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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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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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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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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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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2)

DUMMY

마지막 베르미가 성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길버트가 창을 잡은 손에 더 이상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됐을 즈음, 성벽 한 구석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이겼다!"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예의 그 의식처럼 행해지는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것은 확실한 전투의 끝을 알리는 행위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길버트는 몸의 긴장을 의식적으로 풀었다.

몸은 평소보다 더 뻐근하고 엉망진창이었다.

오늘 하루 있었던 노동의 과격함에 육체가 시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버트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당연히 주저앉지는 않았다.

총 지휘관이 병사들 앞에서, 그것도 전투가 이미 끝난 마당에 비틀대고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 분명했다.

길버트는 보급대가 있는 천막으로 천천히 걸어간 뒤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의자에 앉았다.


"전부 죽여라! 찢어버려!"


여태 수백 번의 승전보를 울렸음에도 단 한번의 패전보조차 허락되지 않는 가여운 병사들이, 성벽에 남은 베르미들을 말 그대로 짓이겨 놓고 있었다.

병사들의 발길질은 과감하고 거칠었다.

그 탓에 전투가 끝난 성벽 위는 엉망이었다.

초록색 피와 베르미들의 다리, 그리고 몸에서 뜯겨진 얇은 날개나 부서진 외피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이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워진 성벽을 보며 길버트는 전투의 뒤처리가 상관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길버트는 고개를 들었다.

지평선 근처에 태양이 걸려 있었다.

태양은 마치 마지막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더 붉게 발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장면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는,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낮과 밤의 교대 장면이었다.

다만 그 장면을 바라보는 길버트의 감회는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태양은 분명 몇 달 전보다 훨씬 이른 시각임에도 벌써부터 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루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고 그 증거는 도무지 희망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그 땅에서 길버트가 유일하게 위안 삼고 있는 부분이었다.

길버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겨울.'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날이 멈추지 않는 한 언젠가 겨울은 온다.

하지만 현재 겨울이라는 단어는 길버트에게 있어서는 희망이라는 단어와 완벽하게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온화한 기후였지만 듀라트 영지에도 엄연히 겨울이 존재한다.

그 사실은 길버트에게 거의 기적처럼 느껴졌다.

길버트는 영지의 겨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개인적인 취향에 기반한 기다림은 아니었다.

길버트는 기후와 저 빌어먹을 요괴들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한 겨울이 되면 베르미들은 아마 정오에도 활동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겨울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시점에 총 지휘관으로써 길버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못해 단순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겨울까지 영지를 지켜내면 된다.

겨울이 오면 듀라트 영지의 모든 시민들은 그 틈에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길버트는 혀를 찼다.

인간으로서 단순히 한 계절을 보낸다는 것조차 이토록 지난하다는 사실이 길버트는 어이가 없었다.

길버트는 하늘을 쳐다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고선 다시 무심한 얼굴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살육 장면을 지켜보며 길버트는 잠잠히 오늘 있었던 전투를 복기했다.


오늘 역시 그리 특이한 일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비참하게 발버둥치는 인간과 베르미들이 있었을 뿐이다.

잠잠한 복기 와중에 어떤 묘한 상상이 길버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길버트는 그 갑작스럽고 격렬한 의식의 흐름에 집중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현재 성벽 위의 모습이었다.

길버트는 아주 높은 하늘에서 관망하는 듯한 시야로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밀러가 베르미들을 상대로 취하고 있는 진형은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상식적인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밀러는 가장 적은 수의 침입 만을 허용하기 위해 난간을 방패병으로 틀어 막아 놓았다.

또 그 방패병들의 후미를 지키기 위해 보병을 배치한 점도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무의식의 기저에서 알 수 없는 생각들이 샘물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떠오른 생각들을 길버트는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베르미들은 정면으로 싸워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을 숫자다.

겨울이 다가온다.

베르미들은 성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다만 완벽한 성체가 아닌 베르미들은 성벽을 넘지 못한다.

겨울이 다가온다.

성체가 아닌 녀석들은 눈 깜짝할 사이 성체로 자라버린다.

결국 죽인 숫자와 동일한 숫자의 미성숙한 베르미들이 다음 날 성체가 되어 성벽 위에 내려 앉는다.

겨울이 다가온다.


길버트는 소용돌이 치는 무의식의 강에서 헤엄쳤다.

한편 성벽 한 구석에서 마지막까지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던 밀러는 그때쯤 제 할 일을 전부 끝낸 상태였다.

밀러는 자연스레 보급대 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보급대로 이동한 밀러는 그곳에서 미간을 잔뜩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길버트의 모습을 발견했다.

밀러는 의아함을 느끼며 말을 건네려 했다.

