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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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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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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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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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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 (8)

DUMMY

듀라트 영지에 인접한 이름 없는 숲, 그리고 동시에 롭스 산맥의 지류에 걸쳐있는 한 숲에서 불쑥 세 사람이 뛰쳐나왔다.

태양은 점점 짧아지는 낮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제 몸을 더 가혹하게 불사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숲에서 나온 것은 무덤덤한 표정의 인간 여자였다.

뒤이어 비슷한 또래의 인간 남자 한 명과 아돌프 한 명이 나타났다.

세 사람 중 인간 남성 한 명이 가장 앞으로 뛰쳐나오며 외쳤다.


"끝났다!"


리버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초록빛과 수목의 비릿한 향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나가자 숲의 말단까지 무성하게 돋아 있는 풀들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거기서 조금 더 걷자 이윽고 무기질적인 흙이 사방에 나타났다.

축축했던 숲과 달리 대지는 바싹 메말라 있었다.


리버는 무사히 여정이 끝났음에 새삼 감격했다.

어느 누구도 리버가 호들갑을 떤다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롭스 산맥의 가장 험한 부분을 가로지르는 여로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리버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은 모험가나 혹은 탐험가들이 여정을 끝냈을 때 느낄 만한 감동과 비슷한 종류였다.


리버가 감격하고 있었다면 뒤 쪽에서 따라오던 토비는 약간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아돌프는 본래 숲의 종족이다. 토비는 모처럼의 즐거운 산책이 끝나버린 것이 아쉬웠다.

토비는 전방의 듀라트 영지를 발견하고서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저게 듀라트 영지인가? 시골에 있는 것 치곤 엄청나게 크군."


"듀라트 백작은 대륙 제일의 무인이었잖아요. 아마 그래서 아닐까요?"


"리버,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 영지가 저 정도로 크다면, 분명 근사한 술집이 한 두개쯤은 있을 거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자 서두르자고!"


두 사람은 숲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영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숲에서 항상 선두에 섰던 루나는 이제 말없이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걸었다.

리버와 토비가 멋진 술집을 원하고 있던 것처럼 사실 루나 역시 원하는 것이 있기는 했다.

루나는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목욕탕이 있는 여관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행하는 두 남자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루나의 신체는 상당히 끈적거리는 상태였다.

루나는 토비와 마찬가지로 숲에서 나고 자랐고, 따라서 더위를 피하는 방법 쯤은 수십 가지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 근처 숲은 이상하리만치 후덥지근했고, 결국 어젯밤 내내 바닥에서 올라온 습기가 루나의 옷 속에 그대로 가두어져 있었다.

루나는 졸라 맨 허리 부근과 가슴께가 축축하게 들러붙는 감각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각자가 품고 있는 욕망 덕에 영지를 향해 걷는 세 사람의 걸음은 꽤 빠른 편이었다.

성벽과의 거리가 600큐빗 정도 남은 지점에서 리버는 멀뚱하게 걷고 있는 토비를 향해 이것저것 조언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토비, 일단 무조건 순하게 굴어요. 인간들이 보기에 당신 인상은 너무 사나우니까요. 아무튼 듀라트 영지도 폴 영지 못지 않은 시골이니 아돌프를 실제로 본 인간은 거의 없을 거에요. 우린 여행자고, 그러니 처음부터 나쁜 인상을 줘서 좋을 게 없어요. 알겠죠?"


"순한 표정이라니 이렇게 말이냐?"


토비는 주둥이를 벌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어서 리버를 폭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서로에 대한 악담을 내뱉으며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긴박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가장 뒤에서 걷던 루나는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선웃음을 한번 지어버렸다.

하지만 성벽과 400큐빗이 남은 지점에서 루나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루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이어서 앞서 걷는 두 사람과 자신의 발치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두 사람은 여전히 영지에 도착하면 곧장 시원한 맥주부터 마시겠다느니 하는 실없는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루나는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치의 대지는 바싹 말라있었고, 태양에 잘 달궈져 따뜻해 보였다.

루나는 바닥을 관찰했다.

과거는 어떤 형태로든 현재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으며, 더불어 대지는 자신을 밟고 지나쳤던 여행자들을 항상 기억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 순간 루나가 보고 있던 것은 대지의 과거였다.


곳곳에 잔풀이 나 있긴 했지만 주변의 대지는 거의 대부분이 흙으로 덮인 황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루나는 얼핏 평범해 보이는 그 흙바닥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한 인상을 받았다.

물론 루나는 자신이 지질학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루나가 바닥을 주시한 것은 땅의 구성 성분이나 광상(鑛床)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루나가 주목한 것은 흙에 새겨진 자국들이었다.

근처의 땅이 마치 무언가 질질 끌려 다닌 것처럼 죄다 파여 있었다.

