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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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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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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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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7)

DUMMY

콥스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돌아오자 그곳에는 낯선 남자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면면을 살핀 길버트는 곧 그들이 마을 입구에서 마주쳤던, 콥스의 뒤에 서 있던 남자들임을 알아챘다. 콥스는 손바닥을 펴 사내들을 향해 내밀며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제 동료들입니다. 술은 함께 마시는 사람이 많을수록 맛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길버트가 대답하기도 전에 토비가 팔을 휘저으며 길버트를 불렀다.


"여어 길버트 집 구경은 잘 했냐? 빨리 와서 한 잔 하라고."


토비는 기분 좋은 얼굴로 길버트에게 손을 흔들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호두를 으깨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먹어댔는지 탁자 위엔 이미 호두 껍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길버트는 한숨을 쉬며 비어 있는 자리에 착석했다.

길버트와 콥스가 마지막 두 자리를 채우자마자 때마침 주 요리가 등장했다. 두 남자가 지름이 거의 1큐빗은 될 듯한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물론 접시 위에는 막 조리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도마뱀 구이가 있었다. 콥스는 환하게 웃으며 길버트에게 술을 권했다.


"길버트님도 한 잔 걸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런 안주를 두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죄악이지요. 한번 드셔 보십쇼. 이 술은 독하긴 하지만 상등품입니다. 마을 놈들에겐 절대 내어 주지 않는, 무려 북부제 술이지요."


처음에 사양하려 했던 길버트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잔을 붙잡았다. 곧 콥스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로 술병을 들었고, 길버트는 못이기는 체 하며 술병 밑에 술잔을 가져다 댔다. 투명한 유리병에서 맑은 술이 흘러나왔다.

길버트는 가득 찬 잔을 코 근처로 들어 올려 향을 맡았다. 고소하고 달달한 향이 났다. 어디선가 맡아본 향이 분명했지만 정확히 무슨 냄새인지 떠오르지는 않았다.

술잔을 든 채로 잠시 망설이던 길버트는 이내 한숨에 잔을 비워냈다. 그리고 술이 목구멍을 타고 완전히 내려간 후에는 약간 감탄했다.


"호르체군요. 그것도 말씀하신 대로 상당한 상등품입니다."


콥스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정확하십니다. 놀랍군요, 이 술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저 말곤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긴 길버트님은 집사님이실 테니 저택의 저장고를 관리하셨겠지요?"


콥스의 마지막 질문은 상대를 떠보려는 의도가 명백했지만, 그것이 너무 순진한 방식의 유도심문이어서 길버트는 헛웃음을 참아야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집사의 주된 업무잖습니까."


이후에도 몇 가지 떠보는 듯한 질문이 이어졌지만 길버트의 대처는 완벽했다. 듀라트 영지에서 종종 하멜의 업무를 떠 맡았던 길버트에게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멜 집사를 절반 정도만 흉내 냈음에도 길버트는 그 자리에서 그야말로 훌륭한 집사의 표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밀러와 수 많은 술을 마신 것도 도움이 되었다. 콥스는 술꾼인 것 같았고, 길버트는 콥스가 내 오는 각종 진귀한 술을 전부 맞추는 재주를 선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자에게 쉽게 감화되는 법이다. 감화된 콥스는 한껏 기뻐하며 얼마든지 술을 꺼내어 놓았다.


술자리는 제법 흥겨웠다.

거한 대접을 받고 있던 리버와 토비 그리고 길버트 뿐만 아니라, 대접을 해 주고 있던 남자들도 적잖이 즐거워 보였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도 리버 일행은 반길만한 손님이었다.

길버트는 마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여러가지 비법을 전수했다. 콥스는 촌장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길버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했다.

리버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경험과 영지에서 겪었던 재밌는 얘기를 풀어 놓고 있었다. 평생 외진 마을에 살던 남자들은 도시에서의 생활 자체를 흥미로워 했다. 물론 리버의 교묘한 화술이 청자를 매료시키는데 한몫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토비는 별 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토비가 술잔을 기울이고, 손으로 도마뱀 다리를 뜯어 먹는 모습은 그 자체로 더없이 유쾌했다. 사실 술자리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토비 같은 종류의 사람이다. 토비는 단지 본인이 기분 좋게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주변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어느 술자리가 그렇듯 처음에 폭발적으로 웃던 사람들은 하나 둘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잔잔한 잡담이 간헐적으로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길버트는 연거푸 술을 마셨다.

길버트는 자제하기 어려웠다. 듀라트 영지를 떠나온 후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던 길버트는 오랜만에, 게다가 상등품의 호르체를 눈 앞에 두고 버틸 도리가 없었다.

콥스는 길버트와 토비의 술잔이 빌 때마다 친절히 따라주었다. 술은 마실수록 입에 감겨 붙는 느낌이었고, 고소한 향은 잔을 비운 뒤에도 입에 맴돌았다. 길버트는 잔을 내려다 보았다. 잔에 담긴 호르체는 희미한 갈색빛을 띄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길버트는 콥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호르체에 무엇을 섞은 겁니까?"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호르체는 무색무취잖습니까. 가끔 들소풀 같은 것을 섞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상등품이면 그렇게 섞기가 아깝지요. 흔히 질 좋은 사과주를 섞습니다만 여기에 들어간 것은 과실주 종류는 아닌 모양이군요. 재료를 알려주시면 다음에 저도 이런 방식으로 마셔볼까 합니다."


콥스는 길버트의 해박한 지식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아마 알려드려도 재료를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상당히 귀한 것이라서요. 가공도 어렵고 추출은 더 어렵지요. 이건 그러니까..."


