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새글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780
추천수 :
573
글자수 :
1,068,691

작성
23.12.13 17:53
조회
9
추천
0
글자
11쪽

행마 (6)

DUMMY

얘기하던 도중 눈이 퍼붓기 시작해서 세 사람은 이글루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모닥불을 옮기느라 세 사람은 꽤 부산을 떨었다.

모든 짐을 옮긴 후에는 완전히 아늑해졌다.

모닥불은 이글루 안쪽 면의 눈을 녹였고, 그것들은 금방 추위에 다시 얼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언 부분은 그대로 단단한 벽이 됐고, 온기를 안에 가두어 주었다.

바깥은 지독한 추위가 서려 있었지만, 이글루 안의 공기는 훈훈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훈훈한 공기 속에서 더글라스는 마치 수도원의 어린 사제들이나 보낼 법한 눈길을 스니블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눈길을 받은 스니블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스콜라리움의 선생처럼 얘기할 수 밖에 없었다.

스니블은 이글루 안으로 몇 송이씩 새어 들어오는 눈을 바라보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이것부터 미리 말해두겠어. 권능을 다루는 것과 교리 해석 사이에는 조금의 연관도 없어.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들이 스콜라리움에서 배우는 것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한 것이지, 신에 대한 이해는 아니니까."


"그 교육들이 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수업은 성전(聖典)으로 이루어지잖습니까."


"성전은 맞아. 다만 거기 적힌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지혜 같은 것에 가깝지. 수도원의 사업 중 하나는 우리가 그 지혜를 배워서 가련한 시민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게 만드는 것이니까. 하지만 단언할 수 있어. 거기서 배우는 온갖 종류의 지혜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오히려 신과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해."


스니블의 단호한 태도에 더글라스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스콜라리움의 선생들이 들으면 눈물을 글썽일만한 발언이군요. 그래도 스니블님이 하시는 말이니 당연히 깊은 의미가 있겠지요."


"물론 있지. 방금 말한 것처럼 성전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야. 그런 책을 보는 일의 가장 큰 이점은 당연히 이해력이 높아진다는 거야. 아, 여기서 이해력이 높아진다는 말은 단순히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원리를 보다 잘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야. 말 그대로 세상 모든 현상에 대한 이해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진다면... 그건 지극히 권장할만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렇지 않아. 왜냐하면 신은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없거든. 아니, 오히려 세상에 대한 이해와 신에 대한 이해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고 해야겠군. 피오와 디스토니아 교단이 결코 융합될 수 없는 것처럼,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해.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실천해야 하지. 그래서 대개는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신앙심은 반대로 옅어지고 말아."


더글라스는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는 스칼이 네 번째로 수프 그릇을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스니블은 자신의 몫을 약간 걱정하며 다시 더글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신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야. 교단의 높은 분들이 권능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그 늙은이들은 세상을 너무 많이 이해해버렸거든."


"그럼 신을 이해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올바로 해석하지 못했음이 당연하겠지만, 지금 스니블님의 말은 신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상 일에 무지한 바보가 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것도 썩 틀린 방법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그렇지만 그 방법은 권하지 않아. 일부러 바보가 될 필욘 없겠지. 잘 들어봐 더글라스 이건 전혀 복잡하지 않아. 신을 이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 그냥 신을 믿으면 돼."


더글라스가 쉽게 대답을 꺼내지 못했고, 그래서 다시 스니블이 말했다.


"좋아, 스콜라리움에서 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설명은 집어 치우겠어. 그럼 이번엔 이쪽에서 질문하지. 더글라스, 너는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태초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와중에 이런 말을 드리게 되어서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방금 말하신 세상이 굴러간다는 개념 자체도 어렵습니다. 아뇨, 정확히는 그것이 아예 뭘 의미하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해야겠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인이라니요. 세상은 그저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저 돌아간다는 해석도 괜찮은 편이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태어났으니 살고, 배고프니 먹고, 잠이 오니 잔다는 식으로 말야. 보통 능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주제에 지독한 염세관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그런 말을 하곤 하는데..."


말하는 도중 더글라스가 우울한 기색을 내비쳐서 스니블은 잠시 말을 끊었다.

스니블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더글라스. 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난 그런 해석도 옳다고 믿어. 이건 말 그대로 단순한 관점의 차이일 뿐이야. 옳고 그름을 가를 수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비난할 이유도 없지."


"관점의 차이... 말입니까?"


"그래, 이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의 차이에 불과해. 세상이 그저 굴러간다는 네 말은 틀리지 않았어. 성실한 주부가 가족을 위해 요리를 만들고, 물레방아의 주인이 빵을 만들고, 병사가 훈련하고, 창부들이 몸을 팔고,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또 노인들은 죽어 가. 이것들은 네가 말한 것처럼 그저 일어나는 일들이야. 확실히 세상은 제 멋대로 구르고, 흘러가고 있어. 심지어는 우리가 신을 신이라 부르기 한참 이전부터 말이야."


더글라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알겠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흘러가는 것들이군요. 그런데 스니블님이 말하는 다른 해석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일어나는 그 일들에 어떤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까?"


"저 곳을 봐."


스니블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손으로 위 쪽을 가리켰다.

더글라스는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이글루의 천장이 보였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글라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스니블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부연했다.


"천장이 아니라 그 옆 쪽에 떨어지고 있는 물을 보라는 거였어."


