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농장

말할 수 없는 것 (3)

바닥에 펼쳐진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토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여긴 듀라트 영지잖냐. 음, 그보다 나는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군. 어째서 지도를 훑은 거냐?"

루나는 묵묵부답이었고, 그래서 토비는 자신이 혹시 해선 안될 질문을 해버렸는지 고민했다.

어느 순간 토비는 루나의 가슴이 심하게 들썩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루나는 마치 격렬한 운동을 막 끝낸 사람처럼 호흡하고 있었다.

토비는 그제서야 루나가 질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은 토비는 일단 루나의 숨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미 밤이었고, 다른 할 일도 없어서 토비는 멍하니 하늘을 관찰했다.

만이 밤하늘 위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멍청히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기에는 꽤 괜찮은 풍광이었다.

한편 리버는 손등에 축축한 감촉을 느끼며 루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나는 온 몸에 땀을 흘리고 있었고, 여전히 루나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던 탓에 리버의 손등 역시 점점 축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리버는 지금 맞잡은 손을 빼내도 괜찮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튼 리버가 마법이나 요술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것이 특별하다는 점 밖에 없었다.

그건 건축가가 건물을 짓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고민 끝에 리버는 일단 손을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마법이나 요술에 대해 무지하긴 했지만, 리버는 적어도 무언가에 미친듯이 몰두해 있는 사람의 집중력을 깨뜨려선 안될 것 같았다.

루나가 원래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만이 몇 걸음이나 밤하늘을 거닐고 난 후였다.

피로에 물든 얼굴로, 그러나 흐르는 땀을 닦지도 않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일도 없이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나는 선 채로 바닥의 지도를 응시하며 말했다.

"듀라트 영지였군. 하지만 여긴 분명 예전에 확인 했을 텐데..."

루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루나는 지도를 배낭 안에 집어 넣은 뒤, 숲 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멍한 표정으로 지도 앞에 앉아 있던 리버는 당황하며 물었다.

"갑자기 어딜 가는 거야?"

"나는 듀라트 영지로 가야 해. 거기에 다음 성물이 있어."

말하는 도중에도 루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리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쪽이냐면 리버는 루나가 듀라트 영지를 행선지로 삼았다는 것에 대해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리버는 지금 그녀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쪽은 전부 롭스 산맥으로 이어지는 숲이잖아. 게다가 지금은 만이 타오르고 있는데..."

"상관없어. 그보다 너희는 각자 살 길이나 열심히 모색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자드 공작은 꽤 집요한 남자거든. 대륙의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지. ...썩 즐거운 만남은 아니었어. 그럼 잘 살아봐."

"잠깐만!"

할 말을 전부 다했다고 생각했던 루나는 약간 짜증스러운 얼굴로 멈춰 섰다.

리버는 헐레벌떡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리버는 루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그래!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돼지에게 도축 당하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했었지."

"기억력은 좋은 편이군. 그래 맞아.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야. 거기에 구태여 갖다 붙이는 이유는 대부분이 지독한 기만이지. 가축을 잡아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인간은 가축을 잡아 먹어. 그리고 공작은 나를 겁탈할 능력이 있으니 그것을 시도하고 있는 것 뿐이야.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지."

덤덤한 태도였다.

리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숲에서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와 루나의 머리카락을 제 멋대로 흩뜨려 놓았다.

리버는 루나의 어질러진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 행동은 이상해. 너는 나와 토비를 그 자리에서 도망치게 해줬잖아. 푸조 마법사를 때려 눕힌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야. 게다가 수로에서는... 네 일에 말려들게 해버린 것에 대해 우리에게 사과하기도 했지. 그건 기만이 아냐. 오히려 그쪽이 진심에 가깝겠지. 난 인간성이란 그런 거라고 생각해. 예를 들면 우물 앞에서 휘청이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고민하기도 전에 얼른 달려가 붙잡는 행위들 말이야. 여태 네가 했던 행동들과 마찬가지지."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집요한 구석이 있군."

루나가 미간을 모으며 팔짱을 꼈다.

마치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보라는 태도였다.

딱히 안될 이유도 없었으므로 리버는 더 말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별 볼일 없는 일개 상인이야. 그러니 자드 공작이나 되는 인간이 나를 추적한다면,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붙잡히고 말 거야. 네 말대로라면 그 뒤엔 비참하게 죽을 테고. 그렇겠지?"

"그래서?"

"너와 동행하게 해 줘. 물론 업고 가 달라는 말은 아니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와줄 테니까."

