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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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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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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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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후의 장례식(5)

DUMMY

이날 오전.


칠석교 건너편 황건명의 막사에 한 필의 말 탄 사신이 도착했다.

이 사람은 기존에 왔던 사신과는 달리 황건명과 인연이 깊은 자였다.

현무칠협 중 일인이자 무당파 수제자 장태호가 황건명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사질 장태호가 황 사숙을 뵙습니다.”

“태호야, 네가 어인 일로 이 어려운 걸음을 하였느냐?”


현재 무당파는 장문인 포함 전원이 여불선 밑으로 투신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은 사숙과 사질의 관계이긴 했지만, 지금은 엄연히 서로 적군이었다.

장태호가 낯빛을 굳힌 채 다가와 고했다.


“황 사숙, 어려운 부탁인 줄 압니다만, 오늘 중으로 공선 대사님과 함께 무령궁에 입궁해주십시오.”

“응?”


뒤편에서 향후 작전 내용을 상의 중이던 남궁연과 공선 대사가 대화를 멈추고 장태호와 황건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건명이 피우던 담배를 내려놓고 장태호의 까칠한 손을 붙잡았다.

그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맹주께 무슨 일이 있느냐?”


장태호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처음엔 그저 사모님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몸이 조금 상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의원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며칠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답니다.”

“뭐? 아니, 어쩐 연유로?”

“아무도 병명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맥이 점점 가늘어지고, 진기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해 생기 자체가 거의 소멸 직전이라고만······.”


중랑장 남궁연이 경계의 눈빛으로 공선 대사를 바라봤다.

그가 공선 대사의 귓전에 속삭였다.


“여불선의 간계일 수도 있으니 대사께선 어서 장군님께 말씀을···.”


한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장태호가 이미 그들의 의중을 눈치채고 황건명에게 진중히 고했다.


“사숙, 제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습니다. 만일 제가 맹주님의 지시로 사숙을 속이러 왔다면 사부님한테 단칼에 목이 달아날 겁니다. 하늘에 맹세코 거짓이 아닙니다.”


황건명이 장태호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득 막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남궁연과 공선, 장태호가 뒤를 따라 나왔다.

황건명이 눈 내리는 하늘을 한참이나 말없이 올려다봤다.

그가 뒷짐 진 손으로 커다란 염주 알을 몇 차례 쥐락펴락하더니 몸을 돌려 말했다.


“남궁연, 당장 무령궁으로 갈 채비를 준비해주게. 나와 공선 대사, 그리고 최고 고참 무장 10인 그렇게 갈 것이네.”


남궁연이 입을 쩍 벌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황건명이 여유롭게 미소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하하, 걱정하지 마시게. 별일 없을 터이니. 나는 내 사질을 믿네.”


장태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황건명을 바라봤다.



*



비검이 벌어지고 있는 대기소.


지상과의 대결에서 살수를 쓰지 않으려 했던 건 오천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입으로 언급했다시피 예전부터 부하들에게서 지상의 됨됨이를 적잖이 들어왔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지상은 잔혹함과 선함이 종이의 앞뒷면처럼 한몸에 겹쳐있는 흑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무림 기사였다.

적에겐 잔인할만큼 냉혹한 면모를 보이지만, 자기 사람들에겐 지극히 온화한 아버지, 혹은 든든한 형님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자였다.

해서 그의 목숨을 취하는 대신 팔 하나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당연하게도 오천행은 지상에게 질 것이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개방과 기타 정파 선배들의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한 탓에 강호의 절세 무공을 일신에 두루 섭렵한 그였다.

무공을 배운 이후로 오천행은 지금까지 후기지수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꽃길 행로가 오늘 오천행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결과를 초래했다.

만일 오천행이 과거 단 한 번이라도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본 적이 있었더라면!

그가 패배의 쓰라린 아픔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더라면!

