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새글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819
추천수 :
573
글자수 :
1,068,691

작성
23.06.14 23:15
조회
126
추천
7
글자
17쪽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7)

DUMMY

"선생님, 저는 도무지 여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화났는가 하면 어느새 웃고 있고, 즐거운가 하면 어느새 다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조화로운 피오 신의 섭리가 오로지 여자들의 마음에만 부재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대륙에서 가장 저명하신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이 복잡한 것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랑그는 온통 눈으로 덮인 대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제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스퀼라의 독."


-북부의 시인 랑그가 제자와 나눈 대화 중 일부-


네 번의 만 중 가장 마지막으로 찾아온 만이 폴 영지를 내리쬐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리 늦은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거나하게 취한 술꾼들, 밀회를 즐기려는 연인들, 혹은 뒷골목의 다소 불량한 인간들이 아직 활개를 치고 다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폴 영지의 지상에선 그중 어떤 종류의 인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민들은 모두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불량배들이 이 날만 유독 선해졌다거나, 혹은 서로 열렬했던 연인들이 이 날만 유독 차갑게 식어버렸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만이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시민들이 밖으로 쏘다니지 않을 만한 충분한 이유였다.


사실 만이 타오르는 날에 돌아다니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미신이다.

여기서 만이 부린다는 요설에 대해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거의 모든 인간들은 어린 시절 이불맡에서 만에 관한 신비한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

그리고 그 신비한 이야기 속에는 비극과 참상이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머리는 굵어지고, 몸은 커져도 그런 무의식은 깊게 남는 법이다.

다 자라버린 인간들이 만에 대해 께름칙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상의 시민들이 으스스함이나 혹은 스산함을 느끼고 있었을 때, 지하의 세 사람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영지의 지하는 어둡고 축축했다.

그 속에서 상처 가득한 무스가 세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스스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루나와 토비는 조심스럽게 에이튜를 관찰하고 있었다.

무스의 목적을 알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적잖이 긴장한 상태였다.


한편 리버 역시 에이튜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만 루나와 토비처럼 긴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리버는 에이튜의 모습에서 진득한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리버가 관찰한 에이튜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무참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것이었다.

짧고 뻣뻣한 에이튜의 털은 군데군데 붉은 자국과 함께 지독히도 엉켜있었다.

길고 툭 튀어나온 주둥이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무엇보다 앞니 두 개는 손질한 지 한참이 지난 듯 이빨 끝이 우둘투둘했다.

마지막으로 세모난 귀는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고, 가장자리가 조금 찢겨 있었다.

리버는 무의식적으로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밤에 보았던 에이튜가 떠올랐다.

지금 에이튜는 그때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짧은 관찰이 끝나자마자 에이튜가 입을 열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라 리버.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지."


에이튜는 자리에 우뚝 서서 그 작고 붉은 눈으로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마치 멋대로 집에 쳐들어온 불청객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멀거니 서로를 바라보는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시점에 토비가 리버의 옆구리를 찔러왔다.

리버가 돌아보자 토비가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어색해 죽겠다 이 자식아. 듣자 하니 너희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그럼 네가 뭐라고 말 좀 해 봐라."


토비는 리버가 상황을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버는 토비의 기대를 가뿐히 배반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리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토비는 한번 더 옆구리를 찔러 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이유야 알 수 없었지만 리버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토비는 눈을 뻐끔거리며 할일 없이 하수도의 풍경을 둘러보는 쪽을 선택했다.

썩 볼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루나가 정적을 배제하고 나섰다.

루나는 리버와 에이튜를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너희 둘은 이미 아는 사이인 것 같군. 하지만 지금 감동적인 재회를 벌이고 있을 틈은 없어. 간략하게 말하겠어. 에이튜라고 했나? 네가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는 알겠어. 여긴 네 영역일 테니 우리들은 침입자나 불청객에 가깝겠지. 하지만 이쪽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 그러니 우릴 방해하지마. 만약 방해할 생각이라면 이 자리에서 베고 가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루나는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지극히 적대적인 태도였고, 분위기는 삽시간에 험악해졌다.

여지껏 입을 다물고 있던 리버가 소리쳤다.


