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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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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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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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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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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9)

DUMMY

길버트는 더는 자리에 서 있기가 힘들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단순한 이유였다.

오늘은 여느 날보다 훨씬 고되고 지독한 하루였다.

정오부터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길버트는 평소보다 세 배는 많은 베르미들을 상대해야 했다.

길버트의 육신은 빗속에 방치된 기계처럼 삐걱대고 있었다.

게다가 꽤 오랫동안 한 자리에 서 있기도 했다.

그래서 길버트는 서 있기가 힘들었다.

다만 두 번째 이유는 다소 감정적인 이유였다.

길버트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영지의 공터를 응시했다.


시간이 꽤 늦었음에도 영지의 공터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만의 빛이 일반적인 달빛보다 훨씬 밝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그리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이 뿜는 빛은 공평하다.

따라서 영지의 모든 부분 중 공터만 밝다는 원인으로 만을 꼽을 수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터가 환한 이유는 그곳에 있던 기이한 구조물 때문이었다.

그 구조물은 나무를 교차해서 쌓아 올린, 일종의 제단 같은 것이었다.

제단 중심에서는 끊임없이 불길이 높이 치솟았다.

환한 빛은 거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공터가 환한 이유도, 또 길버트가 서 있기 힘들었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길버트는 현재 제단이 잡아먹고 있는 것이 비단 바싹 마른 나무 뿐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버트는 더는 그 꼴을 보면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공터에는 영지의 시민들이 전부 몰려 나와 있었다.

정확히는 시민들은 제단을 중심으로 큰 원형을 그린 채 앉아 있었다.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대체적으로 고요했지만, 어떤 남자의 목소리만은 하염없이 공터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제단 바로 옆에서 주례사를 읊고 있는 베릴 주교의 목소리였다.

베릴 주교는 중얼거리는 듯하면서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종교인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독특한 어조였다.


"오랫동안 우리들의 곁에 머물렀던 핸슨은, 참으로 헌신적이고 유쾌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열정적이었으며, 큰 시련 앞에서도 쉬이 굴복하지 않는 당찬 젊은이었습니다..."


여태 계속되던 주례사가 거기서 잠시 멈췄다.

베릴 주교는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한 늙은 여성이 제단 옆에 놓여 있던 핸슨의 시신 위로 몸을 던졌다.

늙은 여성은 시신에 몸을 포갠 채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핸슨..! 아아, 핸슨!"


가만히 놔두면 제단 안까지 따라 뛰어들 것 같은 기세였다.

시민들이 하나 둘 그녀의 옆으로 몰려들었다.

시민들은 핸슨의 모친을 부축했고, 동시에 각자 위로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베릴 주교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듯했다.

베릴 주교는 황급히 다시 영결사를 읊었다.

다시는 멈추지 않을 거라 다짐한 듯 방금 전보다 훨씬 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쾌활했던 청년 역시, 어느 순간 찾아온 무섭고 끔찍한 재해 앞에서는 결국 무너져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길버트는 공터와 다소 떨어진 곳에서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잠깐 핸슨의 모친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길버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행동은 기만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령 오늘 아침에 새로운 전술을 시행하지 않았다면, 핸슨은 저 제단 옆에 누워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 제단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청년들의 수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결국 길버트는 멀리서 애도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자식을 절벽에서 등 떠민 당사자가 위로를 건넨다면, 모친이 어떤 기분을 느낄지 길버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듀라트 영지의 유일한 주교 베릴은 그 사이에도 쉴 새 없이 영결사를 읊고 있었다.


"이윽고 이들은 다시 세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조화이며, 동시에 피오 신의 권능과 권세와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양분이 되어, 언젠가 다시 이 땅에서 새싹처럼 솟아날 것을 믿습니다."


평가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다분히 열성적인 영결사였다.

묵묵히 그것을 듣고 있던 길버트는 그 내용을 생각해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베릴의 말처럼 피오 교단의 핵심 교리는 조화와 질서다.

피오의 교리에 따르자면 인간은 죽지 않는다.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대륙을 떠돌다가, 마침내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식이었다.

평소라면 어떤 감흥도 없었을 내용이다.

하지만 현재 길버트에게 그 내용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성벽을 뛰어오르는 베르미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꽤나 불쾌한 망상이었다.


길었던 영결사가 끝났다.

마지막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원래 제단 옆에 놓여있던 수 많은 시신들은 이미 재가 되었다.

남은 것은 핸슨의 시신 뿐이었다.

다른 모든 청년들처럼 핸슨 또한 맥없이 제단 안으로 던져졌다.

그때까지 고요하게 타오르던 불은 핸슨을 삼키자마자 급작스럽게 몸집을 부풀렸다.

그래서 시민들의 감정이야 어찌 됐든 그 행위는 공터를 조금 더 환하게 밝혀주었다.

생명이 깃든 불길을 바라보며 시민들은 청년들은 추모하고 애도했다.

