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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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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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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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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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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3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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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종말의 혈화문(1)

DUMMY

자정 무렵 시작된 전투는 어느새 사경(四更) 끝자락(새벽 3시)을 지나고 있었다.

그간 한 시도 쉴 틈이 없었던 홍 의원과 의녀들은 끝도 없이 밀려드는 부상병들의 홍수에 숨이 막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금파파가 진기로 부상병들의 혈도를 짚어 도움을 주었지만, 이젠 금파파도 전투 현장으로 떠나고 없기에 부득불 아편을 이용해 부상병들을 잠재워야 했다.

하지만 아편도 거즘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부상자들을 누일 침상도 터무니없이 부족해 차가운 땅바닥에 요를 깔고 환자들을 누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너덜거리는 팔꿈치를 톱으로 잘라낸 홍 의원이 잠시 의녀들에게 환자를 맡긴 뒤 뒤돌아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넘쳐나는 환자들로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고 있을 때 아상과 마상춘이 몸 밖으로 내장이 다 튀어나온 부상병을 들것에 싣고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의원님, 이 사람 어디다 놓을까요?”

아상이 땀에 흠뻑 젖은 얼굴로 묻자, 홍 의원이 조금 전 숨을 거둔 병사를 침상에서 밀쳐 바닥으로 떨어트린 뒤 그 자리에 부상병을 올리게 했다.

한눈에도 어려 보이는 부상병은 신음 중에 엄마를 찾았다.

의녀가 마른 옷감에 물을 적셔 부상병의 얼굴을 닦는 사이 홍의원은 흘러내린 내장을 독한 고량주로 소독한 뒤 주섬주섬 몸속으로 구겨 넣었다.

홍 의원이 아상과 마상춘을 향해 말했다.

“좀 도와주겠나?”

“아, 네, 의원님.”

아상과 마상춘이 부상병의 뱃가죽을 붙잡고 있자, 의녀가 부상병의 입에 북채처럼 보이는 재갈을 물렸다.

홍 의원이 마취도 없이 뱃가죽을 꿰매기 시작했다.

어린 병사는 바늘이 살가죽을 뚫을 때마다 이를 악물고 몸부림치다 끝내 혼절하고 말았다.

홍 의원이 남은 부위를 마저 꿰매는 사이 아상과 마상춘이 사색이 된 채로 환자에게서 물러났다.

순간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철두와 강군이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철두가 대뜸 환자들 사이로 파고들어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가 멀뚱히 선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상과 마상춘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야, 너희들. 그거 내려놓고 땅에서 소리 나는 곳 좀 찾아봐.”

“네?”

“땅바닥에 귀를 갖다 대라고! 빨리!”

철두의 사나운 외침에 아상과 마상춘은 영문도 모른 채 들것을 내려놓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철두가 일어나 몇 장 거리 위쪽으로 이동해 다시 바닥에 얼굴을 대고 귀를 기울였다.

순간 마상춘이 손을 들고 외쳤다.

“여기요, 여기 밑바닥에서 쿵, 쿵쿵 소리가 들려요.”

강군이 달려가 다짜고짜 상춘을 밀쳐낸 후 땅바닥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다.

상춘과 아상이 주변에 있던 환자들을 옆으로 옮겼다.

벽력탄이 들어있는 나무상자를 들고 다가온 철두가 상자에서 벽력탄 몇 개를 꺼내 심지에 불을 붙였다.

잠시 뒤 땅을 한 자 가량이나 파낸 강군이 철두를 향해 일갈했다.

“정확해! 바로 밑에서 좀비들이 떼거지로 올라오고 있다.”

철두가 구덩이로 내려갔다.

철두와 강군이 땅속 지하갱도와 이어진 손바닥만 한 구멍 안으로 불붙인 벽력탄을 떨어트렸다.

허겁지겁 흙을 퍼서 구멍을 틀어막은 철두가 홍 의원과 의녀들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뭐라도 붙잡고 충격에 대비하세요!!”

곧바로 땅이 울렸다.


쿵, 쾅쾅쾅――!!


땅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진 강한 굉음과 진동이 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막사 안으로 흙먼지가 휘날렸다.

미처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홍 의원은 비틀거리다 끝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진동이 잠잠해진 뒤, 강군이 다시 땅에 귀를 대고 소리의 방향에 집중했다.

