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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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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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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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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마 (9)

DUMMY

북부의 이름 없는 평원 위로 카니쿨라 썰매가 미끄러졌다.

큰 썰매 위에는 스니블과 스칼이, 그리고 옆의 작은 썰매에는 더글라스가 올라타 있었다.

스니블은 썰매 위에 앉은 채, 옆 썰매로 고개를 돌렸다.

더글라스는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고심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다.

스니블은 피식 웃어버렸다.

저 신실한 사제가 어젯밤 이글루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에 휩싸였을지, 표정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스니블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주변은 지난 며칠 동안 지겹도록 봐왔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눈으로 덮인 끝없이 하얀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 풍경에 약간 압도되는 느낌을 받으며 스니블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처음처럼 카니쿨라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아무튼 주변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는 그것이 가장 역동적인 장면이었고, 또 가장 흥미로운 관찰거리였다.

스니블이 하릴없는 지루함에 빠져 있었을 때, 문득 스칼이 말을 건네왔다.


"스니블."


"말해."


"계속 생각해봤는데 말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여행을 시작한 뒤로 부쩍 질문이 많아졌군. 하긴, 생각하기 좋은 환경이긴 하지. 좋아 말해봐, 이번엔 또 어떤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


"네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 말이야."


시시한 주제였기에 스니블은 그저 정면만 응시했다.

스칼 역시 정면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그게 뭔가 이상하잖아? 무벤의 컨트 시장은 어차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꼼짝없이 따라야 하는 처지야. 그러니 무벤에서 벌어질 건 피 말리는 협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것이 되겠지."


"그렇겠지. 그래서?"


"그럼 이상하잖아. 왜 굳이 협상에 필요도 없는 나까지 이 여정에 동행 시킨 거야?"


스니블은 스칼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을 눈치 챈 스칼 역시 스니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스니블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스칼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야 너를 곁에 두고 싶었으니까."


스칼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스칼은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스칼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잠시 뒤에 스칼은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친하게 지낸 일 없던 진지함과의 관계를 재조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스칼은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이어서 심각한 얼굴로, 그리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어. 그런 놈들이 수도원에 몇몇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너를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한 적이 없는..."


말하던 도중 스칼은 스니블의 표정에서 의구심을 느끼며 말을 끊었다.

스니블은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니블의 올라간 입꼬리를 본 스칼은, 그제서야 그것이 농담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가슴 속에 철렁 내려 앉았던 것이 다시 부상하는 것을 느끼며 스칼은 투덜댔다.


"이 카니쿨라 같은 자식아, 농담을 하려거든 낯빛이라도 좀 바꿔가면서 해라. 방금 나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겪었다고."


"위기라니? 무슨 위기?"


"방금 내 인생 최초로 믿음이 무너질 뻔했다고."


결국 스니블이 참지 못하고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스칼 역시 정면을 응시하며 가볍게 웃어버렸다.

한참을 웃고 난 뒤에, 이번에는 스니블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스칼, 혹시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어?"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그렇기는 해."


그 대답에 스니블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면을 보고 있었던 스칼은 그 반응을 알아채지 못했다.

스칼이 이어서 말했다.


"젠장할, 이 빌어먹을 여행은 너무 지루하다고.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곤 죄다 눈 밖에 없잖아. 게다가 식사라곤 빌어먹을 훈연된 것들 밖에 없고."


스칼의 불평에 스니블이 안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공감되는 말이었기에 스니블은 일단 친구를 위로했다.


"그런 것이었군. 하지만 이미 여행을 떠나왔으니 우린 이제 앞으로 달리는 수 밖에 없어. 돌아갈 거라면 애초에 썰매에 올라타면 안되는 것이지. 조금만 더 참아봐. 우린 꽤 빠르게 이동했으니 조만간 나데자에 도착할 거야."


그때 카니쿨라들이 서로 엉키는 바람에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스칼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 질렀다.


"아르히! 왼쪽으로 움직여! 맥베놈! 속도를 늦춰 이 카니쿨라자식아!"


스칼은 카니쿨라들 제 각각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하나 위치를 바로 잡았다.

스니블은 그 솜씨에 약간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이 며칠 간의 여정은 스칼에게 썰매 대회에 나가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솜씨를 부여한 듯했다.

마침내 상황을 전부 조율한 스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스칼은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이봐 스니블. 아까는 흐지부지하게 넘어갔지만 나는 진심으로 질문한 거라고. 도대체 나는 왜 데려온 거지? 그러니까, 우리 둘이 동시에 자리를 비워버리면 지하와 광산을 감독할 사람이 없어지잖아. 물론 미오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녀는 너무 무르단 말야. 인간이란 엄하게 채찍질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게으르고 나태하게 변해버린다고."


스니블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알 수 없는 반응에 스칼은 다시금 고민에 잠겼다.

물론 고민의 와중에도 카니쿨라들에게 소리 지르며 간간이 명령하는 일은 잊지 않았다.