그는 오늘 살수로 평생을 살아온 이지상에게 비검을 제안하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만일 그가 기어코 지상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할 생각이었다면, 개방 무공의 오의인 연화장(蓮花掌)이나 백결신장(百結神掌), 용호십팔장(龍虎十八掌) 같은 장법으로 승부를 보았어야 했다.

하지만 오천행은 그러지 않았고, 그는 지상을 상대로 검도 아닌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

물론 타구봉법이 강호 최강의 봉법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미 혈마의 단계까지 올라선 지상을 상대하기엔 한 수 부족한 무공이었다.

이지상은 타구봉 따위로 다룰 수 있는 개가 아니었다.

그는 독기를 품은 최강의 독사였고, 그의 송곳니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날카로웠다.

장발 화상 금모량이 눈 쌓인 땅을 박차고 오른 덕에 한바탕 눈보라가 일어나 오천행의 시야가 좁혀진 것도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이미 승기를 잡았다 생각한 오천행은 시야가 좁아진 걸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타구봉법 초식 중 당두봉갈(當頭棒喝)이라는 비교적 단순명료한 수법으로 지상의 정수리에 단 한 번의 타격을 가해 승부를 결정지으려 했다.

그런 후 모두 앞에 내려서서 자랑스럽게 사자후를 일갈(一喝)하려 했다.

그것이 오천행이 스물여덟 인생에서 저지른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였다.


“음영검 제13식 만개사화(滿開死華)――!”


지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저 단말마의 한 마디 후, 쌍두사의 핏빛 검날이 눈앞에서 총 아홉 개의 검날로 쪼개지듯 흩어졌다.

사실 그것은 검날이 쪼개진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음영신공이 한 줌 남김없이 폭발을 일으켜 만들어 낸 파괴적인 속도의 잔상이었다.

이 초식이 음영검의 궁극의 절초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음영검 13식을 쓰고 나면 지상의 몸 안에는 단 한 방울의 내력도 남지 않게 된다.

아니 내력이 남아서는 아니 된다.

때문에 혈적세 상태에서 이것을 사용해도 마찬가지 결과를 얻게 된다.

혈기가 아무리 몸 안에 충만해 있어도 일단 만개사화를 시전하면 모든 혈기가 한순간에 사라지게 된다.

대신 보유하고 있는 내력의 양에 따라 얻는 힘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그뿐이다.

따라서 정말 동귀어진해야 하거나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 초식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용 후에는 내력이 완전히 고갈돼 적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지상은 이것을 실제 사람을 상대로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지상은 이것을 완벽히 사용할 수 있다.

이유는 누군가 그 앞에서 이것을 직접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당연히 지상의 사부 유무성이었다.

그는 죽기 전, 여불선을 상대로 한 비검에서 첫 검에 이 만개사화를 시전했다.

알다시피 그 당시 유무성은 이 무시무시한 검초를 사용 할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여불선의 매랑검에 허리가 두 동강 나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진짜 그의 숨통을 끊은 건 음영검으로 인한 경맥의 치명적인 손상이었다.

당시 유무성이 그걸 모르고 사용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하나뿐인 제자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마음껏 선보였다.

유무성은 사랑하는 지상에게 13식의 사용법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이용한 것이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내력 덕분에 여불선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초식 자체는 완벽히 구현해냈다.

그가 죽은 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지상은 비로소 사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원걸영을 통해 혈적세를 익힌 지상은 최근 13식을 완벽히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때문에···.

개방 방주 오천행의 죽음은 필연이었다.


두 사람의 격돌을 지켜보던 사람들 눈에는 그저 지상이 총 아홉 개의 핏빛 혈선(血線)으로 승화해 오천행의 몸을 뚫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또 누군가에겐 그것이 피를 머금은 쌍두사 한 마리가 무림 기재 오천행을 제물 삼아 하늘로 승천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채인하를 비롯한 몇몇 고수들은 분명히 목격했다.

지상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오천행의 몸 아홉 곳을 기묘한 수법으로 찢어버리는 것을 말이다.

그 수법이 너무도 경이로워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입을 연 자가 없었다.

