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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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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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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마 (8)

DUMMY

파스토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미오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미오는 그것이 종교인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일종의 교리 문답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굳이 쿠니가 알 필요는 없다.

파스토르 역시 말이 없었기에 두 사람은 잠시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에 미오는 이만 방을 나서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어차피 이곳에 찾아온 주된 용건은 이미 해결한 상태였다.

미오는 대주교와 느긋한 소담을 나눌 의향도 당연히 없었다.

결국 그대로 자리를 뜨려고 마음 먹었을 때, 미오는 문득 두 아이가 떠올랐다.

파스토르와 종교적인 토론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두 아이에 대한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어쨌든 대주교와 같은 눈높이에서 독대할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미오는 말했다.


"네 종교적 철학에 대해선 전혀 관심 없어. 네가 무엇을 믿든 그건 네 문제겠지. 하지만 스니블과 스칼에 대해선 한 마디 해두고 싶군."


"어떤 것입니까?"


"네 더러운 계획에 순진한 두 아이를 끌어들이지 마."


직설적이고 단호한 말이었다.

갑자기 파스토르가 고개를 숙였다.

미오는 처음에 그것이 반성하는 인간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스토르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미오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뭐가 웃기지?"


"아, 죄송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절대 당신을 비웃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두 사람에게 순진하다는 표현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파스토르 너에 비하면 그 두 아이들은 순진해."


파스토르가 입을 다물었다.

파스토르는 말없이 미오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미오가 시선을 피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동안 끈적하게 얽혔다.

물끄러미 쿠니를 관찰하던 파스토르는 어느 순간 늙은 쿠니의 눈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모성애였다.

파스토르는 목까지 차오르는 헛웃음을 삼켰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후에, 파스토르는 최대한 절제된 어조로 말했다.


"혹시 그들을 돌보다가 뜻 모를 애정이라도 생겨버린 겁니까? 인간은 말입니다. 보통 겨울을 스무 번 정도 겪고 나면 어른이 되는 법입니다. 두 사람은 이미 예전에 그 시기를 지나왔지요. 사실, 스니블의 경우엔 스무 번이나 겪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는 천재 중의 천재니까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고작 몇 주 동안 배운 바둑으로 평생 반상 위를 항해했던 저를 가지고 놀 만큼의 천재입니다. 현재 대륙에선 스니블과 비견될 인물조차 없습니다. 아, 굳이 꼽자면 수십 년 전 폐위 당한 남부의 황태자 정도를 꼽을 수 있겠군요."


"종교에 심취한 인간들은 언제나 너처럼 빙빙 둘러서 말하는 경향이 있더군.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변증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생긴 고약한 버릇입니다. 다시 한 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 둘에게 순진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는 스니블이 네 다섯 살 언저리였더라도 그를 향해 순진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갑자기 의문이 드는군요. 혹시 지금 제가 문화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고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당신들에게는 자녀들이 장성한 이후에도 보살핌을 주는 문화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파스토르의 말은 마지막에 가서 누가 들어도 비꼬는 듯한 투로 변해 있었다.

미오는 그 점을 지적하려다가, 그냥 관두었다.

그녀는 인간들이 순간의 감정에 쉽게 휩쓸린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점을 이해했다.

인간은 지나치게 짧은 시간 동안 땅 위에 머무르는 종족이다.

그러니 순간에 충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오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우리들에게 그런 문화는 없어. 그래, 네 말대로 스니블이 이미 어른이고, 천재라는 점은 인정해. 하지만 제 아무리 머리가 비상해도 모든 일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야. 너도 알겠지만 똑똑하다는 것과 바르게 산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어. 특히 너희들은 언제나 제 감정에 휘둘려서 비틀거리잖아. 또 그렇게 비틀거리는 주제에 상대방과 기꺼이 어깨동무하며 살아가지. 솔직히 말하자면 파스토르, 나는 네 옆에서 세상을 배웠을 그 아이들이 걱정 돼."


미오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말이 상대방을 힐난하는 것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미오는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덧붙였다.


"네가 이걸 모성애의 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이 감정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동정이든 내겐 중요치 않으니까. 하지만 그 두 사람이 내게 소중하다는 점은 확실해. 그러니 네가 벌이는 추악한 전쟁에 끌어들이지 마.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그 이상으로 인간성을 상실하는 걸 원치 않아."


파스토르는 깊게 미소 지었다.

파스토르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양 손을 깍지 꼈다.

그대로 손을 입 앞에 가져다 놓은 파스토르는 가만히 미오를 바라보았다.

약간 거만하다고 할 수 있는 자세였고, 파스토르는 의도적으로 그런 자세를 취했다.

눈 앞의 쿠니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오는 대주교의 태도에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파스토르는 약간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자세를 풀었다.


문득 파스토르는 지금의 대화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불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어떤 기교를 부린다 해도 이 쿠니에게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긴 그럴 수 밖에 없다.