그사이 아상이 강군에게 다가와 소리 죽여 물었다.

“강군 아저씨, 혹시 아까 홍금보 형님 찾으러 가지 않으셨어요?”

강군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철두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짓으로 막사 밖 어딘가를 가리켰다.

철두가 끄덕인 다음 나무상자를 챙겨 강군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아문과 공칠이 환자들을 데리고 막사 안으로 들어오다 철두와 어깨를 부딪쳤다.

의녀들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 있던 홍 의원이 아문 일행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더이상은 수용이 어렵다 손사래를 쳤다.

가만히 막사 안 상황을 둘러본 철두가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비교적 경상자들은 상춘각으로 옮기고, 시체나 중환자들은 중망루 안으로 이동시키세요. 홍 의원과 의녀들은 여기 일 마무리하고 바로 철수하시고.”

“어디로 말입니까?”

“상춘각이요. 이제 그곳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상이 황급히 물었다.

“철두 형님, 중환자들을 중망루로 옮기고 나면 그 후엔 어떡할 건데요? 다들 상춘각으로 철수해 버리면···.”

철두가 아상에게 큰 걸음으로 다가가 녀석의 귀에 대고 사납게 속삭였다.

“방법이 없어. 살리고 싶어도 살릴 수가 없다고!”

“······.”

철두가 아상의 어깨를 툭 친 뒤 마상춘을 불렀다.

“상춘아!”

“네.”

“너는 당장 중망루 꼭대기로 올라가서 몽 고문한테 아편 좀 더 달라고 해. 그걸로 중환자들을 좀 편하게 해줘.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철두가 몸을 돌려 멍해 있는 아상의 팔을 붙들었다.

“아상이 너는 우리 따라오고, 나머지는 아까 시킨 대로해.”

순간 막사 밖에서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괴수 한 마리가 방책을 넘었다. 의방 천막 쪽으로 달려간다! 거기 조심! 비켜, 위험해!”

밖에서 물통을 싣고 오던 의녀가 요시의 이빨에 상체가 찢겨 날아갔다.

요시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의방 막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노호를 터뜨리며 침상을 밟고 오른 철두가 요시를 향해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요시가 철두의 청룡도를 피해 가까운 침상 밑으로 파고들었다.

요시의 날카로운 발톱이 부상병들을 단체로 쓸고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고통의 비명이 터졌다.

괴수가 아가리를 넓게 벌린 채 홍 의원과 의녀들이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달려갔다.

녀석이 막 제 입안으로 사람들을 집어삼키려는 데 마상춘이 요시의 옆구리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그와 동시에 요시의 배 쪽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든 강군이 도끼날로 비교적 얇은 괴수의 뱃가죽을 세로로 길게 찢었다.

요시가 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사람들을 향해 채찍꼬리를 닥치는 대로 휘둘렀지만, 철두가 맨손으로 꼬리를 붙잡고 청룡도의 칼날로 싹둑 잘라냈다.

마침 요시의 몸속을 파고든 강군의 손도끼도 요시의 심장을 두 개로 갈랐다.

요시가 그제야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데 순간 녀석의 앞발톱이 미처 요시 밑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군의 목덜미를 스쳤다.

손가락만 한 길이의 요시의 발톱에 목덜미가 찢긴 강군은 손으로 새어 나오는 피를 막고서 요시 밑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기겁한 철두가 달려와 강군의 가슴 쪽 혈도를 눌러 피를 지혈시키자, 홍 의원이 약 상자를 가지고 허겁지겁 곁으로 다가왔다.

강군이 됐다며 고개를 흔든 뒤, 철두에게 시간이 없다고 소리쳤다.

철두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강군의 손에 쥐여주자, 강군이 손수건으로 목의 상처를 틀어막은 채로 철두와 함께 막사를 빠져나갔다.

아상이 뒤따르며 다시 한번 두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철두 형님, 혹시 홍금보 형님을···.”

“그만 좀 물어, 새끼야! 죽었어! 죽었다고!”

“네?”

“홍금보는 죽었다니까! 닥치고 따라와, 강시가 땅을 뚫고 나오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충격에 휩싸인 아상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요시의 사체를 막사 밖으로 옮긴 아문과 공칠이 뒤미처 들어온 황군 병사들과 함께 홍 의원이 골라준 중환자들을 중망루로 옮겼다.

