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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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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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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2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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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말할 수 없는 것 (6)

DUMMY

정오를 넘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성벽과 지면이 맞닿은 한 지점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땅이 움찔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길버트는 흙바닥 밑에 혹시 커다란 심장이 맥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꽤나 그럴듯한 비유 같았다.

일단 흙이 들썩이는 모습이 심장의 두근거림과 닮아있었다.

게다가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저 구덩이를 찌르면, 분명 심장처럼 울컥하고 피가 솟구쳐 오를 것도 분명했다.

길버트는 자신의 상상에 실소했다.


길버트가 그런 식으로 망상에 심취해 있는 동안에도 땅은 계속해서 진동하고 있었다.

처음에 한 점에서 시작된 들썩거림은 점점 지면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들썩거리는 몇 개의 점들이 하나둘 이어졌고, 그것들은 다음 순간 선으로 바뀌었다.

길버트는 수 많은 점들로 이루어진 그 선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현상을 제어하거나 저지하는 일은 별로 우습지도 않은 우스갯말처럼 느껴졌다.

불현듯 선의 한 지점이 안쪽으로 허물어졌다.

그리고 밤새도록 구덩이를 메우기 위해 들였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구덩이 안에서 베르미와 스퀼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놈들이 나온다! 찔러 넣어!"


한 십인장의 외침과 함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사실 전쟁이라고 하기엔 조금 우스운 모습이었다.

십인장들의 외침에 구덩이 앞과 옆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각자 높이 치켜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게 전투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 장면은 도무지 전쟁처럼 보이질 않았다.

수 많은 구덩이 앞에서 땅을 쑤셔 대는 병사들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밭을 가는 농부처럼 보였다.


길버트는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군화 앞에서 꿈틀거리는 흙바닥을 향해 창을 찔러 넣고 있었다.

창이 바닥에 푹 박혀 들어갔다.

아무리 창 끝이 날카롭다고 해도 본래라면 땅으로 파고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메운 탓에 주변과 미묘하게 색이 다른 그 지점들은 아무 저항 없이 길버트의 창을 받아들였다.

창이 거의 1큐빗 정도 깊숙이 박혀버린 탓에 순간 길버트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즉시 자세를 고쳐 잡은 길버트는 창 끝으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을 느끼며 얼른 창을 회수했다.

뽑혀 나온 창 끝에서 초록색 점액질이 뚝뚝 흘러내렸다.


"멈추지 마라! 계속해서 쑤셔 넣어!"

"주변을 계속해서 살펴라! 새로운 구멍이 열리자마자 바로 움직여!"


길버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투가 너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치러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벽 위에서 베르미들을 상대할 때에는 그나마 창이나 검을 휘둘렀기에 전쟁이라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그곳엔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병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도 흙바닥이었다.

아무리 진지해지려 노력해도 길버트는 땅을 개간하는 농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길버트는 조소를 흘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바닥을 향해 창을 찔러 넣는 작업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정신없이 창을 찔러 넣던 와중에 하멜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이제 교대하지! 비키게!"


아직은 할 수 있다고 대꾸하려던 길버트는 창을 쥔 손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하멜이 교대하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대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온 몸의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다.

어쩔 도리 없이 길버트는 늙은 집사에게 자신이 여태껏 지키던 자리를 내주었다.

자리를 잡은 하멜은 방금 전까지 길버트가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창으로 땅을 쑤셔 대기 시작했다.

길버트는 이순을 넘긴 늙은 집사의 눈이 아직까지도 처음과 똑같이 전의로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하멜 덕에 잠시 한숨 돌릴 여유를 찾은 길버트는 곧바로 전황을 살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병사들은 벌써부터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길버트 역시 지독하게 피곤했다.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쭉 이어진 구덩이를 메우는 작업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길버트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밤새 열심히 구덩이를 메우고, 밟고, 또 다져 놓았지만 지금 다시 열린 구덩이의 수는 어제와 그리 차이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길버트는 그 불합리함의 원인을 베르미들의 타고난 습성에서 찾았다.

베르미들은 해가 지고 난 후면 땅을 파고 들어가 잠자리를 마련한다.

따라서 어제 병사들이 벌였던 작업과 베르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거의 비슷한 작업이었지만, 효율성 면에서 보자면 인간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작업이었다.

종의 차이는 여실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땅을 뚫고 들어오는 녀석들은 좁은 지형에서 서로 엉겨 붙은 채로 기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 상태로는 도약할 수도 없으니 병사들은 그저 바닥을 향해 창을 찌르기만 하면 됐다.

