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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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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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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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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기 (10)

DUMMY

루나가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완전히 변모해있었다.


어두운 숲은 거대한 불이 한밤의 연회 장소를 지독하게 착각해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밤새 불의 시중을 들었을 식물들은 난폭한 불의 연무에 그만 까무러친 듯 보였다.

작은 식물들의 경우엔 진즉 사라져버렸고, 큰 나무들의 경우엔 까맣게 탄화 되어버렸다.

바닥에는 회색 재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인위적인 구조물들이 나무와 마찬가지로 탄화된 채 얼핏얼핏 드러나 있었다.

루나는 재 위로 솟아 있는 그것들이 일종의 지붕이나 기둥 따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바스러지고 헤진 탓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루나는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독하게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한 풍경이었다.

숲이 서둘러 옷을 갈아 입듯 한 순간에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몇 가지 있기는 했다.

가령 모닥불 주위에 있는 두 인간 남자와 한 아돌프, 또 그들의 위를 맴돌고 있는 무수히 많은 나비들이 그랬다.

그 주변의 모습만이 회색 재에 덮이지 않은 채 보존돼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변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 더 있었다.


"힘들어 보이네. 굳이 세 명의 머릿속을 전부 헤집을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어차피 언니가 궁금했던 건 이 아이 뿐이었잖아?"


리버의 정신을 배회하기 전부터 옆에서 떠들어 대던 소녀 역시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녀는 리버의 잠든 얼굴을 보다가 이내 조금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과거를 훔쳐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억까지 잠궜어? 언니 답지 않은 대단한 배려심인걸. 아아, 그보다 아쉽네. 응? 뭐가 아쉽냐고? 그야 당연히 이 꼬마 녀석이 언니를 졸졸 따라다녔던 이유지. 여지껏 나는 이 녀석이 연인을 대하는 심정을 가지고 언니를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았지. 그런데, 이제 보니 부랑자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시선이었던 모양이네. 어때? 사실을 알고 나서 실망했어?"


루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닥의 세 남자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세 남자는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루나는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잠든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지금 옆에 있는 소녀는 등장한 이후부터 지나치게 시끄러웠다.


언제까지나 떠들어 댈 것 같았던 소녀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소녀는 어느 지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변 땅이 전부 재로 덮여 있었기에 소녀가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회색 재가 폴폴 날렸다.

그러나 소녀의 옷이나 몸이 재로 더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생각했던 위치에 다다른 것인지 소녀가 몸을 빙그르 돌렸다.

재로 이루어진 바다 한가운데 선 채로 소녀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참 그리운 풍경이야. 그렇지?"


루나는 실소했다.

그리운 풍경.

이럴때도 그립다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일까.

그립다는 말은 보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현재 숲의 형상은 가장 보고 싶은 동시에 꼴도 보기 싫은 광경이었다.


루나는 둘 중 어느 쪽의 감정이 더 큰지 저울질 하기 힘들었다.

말없이 고민하던 루나는 나중에 가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확실히 그리운 풍경이기는 했다.

보기 싫은 감정이 훨씬 크긴 했지만 그리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완벽히 대비되는 감정이 충돌할 경우, 한 쪽의 감정이 더 크다고 해서 다른 쪽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감정이 그런 식으로 더하고 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디, 언니가 살던 곳은 여기 이쯤이었던가?"


루나가 과거의 향수에 잠겨 있자 소녀는 어느샌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소녀가 서 있는 곳은 회색 재가 거의 무릎까지 덮여 있는 곳이었다.

그 위치에서 소녀는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양 손을 이용해 바닥의 재를 한움큼씩 퍼내기 시작했다.


루나는 무표정하게 소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소녀는 계속해서 바닥의 재를 퍼내고 있었다.

소녀의 손은 아주 작았고, 재는 아주 깊고 광범위하게 깔려 있었다.

강물을 퍼내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럼에도 아주 조금씩 재 밑에 있는 것들의 가장자리가 드러나고 있었다.

지켜보던 루나의 인상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소녀는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잠시 후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가 움직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발걸음마다 재의 파도가 출렁였다.

그러나 역시 루나의 몸이나 옷이 더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루나는 소녀 앞에 섰다.


"그만해."


"뭘 말이야?"


"그 밑에 있는 것들을 파내려는 짓."


소녀는 굽힌 허리를 똑바로 펴며 씨익 웃었다.

두 여자는 재로 변해버린 과거의 바다 위에 발을 담근 채 서로 마주 보았다.

소녀의 입이 열렸다.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마주하는 일은 중요해. 언니도 알고 있잖아?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전부 여기서 나왔다는 것 말이야. 이야기의 시작점을 아는 일은 중요하지. 그래야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지 알 수 있으니까."


루나가 뭔가 대꾸하려 했을 때 갑자기 주변 풍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색 재 밑에서 사물들이 불쑥 재를 뚫고 튀어나왔다.

처음 루나의 예상대로 그것들은 각자 지붕이나 서까래, 마루대와 도리 같은 집의 구조물들이었다.

구조물들은 한결 같이 불타고 있었다.

다만 뜨겁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지붕이 필요 없는 작은 구조물들이 역시 불에 타고 있는 상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침내 인간들이 재 안에서 하나 둘 스르륵 일어났다.

대부분이 이곳저곳에 얕은 창상이 가득한 인간들이었고, 아주 일부분의 인간들만이 깨끗하고 깊은 하나의 상처가 있었다.

루나는 정신을 부여 잡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있었고, 그 기이한 광경은 누가 보더라도 어지러움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루나는 소녀를 향해 경고했다.


"그만...해."