그에 앞서 망루로 들어선 마상춘이 계단을 밟고 꼭대기 층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5층에 접근하자 여화단 무사의 거친 고성이 들려왔다.

“몽 고문님, 저기 북서쪽이요!! 한 무리가 목책으로 돌진하고 있어요!!”

“알았다.”

난간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올라선 몽일천의 전신이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듯 붉게 달아올랐다.

일순 그의 양 손바닥 위로 두 개의 거대한 화염구가 동시에 떠올랐다.

몽일천이 화염구를 중망루와 상춘각을 이은 병목처럼 생긴 좁은 통로.

목책으로 둘러싸인 그 좁은 통로를 향해 돌진 중인 요시들 머리 위로 힘껏 내던졌다.

“뒈져라, 이 요망한 무리들아!”

거대한 화염구가 날아가 요시들을 불태웠다.

피격당한 요시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날뛰다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은 여화단 무사가 화살을 먹인 활을 계단 아래로 돌리는데, 마상춘이 놀라 양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철두 형님이 몽 고문님한테 아편을 더 얻어오라고 해서···.”

몽일천이 난간 아래로 내려섰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운신공을 가라앉힌 뒤 무슨 생각에서인지 상춘을 붙잡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몽일천이 4층 계단참에서 걸음을 멈춘 다음 상춘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이 길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다오.”

“네?”

“상춘각으로 집사람과 릴리를 데려가 줘. 당장.”

“아, ···네.”

몽일천이 4층 방문을 틀어막은 나무 판데기를 거친 손길로 뜯어낸 후 방안으로 들어섰다.

릴리와 그의 아내 줄리, 무어인 아이 시아티, 휘 노인의 아들 정연과 성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몽일천을 응시했다.

몽일천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다들 바로 상춘각으로 이동할 거니까, 간단한 짐만 챙겨서 빨리 나가, 응? 내 말 안 들려?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빨리 서두르라고!”

몽 고문의 아내 줄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여보, 전투가 끝났어요?”

몽일천이 줄리의 좁은 어깨를 양손으로 붙들고 서역 언어로 대답했다.

“여보. 미안하지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당장 애들 데리고 상춘각으로 이동해야 해. 여기 이 친구를 따라가면 될 거야.”

“당신은요?”

릴리가 다가와 몽일천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빠는요?”

“나도 곧 따라갈 거야. 거기 정연아, 잠깐만 비켜줄래?”

진열장을 가리고 서 있던 정연이 옆으로 비켜서자, 상춘이 진열장 깊숙한 곳에서 루앵이 들어있는 은합을 꺼냈다.

그가 마상춘에게 은합을 건네며 말했다.

“남은 건 이게 전부다.”

“네.”

“가라, 당장.”

순간 릴리가 몽일천에게 매달렸다.

“아빠, 아빠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갈래요.”

몽일천이 딸을 품에 깊숙이 끌어안고서 딸아이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속삭였다.

“금방 다시 보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엄마랑 같이 가 있어. 아빤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그것만 마저 끝내고 바로 뒤따라 갈게.”

릴리가 젖은 눈망울로 아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약속하시는 거죠?”

“응, 약속.”

그때 5층 망루에서 여화단 무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고문님. 남쪽 방책이 너무 위험합니다! 화살로는 안돼요!!”

“알았어!”

딸아이를 아내 손에 맡긴 몽 고문이 헐레벌떡 방을 뛰쳐나갔다.

마상춘이 남겨진 사람들을 데리고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쪽에선 벌써 황군 병사들에 의해 중환자와 시체들이 망루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1층은 금세 꽉 찼고 2층, 3층까지 부상병들이 끝도 없이 밀려 올라왔다.

걔 중엔 자신이 버려질 거란 사실을 인지하고 병사들에게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상춘이 릴리 일행에게 잠시 기다리라 말한 뒤, 의식이 있는 환자들에게 다가가 루앵을 하나씩 먹였다.

거부하는 자는 억지로 먹이지 않고 손에 가만히 쥐여주었다.

그런데 문득 겹쳐 누워있는 환자들 사이로 낯익은 옷가지가 보였다.

그것은 이주의 담비 털가죽 조끼였다.

이주가 처음 장원에 도착했을 때 금파파가 선물해준 옷인데 이주는 그것을 절대 몸에서 떼어낸 적이 없었다.

