흘러내린 순간 모두가 경악했다. 천마의 얼굴에 응당 있어야 할 눈, 코, 입이 없어서였다. 그것은 마치 만들다 만 인형의 얼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때 지상은 여불선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그가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불선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킨 후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석굴을 나왔을 땐 괴수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린 각자가 획득한 보물과 천마의 머리를 챙겨서 주둔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세 형제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왜 두려워해야 하는지 원인은 알지 못했지만, 심장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날이 너무 어두워 우린 주둔지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다음 아군들의 시체를 안장한 뒤 고향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한데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 얼굴 없는 천마가 나타나 내게 물었다. 석벽에 적힌 글귀 중에서 한 가지 시험이란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말이다. 나는 궁금하지 않다고, 당장 내 꿈속에서 나가라고 발버둥 치다 잠에서 깨어났다. 경황 중에 쨍쨍, 검이 부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추슬러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너무 아팠다. 근처에 있던 나무 둔치를 붙잡고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주둔지 한복판에서 구검 대사형과 천령화 둘째 사형이 서로 검을 맞댄 채 살벌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노진규는 자신의 짐보따리를 품에 안고서 수풀 속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내가 사형들의 이름을 부르자, 노진규가 겁먹은 얼굴로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형들이 검을 거둔 뒤 몇 장 거리 떨어져 섰다.”


여불선이 잠시 말을 끊은 다음 한쪽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여불선이 팔로 전방 어딘가를 가리킨 뒤 사시나무 떨듯 팔을 떨며 다음 말을 이었다.


“구검 대사형은 천령화 사형에게 검을 달라고 계속해서 호통쳤다. 천령화 사형은 그럴 수 없다며 오히려 구검 대사형이 가지고 있는 원걸영을 자신에게 내놓으라 윽박질렀다. 문득 든 생각에 나는 급히 호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역시나 주머니가 텅 비어있었다. 그때 진규가 손가락으로 내 팔을 콕 찌르더니 다시 손을 들어 천령화 사형을 가리켰다. 천령화 사형의 바지 주머니가 볼록하게 부풀어 있었다. 한참을 둘째 사형과 말싸움을 이어가던 구검 사형이 갑자기 주둔지 옆으로 펼쳐진 낭떠러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천령화 사형이 재빨리 그 뒤를 쫓았다. 나도 진규의 도움을 받아 그쪽으로 이동했다. 만장애라 불리는 협곡 앞에 구검 대사형이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그가 원걸영이라는 은방울을 집어 든 손을 낭떠러지를 향해 내뻗고 있었다. 둘째 사형이 다급하게 안 돼! 라고 소리친 순간 대사형이 은방울을 만장애 아래 깊은 심연 속으로 떨어뜨렸다.”


그때 대전 안에 있던 누군가가 격한 신음을 토해냈다.

구검의 결단에 감탄한 것이었다.

지상 역시 잠깐 사조부님을 의심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여불선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깜짝 놀란 둘째 사형이 황급히 낭떠러지 쪽으로 이동했다. 대사형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대사형의 검이 천령화 사형의 바짓자락을 스치자 내 용심설혼주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천령화 사형이 사납게 노호를 터뜨리더니 다시 구검 대사형과 검을 맞부딪쳤다. 순간 난 더이상 참지 못하고 아픈 다리를 붙잡고서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내가 도대체 이게 뭔 짓이냐고 두 사람을 향해 일갈하자, 그제야 사형들이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순진했던 나는 정말 그걸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예언 속 세 가지 보물 중 한 가지를 잃었으니 그것으로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내 오판이었다. 천령화 사형이 우리를 차갑게 일별한 뒤 그대로 우리를 떠나버렸다.”


여불선이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사마랑이 건넨 물 한 모금을 더 마신 뒤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구검 사형은 왜인지 용심설혼주를 낭떠러지로 던져버리지 않고 내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당부했다. 이번 일을 사부님한테 보고할 때까지 구슬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사형에게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구슬을 지켜내겠다 맹세했다. 다음날 우린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아군 시체를 모두 안장한 뒤 바로 십만대산을 떠났다. 한데······.”


갑자기 여불선의 목이 잠겼다.