애틋한 소리들은 어두운 밤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맴돌다가, 이내 사라졌다.


핸슨의 시신이 제단 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길버트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길버트는 이 정도면 총 지휘관으로써 충분히 자리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절차가 남아있기는 했다.

하지만 길버트는 뒷일은 밀러에게 전부 떠넘기기로 했다.

아마 밀러라면 그 정도의 응석은 웃으면서 받아줄 것이다.

아무튼 길버트는 더는 그 자리에 서 있기 힘들었다.

길버트는 저택을 향해 걸었다.


저택에 도착한 후 길버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 식당에 있을 게 분명했다.

길버트는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멜 집사를 발견했다.

하멜 집사는 꼼꼼한 손길로 식기를 닦고 있었다.

그러다 길버트를 발견했는지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을 건네왔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왔군. 나는 영결식이 깊은 밤까지 이어질 줄 알았네만... 식사를 하러 온 거라면 잠시만 기다리게. 내 금방 내올 테니."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멜 집사님. 식사를 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라면 식당에는 왜 왔나?"


길버트는 약간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식당 한 켠을 바라보았다.

하멜은 미심쩍은 얼굴로 길버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언제나 밀러가 즐겨 찾는 찬장이 있었다.

물론 찬장 속을 주로 차지하고 있던 것은 포도주였다.

하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막돼먹은 영감과 어울리더니, 길 자네도 이제 주정뱅이가 되어버린 모양이군."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밀러 영감님의 말처럼 가끔 취해있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더군요."


길버트는 가볍게 대꾸한 뒤 찬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길버트는 포도주와 잔을 들고 식탁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한 잔을 비우자마자 하멜이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길버트는 굳이 변명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하지만 곧 하멜이 재정을 관리하는 동시에 술 저장고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길버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 많이 마시진 않을 테니까요."


"괜찮으니 마음껏 마시게. 어차피 마실 수 있는 인간이 전부 사라져버리면, 저택의 포도주는 주인도 없이 썩어 문드러질 게 아닌가."


하멜의 말에 곧장 몇 가지 농담이 떠올랐지만 길버트는 농담으로 응수할 수는 없었다.

오늘 시행한 작전은 여러 청년들을 포도주를 마실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청년들 중에는 하멜의 자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길버트는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연상시킬만한 어떠한 말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하멜은 여전히 식기를 닦고 있었다.

길버트가 두 번째로 잔을 채웠을 시점에, 하멜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왔다.


"...혹시 말일세. 핸슨은 명예롭게 전사했나?"


길버트는 그제서야 하멜이 여태 자신을 힐끔대고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길버트는 저 과묵한 집사가 도대체 얼마나 고민한 끝에 한 마디를 던졌는지 알 수 있었다.

알 수 있었기에 길버트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길버트는 하멜 집사를 바라보았다.


하멜은 이 저택이 듀라트 저택이라고 불리기 전부터 쭉 이곳의 집사였다.

그리고 백작이 실종된 이후에도 여전히 백작 부인의 곁에 남아 사용인을 자처하고 있었다.

자고로 능숙하고 경험 많은 집사란 모든 귀족들이 원하기 마련이다.

저택 사용인이나 집사의 품격은 그대로 귀족의 품격과 이어진다.

하멜은 사태가 발발한 이후에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어딜 가더라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하멜은 끝내 이곳에 남았다.


하멜의 행보는 세간에서는 아마 순의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길버트는 눈 앞의 노회한 집사에게는 우둔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길버트는 노회한 집사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제 자식의 명예를 말하는 집사에게 끝내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핸슨이 여태 베르미를 몇 백 마리나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길버트는 그 행위 자체에서 어떤 명예로움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길버트가 묵언을 선택하자 식당 안에 고요가 맴돌았다.

길버트는 다소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차마 보고 있기 힘들었던 그 공터를 피해서 이곳까지 도망쳐온 참이다.

하지만 지금 하멜의 시선은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길버트가 결국 술병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불현듯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식당으로 들어온 사람은 밀러였다.

밀러는 길버트 앞에 놓인 술을 보고서 대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보게 길. 그런 비인간적인 짓은 그만 두게나. 그토록 좋은 포도주를 혼자 마시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 말일세."


밀러는 망설이지 않고 길버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밀러는 호쾌하게 술잔에 포도주를 부었고, 그것을 한 잔 마신 뒤에야 하멜을 발견한 듯했다.


"하멜 자네도 있었군. 잠시만, 가만 보니 식당 분위기가 영 이상하구만. 혹시 둘이서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라도 하고 있었나?"


하멜은 닦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밀러를 바라보았다.


"오늘 발생한 사상자들의 영서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놈아."


"그것 참 재미없고 시시한 얘기들을 하고 있었구만. 자, 그러지 말고 하멜 자네도 이리 와 앉게나. 술은 함께 마시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달고, 기도란 것도 많은 사람이 할수록 더 효과가 좋은 법이지. 그렇지 않겠나? 신께서도 세 명이 똑같은 내용의 기도를 올린다면 신기해서 한 번이라도 더 귀 기울여주시겠지."