갑자기 길버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에는 보여준 적 없는 과격한 몸놀림이었다.

그래서 밀러 역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길?"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예 방법 말입니다 밀러. 그러니까..."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설명하려던 길버트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방금 전 떠올린 생각이 정말로 바람직하고 합당한 생각인지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다.

길버트가 말을 멈추자 밀러 쪽에서 다분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길버트는 밀러가 어떤 의심을 품고 있는지 알아챘다.

길버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미친 건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이상하군요. 어차피 제 자신이 미쳐 있다면 스스로는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럼 타인에게 물어보는 편이 정확하겠지요. 영감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밀러는 미친 사람의 표본 같다는 말을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쾌활하게 웃어버렸다.


"뭐 가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야 부정할 수 없겠지만 아직은 괜찮은 것 같구먼."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노인의 웃음에 길버트는 작게 미소 지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길버트는 어쩌면 밀러라면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떠올린 것을 곧바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길버트는 일단 다른 것에 대해 묻기로 했다.


"혹시 저택 저장고에 호르체도 있습니까."


"호르체? 물론 있지. 그렇지만 자네가 마시기에는 너무 독할 텐데."


"괜찮습니다 마시고 싶은 기분이군요. 그보다 오늘은 조금 일찍 저택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긴히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응? 그래, 뭐 그렇게 하지. 그럼 뒷일은 월렛에게 맡겨야겠구먼."


밀러의 대답을 들은 후 길버트는 곧장 성벽의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홀로 남게 된 밀러는 불현듯 길버트가 꺼낼 말에 대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잠시 뒤 밀러는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밀러는 길버트를 따라 성벽에서 내려갔다.



*



주변은 어두웠다.

그리고 밀러의 방에서 빠져나온 길버트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넘어질 뻔하고 나서야 자신이 평소보다 더 얼큰하게 취했음을 깨달았다.

밀러가 대접한 것은 북부에서도 보기 힘든 꽤 상등품의 호르체였다.

호르체는 질이 좋을 수록 독하며 무색, 무미, 무취에 가깝다.

밀러가 내놓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북부인들은 거의 물을 마시듯 호르체를 마시곤하지만 남부인에게 호르체는 너무 독한 술이다.

그래서 조금 전 밀러의 방에서 두 사람은 남부에서 흔히 먹는 방식대로 향이 좋은 사과주와 물을 섞어 마셨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 선택은 길버트를 꽤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섞은 술은 부드럽게 잘 넘어갔고,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평소보다 꽤 많이 넘겼다.

길버트는 숨을 뱉을 때마다 점점 더 진해지는 사과향과, 그 향을 맡을수록 더 투미해지는 정신을 느꼈다.

내뱉는 숨이 다시 자신을 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길버트는 문득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해선 안될 이유야 당연히 없었다.

길버트는 발걸음을 바꿔 저택의 정원 쪽으로 나섰다.


듀라트 영지는 그리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정원은 여전히 화려했고, 또 코를 찌를 만큼 향기로웠다.

정원을 보며 길버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겨울에 피는 꽃이라고 해 봐야 몇 종류 되지도 않는다.

정원은 그 적은 가짓수를 느낄 수 없도록 교묘한 배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길버트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베르미들의 비릿한 혈향, 바닥과의 마찰로 갈려나가는 창 끝의 쇠 냄새, 두터운 갑옷 안에서 올라오는 눅눅한 땀 냄새와 가죽 내.

정원의 향은 오늘 정오부터 쭉 맡아왔던 그 더러운 냄새들을 모조리 씻겨 낼 만큼 압도적이었다.

길버트는 얼마간 순수한 마음으로 향을 즐겼다.


한참을 눈을 감은 채 서 있던 길버트가 어느 시점에 눈을 떴다.

다시 한 번 정원을 둘러본 길버트는 백작 부인이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한 미적 감각을 가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개월 전 최후의 사용인까지 해고해버렸기에, 현재 저택에는 백작 부인과 하멜 집사 그리고 밀러와 자신까지 포함해서 단 네 명만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중 누가 이 정원을 가꾸고 있는지는 자명했다.

당연히 길버트는 아니었다.

하멜 집사는 아마 영지의 남은 재정을 관리하기에도 벅찰 것이다.

그리고 밀러의 경우에는.

생각의 그 지점에서 길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 노장이 챙이 넓은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채로 정원을 손질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퍽 유쾌했다.

결국 종내에 길버트는 킬킬대는 소리까지 내며 웃고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현명한 노인에게는 정원용 가위보다는 창 쪽이 어울렸다.


아무튼 소거법에 따라 정원을 가꾼 것은 백작 부인일 것이다.

