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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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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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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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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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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석 (3)

DUMMY

풍화된 창문에 부닥쳐 대는 빗방울 소리가 마치 우울한 심포니를 연주하는 것처럼 들려 오고 있었다.

습기로 가득한 공기는 그동안 메말라 있던 복도의 구석구석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 때문에 구석에 쌓여 있던 해묵은 먼지 냄새, 오래된 참나무 냄새 같은 것들이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복도에 걸려 있는 초상화나 혹은 속이 텅 빈 갑옷들은 저택의 숨겨진 보물을 지키려는 파수꾼처럼 음산한 기운을 발하는 듯했다.

밤의 복도는 그렇게 전체적으로 으스스하고 처연한 분위기를 풍겨 댔다.


어둠에 얽매인 복도 끝에서 문득 투미한 빛 하나가 등장했다.

빛은 미세하게 흔들리며 복도의 끝에서 끝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어느 순간, 램프를 들고 있던 리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제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벽에서 어떤 거대하고 시커먼 괴물이 튀어나와 자신을 덮치려는 모습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괴물이 리버를 잡아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에야 리버는 그 괴물이 램프에 비친, 엄청나게 커진 자신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리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루나가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한 번 머쓱한 표정을 지은 뒤에 리버는 다시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잠시 걷다가 이내 리버가 방금 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듯 말했다.


"성물을 찾는 건 좋지만 말이야... 꼭 이런 시간에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인간은 낮에 활동하는 종족이라고."


"낮에 이런 모습을 한 채 사람들 앞을 걸어 다니고 싶진 않군."


조금 생각한 끝에 리버는 루나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리버는 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루나의 손과 단단하게 깍지 끼어진 자신의 왼손이 보였다.

확실히 남들에게 보여주기엔 다소 민망한 모습이었다.


"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네."


그 뒤 얼마간 말없이 복도를 걷던 도중 갑자기 리버가 의문스럽다는 듯 질문했다.


"갑자기 떠오른 의문이 있는데 말이야. 루나 너는 분명 나를 찾아냈잖아?"


"고작 몇 시간 전에 네가 안내 받은 방을 까먹을 정도로 난 멍청하지 않아."


"아니, 그러니까... 조금 전에 방에 있는 날 찾아냈다는 말이 아니라, 너는 그때 폴 영지의 내 가게로 정확히 찾아왔었잖아?"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는 내가 없었으니까 이런 의식.. 같은 걸 할 수도 없었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그때는 너 혼자서 성물을 찾을 수 있었다면, 어째서 지하수로 앞에서나, 또 지금에 와서는 굳이 이런 의식이 필요한지 묻는 거야."


루나는 고민에 잠긴 듯 침묵으로 일관한 채 한참을 걸어갔다.

복도에서 끼익- 대는 소리가 서너 번이나 울린 뒤에야 루나는 확실하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건 특수한 경우였어. 그때 널 찾을 수 있었던 건 우리가 가까운 곳에 있던 시점에서 네가 성물을 흡수했기 때문이야. 흩어져 있는 힘은 감지하기 어렵지만 한 곳으로 모이는 힘은 꽤 선명하게 느껴지더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루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착각하나 본데, 내 능력은 만능이 아니야. 굳이 비유하자면 그래, 항해가 적당하겠군. 내 능력은 컴퍼스가 아니라 나침반에 가까워. 나침반은 넓은 바다 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이지. 하지만 언제 도착할지, 혹은 정확히 어디에 도착할지는 알려주지 않아."


"그럼 내가 힘을 흡수했기 때문에 지금은 날 통해서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거야? 컴퍼스로 항로를 정확히 제도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정적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두 사람이 복도에 난 창을 몇 개나 더 지난 후에 다시 루나가 입을 열었다.


"원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 나도 모르니까. 다만 너와 신체를 접촉하고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느껴져. 지금 네가 무슨 의문을 가지고 있는진 알겠지만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문제야. 그저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 뿐이지. 너는 네 팔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설명할 수 있어?"


리버가 대번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설명할 수 있지. 내 팔은 내가 움직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움직이는 거잖아."


"물론 그런 식으로 대답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럼 팔을 움직이고 싶다는 네 생각은 애초에 어디서 생겨났지? 설마 생각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이 생겨났다는 식으로 설명할 건가?"


그렇게 설명할 수 없었기에 리버는 순간 적잖이 난처해졌다.

어느 쪽이냐 하면, 루나의 말은 완전히 틀린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할 수 있기에 한다는 식의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개인의 의지를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찻잔을 들기 위해 팔을 움직이는 것과, 팔을 움직일 수 있으니 찻잔을 드는 것.

그 두 가지는 왠지 원인과 결과가 지독하게 뒤엉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 리버는 결국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어서 리버가 다시 다른 질문을 던지려 했을 때, 복도에 굉음과 함께 빛이 쏟아졌다.


콰르릉-!


천둥이었다. 창을 통해 들이닥친 강렬한 빛이 찰나였지만 복도의 색감을 완전히 반전 시켜버렸다.


그리고 그런 색감의 반전과 그닥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천둥은 램프를 쥐고 있던 리버의 손 역시 반전 시켜 놓았다.


천둥에 놀란 나머지 리버는 램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확- 하고 불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유리 깨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리버는 황급히 램프를 주워들었지만 이미 기름통이 전부 부서진 후였다.


"미안. 너무 놀라서 그만..."


리버가 중얼거리듯 변명을 시작했지만 루나는 대꾸하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지나치게 냉랭한 태도였다.

그래서 리버는 투덜대며 불만을 토로하려 했다.