그렇다곤 해도 수의 차이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인간은 하루 종일 창을 몇천 번이나 휘두를 수 없다.

결국 길버트는 베르미들의 작전이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지금 베르미들이 벌이는 작전은 자신들의 육체적 장점과, 수가 많다는 장점 모두를 적절히 활용한 전술이었다.

더불어 베르미들이 알 리는 없지만, 성벽의 위 아래로 나누어진, 그러니까 전선의 이중화는 영지의 적은 병력을 고려했을 때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아악!"


그때 바로 옆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에 길버트는 고개를 돌렸다.

한 소년병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소년병의 맞은 편에는 언제든지 앞으로 내지를 것처럼 꼬리를 바짝 세운 스퀼라 한 마리가 있었다.

날개도 없고, 도약할 수도 없는 그것들은 이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요괴였다.

그리고 땅 속에 길이 열린 지금은 무엇보다 더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소년이 있던 곳은 성벽과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소년의 곁에는 어떤 병사도 없었다.

주변에 도움을 줄 병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길버트는 달렸다.

소년의 바로 앞에서 길버트는 노호하며 스퀼라의 배 부분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창은 그대로 배를 꿰뚫었다.

빠직-하는 딱딱한 갑피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스퀼라의 배 아래에서 진득한 체액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빳빳하게 하늘로 솟은 스퀼라의 꼬리가 바닥으로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스퀼라를 처리한 길버트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소년병은 거의 착란 상태에 가까운 모습으로 자신의 다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소년병의 발목 근처에서 스퀼라의 보라색 독이 방울져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길버트는 교양있는 학자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몇 가지 욕설을 속으로 중얼거린 후에 소년에게 다가갔다.


"몇 번째지?"


소년병은 길버트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길버트는 다시 욕설을 내뱉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질문했다.


"스퀼라의 꼬리에 찔린 것이 몇 번째냐고 묻는 거야."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소년병은 얼굴을 잔뜩 굳혔다.

길버트는 소년병의 극적인 표정 변화가 스퀼라의 독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소년병의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소년병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상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소년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으며 대답했다.


"모...모르겠어요 길 아저씨...! 두 번... 아니... 세 번인 것 같아요."


소년병은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길버트를 쳐다보았다.

길버트는 소년병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단 차분하게 설명했다.


"자네는 지금 움직일 수 있고 말하는 것도 가능해. 그러니 스퀼라의 독에 완전히 중독된 것은 아니야."


"그...그렇죠.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소년병의 말투가 다시 희망적인 것으로 변했다. 길버트는 담담하게 부연했다.


"하지만 벌써 세 번이나 찔린 거라면 앞으로 전선에 나오는 것은 무리겠지. 앞으로 자네는 최후방에 배치하겠네."


길버트의 말에 소년병은 자신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성벽에 달라붙은 병사들은 어찌저찌 전투를 벌이곤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풀썩 쓰러질 것처럼 피로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소년병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머뭇거림이 지극히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는 길버트는 순간 눈 앞의 소년이 조금 역겨워졌다.

길버트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외쳤다.


"월렛!"


길버트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했던 월렛은 어느 순간부터 길버트의 직속 부하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월렛 역시 자신이 주변으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항상 길버트의 가까이에서 머무르던 월렛이 그 외침에 곧장 곁으로 다가왔다.

길버트는 상황을 설명했다.


"여기 부상자가 생겼네."


"...스퀼라에게 찔렸군요."


"그래, 이 아이를 후방으로 옮겨주게."


소년병은 여전히 머뭇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길버트는 소년을 위로해주기로 했다.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 테지만 길버트는 어차피 이제 자신의 남은 인생 전부를 위선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선량한 인간과, 평생을 위선자로 사는 인간을 구분할 방법 따위는 없다.


"자네는 다리의 마비가 풀린 후에 부인들과 함께 병사들의 치료를 전담하도록 하게. 그것 또한 중요한 일이야."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자마자 소년병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곧 월렛이 소년병을 어깨에 들쳐 메고 영지 쪽으로 이동했다.

길버트는 우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확인한 뒤에 길버트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체감상 베르미들의 첫 도약으로부터 몇 시간은 흘렀다고 생각했지만 태양은 여전히 높은 곳에 걸려 있었다.


'낮이 이렇게 길었었나?'


심지어 지금은 낮이 긴 계절도 아니다.

그래, 어쩌면 태양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틀림없다.

저 멍청한 태양은 누구도 보지 않는 동안에는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머물고 있을 리가 없다.