길버트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정원을 가꾸고 있는 백작 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기에 약간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백작 부인은 귀족의 명예란 훌륭하게 가꾸어진 정원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여자다.

그러니까 부인은 귀족의 명예를 지키고자 정원을 가꾸었을 것이다.


길버트는 그것이 참으로 순박하고, 고지식하며, 또 존경할만한 귀족 다운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길버트는 무성의하게 방치된 정원과, 직접 정원을 손질해야만 하는 백작 부인의 처지.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귀족의 명예를 손상 시키는 일인지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치는 결국 개인의 잣대에 따르게 되는 법이다.

애초에 자신과 백작 부인의 눈금이 다르다면 비교는 무의미할 것이다.

한참 동안 정원을 감상했지만 길버트의 내부를 잠식한 취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후 길버트는 지금 내뱉고 있는 숨에서 나는 향이 자신을 더 취하게 만든다는, 그 어이없는 가설이 아무래도 옳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하하."


길버트는 짧게 조소했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어리석고 때론 무모하기까지하다.

여느 때와 달리 지금 이토록 깊게 취한 이유를 길버트는 이미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술이 다른 날보다 잘 넘어갔다는 그런 보잘것없는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길버트는 호르체를 마시며 밀러와 상의했던 작전을 떠올렸다.

그 작전은 지금도 얼마 남지 않은 영지의 청년들에게 더욱 큰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그래서 길버트는 평소보다 더 많이 마실 수 밖에 없었다.

백작 부인이 정원을 가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지식하고, 순박한 이유였다.


길버트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길버트는 아마 자신이 그럴듯한 병법서 하나쯤은 쉽게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좋은 군사는 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자고로 좋은 군사란 가능한 적은 병력을 소모해 가능한 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만드는 자다.

하지만 길버트는 도저히 그런 식으로 영지민들을 소모할 수 없었다.

물론 이르면 내일부터 영지의 청년들을 소모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전술적 소모라기보다는 역시 희생에 가깝다.


우울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길버트는 불현듯 무릎 근처에서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길버트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취기 탓에 그만 허둥지둥대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길버트는 영지의 총 지휘관이 술에 취한 탓에, 고작 한 마리의 베르미 자객에게 물어 뜯겼다는 애석한 소문이 퍼질 것을 염려했다.

길버트는 재빨리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래에 접근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길버트는 긴장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발치에 다가온 것은 삐쩍 마른 카니쿨라였다.


길버트는 작게 미소 지으며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부드러운 손길로 카니쿨라의 머리를 쓰다듬던 길버트는 카니쿨라의 목에 작고 가느다란 인식표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누가 기르고 있는 카니쿨라인지 확인하려던 길버트는 곧 그 짓을 그만두었다.

인식표는 잔뜩 구부러진 동시에 너무 닳아 있었다.

그 탓에 양각으로 새겨진 이름이 거의 지워져 있었다.

하긴 만약 인식표의 이름이 선명해서 그 주인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의미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 주인은 지금쯤 지하에 묻혀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길버트는 다시 카니쿨라의 부드러운 머리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카니쿨라의 다리 쪽이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제서야 길버트는 이 작고 가련한 병사에게 영지의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 너도 열심히 싸웠구나."


말을 내뱉고 나자 길버트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길버트가 상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주머니 안에는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방을 나오기 전 밀러가 억지로 쑤셔 넣었던 육포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육포를 전부 바닥에 쏟아내자 카니쿨라의 꼬리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길버트는 녀석이 그대로 주둥이를 처박고 육포를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카니쿨라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길버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이내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과 가장 친숙한 그 요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카니쿨라의 눈에서 새어 나온 노란색 액체가 방울지더니 결국 주둥이 옆면을 타고 미끄러졌다.

알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길버트는 정원을 한 번 둘러보았다.

만이 타오르고 있었기에 정원은 어느샌가 만의 붉은 빛에 온통 침식 당해 있었다.

작은 연못의 표면은 빛을 반사해 루비처럼 번뜩였다.

바닥을 덮고 있는 잔디는 초록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잃은 채 붉고 표면이 거친 벨벳처럼 깔려있었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덩굴은 꼭 피에 젖은 손이나, 혹은 그것을 표현한 무기질적인 태피스트리 같았다.

길버트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활기 넘치고, 또 수윤한 그림 같았던 정원은 순식간에 신비한 영역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정원 옆에서 카니쿨라가 눈물을 흘리며 길버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불현듯 길버트는 카니쿨라가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자신을 대신해서 울고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미신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며 길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버트는 지체 없이 저택 안으로 발을 놀렸다.

정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마지막 모퉁이에서 길버트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자신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홀로 남겨진 카니쿨라는 여전히 길버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서는 여전히 투명하고 노란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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