상춘이 겹쳐 있는 환자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옮기자, 그 아래 깔려있던 이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갖다 대니 희미하긴 해도 호흡이 느껴졌다.

그때 상춘처럼 이주를 알아본 성연과 정연 형제가 다가와 환자들 밑에서 이주를 꺼내는 걸 도왔다.

상춘이 몸을 숙여 이주를 등에 업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무게가 너무도 가볍게 느껴졌다.

원래 이주는 홍 의원에게 치료를 받은 뒤 막사 한쪽에 옮겨져 있었다.

정청하가 맡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지만, 밖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전투 상황에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청하가 의녀에게 언질 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사정을 모르는 황군 병사들에 의해 이주는 이곳으로 옮겨졌다.

마상춘이 앞장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 시아티와 릴리, 줄리와 성연, 정연 형제가 재빨리 그를 뒤따랐다.

망루를 나서기가 무섭게 방책 너머로 몸집이 집채만큼 커다란 멧돼지 괴수가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도철이었다.

황군 천부장 두 사람과 추문강이 방책 밖에서 도철이 방책을 부수지 못하게 혼신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다.

정청하도 추문강 옆에서 요시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철의 섬뜩한 포효를 뒤로하고 마상춘이 상춘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제2 저지선과 상춘각 사이를 연결하는 좁은 청석길에는 3장 높이의 목책이 이중으로 세워져 있었다.

목책을 뛰어넘어 침입한 요시들은 휘노인과 황군 병사들, 피난민 일부가 암기와 창칼을 휘둘러 막아내는 중이었다.

중망루 꼭대기에서 무섭게 내리꽂히는 몽일천의 화염구도 그들을 도왔다.

마상춘 일행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거대한 화염구를 바라보며 휘노인과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때였다.

이주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아···.”

상춘이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주 누님, 깨어나셨어요?”

“···상춘이? 너, 상춘이냐?”

“네, 누님, 괜찮으세요?”

“괜찮긴, 좆나게 아픈데. 크크크.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야?”

“말하지 마세요. 지금 상춘각으로 가는 중이에요.”

“그래? 그렇군. 아···, 근데 나 안 무겁냐?”

“네, 하나도요.”

“하하하··· 지상이는, 지상이는 왔어?”

상춘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말을 둘러댔다.

“아, 네, 금방 도착한다고 비둘기 편으로 전해왔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다.”

“누님, 말 그만하시고 호흡 진정시키세요. 이제 다 왔어요. 조금만 가면 상춘각이에요.”

대답이 없었다.

뭔가 불길했다.

“누님?”

그때 마상춘 일행이 지나던 바로 옆 목책을 요시들이 바깥쪽에서 들이받았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튕겨 나온 통나무 조각이 마상춘을 향해 날아왔다.

나무 조각을 간신히 피한 마상춘이 눈밭에 미끄러졌다.

뒤따르던 성연과 정연이 이주가 땅바닥과 부딪치기 직전 그녀의 몸을 붙들었다.

이미 뭔가를 깨달은 마상춘이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와 이주를 품에 안아 들었다.

이주의 벌어진 입에서는 작은 숨결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고 두 눈동자는 눈 내리는 잿빛 하늘로 향한 채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상춘이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뒤편에 있던 아이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창졸간 악인곡에서부터 이어진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상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근처에서 한 무리의 요시들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휘 노인이 아들들에게 달려왔다가 이주의 죽음을 목격했다.

휘 노인은 상춘을 그곳에 남겨둔 채 아이들과 몽 고문의 아내를 데리고 상춘각으로 이동했다.

때맞춰 반대편에서 달려온 홍 의원과 의녀들이 그들 무리에 합류했다.

상춘각 대문은 피난민 일부와 안개위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휘 노인이 안개위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다들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게냐? 빨리 사람들 안 들여보내고!!”

안개위가 구겨진 얼굴로 휘 노인을 돌아본 뒤 불안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괴, 괴수들이 하늘을 날아다녀요.”

“뭐?”

안개위 말대로였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는 백색 요시 십여 마리가 중망루 주위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여화단이 녀석들을 향해 화살을 마구 쏘아댔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니는 괴수들을 화살로 맞춰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느덧 하늘 높이 비상한 요시 한 마리가 매가 수면으로 돌진하듯 중망루 꼭대기를 향해 무식하게 떨어져 내렸다.