지상을 뒤쫓아 날아올랐던 금모량은 지상의 발뒤꿈치에도 닿지 못한 채 하늘 상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한 무더기의 피의 소나기를 전신에 둘러써야 했다.

금모량이 다시 땅에 착지한 순간 기다리고 있던 채인하의 매화검이 금모량의 양 손목을 끊었다.

황금빛 철장이 즉시 눈 속에 파묻혔다.

왠지 흐리멍덩했던 금모량의 동공이 환하게 밝아지던 순간이었다.

눈밭에 뒹구는 자신의 두 손목을 발견한 금모량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의 동료 이평이 군중들 속에서 뛰어나왔다.

한데 그때 하늘에서 그자 앞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한 개가 아니었다.

총 여덟 개의 사람 거죽이 이평 앞에 떨어지더니 말려 있던 그것이 스르륵 펼쳐졌다.

마치 꽃의 잎사귀처럼 말이다.

어떤 부분은 꽃의 암술과 수술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평은 공포로 온몸이 마비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지막 아홉 번째의 거죽이 떨어진 순간 이평이 정신을 잃고 자빠졌다.

아홉 번째의 거죽은 사람의 머리였고, 당연히 오천행의 머리였다.

머리는 마치 꽃봉오리처럼 앞서 떨어진 여덟 개의 살가죽이 만들어낸 만개사화의 정중앙에 내려섰다.

화룡점정이었다.

잠시간 깊고 무거운 침묵이 대기소 광장을 짓눌렀다.

한참만에야 누군가 소리쳤다.


“끼아아아아아아악, 방주께서! 오 방주께서 돌아가셨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마, 마, 말도 안 돼!”

“귀, 귀, 귀신이다! 귀신의 수법이다. 저건 무공이 아니야, 귀신의 수법이다!”


모두가 눈을 돌려 지상을 찾았다.

한데 하늘로 솟구쳤던 지상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눈밭에 꽂혀있던 그의 홍사검과 흑사검도 사라졌다.

칼 빼 든 군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간살이가 박살 나며 시끄러운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군중 뒤편에서 초로의 노인네가 사납게 외쳤다.


“저기다, 이지상이 무령궁으로 들어가고 있다!”


채인하가 일신을 날려 노인의 머리를 뛰어넘었다.

그의 시야에 무언가를 쫓아서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지상의 모습이 들어왔다.

내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라 지상의 몸놀림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바람처럼 날아간 채인하가 금세 그를 따라잡았다.

궁궐 대문을 지키고 있던 시위들이 문상객들을 뚫고 막무가내로 안으로 들어서려는 지상을 막아섰다.

지상이 쌍두사를 검집으로 회수 후, 홍사검과 흑사검만으로 그들을 밀쳐냈다.

곁에 바싹 붙어선 채인하가 매화검을 지상의 전면을 향해 내지르며 윽박질렀다.


“이지상! 이지상! 정신 차려!”


뭔가에 홀린 듯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지상이 그제야 인하를 돌아봤다.

그가 인하에게 전방 어딘가를 검끝으로 가리키며 목청 높여 말했다.


“인하 너, 저거, 저거 안 보여?”

“뭐? 뭐? 이 미친 새끼야!”

“아까 그 장발 화상 몸에서 저게 빠져나왔다! 네 사제 정청하가 말한 것과 똑같이 생겼다. 저게 바로 천마가 부리는 악귀다. 저것이 그 장발 화상을 조종해 내 비검에 끼어들었다.”


채인하가 지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상의 말대로 허공에 떠서 빠르게 날아가고 있는 희끄무레한 영기(靈氣) 덩어리가 보였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사흉 중 하나인 궁기였다.

궁기를 목격한 순간 지상과 인하는 동시에 어떤 거대한 존재를 느꼈다.

근처에 천마가 있었다.

그때 방주의 죽음으로 눈이 돌아간 개방의 수천 방도들이 지상을 쫓아 무령궁에 침입했다.

