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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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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87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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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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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여후의 장례식(6)

DUMMY

대륙의 동해안에 자리한 외딴섬 해룡도.


바다의 습기를 한껏 머금은 뿌연 해무가 파도가 넘실대는 갯바위 주변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다.

짙은 안개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 하늘로 날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 턱 위로 조잡한 물개 가죽조끼를 덕지덕지 껴입은 장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대기 끝에 달린 사각 청등을 높이 들어 올린 장한이 해안가 어딘가를 향해 외쳤다.


“어이, 표 형! 표 형! 목소리 들리면 말 좀 해봐. 아니 무슨 오줌을 하루종일 싸? 이봐? 표 형! 곧 교대 시간이라고!”


일순 바닷가 용머리 바위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시커먼 인영 하나가 장한 쪽으로 머리를 쓱 내밀었다.

청등을 비춰 사람을 대충 확인한 장한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짜증 냈다.


“아니, 이 사람아. 거기 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해? 사람 속 터지게. 빨리 와, 늦었어.”


장한이 몸을 돌려 해안가 모래턱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데 방금 장한 앞에 머리를 내밀었던 동료가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위틈 사이로 픽 쓰러졌다.

뒤미처 구름떼처럼 많은 청의인들이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안개 속에서 걸어 나왔다.

선두로 나선 10척 대한이 전방으로 길쭉하면서도 날렵하게 생긴 장창 하나를 휙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장창은 막 모래턱에 올라서던 물개 가죽조끼 장한의 목구멍을 정확히 꿰뚫었다.

누군가 장한이 떨어트린 청등을 주워들었다.

기동우가 청등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며 부하들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안개가 걷히고 있다. 최대한 신속하게 이동해라. 빨리, 빨리 움직여!”


희미해져 가는 안개 속에서 기동우의 시선이 부하들 너머 저 멀리 바다 쪽으로 이동했다.

바다에 정박한 누선에서 쪽배로 옮겨타고 해안으로 이동 중인 그의 주군 당지위와 호려, 모개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지위가 탄 쪽배 십 장 거리에선 눈부시도록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바다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머리 셋 달린 괴물도 보였다.

녀석의 정체는 바로 얼마 전까지 미라 상태의 즉신불이었다가, 최근 용심설혼주를 심장에 박아넣고 요마가 된 남자였다.

주군과 요마를 바라보던 기동우의 입가에 모처럼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최근 벌어진 몇 차례 전투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그였기에, 오늘 주군 당지위, 또 요마와 함께하는 전투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기동우가 몸을 돌려 깎아지른 해안가 절벽 위에 세워진 동해파 성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쾅, 쾅쾅쾅!


누군가 성 꼭대기 층에 자리한 성주의 방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근처 첨탑에서 시끄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였다.

대충 옷가지를 걸친 라동해가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문을 열었다.

계단참엔 그의 오른팔 염동욱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서 있었다.

녀석이 방에 있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주군에게 소리죽여 말했다.


“주군, 지금 적이, 적이 성안에 침입했습니다”

“적? 무슨 적? 서, 설마 혈화문 놈들?”

“아닙니다. 생전 처음 보는 놈들입니다.”

“수는 얼마나 되는데?”

“쪽수는 저희와 대강 비슷하지만, 적군 속에 이상한 괴물 하나가 껴 있어 마치 초패왕 항우처럼 우리 무사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복양혁이가 지하에 있는 나효를 부르러 갔습니다만, 나효가 그 괴물을 당해낼지는 의문입니다.”

“알았어. 일단 적의 진입을 막는 데 주력하고 있어. 내가 나가서 처리할 테니까.”

“네, 주군.”


부하 염동욱이 계단을 따라 내려간 뒤 라동해가 즉시 벽에 걸린 자신의 무장을 끌어 내렸다.

침상 위에서 벌거벗은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마츠시타 시하가 반개한 눈으로 남편을 돌아봤다.

라동해가 시하에게 말했다.


“한조 그 녀석은 지금 어딨지?”


시하가 남편을 향해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있을 땐 그렇게도 못 잡아먹어서 난리더니 이럴 땐 또 한조를 찾는 건가요?”

“흥, 당신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오.”

“제 걱정은 하지 말고, 가서 적들이나 물리치세요. 당신이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조가 나타나서 절 지켜줄 거에요.”


라동해가 대답 없이 끄덕였다.

그가 무장을 완벽히 착용한 뒤 침상 밑에서 쇠닻 천손묘갑(天孫錨甲)을 꺼내 어깨 위로 들쳐 맸다.