"잠깐만..! 검을 뽑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방금 말한 대로야. 우린 한가롭게 지하를 탐사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 네가 저 무스와 어울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는 베고서라도 당장 이 영지를 벗어나야겠으니까."


그때 루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에이튜가 말했다.


"굳이 싸우겠다면 상대해 줄 수는 있지. 하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네가 리버의 친구라면 나는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이 주변엔 내 가족들이 많거든. 내가 가족들을 부르는 순간 너는 고깃덩이가 될 거야."


"싸우기 싫다면 길을 비켜. 나는 갈 길이 멀고, 네게 볼 일은 없으니까."


"잠깐만! 내가 말할 테니까 루나 너는 뒤로 물러나 있어!"


상황을 지켜보던 리버가 이내 루나를 자신의 등 뒤로 떠 밀었다.

이어서 리버는 교묘하게 두 사람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루나와 에이튜는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소란이 약간이나마 진정됐다.

두 사람을 중재한 뒤 리버는 루나와 토비에게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에이튜가 건넸던 경고는 듣기에 따라선 일종의 선전포고처럼 들릴만했다.

자신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렇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리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사람에게 에이튜와의 관계를 전부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루나의 말처럼 한가하게 옛 이야기나 늘어놓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고민 끝에 리버는 두 사람을 설득하기보단 에이튜 한 명을 설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리버는 에이튜를 바라보았다.

늙은 무스의 모습을 보자마자 리버의 내부에서 다시금 그리움이 부상했다.

리버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꾹 누르며 눈 앞에 있는 무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에이튜."


에이튜는 허리를 앞으로 굽히고 있었다.

그 탓에 고작해야 리버의 가슴 부근에 머리가 위치해 있었다.

에이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선 들고 있던 작대기 끝을 리버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작대기 끝에 매달린 램프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에이튜는 그 상태로 리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버는 조금 초조해졌다.

무심결에 에이튜의 이름을 부르기는 했지만 다음 말을 생각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버는 다소 어색하게 운을 뗐다.


"그러니까 그게... 그래요! 우리 참 오랜만이죠 에이튜?"


"...그래, 아주 오랜만이구나 리버. 몰라볼 정도로 몸집이 커졌구나."


처음과 달리 에이튜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온화하고 자상하게 바뀌어 있었다.

리버가 어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음. 요즘 지하 경기는 어때요?"


그것은 별 특별한 것도 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흔한 인사치레였다.

하지만 리버는 질문을 내뱉자마자 자책하는 동시에 후회했다.

리버는 방금 전 분명히 에이튜를 관찰했었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

정돈되지 않은 털과 앞니.

무참하게 찢긴 귀와 여기저기 묻은 피.

몇 년 전이었다면 자신은 에이튜의 상태를 보자마자 지하의 상황을 대번에 유추해 냈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이런 멍청한 질문 역시 당연히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리버가 그런 식으로 자책하고 있었을 때 에이튜가 자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영지의 인간들이 잘 살고 있으니 우리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리버는 에이튜가 자신을 배려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몇 년 전이었다면 에이튜 역시 저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토비가 재차 리버의 옆구리를 찔러왔다.

토비는 에이튜의 대답이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버가 일일이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을 때 등 뒤에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무스들은 영지의 인간들이 버린 것들을 주워다 쓰고 있어. 영지의 인간들이 부유하다면, 당연히 여기도 풍족해지겠지."


"흐음, 과연... 그런 것이군!"


팔짱을 끼며 그 의미를 생각해보던 토비가 이내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던 토비가 어느 순간 획 에이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토비는 루나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당사자 앞에서 말하는 것은 무례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토비의 생각과 달리 에이튜는 화내지 않았다.

에이튜는 담백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보다 대화가 엇나가는구나. 그래서 리버, 너는 왜 이곳에 다시 내려왔지?"


"조금...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상당히 복잡한 사정이 생겼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에이튜. 우린 지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어떤 도움을 말하는 거지?"


"우린 이 지하수로를 통해서 영지 밖으로 나갈 작정이에요. 하지만 수로는 어둡고 너무 복잡하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수로 밖까지 안내해줬으면 좋겠어요."


