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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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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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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마 (11)

DUMMY

나데자의 경비병 발러는 벌써부터 지쳐있었다.

아직 시각은 정오였고, 또 근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그랬다.

평소였다면 그렇게까지 지쳐있지 않았을 것이다.

동료와 함께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시각이었다.

다만 최근에는 그럴 틈이 없었다.

마지막 만이 시들어버린 후에, 북부의 경비병들은 모두 급작스러운 업무량 증가를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온갖 것들을 구매하고 싶어 했고, 반대로 상인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온갖 물건들 다 팔고 싶어 했다.

자연스레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이 평소보다 몇 배는 많아졌다.


물론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구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원만한 만남을 주선하지는 않는다.

사실 단순히 통행 허가만 내리는 것이라면 발러가 그렇게 지쳐있을 이유도 없었다.

경비병들이 지친 원인은 성문을 드나드는 수 많은 상인들의 짐을 검역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시 자체가 별로 없는 북부에서 나데자는 대도시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도시였다.

도시가 크다는 말은 그만큼 섞여 들어오는 밀수품이 많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나데자의 모든 경비병들은 꽤나 바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발러는 피로에 찌든 눈으로 썰매를 뒤지고 있었다.

건초 상인의 썰매를 검역하던 중 멀리서 한 경비병이 소리쳤다.


"어이 발러! 교대 시간이야. 와서 몸 좀 녹이다가 식당으로 가라구!"


발러는 영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식사를 끝내고 나온 듯한 경비병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어서 발러는 얼른 제복을 벗었다.

발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묘한 썰매가 발러의 시선을 잡아 챘다.

발러는 다시 성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썰매는 총 두 대였고 상당히 낯선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도시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썰매는 상인들의 것이므로 전부 낯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발러가 생각하기에 그 두 대의 썰매는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특이했다.

발러는 썰매를 관찰했다.

썰매의 생김새나 혹은 썰매를 끄는 카니쿨라들이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양의 썰매였고, 또 카니쿨라들이었다.

처음부터 발러가 의문을 느낀 것은 썰매의 모양이 아니었다.

그 썰매에 짐이 거의 실려있지 않다는 점이 발러를 잡아 세웠다.


만약 일반적인 시기에, 그러니까 조금 더 날이 따뜻했을 때 그 썰매를 봤다면 발러는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을 하려면 썰매를 가볍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마지막 만이 져버린 지 한참이 지난 상황이다.

썰매에 짐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상인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었고, 상인이 아니라면 이 시기에 한가롭게 여행을 다니는 북부인은 없다.


"뭐 하는 거야 발러? 빨리 가지 않으면 다른 놈들이 건더기부터 다 퍼 먹을 거라고."


제복을 벗은 채 가만히 서 있자 함께 근무하던 동료가 발러를 재촉했다.

발러는 고민했다.

확실히 점심 식사란 고된 경비병 생활 중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교대자가 오고 있는 이상 굳이 자신이 한 썰매를 더 검역하고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참을 멀거니 서 있던 발러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먼저 가 있어. 저 썰매만 확인하고 갈 테니까."


동료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발러의 동료는 별 희한한 일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 사이 썰매는 성문 앞에 정차해 있었다.

수속을 밟기 위해서 썰매 위에서 세 남자가 주섬주섬 내려 섰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발러는 짐이 없는 썰매 뿐만 아니라, 썰매의 탑승자들 또한 상당히 이상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두 썰매 중 보다 큰 쪽에서 내린 두 남자는 호리호리했고, 어려 보였으며, 무엇보다 백발이었다.

북부인들의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야 상식이지만, 그 둘은 지나칠 정도로 하얬다.

반대로 작은 썰매에서 내린 남자는 북부인 치고는 상당히 거뭇한 피부였다.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때 발러는 그가 아돌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그 남자는 엄청난 거한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상한 조합이었다.


썰매에서 내린 세 사람이 발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몇 발자국 앞까지 다가왔을 때, 발러는 비로소 세 남자 모두 사제복을 입고 있다는 점을 눈치챘다.

발러는 그리 성실한 신자가 아니었기에 사제복에 새겨진 문양에서 직위를 추측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제복이 아주 값비싸다는 것 정도는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발러는 더욱더 의심스러워졌다.

남부라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북부의 수도원이나 수도회는 보통 지독하게 가난하기 마련이다.


생각의 그 시점에서 발러는 모종의 불안감을 느꼈다.

발러는 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이 근무하던 동료는 이미 식당 쪽으로 상당히 멀어진 후였다.

멀어지는 동료의 뒷모습을 보며 발러는 혹시 자신이 괜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서두르지 않으면 초라한 음식만 남아 있을 게 뻔했다.


발러가 고민하는 사이 세 사람이 발러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백발의 남자가 발러에게 신분증을 내밀었다.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것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발러는 신분증을 받아 들고 확인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신분증과 눈 앞의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발러는 신기한 것을 대할 때나 보낼 법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스니블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혹시 통행증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발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신분증과 스니블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스니블과 눈이 마주쳤다.

스니블의 투미한 백안을 마주 보던 발러는 그제서야 자신이 상당한 결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발러는 황급히 신분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귀하신 분들의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군요. 신분증은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저 소문이 자자하신 분을 직접 만나 뵙게되어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신분증을 받아 들던 스니블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어떤 소문을 말하시는 겁니까?"