하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 채신머리 없는 늙은이야. 자네는 기도하면서 술을 마시겠다는 말인가?"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정반댈세. 나는 술을 마시는 도중에도 기도를 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것이지."


하멜은 혀를 차면서 그대로 식당을 나섰다.

밀러는 선웃음을 지으며 하멜을 바라보다가, 이내 길버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안주거리라도 들고 올 셈일 게야. 내 장담하지."


길버트는 어쩔 도리 없는 유쾌함에 피식 웃고 말았다.

술 잔을 한 번 부딪힌 직후에 갑자기 밀러의 표정이 바뀌었다.

밀러는 진지한 눈빛으로 길버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지독한 영감쟁이구만. 제 아들의 시신을 보러가지도 않다니 말이야."


"하지만 제게는 핸슨이 명예롭게 전사했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런가? 핸슨 그 녀석은 성질이 좀 방정맞기는 했어도 좋은 녀석이었지. 그래, 당연히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말해 줬겠지?"


"아니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밀러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밀러는 비어있는 두 잔에 포도주를 따른 뒤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랬나? 저 영감은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게다가 핸슨은 실제로 명예롭게 전사했잖은가. 마지막까지 그것들과 싸우다 죽었으니 말이야. ...혹시 길 자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나?"


길버트는 하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밀러는 연거푸 술을 들이켜다가 이내 답답하다는 듯 캐물었다.


"우리는 영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명예로운 일이야. 이것이 명예롭지 않다면 대륙의 어떤 일이 명예롭다는 말인가?"


길버트는 연신 주저하다가 포도주를 한 입에 들이부었다.

길버트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전장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려면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보상이 없다면 카니쿨라같은 죽음에 불과합니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로구만. 보상이라면 돈이라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아닙니다. 보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영감님 말씀처럼 보통은 돈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상대의 절멸이나, 상대의 진심 어린 사과, 혹은 찬사 받는 일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이 전쟁에서 이겼을 때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베르미들은... 아무래도 자연적인 현상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핸슨의 명예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태풍을 이겨보겠답시고 맨 몸으로 맞서고 있는 인간에게 '당신은 지금 명예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식의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봐도 지독한 기만일 겁니다."


길버트의 말이 끝나자 밀러가 말없이 술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뭔가 곰곰이 생각해보던 밀러는 다른 주제로 얘기를 꺼냈다.


"우울한 얘기는 그쯤 해두지."


길버트는 이 영지에서 어떤 것을 말하더라도 우울한 얘기가 될 거라는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밀러는 의도적으로 화제를 바꾸고 있었다.

밀러가 희망찬 어조로 말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테지. 겨울이 되면 저 빌어먹을 것들도 더는 활동하지 못할 테고 말일세."


"룰러의 말대로라면 아마 그럴 겁니다. 베르미들은 피가 차가운 부(否)의 요괴들이니까요. 저희들은 겨울 동안 다른 영지로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거동이 불편한 자를 포함해, 한 명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길버트는 말하던 도중 밀러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밀러는 마치 끝까지 잘못을 숨긴 어린아이가, 마지막에 가서야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보게 길. 자네라면 이런 생각을 어리석다거나, 미련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얘기해 보자면, 나와 시민들은 겨울이 온다고 해도 이 영지에서 도망치지 않을 작정이네."


"어리석고 미련한 선택입니다. 고향은 단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다른 도시와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아마 자네 말이니 맞을 테지. 하지만 쭉 같은 땅에서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게 되면 말일세, 어느 순간부터 땅과 자신이 동화되어 버렸다는 걸 느끼게 되지. 게다가 자네도 알다시피 늙은 사람에겐 미래가 없지 않은가. 내 나이쯤 되면 필연적으로 과거에 몸을 지탱한 채 겨우겨우 살아가게 되네.

과거에 몸을 지탱하려면 과거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이 경우 과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땅에서 살아왔던 날들이지. 그것들이 베르미들에게 파 먹혀버린다면 어차피 몸을 지탱할 수 없을 게야. 하멜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이더군."


길버트는 어금니에 힘을 준 채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놀랍지는 않았다.

길버트는 밀러나 하멜이 저런 식으로 나올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길버트는 한참 동안이나 찰랑이는 포도주의 표면을 응시했다.

어느 시점에 길버트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길버트는 말을 끝 맺지 않고 도중에 끊어버렸다.

맞은 편에서 밀러는 그것이 무력함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그야 어떤 방법으로도 다가올 파멸을 막을 수 없다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밀러는 길버트에게 위로를 건네려했다.

하지만 길버트의 눈을 들여다본 밀러는 다소 미심쩍은 기분으로 위로의 말을 삼켰다.

길버트의 눈빛엔 자포자기한 기색도, 일말의 나약함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길버트의 눈빛엔 어떤 확고한 결연함만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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