그가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도무문 무림맹에 들려 경과를 보고한 다음 노진규와도 헤어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화산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맞이한 건 누군가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한 수많은 시체들이었다. 그들 속엔 매휴 사부님뿐만 아니라 얼마 전 화산파에 입문한 일곱 살 난 어린 속가 제자까지 섞여 있었다. 구검 대사형과 나는 너무 큰 충격에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다. 이후 나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구검 대사형이 돌연 옥녀봉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곳에 구검 사형과 은이정 사매의 은신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고, 그건 천령화 사형과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여불선의 팔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떨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사마랑이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여불선의 어깨를 뒤에서 붙잡았다.

여불선이 사마랑에게 기댄 채 말을 이었다.


“뒤늦게 옥녀봉으로 따라 올라간 내 눈에 살아 있는 사매가 들어왔다. 한데 초막 앞마당에 주저앉은 사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벌거벗겨진 채 온몸이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또한, 혼자가 아니었다. 천령화가 그 옆에서 옷가지를 주워 입고 있었다. 우리가 올 때까지 사매에게 그 짓을 며칠이나 지속한 것 같았다. 대노한 구검 사형이 천령화를 향해 검을 빼 들었다. 십만대산에서처럼 손에 여유를 둔 움직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검을 부딪치며 옥녀봉 위로 올라갔다. 나는 행여 울고 있는 사매가 자살이라도 할까 싶어 두 사람을 뒤쫓지 못했다.”


여불선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한데 얼마 뒤 사매와 내 앞에 나타난 건 구검 사형이 아니라, 스스로 우리와 사형제의 인연을 끊어버린 천령화였다. 녀석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복부를 끌어안고서 내게 말했다. 옥녀봉 꼭대기에 구검 대사형이 쓰러져 있다고 말이다. 서둘러 치료하면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냐고, 무엇이 너를 이렇게 미치게 만들었냐고. 천령화가 무심히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 답을 잘 알고 있지 않냐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화에 휩싸였다. 내가 녀석을 향해 검을 뽑았지만, 나는 천령화를 찌르지 못했다. 사매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 구검 대사형을 구하는 게 급선무라 애원해서였다. 순간 천령화가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1년 뒤 만장애에서 기다릴 테니 구검 대사형에게 그렇게 전해달라고···.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녀석이 입은 상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내가 평생 후회한 게 그때 녀석을 죽이지 않은 거였다.”


여불선이 긴 한숨을 내뱉은 뒤 약간은 여유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후 천령화는 행여라도 무림맹에게 쫓길까 싶어 강호를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녀석이 헤매다 도착한 곳이 바로 남해의 아스카 왕국이었다. 이것은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고 당시엔 예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천령화는 그곳에서 몸을 회복한 뒤 약속을 지키기 위해 1년 뒤 만장애로 돌아왔다. 한데 그사이 녀석은 무척이나 강해져 있었다. 불행하게도 녀석이 획득한 제룡척골검에 죽은 천마의 무공이 숨겨져 있었던 것 같았다. 구검 대사형은 새로운 무공을 통해 더욱 강해진 천령화와의 비검에서 삼십 합도 버텨내지 못했다. 복수를 실패한 사형은 그 치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장애로 몸을 날렸다. 당시 난 그 현장에 있었고 사형이 죽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천령화가 다가와 내게 사매의 사정을 캐물었다. 나는 그가 무서웠지만,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에게 절대로 사매가 얼마 전 사생아를 낳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말을 마친 여불선이 지상을 돌아봤다.

여불선과 눈이 마주친 지상이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여불선이 잠시 혀를 곱씹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비겁한 놈이었다. 나는 사형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천령화가 두려워 그에게 복수할 생각도 못 했다. 만장애 일전에 앞서 구검 대사형이 내게 따로 부탁한 일이 있었다. 만일 자신이 복수에 실패하면 사매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말이다. 나는 약속했지만, 그녀와 천령화 사이에 태어난 아이만큼은 키울 자신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사매 역시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아이를 낳은 사실을 잊어버렸기에 나는 죄책감 없이 그 아이를 흑도들이 사는 야야장에 내버렸다.”


불현듯 지상이 노호를 터뜨렸다.


“아니야! 개소리 그만 지껄여! 아니라고!”