막아서던 시위들이 개방 방도들의 무력에 모조리 나가떨어졌다.

문상객들까지 싸움에 휘말렸다.

무령궁 전체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궁기는 정확히 여불선이 있는 무령궁을 향해 날아갔다.

지상과 인하가 함께 그것을 쫓았다.

내력이 고갈된 지상은 숨을 미칠 듯 헐떡였다.

인하가 지상을 지나쳐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일정 거리에서 궁기를 향해 검을 뽑았다.

한 줄기 자색 강기가 섬전처럼 궁기를 덮쳤지만, 궁기가 제때 몸을 비틀어 피했다.

놀란 녀석이 뒤를 돌아보더니, 무영전 대전과 인접한 높다란 계단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순간 어디선가 빛살 하나가 날아와 궁기를 낚아챘다.

인하가 지붕 위로 날아간 빛살을 향해 수차례 검을 휘둘렀다.

짧지만 강맹한 강기들이 궁궐 기와를 모조리 절단 내며 빛살을 쫓았지만, 아쉽게도 결정타를 날리진 못했다.

인하가 광풍신법으로 오 장 높이의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적의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하가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이런 제기랄!”


그때 무영전 문이 열리더니 한 떼의 사람들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소란을 듣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마침 걸음을 멈추고 한쪽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지상을 뒤쫓아온 개방 무리가 발견했다.

개방 방도 하나가 지상을 향해 암기를 내던지며 달려갔다.


“저깄다. 악귀가 저깄다. 죽여라! 저 녀석을 당장 죽여라! 살인마를 찢어 죽여라!”


지상이 쌍검으로 암기들을 튕겨내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방도를 밀쳐냈다.

곧바로 일신에 상당한 무공을 보유한 개방 장로들이 지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일순 인하가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지상과 개방 방도들 사이를 막아섰다.

하지만 개방 장로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인하와 장로들 사이에 치열한 칼부림이 펼쳐졌다.

그것은 비검 따위가 아니었다.

오직 죽이려는 자와 어떻게든 막아내려는 자 사이에 펼쳐지는 원시적인 폭력 행위였다.

험한 욕지거리 사이로 암기들이 날아다녔고, 독을 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처음엔 적당히 겁만 줘서 보내려 했던 인하는 슬슬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상이 합류해서 그를 도왔지만, 흥분한 방도들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단 아군을 상대로 살수를 쓸 수가 없는 게 너무 컸다.

그때 대전 안에서 시위들이 뛰어나와 두 사람을 도왔다.

하지만 추가로 나타난 무림맹 무사들까지 개방 무리들과 합세해 무영전 앞에 있는 폭도들의 수가 수천을 뛰어넘었다.

지상과 인하, 시위들이 마치 거대한 파도에 떠밀리듯 뒤로 쭉쭉 물러났다.

순간 아까 대전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한 노승이 수천 무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마아아아아안!!!”


노승의 비쩍 마른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단 한 마디 일갈에 수천 무사들이 일제히 귀를 막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것은 진정 일 갑자 내공이 가득 실린 사자후 그 자체였다.

사자후 한 번으로 수천 무사들을 제압한 노승의 정체는 무당파 장문인 충의(忠毅) 도장이었다.

그가 다시 한번 똑같은 수법으로 군중을 향해 포효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리도 무엄한 짓을 저지른 것이냐! 누구냐? 누가 감히 무리를 이끌고 무령궁에 침입한 것이냐?”


개방 장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가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충의 도장에게 간절히 고했다.


“충의 장문인, 오 방주가 살해당했습니다.”

“뭐, 뭐, 자네 방금 무어라 말했는가?”

“오천행 방주가 저기 보이는 이지상이란 자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단 말입니다!!”


충의 도장의 일신이 갑자기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순간 그의 신형이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지상의 면전까지 쇄도한 충의 도장이 서슬퍼런 손아귀로 지상의 목덜미를 잡아 뜯어버리려던 그때, 한 줄기 파쇄적인 강풍이 날아와 충의 도장을 밀쳐냈다.