에이튜는 동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그 붉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얼마간 에이튜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어린 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리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제 완전히 인간들과 동화되었구나."


리버는 에이튜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리버가 죄책감이 다분히 섞여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당신을 잊고 살았던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먹고 살기 바빴던 것 뿐이죠. 맞아요 전 적응했어요. 인간은 어떤 것에도 가장 빨리 적응해버리는 종족이니까요."


"그래, 인간들은 그렇지. 언제나 가장 먼저 변화하지. 그런데 혹시 옆의 두 사람은 네 가족이냐?"


그 질문에 토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황당한 소리 다 듣겠군. 이봐, 이 녀석은 인간이고 나는 아돌프잖냐."


지당한 지적이었다.

실제로 가족이었다면 퍽이나 괴상하다고 할 수 있는 조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토비의 오해를 알아챈 리버가 작게 웃으며 설명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토비. 무스들이 말하는 가족이란, 그러니까 우리들로 치자면 동료에 더 가까운 개념이에요. 우리들도 함께 살거나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동료라고 생각하잖아요?"


"뭐야, 그런 거였냐."


리버는 다시 에이튜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때요? 우릴 도와줄 수 있겠어요?"


에이튜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 순간 에이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긍정의 표시였기에 리버와 토비의 표정이 환해졌다.

에이튜는 세 사람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리듯 말했다.


"수로 밖까지 안내하지. 따라와라."



**



"그래서 결국 전부 놓쳤다는 말입니까?"


폴 남작의 질문에 푸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남작이 던진 질문은 어떻게 봐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현장에 있던 자들을 제외하면 당연히 가장 먼저 보고를 받은 사람은 남작일 것이다.

따라서 남작은 지금 결과를 뻔히 알고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푸조는 남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작의 표정에선 아주 미세하지만 어떤 즐거움 같은 감정이 엿보였다.

마침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푸조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평소였다면 남작은 감히 이런 식으로 자신을 능욕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폴 남작은 그야말로 범부였고, 아무튼 자신은 마법사였다.

일천한 마법사라 해도 고작 남작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마법사는 당연히 없다.

푸조는 속이 끓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정을 내지는 않았다.

폴 남작이 저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저런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작의 말대로 그 많은 병사들을 데리고 세 사람을 놓친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푸조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전부 놓쳤소."


푸조는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고민하다가 부연했다.


"하지만 어차피 도망갈 곳은 없소. 폴 영지는 시골이잖소. 이 좁아터진 영지에서 그들이 도망가 봐야 얼마나 멀리 가겠소? 그리고 마녀사냥쯤이야 언제든 있는 싱거운 일인데, 뭘 그리 채근하고 난리요."


푸조의 뻔뻔한 대답에 이번에는 폴 남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남작은 쟁쟁한 권력가들과 정치 투쟁을 할 만큼의 야심가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남작은 자신의 영지에 대해서는 꽤나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남작은 좁아터진 영지라는 말이 상당히 비위에 거슬렸다.

문득 남작은 눈 앞에 있는 늙은 마법사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사실 안될 것도 없었고, 지금은 충분히 콧대를 눌러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 벌였던 마녀사냥은 황제의 칙령이었다.

정확히는 자드 공작의 명령이었겠지만 그런 세부적인 사실은 이 경우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푸조가 치안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보기 좋게 기절했다는 사실이다.

남작은 약간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것이 하찮은 일이었다면, 굳이 칙령으로 내려오지는 않았겠지요. 푸조 당신처럼 경험 많은 마법사를 지명할 정도니 충분히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푸조의 인상이 대번에 구겨졌다.

폴 영지는 시골이며, 이런 시골까지 칙령이 내려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남작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이런 시골 영지에 칙령이 내려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더없이 중요한 일임을 시사한다.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럼에도 푸조는 순간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작은 푸조가 머뭇대고 있는 모습에 만족했다.

그렇게 일단 한번 만족한 후에 남작은 눈 앞의 마법사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남작은 자신이 늙은 마법사를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쯤 몰아붙였다면 이제 마법사의 남은 체면 정도는 지켜줘도 괜찮을 것이다.