여불선이 지상의 말을 무시한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젖은 눈망울로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데 죽은 줄 알았던 구검 대사형이 살아 있었다. 만장애 밑에서 10년을 살아남았다가 그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복수를 원하고 있었지만, 내 기억 속에서 천령화는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10년 전 둘 사이 비검 이후로 천령화는 완전히 종적을 감춘 채 강호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대사형에게 이만 과거는 잊고 나와 같이 후기지수나 양성하며 노후를 보내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그는 천령화가 반드시 어딘가에서 무림을 뒤흔들 흑막을 꾸미고 있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사형은 그길로 천령화를 찾아 길을 떠났다. 사랑하는 정인, 은이정을 외면한 채 말이다.”


그 부분에서 여불선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그가 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뒤, 내가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화염사막 인근에서 초주검 상태가 된 구검 대사형이 발견됐다. 충격이었다. 그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천령화 밖에 없었다. 잊고 있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일단 나는 사형을 대도무문에서 멀리 떨어진 황도 천상각 뇌옥에 가뒀다. 은이정 때문이었다. 그때쯤 나는 은이정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과거의 기억으로 아파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러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천령화의 행동에 이목을 집중했다. 한데 불행 중 다행으로 천령화는 목격되지 않았다. 그 무렵 천상각에서 구검 사형의 감시를 맡았던 간수로부터 구검 사형이 감옥 안에서 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형의 제자가 된 유무성이란 사내에 대해 흥미를 느꼈지만, 당시 오악에 출몰한 대규모 녹림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나는 사형의 일을 깜박 잊어버렸다. 몇 달 뒤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고 천상각을 찾았는데, 내가 방문하기 전날 구검 사형이 유명을 달리했다. 유무성이란 자 역시 얼마 전 출소한 상태였다.”


지상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공선 대사가 다가와 호흡이 흐트러진 지상의 어깨를 슬며시 붙들었다.

대사의 손에서 한 줄기 따사로운 진기가 지상의 몸 안으로 스며 들어가 흥분된 지상의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하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여불선의 말에 지상의 단전으로 모이고 있던 음영신공의 진기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여불선의 말이 이어졌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내가 먼저 유무성을 찾았다. 무림맹 수사관들이 유무성을 어떤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한데 그때 나는 유무성을 따라 다니던 어떤 아이를 목격했다. 그 아이를 본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내려쳤다. 그 긴 세월 억눌려 있던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둘째 사형 천령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이의 아빠가 그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아이는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다. 한데 아이를 향한 내 살기를 유무성이 먼 거리에서 간파했다. 그날 밤 내 숙소로 유무성이 찾아왔다. 유무성은 다짜고짜 내게 아이를 죽이려는 이유를 캐물었다. 물론 나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유무성은 내게 그럼 혹시라도 아이를 살릴 방법은 없는지 재차 물어왔다. 그때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구검 사형의 제자인 유무성이란 놈을 알고 싶었다. 해서 유무성에게 아이 대신 죽을 수 있냐고 떠봤다. 놀랍게도 그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다. 왜냐고 이유를 묻자, 유무성은 내게 이지상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시발!”


순간 이지상이 쌍두사를 뽑았다.

단상 밑에서 준비하고 있던 채인하가 번개처럼 날아와 매화검으로 쌍두사의 검날을 쳐냈다.

지상이 인하에게 사납게 소리쳤다.


“비켜, 비키라고, 이 새끼야. 내가 오늘 저 새끼를 죽이지 못하면 이지상이 아니다. 여불선, 이 시발 새끼야, 넌 오늘 나한테 무조건 죽었어.”


채인하가 지상과 검날을 맞부딪친 채로 고성을 내질렀다.


“아직! 아직 사부님의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좀만 기다려. 조금만. 이지상!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여불선이 갑자기 황색 용포를 훌훌 벗어 던졌다.

그가 요대에서 매랑검을 뽑아냈다.

여불선이 사마랑에게 눈짓한 뒤 갑자기 허공을 향해 1초식을 내질렀다.

그가 평생에 걸쳐 만든 매화검법 초식이었다.

