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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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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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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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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마

DUMMY

『상대방 기사가 반상의 가장 구석에 돌을 놓았다.

베테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둑은 반면 승부였다.

종반에 벌어진 치열한 수상전에서 크게 실수한 것이 상대방의 패착이었다.

상대 기사는 자신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반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사나운 기세였고, 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기에 베테거는 복기를 할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베테거는 대국장을 빠져나왔다.

곧 문하생 중 한 명이 베테거에게 다가왔다.


"정말 멋진 대국이었습니다 선생님.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역시 이기셨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좀 아슬아슬했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 중반에 크게 실수하셨을 때 말입니다! 설마 무패의 기록이 깨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제가 다 식은땀이 나더군요."


베테거는 별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문하생은 질문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바둑을 둘 때 어떤 실수에도 마음이 흐트러지는 법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저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베테거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기력이 어느 단계를 넘어서고 나면, 기사들은 부동심을 배우게 되지. 그리고 이 부동심이란 확고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문하생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고한 믿음이라...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실수를 했다 쳐도, 어차피 상대방보다 자신의 기력이 더 높을 테니 승부에선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말씀이시지요?"


문하생을 보는 베테거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장난기 가득한 어린아이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문하생이 그 변화를 의문스럽게 여기기 시작했을 때쯤 베테거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믿는 건 그런 게 아닐세."


"예? 아... 그렇다면 역시 평소에 공부를 잘 해두어서, 한 번쯤 실수하더라도 금방 만회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까?"


베테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침내 문하생이 도저히 모르겠다는 식으로 나왔을 때에야 베테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완전히 잘못 짚었군. 대국 중 큰 실수를 저질렀을 때 믿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라고 할 수 있지."


"예? 상대방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인 이상 대국 중에 반드시 한 번은 크게 실수하고 말 거라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지."』


-무패의 기사 베테거의 일화 중-



*



렌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물론 쿠니들에게 인간들의 의자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지금 렌카가 기댄 의자는 정보 길드에서 특별히 세 쿠니를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의자가 아니라, 의자와 약간 닮은 해먹이라고 보는 편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아무튼 렌카는 등 부분이 그물망처럼 되어 있는 그 의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의자에 등을 비비며 마침내 편한 자세를 찾은 렌카는 옆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탁자 위에 놓인 제철 과일과, 이 시기에 보기 힘든 과일들이 보기 좋은 빛깔을 내고 있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제는 익숙해진 두 어린 쿠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들은 바닥에 앉은 채 알팔파와 티모시를 섞은 것으로 보이는 건초를 씹고 있었다.

이 방에 있는 거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코가 준비해준 것들이었다.

건초를 씹던 두 쿠니가 이번에는 과일을 집어 들었다.

렌카는 두 쿠니를 향해 소리쳤다.


"배탈이 날 수도 있으니 너무 많이 먹지는 마라!"


무려 열흘 동안 렌카에게 호되게 시달린 두 쿠니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경고를 준 뒤 렌카는 다시 해먹에 몸을 묻었다.

렌카는 누운 상태로 주머니를 뒤적여 연초를 꺼냈다.

렌카는 연초를 코 앞으로 가져와서 이리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당최 알 수가 없군."


말 그대로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 저택에 발을 들여놓았던 열흘 전에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쿠니라고 해서 전부 식물학에 능통한 것은 아니다.

가령 지금 건초를 씹고 있는 저 두 놈들의 경우에 도저히 식물학에 권위가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하긴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장 무지한 쿠니조차 가장 박식한 인간들보다야 식물에 박식하긴 하다.

숲에서 살고, 게다가 주식이 식물이니 당연한 사실이다.


다만 렌카는 그저그런 쿠니들과는 달랐다.

렌카는 종교전쟁 직후부터 쭉 식물학에 빠져 살았고, 현 시점에서 그가 다루는 것은 이제 식물학이라기보다는 약학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인간들과 어울려 사는 쿠니들 중에는 렌카에게 자문을 구하러 오는 자들도 많았다.

자부심을 느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열흘이 지난 지금, 원래 자신감이 있던 자리에는 대신 회의감이 꿰차고 있었다.


렌카는 연초 끝을 풀어 손으로 비볐다.

지난 열흘 동안 알아낸 사실이야 있다.

연초의 주성분은 생각했던 것처럼 담뱃잎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알아낸 전부였다.


"확실히 뭔가 있긴 있는데 말이지."


렌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참여한 이 일종의 연구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흔한 연구였다면 도둑들이 사정사정하며 자신을 초빙했을 리 없다.

한참을 누운 채 빤히 연초를 들여다 보던 렌카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어서 탁자 위의 투명한 용액에 연초 끝을 살짝 담궜다.