콥스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식당 내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그때까지 두서없이 떠들던 남자들이 갑자기 한순간에 전부 입을 다물어버렸다. 남자들과 콥스는 어딘가 얼빠진 표정을 한 채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길버트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째서 남자들이 멍청한 얼굴로 식당 입구를 주목하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식당 입구에 루나가 젖은 채 서 있었다.

루나는 얇은 스톨라를 걸치고 있었다. 여성들이 흔히 입는 옷이지만 루나의 차림새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루나의 스톨라는 밑부분이 지나치게 짧았다.

드러난 새하얀 허벅지를 바라보며 길버트는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비가 잔뜩 쏟아지던. 그리고 떠들썩한 동시에 차분했던 어느 저녁에 분명 지금과 거의 똑같은 상황을 겪었었다. 마침 그 때도 장소는 식당이었고, 루나의 차림새도, 사람들의 반응도 지금과 비슷했다.


식당 안에 있던 모든 남성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루나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루나가 한 발자국씩 가까워 질 때마다 남자들은 점점 바보가 된 것 같이 굴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는 귀한 술을 엎질렀고, 어떤 남자는 들고 있던 도마뱀 꼬리를 놓쳐버렸다.

남자들은 도무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한 남자는 뜬금없이 식당의 바닥 무늬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한 남자는 여태 있는지도 몰랐던 벽의 장식물에 갑자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수 많은 남자들 중 태연한 것은 세 사람 뿐이었다.

토비는 애초에 루나가 무엇을 입고 다니던 전혀 관심이 없었고, 길버트와 리버에게는 이미 익숙한 차림새였다.

사내들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루나는 테이블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때까지 멍하니 루나를 바라보던 콥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콥스는 루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저, 혹시 레이디께서는 여기서 저녁을 해결하실 생각입니까?"


루나가 그게 무슨 당연한 소리냐는 얼굴로 콥스를 올려다보았다. 콥스는 명백히 당황하며 황급히 덧붙였다.


"아 그것이, 레이디께서 함께 하시기엔 너무 누추한 자리가 아닐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따로 식사를 가져다 드릴 테니, 방에서 저녁을 드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어. 여기서 먹을 테니 나이프와 포크만 준비해 줘."


"아 예 물론입니다!"


콥스는 힘차게 대답하고 나서 사람을 부리는 대신 직접 주방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콥스는 그 낡은 식당의 어디서 찾았는지 은으로 된 고급진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왔다.

루나가 등장하자 식당 안은 다시 처음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이전에 간간이 나오곤 했던 음담패설 같은 것은 전부 사라졌다. 힐끔힐끔 루나를 곁눈질하고 있는 사내들은 의식적으로 그런 상스러운 대화를 자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나는 주변을 전부 무시한 채 우아하게 식사했다. 한창 도마뱀을 해체하던 루나가 갑자기 빈 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어서 술병을 쥐자 콥스가 손을 내저으며 루나를 제지했다.


"이건 레이디께서 마시기에는 너무 독한 술입니다."


루나는 대답 대신 말없이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단숨에 비워냈다. 처음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루나를 바라보던 콥스는 그러나 루나가 네 번째 잔을 깨끗이 비워냈을 때는 결국 루나의 주량에 탄복하고 말았다. 이어서 루나가 다섯 번째 술잔을 비우자 이번에는 길버트가 제지하고 나섰다.


"루나양 콥스씨의 말처럼 이건 독한 술입니다. 그렇게 급하게 마시다간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루나는 길버트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나는 취하지 않아 길버트. 애초에 취할 수 없는 몸이니까."


영문 모를 말이어서 길버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연거푸 술잔을 비워대는 루나가 지극히 멀쩡해 보였으므로 말릴 명분이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모두가 적잖이 취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쓸데없는 개인사를 풀어놓기 시작했을 때, 돌연 식당 안 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남자를 발견한 것은 콥스였다. 콥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여태 보여준 적 없던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홉스! 방에 쳐박혀 있으라니까 여긴 왜 온 거야!"


콥스의 외침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움직임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길버트 역시 남자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홉스라 불린 사내는 상당히 특이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감지 않은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긴 머리카락은 죄다 덕지덕지 엉켜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상태가 영 엉망이었다. 역시 최소 몇 달은 빨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홉스의 입가엔 질질 흐른 침이 마른 자국과, 흙먼지와, 얼굴 전체엔 정체 모를 더러운 것들이 달라 붙어 있었다. 어두운 밤에 마주쳤다면 시궁무스라고 오해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콥스가 황급히 리버 일행을 향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저 놈은 그러니까... 제 형입니다."


홉스를 물끄러미 관찰하던 루나가 말했다.


"얼굴을 보니 우리와 함께 술을 마시러 온 것 같지는 않군."


"그것이 저 놈은 어느 날 정신이 나가버린 놈이라... 하여튼 죄송합니다. 이봐 뭐하고 있어!"


콥스의 지시에 남자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 홉스라 불린 사내는 등장 직후부터 식당 안을 유심히 둘러보고 있었다. 차례로 한 사람씩 훑던 홉스가 어느 시점에 루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음 순간 홉스의 눈이 뒤집혔다. 홉스는 잔뜩 갈라지고 쥐어 짜내는 듯한, 그리고 살의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외쳤다.


"여자!"


루나는 콥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형이라는 작자는 성별을 한 눈에 파악하는 기막힌 재주를 가지고 있군."


농담이 분명했지만 식당 안의 누구도 웃지 않았다. 루나를 응시하던 홉스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불쑥 홉스가 허리를 숙였다. 식당 안에 있던 그 누구도 홉스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다. 홉스의 발치에는 한 큐빗 정도 되는 낫이 있었다. 홉스는 그 낫을 집어 들었다. 낫을 치켜든 홉스가 무서운 얼굴로 루나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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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행마 (5) 23.12.11 12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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