그 자국들은 어린 아이들이 모래사장에서 손가락으로 모래를 긁은 모습이나, 혹은 강 하류에 존재하는 복잡한 지류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루나는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이어진 잠시 동안의 관찰 끝에 루나는 이내 그 흔적들이 도저히 인위적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마차의 바퀴 자국이나, 누군가 짐을 끌고 간 자국, 혹여 그저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닐 뿐인 사람들이 지나갔다고 하기에는 흔적들이 너무 광범위했다.

만약 실제로 그런 경우였다면 적어도 몇천 명의 사람들이 일렬로 죽 늘어선 채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자국들은 일종의 방향성을 품고 있었다.

길게 파인 그 자국들은 애매하긴 하지만 모두 일정한 방향으로 죽 그어져 있었다.

숲과 듀라트 영지를 기준으로 가로로 그어져 있는 자국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강의 지류 같다고 생각했지만 종내에 루나는 그것이 강보다는 바다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썰물로 인해 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종종 저런 무질서하지만 흐름은 분명한 자국들이 남기도 한다.

또 강이라고 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으니 바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루나는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멈춰 선 루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바닥을 쳐다보며, 루나는 어쩌면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에 쓸데없는 망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추격자에게 필요한 덕목이 끈질김이라면 도망자에게 필요한 소양은 예민함이다.

그리고 루나는 거의 삶의 절반을 도망자로 보냈다.

도저히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는 여생이었다.


생각해보면 흙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건 일행의 목적과는 관계가 없었다.

저런 식으로 지형이 구성된 것은 어쩌면 단순한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저 바람과 흙더미의 수천 번의 맞물림으로 만들어진 우연한 합작품.

이윽고 두 사람이 루나의 곁에 다가 섰다. 루나는 약간 미안한 투로 얘기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괜히 시간을 허비했군. 다시..."


돌연 루나가 말을 멈췄다. 눈 앞의 두 사람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루나는 리버가 바보 같은 표정이라는 점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루나가 생각하기에 리버는 항상 그 비슷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루나는 토비의 반응에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비는 인상을 구기며 낮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어느샌가 털이 잔뜩 뻣뻣해져 있었고, 동시에 꼬리는 바닥에 축 처진 채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루나는 그것이 겁을 집어 먹은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생각은 루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무튼 토비와 같은 성인 아돌프가 겁을 집어먹을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두 사람은 여전히 루나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불가해한 기분과 함께 루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자신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루나는 다시 앞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루나의 발이 불쑥 지상에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루나는 당황했다.

곧 허리에 실린 무게감을 느낀 루나는 그제야 토비가 자신의 허리춤에 팔을 감고서 들어 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공에 붕 뜬 채로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토비에게 들린 채 당황하고 있는 리버가 보였다.

루나는 미량의 당황스러움과 수치스러움, 그리고 대량의 분노와 함께 외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


하지만 이번에도 루나는 말을 끝 맺지 못했다.

이어진 토비의 행동 때문이었다.

방금 전 루나를 들어 올린 토비의 행동이 수직적인 움직임이었다면 이번에는 수평적 움직임이었다.

토비는 마치 짐짝처럼 양 옆구리에 두 인간을 단단히 낀 채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루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동시에 어쩌면 여행 내내 만의 빛 아래에서 돌아다녔던 탓에 드디어 이 아돌프가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토비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뒷방향을, 즉 영지의 맞은 편을 바라본 순간 루나는 토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그와 더불어 지금껏 바닥을 관찰하며 느꼈던 의문들까지 한 번에 해소할 수 있었다.

매달린 채 뒤를 바라보며 루나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상상이 그리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숲에서 새까만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굽이치고, 위 아래로 요동치고, 제 멋대로 들썩거리고 있는 파도였다.

한 줌의 이성은 그것이 절대 파도가 아니라고 루나를 설득하고 있었지만, 모로 봐도 그것은 분명히 파도처럼 느껴졌다.

하긴 실제로 그리 다른 점도 없다.

무정물이 아닌 살아있는 것이 온 몸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 장면은 파도와 꼭 닮아있었다.


숲에서 쏟아져 나온 검은 파도는 순식간에 원래 세 사람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루나는 흙바닥에 생겨있던 무수한 자국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도하고서 소스라쳤다.

까맣고 번들거리는 파도는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방향은 명백하게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루나는 자신들의 위치가 영지의 성벽과 파도 사이에 끼여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됐다.

그리고 그런 심정은 옆의 리버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만 리버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비명을 질렀다.


"저게 뭐야!"


"베르미... 베르미와 스퀼라들이야...!"


루나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리버가 묻고 싶은 것은 파도의 정체가 아니라 파도의 목적이었다.


"그건 알아! 근데 왜 우리에게 달려드는 거야!"


이 질문에는 두 사람에게서 그럴듯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토비는 달리는 데 여념이 없었고, 루나는 스스로도 모르는 것을 설명할 만큼 양심이 없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 번쩍 고개를 쳐든 루나가 갑자기 성벽과 토비의 얼굴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루나는 성벽과 현재 자신들의 거리가 꽤 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리고 루나가 생각하기에 토비는 이미 최대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루나는 도피 생활 중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절망감을 느꼈다.