여불선이 검을 든 채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최근 내게 사천당가의 당지위란 놈이 찾아왔다. 녀석이 당돌하게도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내가 수십 년 지켜온 용심설혼주를 육지라는 신물과 바꾸자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캐물었더니 녀석이 이렇게 대답했다. 천마를 막기 위해서라고···. 나는 당지위를 실컷 비웃어준 뒤 녀석의 몸에 수십 차례 칼질을 가했다. 녀석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천령화 사형이 천마가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당지위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두려워서 여태까지 그것을 모른 척하고 지냈을 뿐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르면서 나 역시 천령화처럼 괴물이 되어있었다. 말로는 백도 천하를 주장하며 전쟁의 당위성을 부르짖었지만, 사실 난 황제를 없앤 뒤 강호를 내 일인 체제하에 놓으려 했다. 무림맹 무사들의 피를 제물 삼아서 말이다.”


여불선이 허공을 향해 매화검법 2초식 매화접무(梅花蝶舞)를 펼쳐냈다.

군중들의 눈에 마치 단상 위로 나비가 모이는 듯한 환상이 펼쳐졌다.

여불선이 다시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전쟁터에 나가 있던 사이 당지위가 뇌옥을 탈출했다. 녀석이 내 아내 은이정을 죽이고 그녀에게서 용심설혼주를 빼앗았다. 아내는 죽을 때까지 구검 대사형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내가 말해주지 않았다. 행여라도 그녀가 사형을 따라 죽을까 싶어서였다. 그녀는 용심설혼주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구검 사형이 나타나 자신을 데려갈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아내의 주검 앞에서 깨달았다. 내가 천령화처럼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나와 구검 사형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저물었다는 사실을···. 우린 30년 전 그날 수렴동을 들어갔던 그 순간 생명을 다했던 것이다.”


여불선이 하늘을 향해 매랑검을 찌른 뒤 짧게 입을 뗐다.


“여기까지가 나의 이야기이다. 이젠 너희의 이야기가 시작될 차례다. 오늘 이후 황군과 무림맹 간 전쟁은 종결될 것이다. 나는 오늘 무림맹주 자리를 황건명에게 물려주도록 하겠다.”


순간 무당파 충의 도장을 비롯한 각 문파의 수장들이 싸늘한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여불선의 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차기 무림맹주가 상대해야 할 적이 바로 천마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황건명이 앞으로 나와 여불선을 바라보며 포권한 채 고개를 숙였다.

여불선의 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승낙의 표시였다.

여불선이 무림맹 무사들을 향해 당부했다.


“이후 누구라도 황건명 맹주의 말을 거스르는 자는 내가 구천에서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알았느냐? 거기 개방의 용 장로, 대답하라. 알았느냐?”

“···아, 알겠습니다.”

“충의 도장도 알아들었소이까?”


충의 도장이 못 이기는 척 팔짱 낀 채 대답했다.


“알겠소.”


여불선이 무림맹 무사들을 향해 재차 물었다.


“다들 알았느냐?”


대전 안팎의 모두가 동시에 복창했다.


“존명!”


여불선이 그제야 채인하와 겹쳐 있는 지상을 돌아봤다.


“이지상.”


지상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말해라.”

“내가 널 죽이려 했던 이유는 네가 네 아비와 손을 잡을까 싶어서였다.”

“닥쳐라,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다.”


여불선이 탄식하며 말했다.


“맞다. 그는 네 아버지가 아니다. 네 아버지는 죽은 유무성이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들을 지키려 했던 유무성이 진짜 네 아버지다. 그것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된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목이나 내놔라.”

“너에게 한 가지만 더 부탁하겠다. 네가 당지위에게 복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어미이자 내 아내였던 은이정을 죽인 건 나다. 내가 그녀를 아편에 중독시켰다. 그녀가 어느 순간 아이를 낳은 걸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시발 새끼야. 됐으니까 은이정 얘기는 그만 지껄이라고!”


돌연 여불선이 지상을 향해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닥치고 들어라! 내 마지막 부탁이니까! 이지상! 할 수만 있다면 당지위란 놈과 손을 잡아서라도 천마에게 맞서라. 그는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자보다 강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그를 막아낼 수 있다. 제발 부탁한다, 이지상.”

“끝났느냐?”

“그래, 내 말은 이것으로 끝이다. 자, 이제 덤벼라. 이지상, 네 검으로 나를 끝내 다오.”


갑자기 여불선이 단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비틀비틀 몸을 한 차례 크게 휘청이더니 검끝으로 대전 바닥을 가르며 무림맹 무사들을 뚫고 무영전을 빠져나갔다.