그때 루나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였군."


루나가 멈춰 선 곳은 어느 거대한 문 앞이었다.

문 틈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오래된 종이가 습기를 머금은 냄새였다.



*



어느 날 밤, 정원의 향취에 한껏 취했던 이후로 길버트에겐 가끔 밤의 정원을 산책하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거기서 '가끔'이라는 애매한 부사를 '약간 과할 정도로 취한 날' 정도로 대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길버트는 현재 조금 취한 상태로 밤의 정원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을 숙소까지 안내한 후 길버트는 식당에서 밀러와 함께 포도주 두 병과 호르체 한 병을 더 개봉했다.

아마 몇 달 전이었다면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양이었겠지만, 밀러와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량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다.


정원을 바라보던 길버트는 자신이 그렇게 마셔 댔음에도 아직 만취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운 기분을 느꼈다.

잠시 후에 길버트는 적어도 오늘 만큼은 쓰러질 정도로 마셔도 괜찮았다는 말로 조금 전의 음주를 합리화 했다.


길버트는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현재 하늘의 상태로 봐서 비는 도무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설사 지금 그친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미 한밤중이니 내일까지 물이 전부 증발할 리는 없다.

수적인 이점을 살려 전선을 이중화할 만큼 똑똑한 요괴들은, 절대 젖은 채로 바람을 맞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길버트는 자신의 내일을 요괴들의 지능에 기대야 한다는 사실에서 말 못할 씁쓸함을 한 번 느꼈다.


길버트는 다시 정원에 집중했다.

먹구름 탓에 달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비에 젖은 정원도 나름의 향취가 있었다.

길버트는 향기를 맡거나, 혹은 연못 위에서 춤추고 있는 물방울들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어느 시점에 달빛이 아닌 지극히 인공적인 빛이 길버트의 시야에 포착됐다.

빛은 복도의 창을 통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길버트는 조금 멍한 얼굴로 저택의 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빛이 램프의 불빛이라는 것과, 램프를 들고 이동하고 있는 것이 리버와 루나라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빛이 나오는 방향은 세 사람의 숙소 쪽이었고, 창문에 비춰지는 그림자의 크기로 봐서 절대로 아돌프의 몸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길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한창일 시기의 젊은 남녀.

폭우가 쏟아지는 위태로운 밤.

어둡고 신비스러운 귀족의 저택.

흔들리는 램프와 비밀스러운 시간.


여러 사실들에서 자연스레 추론되는 결론은 길버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길버트는 저런 종류의 순수함이란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미소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길버트는 계속해서 복도를 움직이고 있는 빛을 관찰했다.

복도 끝에서 튀어나온 그 불빛은 첫 번째 창문을 지나서 잠시 멈췄다.

이어서 다시 두 번째 창문에서 나타난다.

그곳에선 방금 전보다 더 오래 멈췄다가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순간 길버트는 혹시 자신이 지금 몸을 숨겨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튼 두 남녀의 즐거운 밀회에, 괜한 불청객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길버트는 이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우 탓에 정원은 어두컴컴한 상태였다.

게다가 현재 서 있는 곳은 커다란 기둥의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거의 완전히 가려주고 있었다.

빛을 가지고 있는 것은 두 사람 쪽이지만, 반대로 두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길버트는 문득 출처가 불명확한 북부발의 금언 같은 것이 떠올랐다.


'빛의 부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만들지만. 너무 많은 빛 또한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어버린다.'


분명 황궁에 머무를 당시 들었던 속담이었다.


'누가 나에게 이 말을 했었지?'


기억이 날듯 말듯했기에 길버트는 얼마간 그 생각에 골몰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에 더 이상 몰두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정원의 중심에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


콰르릉-!


정신을 온통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일에 할애하고 있던 탓에 길버트는 지나치게 놀라고 말았다.

길버트는 몸을 웅크리며 기둥 옆에 주저 앉았다.

다시 빗소리에 귀가 익숙해졌을 시점에, 길버트는 다분히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길버트는 밀러가 지금 자신의 곁에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밀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다 큰 어른이 고작 천둥에 그토록 겁을 집어먹냐는 식으로 놀려 댔을 것이다.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길버트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번째 창문에 어른거리던 불빛이 사라져 있었다.

하긴 자신이 이만큼 놀랐다면 두 사람 역시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길버트는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놀라서 램프라도 떨어뜨렸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길버트는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 결코 어른으로써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역시 젊은 남녀의 밀회를 훔쳐보는 일은 양심에 켕기는 일이었다.

길버트는 자리를 뜨려 몸을 돌렸다.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던 길버트가 갑자기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을 목도한 사람처럼 괴상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길버트는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이어서 두 사람이 등장한 복도의 오른쪽 끝에서부터 창문의 개수를 침착하게 세어 나갔다.


하나. 둘. 셋. 넷.


벼락이 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두 사람이 멈춘 곳은 네 번째 창문이었다.

복도의 네 번째 창문. 길버트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곳은 저택에서 가장 익숙한 장소기도 했다.

몇 년 동안 저택에서 생활하며 제일 오래 머물렀던 장소였으며, 백작이 실종된 후에는 아무도 찾지 않았기에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던 장소였다.


두 사람이 멈춘 곳은, 정확히 길버트의 서재가 있는 곳이었다.


콰르르릉!


다시 한 번 정원에 굉음이 울렸다. 빛은 정원을 한 번 휩쓸고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후, 정원 한 편에 있던 커다란 기둥 옆에선 더 이상 길버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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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9) 23.06.16 120 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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