"어이가 없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 네가 도울 일은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짐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너는 자신이 기막힌 모험가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군. 네 말대로 넌 일개 상인이고, 난 귀찮은 짐은 딱 질색이야. 길들여진 돼지는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어. 이미 야생에서 살아가던 것들에게 잡아먹히고, 유린당할 뿐이지. 분에 넘치는 일은 벌이지 마. 그럴수록 명이 짧아지니까."

리버는 더 이상 현학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어쨌든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실용성에 기대는 것이 나아 보였다.

"음, 그럼 부탁이 아니라 제의를 할게. 아무리 너라도 추격자들을 뿌리치면서 저 험한 숲을 통과하기는 힘들 거야."

그 말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듯 루나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나가 고개를 세로 저으며 대꾸했다.

"꽤 합당한 지적이군. 그래, 물론 힘들겠지. 롭스 산맥은 여행자들에게 친절한 편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지난하고 험난한 여정이 장사치 한 명이 끼어든다고 해서, 더 쾌적하고 안전해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니. 훨씬 쾌적해지고, 또 안전해질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리버는 원래 지도가 놓여 있던 위치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선 토비가 멍한 얼굴로 하늘에 떠 있는 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토비의 바로 옆까지 걸어간 리버는 토비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리버는 토비를 루나의 앞까지 데려갔다. 그러고선 토비의 어깨에 손을 척 얹었다.

그 행동들이 당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 토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버를 바라보았다.

리버는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돌이켜보면 토비 당신은 언제나 듬직하고 믿음직한 친구였어요."

토비는 당황하며 손톱 끝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응? 나 말이냐? 뭐 듬직하고 믿음직한 건 인정하겠지만 언제나라니? 우린 꽤 오래 떨어져 있었잖냐."

"자자, 쓸데없는 얘기는 전부 집어치우자구요. 아무튼 토비 당신과 저는 이제 같은 처지에요. 그게 중요하죠. 뭐가 됐든 토비 당신은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진짜' 아돌프에요. 그렇죠?"

"뭐 그렇기야하다만..."

"그럼 정해졌네요. 진짜 아돌프는 절대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친구를 나몰라라하지 않아요. 그렇죠?"

이후에 리버는 평소부터 토비의 갈기털이 멋지다고 생각해왔다는 것과, 또 토비의 근육이 자신이 만났던 여타 아돌프들보다 훨씬 크고 우람하다는 점을 한참 동안 설파했다.

"끄응..."

토비는 신음을 내뱉으며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리버는 토비가 어떤 대답을 꺼내 놓을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붉은 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영지 뒤편의 숲에서 토비의 꼬리는 위 아래로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듀라트 영지의 밤은 평소와 달리 시끄러운 소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이미 모든 병사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어야 할 늦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집으로 돌아간 병사는 없었다.

영지의 성벽 밑에는 병사들과 함께 거의 모든 시민들이 몰려 나와있었다.

어느 십인장 하나가 잔뜩 신경 돋친 목소리로 외쳤다.

"한스! 여기도 있다! 이쪽으로 두세 명 보내!"

"예!"

힘차게 대답한 한스는 자신의 옆에 있던 길버트를 한 번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승낙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는 마주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 주위에 있던 비슷한 또래의 병사 한 명을 붙잡고는 얼른 십인장에게 뛰어갔다.

십인장이 있던 곳은 어느 구덩이 앞이었다.

한스는 십인장이 무슨 용무로 자신을 불렀는지 묻지 않았다.

위치는 다소 바뀌었지만 작업 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스는 삽을 들었다. 이어서 삽을 흙무더기에 꽂아 넣었고, 삽으로 파낸 흙을 발치의 구덩이에 쏟아 부었다.

지극히 간단한 작업이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성벽 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모두 그 간단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기계 같은 동작으로 흙 산에 삽을 쑤셔 넣고 있었고, 시민들은 흙을 퍼 날라 병사들 앞에 흙산을 만들고 있었다.

퍽- 퍽- 하는 무기질적인 소리. 십인장들의 욕설. 병사들의 불만 섞인 중얼거림.

또 지긋한 노인들이 습관적으로 내곤 하는 앓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 모든 잡음이 원래 적막했을 듀라트 영지의 밤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길버트 역시 그런 소음에 한몫하고 있었다.

거의 타성적으로 구덩이를 메우던 길버트는 문득 한 소년을 발견했다.

그 어린 것은 작고 여린 손으로 열심히 흙을 퍼 나르고 있었다.

길버트는 아마 아이의 손에 맞는 삽이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자기 몸보다 더 큰 삽으로 땅을 팔 수는 없는 일이다.

길버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장갑이라도 끼고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갑은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이나 끼고 다니는 고급품이며, 당연히 듀라트 영지민들에겐 지극히 사치스러운 물품이었다.