일단 미오는 파스토르의 사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미오가 숲으로 돌아가버리는 순간,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생길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녀는 쿠니였다.

파스토르는 그녀가 약학에 능한 인간이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인간 전문가였다면 파스토르는 다른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그녀를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쿠니는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


종교전쟁 이후 제정된 법안에는 타종족과의 마찰에 대비한 항목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리고 법이란 언제나 지상의 것이며 현실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법은 종교를 싫어한다.

법과 신앙이란 태어난 순간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증오하는 오래된 앙숙 같은 사이라고 할 수 있다.

파스토르는 북부에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법과 사이가 나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현재 북부의 모든 재판관은 남부의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륙법을 시행하기 위한 조치였고, 그 재판관들은 북부의 추위를 견딜 만큼 강인한 자들이다.

따라서 쿠니와의 마찰로 법정에 서는 순간, 파스토르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질 확률은 희박하다.

오랜 시간 고민하던 파스토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가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이 걸어왔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북부에선 일단 도시를 떠나면 다른 도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야 합니다. 도중에 멈추면 얼어 죽으니까요. 저와 그 두 사람, 그리고 당신까지 포함한 우리들은 이제 달리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습니다."


"내가 네 사업에서 손을 떼고 숲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미오의 대답을 듣자마자 파스토르는 어떤 낯선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의 정체를 찾던 파스토르는 이내 자신의 가장 깊은 저변에서 약간의 분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파스토르는 그 분노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주교의 자리에 앉은 후부터, 누군가에게 부탁은 고사하고 설득을 들은 적도 없다.

하지만 눈 앞의 이 과감한 쿠니는 협상은 고사하고 협박을 시도하고 있었다.

파스토르는 그 감정이 절대 수면 위로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꾹 즈려 밟으며 말했다.


"처음에... 저는 저희들에게 무엇보다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예, 비록 신심이 부족하긴 해도 저는 대주교입니다. 제 신앙 생활은 결코 짧지 않았고, 그간 믿음이 망가질 뻔한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온전히 믿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그 얘기인가? 네 종교적 관점에 대해선 흥미가 없다고 조금 전에도 말했을 텐데."


"아니요. 저 역시 당신과 교단의 섭리에 대해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이건 두 사람에 관한 얘기입니다. 방금 전에 미오님은 두 사람이 인간성을 상실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지요. 저는 그런 일이 결코 벌어지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예, 저는 세상 누구보다 그 두 사람을 온전히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당신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미오가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네가 스니블과 스칼을 믿고 있다고?"


"예, 저는 진정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역시, 제가 보내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믿음을 제게 보내고 있을 거라는 점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군. 그 두 사람이 네 사업을 끝까지 도와줄 것을 믿는다는 말이야? 물론 사업에 관해서는 그럴 수 있겠지. 너는 그들을 믿었기에 연초와 광산에 관한 것을 일임했어. 두 사람도 너를 믿었으니 여태 사업을 진행한 것일 테고. 하지만 두 사람이 쭉 올바른 길로 걸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이지?"


파스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다만 이번에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의도적인 몸짓이 아니었다.

파스토르는 눈 앞의 쿠니를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파스토르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미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언하건대 미오님. 그들을 걱정할 필요는 추호도 없습니다. 당신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스니블은 다시 없을 천재라고 말입니다. 물론 스칼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천재적인 아이입니다만, 아무래도 세간의 인식에 맞추자면 역시 천재라는 평은 스니블 쪽이 더 어울리겠지요. 예, 미오님 다시 말하겠습니다. 천재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천재들의 특성을 알고 있다면 분명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겁니다."


"천재들의 특성?"


"천재란 말입니다. 단지 많은 양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것들을 종합하고, 해석하고, 재분류하고, 재창조하는... 또 그 모든 과정을 말도 안될 만큼 재빨리 해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들 사이에선 그 정도로도 천재라고 불립니다만, 제가 보기에 그런 부류는 어설픈 천재들에 불과합니다. 그건 차라리 우수한 학자에 더 가깝다고 해야겠지요."


미오는 파스토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얘기에 아예 관심이 없는 척하려 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조금씩 귀가 쫑긋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파스토르는 미오의 들썩이는 귀를 보며 설명을 이었다.


"진정한 천재란 말입니다. 놀랍게도 자신의 인간성이 전락할 것까지도 기가 막히게 예견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어떤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는 물론이고,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불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그렇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가끔 스니블을 볼 때 소름이 끼칩니다."


"소름이 끼친다고?"


"예. 그는 절대 인간성을 훼손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왜 그 두 청년을 보호하려 하는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수단을 써도 천재들의 인간성을 훼손시킬 수 없습니다. 제가 믿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스스로의 인간성을 훼손시킨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럴 경우 그들이 망설이지 않고 저를 배반할 것을 신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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