때맞춰 난간을 밟고 올라선 몽일천이 두 손을 모아 괴수에게 홍염장을 격출했다.

시뻘건 불길이 괴수를 덮쳤지만, 괴수가 망루로 떨어지는 걸 막아내진 못했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망루의 지붕이 박살 나고 불붙은 괴수의 몸뚱이가 망루 5층을 초토화시켰다.

충격파로 인해 여화단 무사 두 사람이 망루 밖으로 떨어졌다.

칼을 뽑아 든 몽일천이 헐떡이는 요시의 심장을 찔렀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머지 요시들이 부서진 망루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온몸이 시커멓게 그을린 여화단 여자 무사가 한쪽 구석에 배치된 나무상자를 향해 기어갔다.

여자 무사가 상자를 열어 벽력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기 전 몽일천과 눈을 마주쳤다.

몽일천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주억인 뒤,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밑에서 방패 부대를 지휘 중인 육손을 향해 대갈했다.

“육 책사! 육 책사! 여긴 이제 끝이야!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

육손이 놀란 눈으로 망루를 올려다봤다.

몽일천이 날아드는 요시들을 향해 일신에 남은 화운신공의 진기를 모두 끌어다 어마어마한 홍염장을 쏘아냈다.

세 마리가 불길에 휩싸였고, 그중 한 마리는 날개가 꺾여 땅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두 마리는 그대로 몽일천을 덮쳤다.

육손이 황급히 병사들을 향해 피하라 소리쳤다.

나머지 요시들까지 중망루 속으로 모두 내려선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중망루가 폭발했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층마다 설치된 벽력뇌화탄이 펑펑, 펑펑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망루에서 촉발된 부서진 돌조각과 나무 파편들이 마치 화산 분화구에서 뿜어진 낙진처럼 병사들 후방을 맹렬히 덮쳤다.

혼란에 빠져 아우성치는 병사들 위로 들보와 벽돌이 뒤엉킨 무지막지한 크기의 돌무더기가 그대로 쓰러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돌무더기에 깔린 순간, 경천동지할 파공음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시커먼 연기가 제2 저지선을 완전히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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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말의 혈화문(6) 23.12.30 96 3 17쪽
92 종말의 혈화문(5) 23.12.20 95 3 16쪽
91 종말의 혈화문(4) +1 23.12.17 93 3 16쪽
90 종말의 혈화문(3) 23.12.16 92 3 15쪽
89 종말의 혈화문(2) 23.12.15 104 3 14쪽
» 종말의 혈화문(1) 23.12.03 145 1 18쪽
87 피할 수 없는 전쟁(8) 23.11.27 153 2 14쪽
86 피할 수 없는 전쟁(7) 23.11.25 148 4 13쪽
85 피할 수 없는 전쟁(6) 23.11.22 149 2 18쪽
84 피할 수 없는 전쟁(5) 23.11.19 164 3 18쪽
83 피할 수 없는 전쟁(4) 23.11.15 169 2 19쪽
82 피할 수 없는 전쟁(3) 23.11.13 175 3 17쪽
81 피할 수 없는 전쟁(2) 23.11.12 189 3 14쪽
80 피할 수 없는 전쟁(1) 23.11.08 217 3 15쪽
79 그날의 기억(2) 23.11.06 215 2 21쪽
78 그날의 기억(1) 23.11.04 200 3 16쪽
77 여후의 장례식(6) 23.11.02 225 3 20쪽
76 여후의 장례식(5) 23.10.31 234 3 19쪽
75 여후의 장례식(4) 23.10.29 232 5 15쪽
74 여후의 장례식(3) 23.10.27 225 5 14쪽
73 여후의 장례식(2) 23.10.25 258 5 17쪽
72 여후의 장례식(1) 23.10.24 302 5 17쪽
71 야야장 사람들(5) 23.10.22 270 5 16쪽
70 야야장 사람들(4) 23.10.20 253 6 14쪽
69 야야장 사람들(3) 23.10.19 265 5 19쪽
68 야야장 사람들(2) 23.10.17 272 5 14쪽
67 야야장 사람들(1) 23.10.16 258 4 16쪽
66 중간 결산(2) 23.10.15 247 4 15쪽
65 중간 결산(1) 23.10.13 306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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