"이건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아냐. 언니가 하고 있는 거지."


이번에는 제국군이 나타났다.

무장한 제국군들은 이미 상처 입은 마을의 인간들을 칼로 베고, 창으로 찔렀다.

놀랍게도 무기를 휘두른 횟수 만큼 마을 사람들의 몸에서 상처가 사라졌다.

루나는 그것이 역재생된 장면이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직관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루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세게 눌렀다.


그 사이에도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되감기고 있었다.

건물에 붙어 있던 불은 제국군이 들고 있던 횃불로 빨려 들어갔다.

그 후에는 무기를 지참한 제국군들이 뒷걸음질 치며 숲으로 사라졌다.

루나는 그 장면 역시 거꾸로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움막들과, 나무로 지어진 멀쩡한 건물들이 나타났다.

여느 시골과 다르지 않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이었다.

마을 중심부에는 뛰놀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또래의 일반적인 아이들처럼 그들 역시 어떤 목적지도 없이 그저 뛰어다니고 있었다.

루나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된 공예품처럼 죄다 흐려져 있었다.

루나의 옆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던 소녀가 말했다.


"이런, 사람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질 않네? 하긴 이 당시 언니는 너무 어렸으니까 그럴 만도 해.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래, 어렸으니까 그런 거겠지. 그래서 그 남자를 믿은 것일 테고."


소녀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루나에게 그 내용은 비난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나를 비난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단지 나를 자극하려고?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 어차피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결과는 변하지 않았어. 내가 자드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도 부족은 멸절했을 테고, 자드는 나를 끌고 갔을 테지. 자드는 그런 남자야. 원하는 장난감이 있다면 부모에게 떼를 쓰는 대신 차분히 저금통에 돈을 집어 넣을 남자지. 오히려 순진했던 건 너희들이야. 도망칠 기회는 충분히 있었어. 북부로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그래, 듀라트 영지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땅을 끝내 버리지 못한 것처럼 말이야."


소녀는 빙그레 웃었고, 대답할 말이 막막해진 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루나는 더 이상의 질의응답이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마을을 둘러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곧바로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리움은 점점 부상하기만 했다.

가라앉지 않았다.

떠오른 감정은 내부를 휘저었다.

루나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루나는 망막에 묻은 과거의 편린들을 떨쳐내기 위해 시선을 옮겼다.

루나는 모닥불과 그 옆에 뒹굴고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곧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리버와 토비 그리고 길버트는 그 모습 자체로 현실의 방증이었다.

세 사람을 보며 약간의 안도감은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지러움은 점점 더 심해졌다.

세 남자의 모습은 과거와 현재의 끔찍한 혼재를 뜻하기도 했다.

루나는 어쩌면 소녀의 말처럼 자신이 무리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세 남자의 머릿속을 헤집고, 더불어 기억을 묶어 놓는 일에 너무 많은 기력을 쏟아버렸다.


그때 불현듯 세 남자 위에서 맴돌던 나비 몇 마리가 루나의 근처로 날아왔다.

여태 루나 곁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나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계하는 듯 날면서도 점점 많은 수가 루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루나는 나비들의 접근에 초조함을 느끼며 마을 한 어귀로 시선을 보냈다.

재가 없었다면 숲의 중심부 쪽이었을 방향이었다.

그 부근은 잠잠했다.

루나가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루나는 더욱 초조해졌다.

나비들의 접근은 자신의 기력이 그만큼 떨어졌음을 암시했다.

만약 이 상태로 시간이 더 흐르면 그것이 나타난 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는 루나에게 끊임없이 이곳에 머물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점점 더 많아지는 나비의 숫자에 루나는 결국 공중에 손을 휘저어야 했다.

얼마간 나비들을 쫓아내는 데 신경이 팔려있던 루나는 어느 순간 주변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원래 밤의 숲에 있었으니 조용한 것이야 당연하다.

하지만 소녀가 더 이상 떠들지 않는다는 점은 이상했다.


루나는 구토감을 참으며 소녀를 관찰했다.

소녀는 한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루나는 자신이 기다리던 것이 마침내 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루나는 소녀가 바라보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매구."


마을 옆의 숲에서 나타난 매구는 얼핏 보기에 아돌프 여성 같았다.

일단 온 몸에 털이 나 있다는 점은 결코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역설했다.

다만 매구는 아돌프들과 달리 주둥이가 훨씬 좁았고, 아돌프들에겐 찾아볼 수 없는 붉은 털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아돌프들의 손이 그저 좀 흉측하고 커다란 인간의 손에 가깝다면, 매구의 손은 짐승의 손에 더 가까웠다.


하얀 소복 같은 것을 입은 매구가 탐색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매구는 이상한 걸 본 사람처럼 고개를 몇 번이나 갸웃거렸다.

한참 동안 묘한 눈빛으로 루나를 바라보던 매구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매구는 루나에게 관심을 꺼버리고선 모닥불 근처로 이동했다.

나비들이 전부 매구를 따라 날갯짓했다.

매구가 입고 있는 소복 아래에서 풍성하고 붉은 네 개의 꼬리가 그 걸음에 맞춰 양 옆으로 흔들렸다.

네 개의 꼬리.

루나는 그 꼬리 개수에서 이전에 이 숲에서 자신들과 같은 경험을 했던 인간이 상당히 많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모닥불 옆으로 이동한 매구는 세 남자의 가운데에 섰다.

잠시 고민하듯 세 남자를 둘러보던 매구가 마침내 선택했다는 듯 길버트 쪽으로 움직였다.

매구는 길버트의 허리 근처의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길버트의 바지춤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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