그런 연유로 아이는 맨손인 것이 분명했다.

길버트는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하려던 길버트는 그러나 말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어차피 오늘 밤 안으로 성벽 밑의 구멍을 다 메우지 못하면, 저 어린 것이 다음에 잠드는 곳은 아마 흙 속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심지어 소년의 비장한 표정으로 봤을 때, 소년 역시 자신의 처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길버트는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넌더리 나는 작업에서 특정한 시민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던 것은 길버트 뿐 만은 아닌 듯했다.

다만 그 인물은 길버트와 정반대로 적극적으로 화내고 윽박지르면서 한 사람의 귀가를 장려하고 있었다.

"이 고집 센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만하고 저택으로 돌아가라니까!"

밀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하멜은 묵묵히 자신 앞에 놓인 흙더미에 삽을 꽂아 넣고 있었다.

하멜이 하고 있는 작업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었지만, 진척 상황에는 다소 큰 차이점이 있었다.

다른 병사들 앞에 쌓인 흙더미는 고작해야 무릎 정도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멜 앞의 흙더미는 거의 허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민들은 맨손이나 혹은 조악한 집기들로 끊임없이 하멜의 앞에 흙을 퍼다 나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하멜은 도저히 그 흙더미를 오늘 밤 내에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구덩이를 메워야 할 흙산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밀러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하멜의 귀가를 종용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계속해서 소리치던 밀러는 마지막에 가서 약간 질렸다는 듯 차라리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가게 하멜. 우리는 병사지만 자네는 집사잖나. 저택에 백작 부인을 혼자 놔 둘 셈인가?"

"이제 잠옷을 갈아 입혀줄 나이는 지났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시중을 들어왔던 하멜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밀러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구원을 바라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받은 길버트는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이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 뒤에, 다시 병사들을 배치하는 일에 집중했다.

밀러가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길버트는 전부 무시했다.

밀러의 생각이야 어쨌든 길버트는 고집 센 노인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병사들을 독려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작업을 끝마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결국 노려보던 밀러는 포기해버린 듯했다.

노인의 고함 소리가 그쳤다. 성벽 밑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모두 말없이 구덩이를 메웠다. 침묵은 그 자체로 피로의 방증이었다.

찡그린 얼굴로 병사들을 바라보던 길버트는 저 수 많은 구덩이를 만들어 놓은 빌어먹을 것들에 대해 상기했다.

오늘 완전한 저녁이 찾아오기 전의 두 시간은 길버트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아주 지독하고 농밀하게 압축된 시간이었다.

여태껏 길버트는 요괴들이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 틀린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괴와 자연의 관계는 나뭇잎과 나무의 관계까지는 아닐 테지만, 적어도 사람과 신의 관계 정도는 될 테니까.

물론 베르미들이 죄다 땅을 덮은 모습이 실제로 파도처럼 보였다는 점도 그런 생각에 일조하기는 했다.

그러나 요괴들이 자연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길버트는 여태 그 요괴들에게 지능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단순한 논리였다.

지능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에 더 가깝다.

가령 물케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서, 그 꽃이나 바람이 살아 움직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다.

하지만 오늘 오후에 길버트는 여태 자신이 해왔던 생각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베르미들은 지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벽 위로 뛰지 않았다.

대신 완전히 방향을 바꿨다.

그들은 해자의 밑바닥부터 영지 안쪽의 바닥까지 땅을 파는 기막힌 전략을 시도했다.

그리고 전략을 시도한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됐다.

인간들이 방파제를 높게 쌓아 올렸다고 해서, 분개하며 땅 속으로 파고드는 파도나 해일이 있을 리가 없다.

전선을 하늘에서 땅으로 바꾸는 그 극단적인 전략 수정에 길버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또 감탄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향해 끔찍한 저주도 퍼부었다.

만약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면, 차라리 어제를 연장해 오늘로 가져온 뒤, 그저 똑같은 하루를 보냈다면.

그랬다면 무난하게 겨울까지는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길버트는 아무리 감추려 노력해도 결국 도리없이 피어오르는 죄책감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길버트는 언젠가 밀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밀러는 그때 자신에게 영웅이 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도저히 영웅이 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은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다.

영지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영웅이 필요했다.

당연하게도 그 영웅은 단지 근엄해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수염을 길러선 안되며, 병사들을 운용하는 데에 죄책감을 느껴서도 안될 것이다.

어느 순간 길버트는 신을 향해 기도 드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기도의 내용은 단순했다.

길버트는 자신이 정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못 이겨, 혹여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신께 기도했다.

사위에서 울리는 소음에 한번 진저리를 친 뒤, 길버트는 다시 흙 속으로 묵묵히 삽을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