준비를 끝낸 라동해가 아내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소.”

“고생하세요.”

“응.”


라동해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방을 나서려는 데 문득 시하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동해가 고개를 돌려 시하를 바라보자, 아내 시하가 물기 어린 촉촉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낭군, 사실 나···.”

“응?”

“나 임신했어요.”


라동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담담한 시하의 표정을 보고 금세 진위를 알아차렸다.

그가 덜컥 시하 앞에 무릎 꿇었다.

동해가 시하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정말이요?”

“응. 저번 날 아버지가 오셨을 때 확인받았어요. 남자아이래요.”

“헐, 그걸 왜 이제야···.”

“그냥 언제 말해줄까 고민하다가 시간이 흘러버렸어요.”


라동해가 말없이 시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꼭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알았소.”


시하가 남편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더니 라동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시간 서로를 부서지라, 끌어안았다.

포옹을 푼 라동해가 아내를 한 차례 일별한 뒤 즉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시하가 창문을 밀어젖히자 성벽을 타고 올라온 한조가 잽싸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불길에 그을렸는지 얼굴과 몸에 검댕을 잔뜩 묻혀 온 한조가 군주에게 부복하며 고했다.


“주군, 당장 몸을 피하셔야겠습니다.”

“응? 뭐라고?”

“적이 생각외로 강합니다. 밑에 게이샤들이 마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랑 같이 성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아니, 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시하가 몸에 얇은 망사옷을 걸친 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순간 어디선가 대기를 찢는 파공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조가 군주의 몸을 끌어안고 함께 바닥에 엎드렸다.


와 장 창창――!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투척용 창이 맞은편 벽에 걸려 있던 동경을 산산이 박살내고 벽에 깊숙이 처박혔다.

한조가 시하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로 창밖으로 찔끔 고개를 내밀었다.

성벽 아래에서 꽃마차를 준비 중이던 게이샤들이 적들에게 사로잡힌 채 목에 밧줄이 묶여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시하가 한조에게 소리죽여 물었다.


“동해, 동해! 우리 남편! 그 사람은 어떡해!”


한조가 눈 밑으로 땀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가느다란 숨을 내뱉었다.


성 지하실 입구.


라동해의 부하 복양혁과 함께 계단을 올라오던 나효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계단 위 좁고 어두운 출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개장처럼 보이는 작은 직사각 철창이 놓여있었다.

나효가 기다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적의 냄새를 맡았다.

순간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와 적의 얼굴을 비췄다.

빗장뼈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끔찍한 자상이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는 사내의 정체는 바로 사천당가의 가주 당지위였다.

나효와 당지위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나효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지위, 못 본 새 얼굴이 왜 그 지경이 됐느냐?”


당지위가 웃으며 대답했다.


“무림맹주 여불선의 솜씨다.”

“하하하, 천하의 당지위도 여불선 앞에선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나 보구만. 크크크. 한데 네가 여긴 어인 일이냐?”

“나효, 널 잡으러 왔다.”


당지위의 말에 나효가 깔깔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미친 새끼. 여불선한테 한번 혼나더니 아예 세상 살기가 싫어졌나 보군.”


당지위가 코를 훌쩍거리더니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불선한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도망치기 전 그의 아내를 죽였으니 어느 정도 빚은 갚은 셈이다. 그러니 너도 끔찍한 꼴 당하기 싫으면 나한테 순순히 투항하는 게 좋을 거다.”


나효가 돌연 웃음을 그쳤다.

그가 바로 옆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복양혁의 뒷덜미를 붙잡아 당지위에게 힘껏 내던졌다.

순간 당지위 옆에서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자의 손에서 뻗쳐 나온 날카로운 채찍이 복양혁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복양혁의 머리와 몸뚱이가 순식간에 두 개로 분리됐다.

당지위가 뒤미처 쇄도한 나효의 섬뜩한 조수를 복양혁의 몸뚱이를 방패 삼아 막아냈다.

자신의 공격 덕에 조각 난 육편을 잔뜩 뒤집어쓴 나효가 툴툴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좁은 계단 위에서 당지위가 양팔을 활짝 펼친 채로 나효를 향해 일갈했다.


“덤벼라, 나효. 이 당지위님이 네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마.”


나효가 송곳니를 번뜩이며 대항했다.


“주둥아리 닥치지 못하겠느냐? 나는 나효다, 나효! 마교의 이인자 나효란 말이다!”


그가 쌍욕을 내뱉으며 당지위를 향해 돌진했다.

