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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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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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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07.12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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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말할 수 없는 것 (11)

DUMMY

영지 상공의 구름은 대기중의 먼지를 잡아먹으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대기층이 너무 건조했던 탓에 작은 물방울들은 구름을 벗어나자마자 부분적으로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들은 하강할 수 있었고, 그것들은 그대로 빗방울이 되었다.

메마른 지표면에 닿은 빗방울들은 강물이나 바다에 떨어지는 것과 달리 주변에 파문을 만들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들은 땅 위에서 춤을 추듯 공기의 흐름을 어지럽혔다.

물론 누구도 그런 흐름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쏴아아-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동시에 사이사이가 촘촘해졌다.

조금 전까지 기계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던 병사들은 차츰 순박한 시골 영지민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빗방울과 마찬가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그래서 오히려 춤의 원류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그저 순수한 감정의 발산이 유일한 목적인 그런 단순한 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병사들을 지켜보고 있던 리버는 현재 그들이 마치 눈 오는 날의 카니쿨라처럼 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온화한 기온 탓에 일생 동안 단 한번 뿐이었지만, 리버는 영지 가득히 눈이 내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날 뒷골목의 카니쿨라들은 방향도 없이 그저 사방으로 방방 뛰며 눈 위를 뛰놀았었다.

지금 듀라트 영지의 시민들과 꼭 닮은 모습으로.

리버가 시민들이 들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를 평가를 내리고 있었을 때, 옆에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괴들이 물러나겠군."


어떤 근거도 덧붙이지 않은 발언이었기에 리버는 루나의 말을 희망적인 예측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루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실제로 요괴들이 서서히 영지에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요괴들이 전부 같은 방향으로, 그러나 두서없이 영지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꼭 썰물과 닮아 있었다.


도무지 말이 안되는 상상이었지만 그쯤에서 리버는 어떤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루나가 어떤 요술이라도 부린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의문이었다.

사실 여태 보여준 신비한 일들을 상기해보자면 그것은 꼭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리버는 토비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런 종류의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비단 자신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루나는 자신에게 의심 섞인 눈빛을 보내오는 두 남자에게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너희들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건 알겠지만 내가 요괴들을 물러나게 한 것은 아니야. 나는 간단한 몇 가지 요술을 부릴 줄 아는 것 뿐이지, 지금 너희들의 상상처럼 대단한 일은 누구도 하지 못해. 요괴들이 도망치는 건 단지 비 때문이야."


"비?"


"그래, 베르미와 스퀼라는 부(否)의 요괴. 피가 차갑지. 온도가 낮은 곳에선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없어. 비를 맞은 후에 떨어지는 체온까지 감안하자면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현명할 거야. 만약 이 정도의 비가 저들의 숲에도 내리고 있다면, 아마 며칠 정도는 더 활동하지 못할지도 모르겠군."


리버는 그 해박한 지식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확실히 루나의 말처럼 요괴들은 처음의 난폭한 기세가 완전히 꺾여 있었다.

그런데 시민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분명 기쁨의 춤을 추고 있었던 영지민들은 잔뜩 흥분한 채 너나 할 것 없이 도망가는 요괴들을 쫓아가 도륙하고 있었다.

창칼을 지닌 병사들은 주로 몇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스퀼라를 처리하고 있었고, 무기가 없는 인간들의 경우에는 발로 힘껏 배를 차버리거나 짓밟아버리고 있었다.

요괴들은 비치적대고, 비실거리고 있었고, 영지민들은 일견 신이라도 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가 죽은 요괴들과 흥분한 시민들이 대비되어 그 장면은 리버에겐 퍽이나 이상하게 비춰졌다.

그 기묘한 전투 장면을 바라보던 리버는 토비의 반응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토비 역시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건 폭력에 익숙한 아돌프가 눈살을 찌푸릴 만큼 불쾌한 것임이 분명했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꽤 남았지만 하늘은 어느샌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하늘이 저런 상태라면 당분간 비는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학살 장면을 바라보던 루나가 불쑥 어디론가 움직였다.

루나가 이동한 건 창고로 짐작되는 건물 앞이었다.

처마가 꽤 넓은 덕에 비를 피하기에 제격인 것처럼 보였다.

굳이 비를 맞고 있을 이유는 없었기에 두 사람 역시 루나를 따라 처마 밑에 섰다.

처마 끝에서 촤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끊임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 사람이 그렇게 하릴없이 서 있던 와중에 불쑥 한 남자가 처마 밑에 나타났다.