"예? 그야 스니블님이 차기 대주교가 되실 거라는 소문이지요. 네 번째 시노드는 아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추기경 몇몇이 손을 들어주었으니 다음 시노드는 기대해 볼 수 있겠지요."


발러가 말을 끝내자마자 스니블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 변화는 일반적으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고 미세한 것이었다.

하지만 발러는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아무튼 지난 몇 달간 발러가 신원을 조회한 사람은 수천 명이 넘었다.

미세하게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발러는 당황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발러는 이 미묘한 분위기를 더 겪고 있지 않아도 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부의 머리에서 오신 사제님들이라면 굳이 검역할 필요는 없겠지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자 어서 들어가십시오."


세 사람은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


성문을 통과한 뒤 세 사람은 시가지를 쭉 가로질렀다.

스니블이 가장 앞에 서서 걸었고, 그 바로 뒤에서 스칼이 사방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더글라스는 썰매를 주의하며 맨 뒤에서 천천히 두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대도시답게 시장가는 상당히 붐볐다.

상인들은 어떻게든 이 대목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 대고 있는 듯했다.

시장은 지독히도 많은 수의 인간들과, 그 사이 섞인 몇몇 쿠니들, 그리고 역시 수 많은 카니쿨라들이 내는 소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흥미롭게 시장을 관찰하던 스칼이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봐 더글라스. 저거 흑담비 모피인 것 같은데?"


"그렇군요, 색을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귀한 물건인데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군요. 곧 추워질 테니 돌아갈 때를 대비해 구입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이 그런 식으로 잡담을 주고 받고 있었을 때, 문득 스니블이 뒤를 돌아보았다.

스니블은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보다가 이내 더글라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더글라스 넌 코이마나무 여관으로 가. 그곳에 썰매를 맡기고 방을 잡아. 그리고나서 내가 부를 때까지 방 밖으로 나오지 마."


"여관 말입니까? 저희는 나데자의 수도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유는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더글라스와 스칼이 거의 동시에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그 이상으로 대꾸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더글라스가 사라지고 난 뒤 스니블은 계속해서 걸었다.

시가지를 지나고 여관을 지난 스니블이 마침내 한 펍 안으로 들어갔다.

딱히 특이할 것 없는 소박한 펍이었다.

이제 막 영업을 개시했는지 손님은 스니블과 스칼 외엔 아무도 없었다.

스니블이 가장 구석진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그때까지 펍의 입구에서 얼떨떨하게 서 있던 스칼은 일단 스니블을 따라 착석했다.

곧 종업원이 다가왔고 스니블이 맥주와 함께 여러 음식을 주문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스칼이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펍엔 왜 들어온 거야 스니블? 더글라스의 말이 맞아, 나데자로 왔으면 당연히 수도원으로 가서 그녀를 만나는 게 순서잖아!"


"목소리 낮춰 스칼."


스칼은 뭐라 대꾸하려다가 스니블의 얼굴을 보고선 입을 다물었다.

스니블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스칼은 기다리기로 했다.

두 사람이 말없이 앉아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맥주와 간단한 음식이 나왔다.

스칼은 뚱한 표정으로 맥주를 홀짝거리다가 질문했다.


"이봐 스니블. 대체 왜 그래? 아까 성문을 지나올 때부터 표정이 영 별로던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문제가 생겼는지 아닌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어. 지금 거기에 대해 한창 생각 중이거든."


"젠장할, 나도 좀 알자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경비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성문에서 우릴 통과시켰던 그 놈? 그닥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는데."


스칼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하며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신중한 태도로 접시 위 감자를 으깨기 시작했다.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스니블이 입을 열었다.


"맞아. 그는 특별한 인간이 아닐 거야. 나도 그런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우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좀 이상해."


"그 놈이 우리를 알고 있었던 것? 그야 우린 예전에도 몇 번이나 나데자에 왔었잖아. 게다가 우린 중앙 신전의 주교야. 일반적인 놈들이 보면 이 직책은 꽤나 특별하다고."


"그런 말이 아니야. 내가 설명을 잘못했군. 네 말대로 이 도시의 인간들이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그 경비병은 내가 곧 대주교가 된다는 식으로 말했고, 네 번째 시노드의 내용에 대해서도 말했지. 심지어는 그것들이 북부인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라는 양 말이야."


스칼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의 와중에 감자 하나를 완전히 뭉갰다.

스칼은 으깬 감자 위에 소스를 붓고서 입에 꽉 차도록 집어 넣었다.

몇 번의 저작활동이 일어난 후에 스칼이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스니블 네 말은 시노드의 내용이 새어나갔다는 것이지?"


"그래."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냐? 언젠가 너도 말한 적이 있잖아. 시노드는... 그야 뭐 비밀리에 진행되긴 하지만 가장 공공연한 회의라고 말야. 그 내용을 일반인들이 알고 있어도 그리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


"맞아. 그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지."


스니블의 차분한 대답에 스칼이 폭발했다.

스칼은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포크를 움켜쥐고서 스니블의 눈 앞에서 흔들었다.

다분히 위협적인 행동이어서 스니블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말해줄 테니 앉아 스칼."


스칼이 자리에 앉았다.

스니블은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나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감시 당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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