당지위의 소맷자락에서 무한개의 금침이 나효를 향해 쏟아져 날아갔다.



*



소중원 천룡회 본산 은룡채.


천룡회 회장 상관금정의 집무실에 제갈세가 사람 하나가 찾아들었다.

상관금정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상장로 이춘수와 철혈대 대장 진가엽이 동시에 그 사람을 돌아봤다.

제갈승이 세 사람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제갈승,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상장로가 어두운 얼굴로 제갈승에게 물었다.


“제갈승, 형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을 터인데 여긴 어쩐 일이냐?”

“음, 하찮은 집안일로 대의를 소홀히 할 순 없어 조금 무리해서라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상장로님. 오늘 제가 형을 대신해서 여후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오겠습니다.”

“뭐? 여후의 장례식?”


옆에 있던 상관금정이 고개를 절레 흔들며 제갈승에게 물었다.


“장례식 사절은 벌써 출발했는데? 혹시 오다가 못 보시었소?”

“네? 출발이라뇨?”

“상관금천과 하후현 등 현무칠협이 아침 일찍 대도무문으로 향했소.”


제갈승이 대노하며 말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제가 아직 안 왔는데 어떻게 그자들끼리 먼저 갈 수 있습니까?”


진가엽이 이상하다는 듯 제갈승을 노려봤다.

상장로 이춘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제갈승, 너 형의 죽음으로 몸이 조금 상한 듯싶구나. 이만 물러가서 쉬도록 하여라. 형을 죽인 흉수는 우리가 찾아내도록 할 터이니.”

“상장로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걸 보십시오. 무림맹주 여불선이 제 앞으로 다시 보낸 장례식 초대장입니다. 밑부분에 보시면 제 이름이 똑똑히 쓰여 있습니다.”


진가엽이 제갈승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아 상장로에게 건넸다.

상장로가 콧김을 내뿜으며 초대장을 들여다봤다.

원래 제갈승의 형 제갈근의 이름이 적혀 있던 자리가 핏물로 반쯤 덮여 있었고, 그 밑에 제갈승이란 이름 석 자가 새로이 적혀 있었다.

상장로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더니 그 자리에서 초대장을 북북 찢어버렸다.

그가 차갑게 제갈승을 향해 말했다.


“제갈승, 잔말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네 형의 장례나 치러라. 장례가 끝난 뒤에도 내가 부를 때까지 은룡채엔 얼씬도 하지 말아라.”


제갈승이 대답하지 않은 채, 섬뜩한 눈동자로 상장로 이춘수를 쏘아봤다.

무심코 그 눈을 올려다보던 상관금정이 제갈승의 살기에 눌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다 못한 진가엽이 자신의 삼첨도에 손을 올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장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진 대장, 그만. 행여나 여기서 피 볼 생각은 하지도 말게.”

“······.”


진가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후 제갈승의 태도에 따라 진짜 그를 베어버릴 심사였다.

진 대장의 의중을 알아챈 이춘수가 달래듯 제갈승에게 말했다.


“제갈승,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응? 네가 형의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누가 네 형의 원혼을 달랠 줄 수 있단 말이냐.”


제갈승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주억이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진 대장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한데 문 앞에서 나가지 않고 잠시 멈춰 선 제갈승이 불쑥 혼잣말하듯 중얼댔다.


“정말 어쩔 수가 없군요. 사부님 말대로 당신들은 그저 명리만 쫓는 쓰레기일 뿐 전혀 사람을 볼 줄 몰라요. 만일 오늘 나를 총관의 신분으로 무림맹에 보냈다면 여러분의 명줄은 며칠은 더 연장됐을 거예요. 하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군요. 벌레들은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해요. 그게 맞아요. 그게 세상의 이치에요.”


진가엽이 불쾌한 듯 상장로를 쏘아봤다.

상장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관금정은 빈 잔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순간 쾅, 소리가 나더니 제갈승이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상관금정이 숨을 가다듬은 뒤 이춘수에게 물었다.


“저 새끼, 저거 미친 거 아닙니까?”

“최근 두 형이 연달아 죽음을 맞이했으니 저리된 것도 무리가 아닐 테지. 우리가 이해하자. 그나저나 제갈근의 죽음에 혈화문이 연루됐다는 게 나는 도무지······.”


그때였다.

갑자기 진가엽이 손을 들어 상장로의 말을 끊었다.

진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잠자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쯤 상장로와 상관금정도 뭔가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은룡채 요새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상장로가 진가엽을 향해 대갈했다.