남자를 알아본 토비가 곧장 말을 걸었다.


"여, 길버트로군. 전투는 이제 완전히 끝난 건가?"


"아직은 아닙니다만, 곧 끝날 것 같군요."


토비와는 이미 통성명을 한 사이지만 리버에겐 낯선 남자였다.

토비와 길버트가 서로 인사를 나누던 때에 리버는 바닥에서 구토를 참으며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버는 조심스레 길버트를 관찰했다.

도대체 언제 다듬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지저분한 수염.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표정.

다분히 날카롭게 느껴지는 안광.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길버트는 처마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리버가 힐끗 대며 관찰하는 도중에도 길버트는 건물 바깥에 서서 추적추적 쏟아지는 비를 있는 그대로 맞고 있었다.

묵묵히 비를 맞고 있던 길버트가 어느 순간 분위기를 환기 시키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이어서 길버트는 약간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두 분과는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군요. 경황이 없었으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전 길버트라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영지의 백인장을 맡고 있습니다."


길버트의 자기 소개가 끝난 후 리버가 자기 차례임을 직감했을 때, 갑자기 루나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길버트...?"


루나는 길버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다음 눈썹을 찌푸리더니 길버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호의적인 인사를 건넨 사람에게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었기에 길버트는 약간 당황스러워 했다.

사태를 지켜보던 리버가 황급히 중재하듯 나섰다.


"죄송해요 원래 좀 이상한 친구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 전 리버에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필사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루나는 자신의 태도 변화를 모색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루나는 한참 동안 길버트를 노려보다가, 이내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바닥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버는 그 모습을 본인은 대화에서 배제시켜 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리버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서 대신 루나를 소개했다.

이후의 대화는 주로 리버와 길버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루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고, 토비는 간간이 입을 열긴 했지만 종족이 달라서인지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더불어 길버트가 은연중에 대화 상대를 리버로 골랐다는 이유도 있었다.

길버트는 거의 본능적으로 세 사람 중 리버가 가장 무난한 대화 상대임을 느끼고 있었다.


"흐음, 이건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혹시 여러분들은 폴 영지에서 출발해 롭스 산맥을 가로질러 오셨습니까?"


"어?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요. 엿새 정도 걸리더라구요. 그렇죠 토비?"


토비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길버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추측대로 세 사람의 출발지는 폴 영지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듀라트 영지까지의 거리는 멀쩡한 길로 움직여도 열흘은 걸린다.

물론 아돌프라면 그런 말도 안되는 행군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토비에겐 동료가 있었다.

길버트는 두 인간, 그중에서도 특히 루나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루나의 몸집은 작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근육이 유별나게 발달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길버트는 찜찜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지독하게 고된 행군이었겠군요.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어... 그건, 그러니까..."


곧장 대답하려던 리버는 말을 멈췄다.

리버는 자신들의 목적을 길버트에게 순순히 털어놓아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과 토비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시였다.

자신들은 고작 성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만으로 공작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길버트에게 사정을 설명한다면 길버트 역시 자신들과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리버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길버트가 얼핏 미심쩍은 눈빛을 내비쳤다.

하지만 곧 길버트 쪽에서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말하기 어려우시다면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것쯤이야 있으니까요. 참, 그보다 오늘 밤 머무를 곳은 정하셨습니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세 사람은 영지에 들어온 후로 쭉 그곳에 서 있었다.

길버트 역시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그것은 그냥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리버가 고개를 젓자 길버트가 마침 잘됐다는 듯 말했다.


"그럼 듀라트 저택으로 함께 가시죠.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저택이요? 아뇨, 저희는 그냥 일반적인 여관에 머무르면 되는데요."


리버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그러나 길버트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애석한 일이지만 현재 영지에서 운영되고 있는 여관은 없습니다. 그러니 괜찮으시다면 저택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영지를 찾아준 손님들을 대접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만한 규모의 영지에 여관이 없다는 것은 상정할 수 없었기에 리버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이내 방금 전 보았던 전투를 떠올리고 나서는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리버가 뭔가 대꾸하려 했을 때, 그때까지 생각에 잠겨있던 루나가 불쑥 끼어들어 대신 대답했다.


"좋아 따라가지. 어차피 너희는 토비가 필요한 것일 테고, 나는 지금 넓고 쾌적한 목욕탕이 간절하니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마침 서로가 가지고 있군. 그렇다면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루나의 말에 길버트가 속마음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쓰게 웃었다.

길버트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마 밑에 남은 세 사람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본 후에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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