차라리 추격자들이 쫓아오고 있는 것이라면 이토록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경우는 몇 번이나 경험해왔던 것이니 대처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을 향해 덮쳐오는 것은 어떤 의지를 가진 것이라기보다 자연 재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그만큼 파도는 넓고 거셌다.

토비가 아니라면 도저히 자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여러 방법을 모색하던 루나는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마지막에 루나는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부디 토비의 달리기 실력이 여느 아돌프보다 한참 뒤쳐지는 것은 아니기를.



**



길버트는 술 기운에 약간 비틀거렸다.

아마 농담이었겠지만 어젯밤 하멜의 지적은 꽤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밀러와 어울리기 시작한 뒤로 점점 취해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주정뱅이라고 불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여러 날을 전투로 보냈지만 어제 구덩이 앞에서 벌였던 것은 전투가 아닌 격한 노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후유증 탓에 길버트는 오늘 아침 성벽으로 나오지 못할 뻔했다.


성벽 밑에서 곧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던 길버트는 문득 자신이 왜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스스로 삶을 내다 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언젠가 밀러가 했던 말처럼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지금 영지에서 요괴들에게 물어 뜯긴 채 맞이할 미래는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삶을 구가하고 싶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으면 그만이었다.

어떤 날이건 상관 없었을 것이다.

그저 밤에 조용히 영지를 빠져나가면 그 뿐인 일이었다.


심지어 길버트는 자신이 사라진 후에 듀라트 영지의 시민들이나 백작 부인, 그리고 밀러나 하멜이 자신을 비난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사라진 일을 그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테고, 언제나처럼 무던히 다시 성벽으로 오를 것이다.

게다가 설령 비난한다고 해도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것은 공허한 외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제 삼자가 듣고 있지 않은 상태로 행해지는 비난은 그저 비난을 당한 당사자의 기분을 약간 상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이미 영지에서 떠난 후라면 그 당사자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다.

더불어 어차피 몇 주 후면 비난했던 시민들 모두가 땅에 묻혀 있을 테니 소문이 퍼질 일도 없다.

따라서 영지를 떠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떤 부담도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영지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은 영지에 머무르는 쪽을 택했고, 저택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가장 깊숙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때 왜 영지를 떠나지 않냐고 묻는 밀러에게 했던 대답은 지독한 위선이었다.


"길! 잠시 위로 올라와 보게!"


길버트가 과거의 편린과 싸우고 있었을 때, 문득 성벽 위에서 밀러의 외침이 들려왔다.

길버트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성벽을 올려다 보았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고, 그 사실은 적어도 듀라트 영지에서는 꽤나 특별한 일이었다.

아무튼 한가롭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시간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길버트는 요괴들의 습격보다 중요한 모종의 변고를 각오한 채로 성벽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삐끗한 탓에 아찔한 기분을 한 번 느낀 후에 길버트는 성벽 위로 완전히 올라 섰다.

밀러는 성벽 난간에 상체를 쭉 내민 채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바깥으로 너무 내민 탓에 금방이라도 밖으로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곧바로 다가선 길버트는 노병의 어깨를 붙잡고 약간 뒤로 당겼다.

당연히 돌아볼 줄 알았던 밀러는 길버트의 접근에도 여전히 바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길버트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밀러가 먼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상한 것이 나타나서 불렀네. 이보게 길, 저게 뭐라고 생각하나?"


길버트는 밀러의 손끝을 따라 차분히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같이 숲에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물론 다른 영지였다면 기겁할 장면이었겠지만 어쨌든 듀라트 영지에서는 흔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본 후에 길버트는 이내 평소와 약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파도의 최선단에서 알 수 없는 형체가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거리가 멀었기에 길버트는 더 집중해서 그것을 관찰해보았다.


처음에 길버트는 그 형체를 요괴라고 생각했다.

흙먼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머리가 세 개 정도 달려 있는 것 같았고 팔은 확실히 네 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낯선 모습에 길버트는 '룰러의 요괴 대백과'를 필사적으로 상기했다.

오래 전에 읽은 탓에 기억이 가물거렸지만 확실히 저런 형태의 요괴는 없었던 것 같았다.


의문의 형체가 성벽과 300큐빗 정도의 지점까지 다가왔을 때, 흙먼지가 점점 걷히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길버트는 그것이 양 옆구리에 인간을 끼고 있는 아돌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길버트는 그 앞에 '괴상하고 꽤나 경박한 모습으로 영지를 향해 전력질주 해 오는' 따위의 수사를 더 갖다 붙여도 전혀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수사는 너무 길었고, 상황은 꽤 급박했다.

따라서 실제로 길버트가 말한 것은 단문이었다.


"아돌프군요. 양 옆에 인간을 들고 이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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