더글라스는 그 부근을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그제서야 스니블이 지시한 부근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모닥불의 솟은 연기가 직접적으로 닿는 벽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녹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보수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스니블이 그를 말렸다.


"앉아 있어. 벽을 보수하라는 말은 아니니까. 어차피 밤이 되면 저곳도 얼게 될 테니까."


더글라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앉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더글라스에게 스니블은 자상하게 설명했다.


"저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지.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 말야. 저건 세상이 굴러가고 있다는 증거야. 여기서 다시 질문하지. 더글라스 너는 저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물은 당연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도 네 말이 맞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 다만 자신이 남들보다 똑똑하고, 또 어느 정도 세상이 굴러가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부류들은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지. 예컨대 그 놈들은 대지 밑에 어떤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있어서, 대지 위의 모든 것들을 아래로 잡아 당기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해."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그런 식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그런 해석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너도 이제 알겠지."


"그저 관점의 차이라고 말하실 것 같습니다."


"맞아. 그런 힘이 실재하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까, 어떤 해석도 틀렸다고 할 수 없지.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재밌는 문제가 발생해. 만약 실제로 그런 힘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구. 그럼 그 힘은 태초에 어디서 왔지?"


더글라스가 이번에는 꽤 오래 고민한 후에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또 정답이야. 우리는 알 수 없어. 그러니 모르겠다는 것이 유일한 정답이야.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왜 아이가 생기는지, 작은 도토리에서 어떻게 아름드리 밤나무가 나오는지 우리는 모르지. 그리고 모르기에 두 가지의 극단적이 해석이 나오게 돼."


"어떤 해석입니까?"


"먼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아주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지. 그들은 세상 모든 일에 어떤 법칙을 부여하고 싶어서 항상 안달이 나 있어. 이른 바 자연의 법칙이라는 거지. 저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에도 법칙이 있다는 식이야. 그리고 이런 부류와 정확히 극단에 있는 것이 우리들이야."


"저희들 말입니까?"


"그래, 우리들은 그런 놈들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거든."


두 사람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스칼이 기어코 다섯 번째로 스튜를 퍼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딱히 굶주렸던 것은 아니지만 스니블과 더글라스는 냄비의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 자신들의 그릇을 채워야 했다.

얼마 동안 세 사람은 말없이 냄비와 그릇에 몰두했다.

적당히 배를 채운 뒤에는 더글라스가 당연하다는 듯 배낭에서 차를 꺼냈다.

스칼 역시 자연스레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기온이 낮아서 물을 끓이는 데에는 꽤 오래 걸렸다.

어느 시점에 이글루 안이 수증기로 가득 찼다.

찻잎을 주전자에 던져 넣은 더글라스가 다시 스니블을 바라보았다.

더글라스는 질문했다.


"방금 전 우리들이라고 하신 것은 교단에 속한 사람들을 말하시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저 역시 포함될 테지만... 역시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은 대체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스니블은 수도원에서 가장 덩치 큰 남자가 저다지도 순박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느꼈다.

스니블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 믿음이지. 신을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해석해.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가장 태초의 원인이 신의 손짓과 의도라고 그저 믿어버리는 거야. 몇몇 멍청한 놈들은 우리들의 이런 관점이 합리성과 완전히 척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곤 하지.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이 두 관점 사이엔 괄목할만한 차이가 없어."


차를 한 입 머금은 스니블이 다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는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지. 학자들은 그것을 힘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은 그 힘을 신이라고 부를 뿐이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결국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야. 자연에 모종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믿거나, 혹은 그 모든 일들이 신의 뜻이라고 믿거나. 하지만 말이야, 후자를 믿을 때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지."


"혹시 그 놀라운 경험이라는 것이, 스칼님이 보여주셨던 권능입니까?"


"맞아."


더글라스는 경외감에 찬 눈빛으로 두 주교를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6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3) 24.01.04 9 0 13쪽
105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2) 24.01.04 8 0 13쪽
104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1) 24.01.03 10 0 17쪽
103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10) 24.01.01 8 0 15쪽
102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9) 24.01.01 7 0 17쪽
101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8) 23.12.31 7 0 13쪽
100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7) 23.12.31 6 0 12쪽
99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6) 23.12.29 7 0 13쪽
98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5) 23.12.28 10 0 13쪽
97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4) 23.12.26 9 0 13쪽
96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3) 23.12.25 12 0 15쪽
95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2) 23.12.25 8 0 12쪽
94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23.12.24 11 0 13쪽
93 행마 (13) 23.12.21 13 0 12쪽
92 행마 (12) 23.12.19 9 0 12쪽
91 행마 (11) 23.12.19 10 0 13쪽
90 행마 (10) 23.12.17 9 0 15쪽
89 행마 (9) 23.12.15 13 0 11쪽
88 행마 (8) 23.12.13 11 0 12쪽
87 행마 (7) 23.12.13 11 0 14쪽
» 행마 (6) 23.12.13 10 0 11쪽
85 행마 (5) 23.12.11 11 0 15쪽
84 행마 (4) 23.12.09 15 0 15쪽
83 행마 (3) 23.12.08 15 1 13쪽
82 행마 (2) 23.12.08 13 1 11쪽
81 행마 23.12.07 16 1 11쪽
80 다면기 (13) +1 23.12.07 18 1 14쪽
79 다면기 (12) 23.10.03 22 3 12쪽
78 다면기 (11) 23.10.03 22 2 10쪽
77 다면기 (10) 23.10.03 22 2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