지상이 채인하를 밀친 뒤 여불선을 쫓았다.

황건명을 비롯한 모두가 두 사람을 쫓아 대전을 빠져나갔다,

대전을 둘러싸고 있던 수만 무림맹 무사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대전 앞, 광장 가장자리로 쫙 펼쳐졌다.

여불선이 광장 한가운데서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자신의 제자를 불렀다.


“채인하! 똑똑히 지켜보아라! 사부의 마지막 검초를!”


지상이 대갈하며 여불선을 향해 쌍두사를 휘둘렀다.

여불선이 몸을 돌려 쌍두사에서 뿜어져 나온 핏빛 강기를 매랑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어 쪼개듯 막아냈다.

여불선이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인하야, 지금 보이는 바로 이것이 내가 이십사수매화검법에 새로 추가한 스물다섯 번째 초식 망각일섬(忘却一閃)이다. 기억해라. 사랑하는 제자야.”


여불선이 공간을 단축해 지상의 정면으로 짓쳐들어왔다.

지상이 그를 향해 매섭게 쌍두사를 휘둘렀지만, 그의 신형이 바로 눈앞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지상이 아무리 그를 베고자 해도 마치 형상이 없는 것처럼 여불선의 몸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불선이 고성을 내질렀다.


“갈(喝)!”


순간 여불선의 손에서 매랑검이 떨어졌다.

여불선이 마치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지상의 쌍두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지상은 충분히 그를 벨 수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 검을 비켜 세웠다.

풀썩. 한 줌도 되지 않는 노인의 몸이 지상에게 안겼다.


“사부님!”


채인하가 달려와 사부를 붙들었다.

여불선이 비스듬히 쓰러진 채 나직한 어조로 인하와 지상을 향해 부탁했다.


“무림을··· 나와 구, 구검 대사형, 은이정이 사랑했던 그 무림을··· 바, 바, 반드시 되살려···.”


여불선의 젖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떨어졌다.

채인하가 울부짖었다.


“사부니이이이이님!!!”


뒤미처 달려온 황건명과 공선 대사, 사마랑, 충의 도장, 현무칠협 및 수많은 문파의 수장들이 여불선 곁에 모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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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말의 혈화문(6) 23.12.30 87 3 17쪽
92 종말의 혈화문(5) 23.12.20 89 3 16쪽
91 종말의 혈화문(4) +1 23.12.17 86 3 16쪽
90 종말의 혈화문(3) 23.12.16 86 3 15쪽
89 종말의 혈화문(2) 23.12.15 97 3 14쪽
88 종말의 혈화문(1) 23.12.03 138 1 18쪽
87 피할 수 없는 전쟁(8) 23.11.27 149 2 14쪽
86 피할 수 없는 전쟁(7) 23.11.25 144 4 13쪽
85 피할 수 없는 전쟁(6) 23.11.22 144 2 18쪽
84 피할 수 없는 전쟁(5) 23.11.19 158 3 18쪽
83 피할 수 없는 전쟁(4) 23.11.15 163 2 19쪽
82 피할 수 없는 전쟁(3) 23.11.13 171 3 17쪽
81 피할 수 없는 전쟁(2) 23.11.12 185 3 14쪽
80 피할 수 없는 전쟁(1) 23.11.08 212 3 15쪽
» 그날의 기억(2) 23.11.06 209 2 21쪽
78 그날의 기억(1) 23.11.04 193 3 16쪽
77 여후의 장례식(6) 23.11.02 220 3 20쪽
76 여후의 장례식(5) 23.10.31 226 3 19쪽
75 여후의 장례식(4) 23.10.29 224 5 15쪽
74 여후의 장례식(3) 23.10.27 217 5 14쪽
73 여후의 장례식(2) 23.10.25 251 5 17쪽
72 여후의 장례식(1) 23.10.24 291 5 17쪽
71 야야장 사람들(5) 23.10.22 265 5 16쪽
70 야야장 사람들(4) 23.10.20 249 6 14쪽
69 야야장 사람들(3) 23.10.19 259 5 19쪽
68 야야장 사람들(2) 23.10.17 267 5 14쪽
67 야야장 사람들(1) 23.10.16 251 4 16쪽
66 중간 결산(2) 23.10.15 241 4 15쪽
65 중간 결산(1) 23.10.13 303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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