남작이 다소 작위적인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남작은 마치 상대방의 실수를 전부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뭐 이미 실패한 이상 어쩔 수 없겠지요. 당신의 말대로 어차피 칙령의 내용은 흔하디 흔한 마녀사냥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콜텐에서도 그리 심하게 책망하지는..."


남작은 말을 멈추었다.

말하던 도중 푸조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푸조 마법사?"


"...이건 마녀사냥 따위가 아니오. 그녀 역시 마녀 따위가 아니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마녀가 아니라면 어째서 마녀사냥을 하라는 칙령이 내려왔겠습니까. 게다가 현장에 있던 치안대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녀 스스로 마녀라고 자백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남작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푸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볼 수 없었던 사나운 기세였다.

사실 처음에 남작은 푸조가 자신과 미묘한 기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남작은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영세한 귀족이었다.

그리고 영세한 귀족과, 그 귀족의 영지에 머무르는 마법사의 권력 다툼은 꽤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푸조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남작은 생각을 바꿨다.

푸조의 태도로 미루어봐선 그런 종류의 일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푸조는 그대로 방을 나서려는 듯 몸을 홱 돌렸다.

남작은 당황했고, 그 감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아직 논의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장 콜텐의 마법사 길드로 가야겠소."


"콜텐이라니요. 수도로 간다는 말입니까? 이보십쇼 푸조. 고작 그 정도의 임무를 실패했다고 해서 직접 수도까지 사죄의 발걸음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 당신의 말대로 기껏해야 마녀사냥 아닙니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가는 게 아니오. 전부 설명하자면 지난한 일이고, 설령 전부 설명한다 해도 당신은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거요."


남작은 자신을 무시하는 그 말에 화를 내려 했지만 이어지는 푸조의 말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푸조는 진지한 눈빛으로 남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연구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줘서 고마웠소.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르니 잘 지내시오."


그 말을 끝으로 푸조는 남작의 집무실에서 나가버렸다.

남작은 그토록 고고하게 굴었던 마법사의 진심 어린 사의에 당황한 나머지 적당한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었다.

남작은 집무실을 나서는 푸조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 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6 착석 (7) +2 23.07.25 68 5 12쪽
45 착석 (6) +2 23.07.24 68 6 17쪽
44 착석 (5) 23.07.23 75 8 14쪽
43 착석 (4) 23.07.22 64 7 14쪽
42 착석 (3) +1 23.07.19 71 8 13쪽
41 착석 (2) +1 23.07.17 67 8 14쪽
40 착석 23.07.17 61 6 14쪽
39 말할 수 없는 것 (12) +1 23.07.15 79 8 15쪽
38 말할 수 없는 것 (11) +1 23.07.12 101 8 11쪽
37 말할 수 없는 것 (10) 23.07.11 96 7 16쪽
36 말할 수 없는 것 (9) +2 23.07.10 92 7 16쪽
35 말할 수 없는 것 (8) +1 23.07.03 100 7 17쪽
34 말할 수 없는 것 (7) 23.07.02 98 7 15쪽
33 말할 수 없는 것 (6) 23.06.29 95 7 16쪽
32 말할 수 없는 것 (5) 23.06.28 95 9 13쪽
31 말할 수 없는 것 (4) 23.06.27 98 8 15쪽
30 말할 수 없는 것 (3) 23.06.26 115 7 16쪽
29 말할 수 없는 것 (2) 23.06.18 113 8 14쪽
28 말할 수 없는 것 23.06.18 105 7 15쪽
27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12) 23.06.17 114 8 15쪽
26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11) 23.06.17 109 7 13쪽
25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10) 23.06.16 111 6 13쪽
24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9) 23.06.16 120 7 17쪽
23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8) 23.06.15 120 8 14쪽
»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7) 23.06.14 127 7 17쪽
21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6) 23.06.13 140 7 12쪽
20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5) +2 23.06.13 120 8 12쪽
19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4) +2 23.06.11 140 8 11쪽
18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3) 23.06.11 136 6 11쪽
17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2) 23.06.10 134 9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