“문에서 비켜서라!!”


진가엽이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순간 집무실 문이 박살나며 멧돼지의 머리를 한 집채만 한 크기의 괴물이 집무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백색 미늘로 둘러싸인 요시들도 함께였다.

도올이 요시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것들을 모조리 찢어버려라!”


요시들이 상장로와 상관금정, 진가엽을 덮쳤다.

그 무렵 은룡채 밖에서는 도철이 이끄는 좀비들이 천룡회 철혈대 무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소중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파헤쳐진 땅굴의 입구에서 요시들과 좀비들이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무림맹 침입을 막기 위해 소중원 사방에 둘러친 높다란 방책과 울타리가 오히려 사람들의 도주를 가로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중원 사람들 대부분은 요시들에게 산채로 뜯어 먹혔다.

그도 아니면 좀비에 의해 목이 뽑히고 팔, 다리가 절단났다.

소중원 중심가 환락시장에선 거미 괴물의 몸에 올라탄 요화가 요령을 쉴 새 없이 흔들고 있었다.

그녀가 요령을 흔들 때마다 거미 괴물의 꽁무니에서 허연 거미줄이 뿜어져 나와 사람들을 공중에 매달았다.

매달린 사람들의 몸속으론 어김없이 작은 벌레들이 파고들었다.

벌레들이 사람들의 뇌 속에 침입하면 어떤 자는 백색 괴물 요시로, 또 어떤 자는 흑색 괴물 좀비로 변했다.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수백, 수천, 수만의 괴물들을 보며 요화가 입꼬리를 한껏 치켜올렸다.

그녀가 종을 울리며 마교의 비밀스러운 주문을 끊임없이 읊어대고 있을 때 와지끈 소리와 함께 천룡회 본산, 은룡채가 송두리째 무너져내렸다.



*



무령궁.


충의 도장이 벼락처럼 내지른 검이 황건명의 검날을 피해 지상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도장이 피해낸 건 비단 황건명 뿐만이 아니었다.

공선 대사가 내지른 여래천신장(如來天神掌)의 장풍도 충의가 내지른 회심의 일검(一劍)을 막아내지 못했다.


카아아아앙――!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지상의 쌍두사가 충의 도장의 태극검과 맞부딪쳤다.

어마어마한 불꽃이 두 사람 사이에서 파닥파닥 튀기며 공중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흑도 잔챙이가 감히 자신의 검을 막아낼 줄은 생각도 못 했던 충의 도장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가 왼손을 구부려 자신의 검날을 감싸 안 듯 쓸어내리더니 머릿속에 떠오른 검결을 태극에 녹아냈다.

일순 북해의 빙하만큼이나 차가운 한기가 주변을 관통했다.

한기와 함께 날아든 충의 도장의 검이 태극과 원을 무한히 그리며 쌍두사의 검막을 뚫어냈다.

이후 충의의 태극검이 지상을 향해 순간순간 변화를 거듭하는 검초로 연거푸 7번이나 찔러졌다.

황건명과 공선 대사가 급히 지상을 도우러 다가섰지만, 충의 도장 뒤쪽에서 나타난 각 파의 우두머리들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황건명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한데 마땅히 충의의 검에 쓰러졌어야 할 지상이 제 자리에 우뚝 선 채로 태극검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그것도 내력을 사용하지 않은 순수 검술 실력만으로···.

충의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 홍사검과 흑사검 쌍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고 있는 이지상을 매섭게 노려봤다.

충의 도장이 검결을 짚던 좌수로 지상의 단전을 향해 권풍을 쏘아냈다.

한데 지상이 몸을 비틀어 권풍을 피하기도 전에 채인하가 불쑥 권풍 앞으로 파고든 뒤 매화검으로 바람을 모조리 흩트려 버렸다.

충의 도장이 채인하를 향해 대갈했다.


“이 노오오옴! 당장 물러서라!”


채인하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거세게 맞받아쳤다.


“안 됩니다! 도장! 지상은 맹주님의 초대를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녀석은 맹주님과 대담을 나누기 전에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버러지 같은 것이, 그간 오냐오냐해줬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어대는구나.”

“장문인, 제발 진정하십시오!”


황건명과 공선 대사도 옆에서 말을 덧붙였다.


“사형!”

“충의 장문인. 잠깐 검을 거두고 일단 맹주님을 뵌 후······.”


상황이 여의치 않게 흘러가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개방 방도들과 무림맹 무사들이 슬금슬금 지상에게 접근했다.

