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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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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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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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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뚱하게 바라보기. (10)

DUMMY

세평이야 어떻든 듀라트 저택의 집사는 영지에서 가장 명망있는 인간이 분명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다.

다른 모든 시민들은 애초에 명망이 없기 때문이다.

백작의 실종으로 인해 듀라트 영지는 남부의 치부나, 부스럼 정도로 여겨지는 곳이 되고 말았다.

명예와 인망 같은 것들은 결국 타인의 평가에 의해 생겨나는 법이다.

따라서 영지의 시민들에게 명망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하멜 집사는 경우가 달랐다.

하멜의 경우 오히려 백작의 실종으로 인해 더욱 명망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백작이 사라진 후에도 집사의 예절은 완벽했고, 몸가짐 역시 쭉 고귀했다.

가장 까다롭고 흠잡기를 좋아하는 인간들도 인정할만한 것이었다.

더불어 행정적 수완 또한 뛰어났다.

백작 부인은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 듀라트 백작과 결혼했다.

그래서 백작의 실종 이후 영지는 일종의 공백 상태에 놓였었다.

백작 부인이 정치는 고사하고 영지의 안주인 역할도 해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어려운 상황을 타개한 건 하멜의 공이 컸다.

하멜은 백작 부인을 보필했고, 영지의 살림을 도맡았고, 또 시민들을 교육했으며, 도시 계획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명망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시민들은 간혹 백작 부인이 아닌 하멜 쪽을 영지의 진정한 주인으로 여기기도 했다.

물론 그런 믿음으로 인해 듀라트 영지에 정치적 암투나, 혼란이 야기되는 일은 없었다.

하멜은 자신은 그저 집사에 불과하다고 누누이 말하고 다녔으며, 어떤 공식적인 직책이나 권한도 거부했다.


뭐가 됐든 하멜은 집사로서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인간이었다.

영지의 모든 시민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길버트는 지금 밀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종군하려는 집사를 한사코 말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길버트는 저택 앞에서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

밀러가 고함쳤다.


"자네는 집사잖나! 여태 해왔던 것처럼 저택이나 관리하라니까. 그게 자네가 평생 해왔고 가장 잘하는 일이잖나. 평생 검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주제에, 갑자기 병졸이 되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자네 나이를 생각하게 나이를."


밀러의 지적은 꽤 합리적이었다.

하멜은 그 지적에 대해 약간 새초롬한 말투로 대꾸했다.


"밀러 자네가 잊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두겠네만 내가 자네보다 한 살 어리다네. 그러니까 나이를 생각해야 하는 건 자네 쪽이지."


그때까지 역정을 내고 있던 밀러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는 듯 눈을 꿈뻑거리며 하멜을 쳐다보았다.

집사는 완고한 의지를 품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말일세. 새파랗게 어렸던 핸슨 그 녀석도 뛰어난 무인은 아니었지 않나. 하지만 여태 잘 싸워왔지. 그러니 나라고 못할 것은 없네."


두 노인의 설전을 감상하고 있던 길버트는 하멜의 말을 개수하고 싶은 느낌을 받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길버트는 뒤의 말은 인정할 수 있었다.

하멜의 말대로 핸슨은 여태 최선을 다해 성벽을 지켜왔다.

하지만 앞의 말은 인정할 수 없었다.

핸슨에게 새파랗게 어리다는 수식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길버트는 그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당연히 망설임에서 그쳤다.

사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자식이란 원래 나이를 얼마나 먹건 부모의 입장에서는 항상 코 묻은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결국 길버트는 여태 그랬듯 나서지 않았다.

길버트는 그저 두 노인 사이에 멀뚱하게 선 채, 아침부터 쭉 이어지고 있는 설전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벌써 세 번이나 반복된 선택이었다.

하멜이 고개를 돌려 저택을 한 번 돌아보더니 다시 밀러에게 말했다.


"백작 부인께도 이미 말해 놓았으니 밀러 자네가 참견할 일이 아닐세."


말을 끝내고 하멜은 더 이상 밀러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멜은 길버트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고 짐짓 활기차게 물었다.


"그래 길, 내가 배치되는 곳과 내 역할에 대해서 설명해주게."


밀러는 속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몇 번 두드리다가 이내 하멜의 뒤를 따라 길버트의 앞으로 걸어왔다.


"이런 고집 센 늙은이 같으니라고. 자네 아들이 몇 달 동안 버텼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니까!"


"알고 있네. 바로 그런 위급한 상황이니 나도 두팔 걷어 붙이고 나서겠다는 말이 아닌가. 애초에 무난한 상황이었다면 나는 자네 말대로 영지의 살림을 관리하고, 또 백작 부인을 보필하는 쪽을 택했을 걸세."


길버트가 듣기에 하멜 집사의 논리는 꽤 그럴 듯했다.

새로운 전략을 시행한 후에 예상보다 많은 청년들이 사라졌다.

단 한 번의 패배가 영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면, 저택에 있기보단 성벽에 있는 쪽이 더 현명할 것이다.

밀러 역시 똑같은 생각인 듯했다.

밀러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밀러가 길버트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시선도 정확히 세 번째였다.

길버트가 세 번째로 난감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하멜이 당차게 말했다.


"나도 소싯적에 자네들처럼 한 가닥 했네. 그러니 그리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걸세. 오히려 샌님 같은 영지의 젊은 놈들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르지."


하멜이 말한 샌님에 정확히 부합했던 길버트는 쓰게 웃었다.

밀러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젠장... 그래 멋대로 하라지! 주인도 없는 저택을 그렇게 지키고 있더니 노망이 난 게로군."


"그러는 밀러 자네야 말로 주인 없는 영지를 지키려고 여태 싸워오고 있었잖나."