잠시 후 길버트는 그 바보 같고 어처구니 없는 망상에 정신적으로 폭소했다.

새벽에 술을 마시고 나왔으니 취해있는 쪽은 태양이 아니라 자신과 밀러, 그리고 하멜 집사 쪽이었다.

길버트는 미미한 술 기운에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밀러의 경우에는 항상 더욱 더 바보가 되기 위해 술을 마셔 대니까.

길버트는 가만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멜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창을 쑤셔 박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다시 교대하시죠 집사님."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멜은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것인지 말없이 구덩이 앞에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곧 길버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묵묵하게 땅 속에 창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기계적으로 그 행동을 반복하던 길버트는, 문득 자신이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차라리... 차라리 첫날 영지가 그대로 멸망해버렸다면 이런 종류의 의구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의구심을 가지기도 전에 육체는 찢겨졌을 테고 정신도 와해되었을 테니까.

이 졸렬한 짓거리는 그저 고통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단 한번의 고통을 받는 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다시 무른 땅에 창을 박아 넣고, 비릿한 혈향을 느끼고, 흙먼지가 눈을 어지럽혔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길버트는 불쑥 며칠 전 밀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밀러는 자신에게 이 영지에 계속해서 머무를 것인지 물어왔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대답은 방금 소년병에게 대답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위선이었다.

길버트는 바닥에 창을 꽂아 넣었다.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면 스스로에게 실망할 것 같다고?'


터무니 없는 얘기다.

길버트는 자신을 이상주의자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저열한 욕망 때문에 영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실 그 욕망이 아니었다면 이런 시골 영지에 올 일도 없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느 멋진 저택에서 더없이 호화로운 식사를 즐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 식사 자리에서 자신은 명망있는 학자들의 위선과, 현실 감각이라곤 조금도 없는 정치가들의 멍청한 정책들을 비판하고 있었을 것이다.

순간 눈이 따끔거리는 바람에 길버트의 사고가 멈췄다.

얼굴 가득히 흐르던 땀이 눈 안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길버트는 머리를 한 번 휘저은 후, 세수하듯 얼굴을 한번 쓸어 내렸다.

얼굴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와 닿았다.

길버트는 묘한 감각이 내부에서 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길버트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혹은 어떤 생각인지 포착하려 애쓰면서 역시 땅에 창을 꽂아넣었다.

몇 번 창을 박아 넣은 후에 길버트는 그것이 어떤 감각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감각이었다.

길버트는 이 영지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더운 땀을 흘려본 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 나지 않았다.

땀도 땀이지만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면 이렇게 필사적으로, 또 이렇게 더없이 추한 꼴로 발버둥쳐 본 적도 전무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단 한 번 있기는 했다.


'그때는 무엇 때문에 그랬지?'


그래, 억울하게 경질당한 친구를 위해서 비참함을 감수했었다.

길버트는 창을 바닥에 쑤셔 넣었다. 육체적인 피로감이 계속해서 길버트의 정신을 좀먹었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생동감과 생명력 같은 것이 끊임없이 내부에서 솟아 오르고 있었다.

서재에 틀어박힌 채 책을 읽었을 때에는 결코 느낄 수 없던 감각이었다.

알 수 없는 고양감에 몸을 전부 내 맡긴 길버트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밀러의 고함소리가 들려온 후였다.


"그만, 그만하게 길...! 적들은 이미 물러갔네!"


발치의 구덩이에 온 정신을 쏟고 있던 길버트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길버트는 멍하니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구덩이 속에서는 더 이상 요괴들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길버트는 이번에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밀러와 하멜 그리고 몇몇 병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수 많은 시선에 길버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듀라트 영지의 총 지휘관은 제 전투에 취해있던 나머지 종전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보던 길버트는 불현듯 이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자신이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은 저택의 서재였다.

길버트는 서재가 가없이 그리워졌다.


노랗게 변색된 종이들의 쿰쿰한 냄새.

그 하나로 수천 년치의 역사를 품고 있는 책장들.

널브러진 깃펜과 잉크통. 흐트러진 종이들.

풍화된 책에 담긴 오래된 지혜. 지성과 호기심의 성지.

그곳에는 베르미도 스퀼라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저분하고 얄팍한 책임감 때문에 전선에서 물러나길 망설이는 소년병도 없다.

길버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피곤하군요. 죄송하지만 뒤처리와 땅의 복구는, 두 분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밀러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하멜이 서둘러 밀러를 제지했다.


"들어가서 쉬게.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길버트는 하멜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인 후에 그대로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자리에 남은 두 노인은 침중한 표정으로 길버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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