썰매는 부드럽게 눈 위를 미끄러졌다.

날은 청명했고, 맞바람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대화하기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나쁜 환경도 아니었다.

굳이 평가하자면 스니블의 말처럼 생각하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게다가 북부의 오래된 금언에 따르자면 여행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말벗이다.

좋은 말벗과 새로운 환경은 언제나 정신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어 준다.

스칼에겐 지금 대륙에서 가장 똑똑한 말벗이 있었고, 주변 환경은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스칼은 사안에 대해 평소보다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스칼은 재차 질문했다.


"굳이 그런 점이 아니더라도 말야. 우리가 없는 새에 대주교가 딴 마음을 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어? 이건 어떻게 보면 직무유기나 다름 없잖아. 심지어 우린 더글라스까지 데려왔어. 관리자가 죄다 떠나온 셈이라고."


"통찰력이 제법이야 스칼. 이제 네게도 어느 정도는 대세점을 짚는 능력이 생긴 모양이군.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가 죄다 자리를 비웠으니 파스토르는 연초 사업이나, 광산 채굴권에 대한 영향력에 손을 뻗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우리 쪽에 가담했던 추기경들도 이 틈에 슬쩍 파스토르에게 다시 붙을 수도 있고."


"그럼 안되는 것 아냐?"


"내가 말한 건 당연히 전부 중요한 것들이야. 하지만 다 가지라고 해. 그깟 사업이나 채굴권 같은 것들은 우리 계획이 성공하고 나면 죄다 의미 없는 것들이 될 테니까."


스칼은 그 말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스니블의 말이 내포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서 경악했다.


"성공하고 나면? 그 말은 혹시 무벤에 도착해서 곧장 일을 벌이겠다는 말이야?"


"맞아. 방금 전에 너는 내가 왜 굳이 너와 더글라스를 데려왔냐고 물었지."


"어... 그랬지."


"내 대답은 똑같아. 나는 너를 곁에 둬야 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부의 머리에서 너를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고 해야겠군. 이 경우에 사업을 살피러 간다는 것은 꽤 좋은 구실이 됐지."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난 뒤에 스칼은 전부 이해했다.

아무튼 계획의 직접적인 실행 단계에서 스니블과 자신은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상황을 전부 이해한 뒤에 스칼은 모종의 기대감이 불쑥불쑥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불안함이 부상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스니블은 스칼의 옆에서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스칼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했다.


"그런데 벌써 진행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아니, 시기는 적절해. 오히려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고 볼 수 있을 정도야. 파스토르의 사업은 원만한 합의 하에 이미 진행되고 있어. 그 말은 이제 곧 자드 쪽에서 움직일 거란 얘기지. 그렇다면 모든 것이 벌어질 그 시점에 우리는 반드시 무벤에 있어야 해."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렇지만 우리의 계획을 시행하자면 우선 무벤을 손에 넣어야 하잖아. 뭐, 더글라스가 완력이 남다른 편이긴 해도... 고작 셋이서 무벤을 점령하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복잡한 문제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충분히 가능해. 처음에 네가 했던 말처럼, 컨트 시장은 내 제안을 승낙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사실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기도 했고. ...그보다 혹시 여행 도중에 인생관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이런 질문을 네게 들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스칼은 그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스니블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이런 식으로 캐묻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칼이 자신의 변화에 조금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을 때, 스니블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벌이고 있는 일은 대륙에서 가장 복잡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네가 해야 할 것은 아주 단순해 스칼. 너는 한 가지만 명심하면 돼."


스칼은 거의 타성적으로 되물었다.


"어떤 걸 말하는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견고하게 유지해. 그게 네 할 일이야."


그것은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해답이었고, 동시에 스칼이 가장 잘 하는 것이기도 했다.

스칼은 여태 끙끙 앓았던 고민이 순식간에 전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스칼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호쾌한 말투로 확답할 수 있었다.


"맞아. 설명은 필요 없지.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 원칙을 따르겠어. 생각은 네가 하라고! 행동은 내가 할 테니까."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스칼을 보며 스니블은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더글라스의 썰매가 두 사람의 썰매 옆으로 바짝 붙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의문 섞인 시선을 보냈다.

더글라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나데자가 보입니다!"


스니블과 스칼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글라스의 말대로 유서 깊은 도시의 성벽 윗부분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나 있었다.

곧 상황을 파악한 스칼이 흥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달려라!"


카니쿨라들은 여지껏 그래왔듯 스칼의 명령에 따라 더 활발히 발을 놀렸다.

한편 스니블은 가만히 도시를 응시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품 속으로 한 손을 집어 넣었다.

스니블은 품 안에 있는 것을 매만졌다.

매만지고 있던 것은 솜이 가득 든 투박한 가죽 뭉치였고, 그 중심에는 자그마한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수도원을 떠나기 전 미오에게서 받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스니블의 표정은 무감각해졌다.

스니블은 몇 번이나 그 가죽 뭉치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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