밀러는 이번에도 역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작게 비속어를 중얼거린 밀러는 이내 완전히 두 사람에게 등을 돌렸고, 그대로 성벽 쪽을 향해 걸어갔다.

밀러의 뒷모습을 보며 길버트는 밀러와 가장 처음에 만나게 될 병사에게 마음속으로 위로를 보냈다.

아마 그 병사는 왜 갑자기 상관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멜은 씩씩대며 걸어가는 밀러를 쳐다보며 말했다.


"괴팍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길 자네의 고충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만."


길버트는 작게 미소 지었다.

집사에게는 밀러와 마찬가지로 나이에 도저히 걸맞지 않는 천진난만함 같은 것이 있었다.

길버트는 어쩌면 두 노인이 이토록 격의 없이 지내는 것은 그런 공통점 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니 슬슬 성벽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사님."


"괜찮지, 괜찮고 말고. 이보게 길. 나는 이 땅 위에서 거의 평생을 보냈다네. 상황은 알고 있네. 어찌저찌 겨울까지 버틴 후에 다른 영지로 도망간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도망친 곳에서 나는 평생을 이방인이나 느낄 법한 기분을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 아닌가. 얼마 남지도 않은 삶을 그런 식으로 비루하게 연명하기는 싫네."


하멜은 어젯밤 식당에서 나누었던 얘기를 다시 꺼내고 있었다.

그래서 길버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 사안에 대해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멜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내 지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이 전부 이 땅 아래에 있지."


하멜은 말을 멈춘 뒤 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에 길버트는 그런 행동이 체념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지금 하멜이 보고 있는 것은 흙바닥이 아니라 거기에 묻혀버린 그의 친지나 지인들일 것이다.

대개 노인들은 쉽게 우울해지는 법이다.

길버트는 집사에게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버트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멜의 눈은 애틋한 과거보다는 비루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천착되어 있는 눈은 아니었다.

늙은 노인의 눈에는 체념보다 훨씬 큰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멜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방금 전보다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나는 베르미 같은... 그야 말로 베르미 같은 놈들이 우리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네. 차라리 북부놈들이 쳐들어와서 영지가 함락되었다면 나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을 걸세. 하지만 감히 그런 하찮은 요괴들이 내 이웃들의 시체로 배를 불리게 할 순 없는 것 아니겠나."


전적으로 동의했기에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길버트는 하멜이 늙고 병들어 주변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노인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다.

하멜은 누구보다 적들에 대한 살의로 충만한 우수한 병사였다.


"집사님은 제 보충대에 편성될 겁니다. 앞으로 저를 따라 다니시면 됩니다. 명령은 그때그때 내리겠습니다. 어차피 고정된 상황은 없으니 유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겁니다."


하멜은 결의 서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먼저 걸어간 밀러를 따라 천천히 성벽 쪽으로 이동했다.


*


성벽 밑에서 길버트는 고개를 들었다.

해는 높게 떠올라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어김없이 영지를 향해 그 빌어먹을 파도가 몰려들 시간이었다.

그들의 습격은 이제 일종의 연례행사 같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이전과 비교해서 상황은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여느 날보다 더욱 처참해 보였다.

길버트는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초래한 것이 어제 오늘 벌이고 있는 자신의 전술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을 다스리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결국 길버트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길버트는 무의식적으로 밀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밀러는 성벽 밑 한 구석에서 어떻게든 청년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농담과 질타, 독려를 고루 섞어가며 떠들고 있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노장의 모습에 길버트는 위안을 받았다.


길버트는 밀러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잠시 걷자 일련의 시민들과, 시민들의 앞에 있는 높은 단상이 나타났다.

시민들은 길버트와 단상을 번갈아 보며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길버트는 단상에 올라서기 전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쉰 뒤 마침내 단상 위에 섰다.

단상에 서서 길버트는 자신의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밀러의 병사들과는 판이한 병사들이었다.

밀러가 데리고 있는 병사들은 실질적인 전투를 담당하는 영지의 청년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아직 미숙한 티를 벗지 못한 이들도 더러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가장 어린 청년의 경우에도 베르미 몇 마리 정도는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


반면 길버트가 지휘할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길버트가 지휘할 병사란 월렛을 제외하면 대개는 남편을 잃은 부인.

아직 젖내가 채 가시지도 않은 소년소녀들.

창을 드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이제 저 무리에 하멜 집사도 끼게 될 것이다.

그들은 꽤 많은 인원이었고 상당히 무질서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상황에 맞지도 않는 올망졸망한 눈으로 길버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길버트는 그들을 상대로 연설을 해야 하는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밀러가 부탁한 이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길버트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길버트는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 조를 개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병사들의 긴장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분노를 이끌어내는 미련하고 멍청한 짓 역시 하지 않았다.

길버트가 한 말이라고는 그저 '주변을 잘 살피다가 베르미 너댓 마리가 붙게 되면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나라'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라면 아예 전장을 이탈해서 멀리 도망치라'는 등.

일종의 조언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장의 지휘관이 내리는 것이라고 보기엔 조악한 것이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자신 또한 한 명의 시민으로써 영지의 미래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 뒤에 남게 되는 것은 이삭 한 톨도 비축하지 못한 채 맞이하게 될 겨울이다.

그런 겨울이 오면 시민들은 더 이상 요괴가 아닌 어쩌면 요괴보다 더 혹독한 자연과 싸우게 될 것이 분명했다.

길버트는 영지가 세워진 이후 가장 혹독한 겨울을 겪을 영지의 아이들에게, 적어도 서로 웃고 떠들 친구들과, 그들을 보듬어 줄만한 현명한 웃어른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슬픈 눈으로 자신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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