장풍에 밀려 세 발짝이나 뒤로 밀려난 충의 도장이 대노하며 소리쳤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날 막아서는 게냐?”


그러자 지붕 위에서 두 개의 인영이 충의 도장과 이지상 사이로 내려섰다.

황건명이 충의 도장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사형,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아니, 너, 넌. 건명이, 네가 여긴 어인 일이냐?”

“여 맹주님의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맹주께서 너를?”

“네.”

“하면 방금 나를 막아선 것도?”


황건명이 옆에 선 공선 대사를 바라봤다.

공선이 합장한 채 충의를 향해 고개를 주억였다.

충의 도장이 여전히 화를 풀지 않은 채 두 사람을 향해 일갈했다.


“해후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 두 사람 다 비켜서라. 내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다.”


황건명이 초췌한 모습의 지상을 한 차례 돌아본 뒤 사형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사형께서 죽이려는 자는 제 친구입니다.”


충의가 두 눈에서 불을 뿜어내며 말했다.


“이지상이란 놈이 네 친구라고?”

“네.”

“너 저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는 있는 게냐?”

“네, 오다가 들었습니다. 오천행을 죽였다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지상이란 친구는 적진 한복판에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엔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겁니다.”


순간 잠자코 있던 채인하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공수를 들어 보이며 선배들에게 고했다.


“선배님들, 저 채인하입니다. 제가 증인입니다. 마(魔)에 속한 무언가가 잔꾀를 부려 이지상이 오 방주를 죽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개방 장로들이 다 같이 소리쳤다.


“시끄럽다, 채인하. 충의 도장, 저자 역시 이지상과 한패입니다. 저희가 목격잡니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증인입니다.”


그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천의 군중이 동시에 복창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충의 도장이 한쪽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황건명과 채인하에게 말했다.


“두 사람 다 들었지?”

“사형,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히시고···.”

“그만하고 비켜라. 너는 알지 않느냐? 내가 오천행을 얼마나 아꼈는지. 나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엔 없지만 소림 방장께서도 오 방주를 자기 친자식처럼 아끼셨다. 만일 그분께서 이 변고를 듣게 되는 날엔 오늘 황건명 너의 행위는 결단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야!”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림 출신 공선 대사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황건명은 절대 사형에게 지상을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데 그때.

지상이 황건명을 지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검자루에 손을 올린 채 충의 도장에게 말했다.


“적의 간계가 아니었더라도 나와 오천행 방주는 비검을 치르고 있었소. 쌍방 합의하에 말이오. 내가 아는 비검은 대결 중 언제라도 상대를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 수 있소. 한데 당신은 지금 내가 오천행을 죽였단 것만으로 나를 죄인 취급하고 있소. 충의 도장에게 묻겠소. 당신네 백도들은 비검 중에 상대를 죽이면 죄를 범한 게 되는 거요?”


말문이 막힌 충의 도장이 낮게 침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충의가 아니었다.

눈앞의 녀석은 흑도 잔챙이에 불과했다.

그래, 이지상이란 이름 석 자 정도는 충의 도장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야야장에 있는 혈화문이라는 살수 집단의 우두머리.

기이한 보법에 음침한 검법을 쓴다는 검귀 녀석.

어느 순간 충의 도장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사형의 저 모습이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때만 나온다는 걸 잘 아는 황건명이 지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충의 도장의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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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여후의 장례식(2) 23.10.25 251 5 17쪽
72 여후의 장례식(1) 23.10.24 288 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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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야야장 사람들(4) 23.10.20 246 6 14쪽
69 야야장 사람들(3) 23.10.19 259 5 19쪽
68 야야장 사람들(2) 23.10.17 266 5 14쪽
67 야야장 사람들(1) 23.10.16 250 4 16쪽
66 중간 결산(2) 23.10.15 240 4 15쪽
65 중간 결산(1) 23.10.13 302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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