여차하면 암기나 비열한 수단을 써서라도 지상을 기필코 죽일 기세였다.

녀석들이 지상을 향해 뭔가를 하려던 그때 무영전 안에서 몇 사람이 추가로 걸어 나왔다.

무림맹 총관 사마랑과 모용균, 장태호였다.

사마랑이 모두를 향해 목청 높여 말했다.


“맹주께서 지금 당장 각파의 수장들을 무영전 안으로 들이라 명하셨습니다. 혈화문 문주 이지상과 충의 도장은 그만 검을 거두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맹주께서 기다리십니다. 아, 혹시 황건명 대장군과 공선 대사께서도 오셨습니까?”


황건명과 공선이 사마랑을 향해 인사했다.


“빨리 대전 안으로 들어와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맹주께서··· 맹주께서···.”

“알았으니 그만하시오.”


충의 도장이 뒤에 선 각 문파의 수장들과 함께 바쁜 걸음으로 대전 안으로 사라졌다.

지상과 채인하가 황건명, 공선 대사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사마랑이 모용균과 장태호에게 대전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선별해달라 부탁했다.

두 사람이 대전 입구를 지키고 섰을 때 대전 좌우 벽에 난 창문이 모두 활짝 열렸다.

그 역시 무림맹주 여불선의 지시였다.

무림맹 무사들과 개방 방도들이 창가로 달려가 무영전 안을 들여다봤다.

개방 장로 몇은 모용균에게 무기를 압수당한 뒤에야 겨우 궁전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얼마 뒤 멀리서부터 마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상관금천이 탄 마차가 무영전 앞까지 들어와서 멈춰섰다.

상관금천과 하후현이 잠깐 모용균과 대화를 나눈 뒤 서둘러 대전 안으로 사라졌다.


무영전 중앙에는 높은 단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꼭대기 사각 제단 위에 여후 은이정이 잠을 자듯 누워있었다.

무림맹주 여불선은 아내 옆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며칠 사이 살점 하나 없이 삐쩍 말라버려 가히 백골을 연상케 할 정도로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단 주변에 자리하고 앉자, 사마랑이 계단을 밟고 단 위로 올라 여불선에게 사정을 알렸다.

그러자 여불선이 퀭한 눈으로 좌중을 돌아보며 사마랑에게 물었다.


“이지상, 이지상, 그 녀석도 왔느냐?”

“네, 맹주님.”


사마랑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지상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여불선이 지상을 향해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진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리, 내 곁으로 오너라. 이지상, 너에게 들려줄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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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말의 혈화문(6) 23.12.30 83 3 17쪽
92 종말의 혈화문(5) 23.12.20 87 3 16쪽
91 종말의 혈화문(4) +1 23.12.17 85 3 16쪽
90 종말의 혈화문(3) 23.12.16 85 3 15쪽
89 종말의 혈화문(2) 23.12.15 96 3 14쪽
88 종말의 혈화문(1) 23.12.03 137 1 18쪽
87 피할 수 없는 전쟁(8) 23.11.27 147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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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피할 수 없는 전쟁(6) 23.11.22 143 2 18쪽
84 피할 수 없는 전쟁(5) 23.11.19 158 3 18쪽
83 피할 수 없는 전쟁(4) 23.11.15 162 2 19쪽
82 피할 수 없는 전쟁(3) 23.11.13 171 3 17쪽
81 피할 수 없는 전쟁(2) 23.11.12 183 3 14쪽
80 피할 수 없는 전쟁(1) 23.11.08 211 3 15쪽
79 그날의 기억(2) 23.11.06 208 2 21쪽
78 그날의 기억(1) 23.11.04 192 3 16쪽
» 여후의 장례식(6) 23.11.02 219 3 20쪽
76 여후의 장례식(5) 23.10.31 223 3 19쪽
75 여후의 장례식(4) 23.10.29 222 5 15쪽
74 여후의 장례식(3) 23.10.27 215 5 14쪽
73 여후의 장례식(2) 23.10.25 251 5 17쪽
72 여후의 장례식(1) 23.10.24 287 5 17쪽
71 야야장 사람들(5) 23.10.22 264 5 16쪽
70 야야장 사람들(4) 23.10.20 246 6 14쪽
69 야야장 사람들(3) 23.10.19 259 5 19쪽
68 야야장 사람들(2) 23.10.17 266 5 14쪽
67 야야장 사람들(1) 23.10.16 250 4 16쪽
66 중간 결산(2) 23.10.15 240 4 15쪽
65 중간 결산(1) 23.10.13 302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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