투명했던 액체가 점점 보랏빛으로 변했다.

렌카가 그 장면을 멍하게 보고 있었을 때, 방문이 열리고 마르코가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마르코는 오직 렌카에게만 경과를 물어왔다.

마르코는 이번에도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두 쿠니들에겐 관심도 주지 않은 채 곧장 렌카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진전이 좀 있으신가요?"


"아니 전혀."


렌카는 마르코가 실망한 기색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코는 열흘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음에도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 태연한 태도는 렌카에게 모종의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렌카는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휴식을 위해 마련된 방에는 쿠니들이 좋아할만한 음식들이 쌓여 있었다.

또 방 안의 모든 가구들은 쿠니들의 몸에 맞게 개량된 것이었다.

섬세하고, 융숭한 대접이었다.

그래서 렌카는 의심스러웠다.


비록 인간의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렌카의 주요 고객은 인간들이었다.

가끔 무스나 아돌프가 찾아오긴 해도, 렌카의 오두막에 찾아오는 것은 역시 인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래서 렌카는 인간들 사이에서 정보 길드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인간들이 덜꿩나무와 가막살나무의 차이점을 알고 있는 것 만큼 모호한 지식이기는 했다.

하지만 렌카는 적어도 정보 길드가 자선 사업가와 정 반대에 위치한 직종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렌카는 질문했다.


"별로 초조해 보이지 않는군. 급한 일 아니었나?"


"예 급한 일이긴 합니다만... 제 초조함과 연구의 진척도 사이에 큰 연관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합리적인 태도로군."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마르코는 덤덤하게 얘기했고, 그래서 렌카는 그 태연함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렌카가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말이야. 만약 내가 이 제의에 응하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이상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그야 다른 쿠니를 찾아서 똑같은 제안을 했을 겁니다."


"흠. 그럼 한 가지 더. 내가 끝끝내 성분을 밝혀내지 못할 경우엔 어떻게 되지?"


렌카의 질문에 마르코는 옅은 웃음을 내보이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마르코는 자상한 눈빛으로 말했다.


"무슨 걱정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겠습니다. 렌카님은 이만큼이나 대접을 받아 놓고서,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못할 시에 저희가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한 것이지요?"


렌카는 대답 대신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고, 마르코에게 그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길드를 대표해 말하자면, 성과가 없다고 해서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려도 상관 없으니 천천히 분석해 주십쇼. 그리고 그 동안 연구에 필요한 모든 것들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마음껏 요청하셔도 됩니다.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저희들도 당신들을 배려하고 존경하니까요."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마르코는 렌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렌카는 닫혀버린 방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얼핏 듣기에 방금 전 마르코의 말은 확실히 배려와 존중이 가득한 발언처럼 들린다.

성과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고, 머무르는 동안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는 말은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렌카는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게다가 인간들에 대한 경험도 풍부한 쿠니였다.

렌카는 인간들이 베푸는 공짜 호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방금 마르코가 한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몇 달, 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다고?'


어쩌면 이 부분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마르코의 태도나, 혹은 여태 길드원들이 자신과 두 쿠니들에게 성과를 재촉하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마르코는 그렇게 몇 년이 걸릴 경우, 자신이 도중에 연구를 포기할 수 있는지까지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빠뜨렸음이 분명한 부분이었고, 동시에 렌카가 일부러 묻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렌카는 자신이 놓여 있는 처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현재 길드의 관계는 어떻게 보더라도 우호적이었다.

한 쪽은 탐구심 넘치는 쿠니였고, 다른 한 쪽은 그런 쿠니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우호적이다.

하지만 렌카는 자신이 이제 그만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이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적어도 우호적이라고 불리긴 어려운 관계가 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렌카가 묘한 표정으로 연초를 매만지고 있자 어느새 두 쿠니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 건초가 입에 남아 있는지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두 쿠니 중 한 명이 물었다.


"알아냈나요 렌카 아저씨?"


렌카는 '너희들도 나와 똑같은 의뢰를 받은 것 아니냐'라고 대꾸하지는 않았다.

더불어 두 어린 것들에게 인간의 호의는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식의 충고를 건네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마르코와 마찬가지로 렌카 역시 어느 시점부터 두 쿠니들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와서 충고하기엔 이미 제공 받은 것들이 너무 많다.


'카니쿨라 같은 일에 휘말려버렸군.'


렌카는 말없이 연초를 응시했다.

사실 숲으로 돌아가기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 한 가지 있다.

간단한 일이고, 또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일이다.

연초의 성분을 밝혀내면 된다.

렌카는 아홉 번째로 마음을 다잡았다.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두 쿠니를 뒤로 한 채 렌카는 연구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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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행마 (6) 23.12.13 10 0 11쪽
85 행마 (5) 23.12.11 11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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