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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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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3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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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8)

DUMMY


세 남자는 다소 멀뚱한 심정으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세 남자는 홉스가 낫을 들자마자 어떤 조치라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낯선 자리였고, 너무 낯선 사람들과 또 너무 낯선 분위기였다.

더불어 세 남자가 모두 어지간히 술에 취해 있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술을 마시고 있던 토비는 사실 정신이 조금씩 혼미한 상태였다.

토비는 투미한 눈빛으로 홉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홉스가 낫을 들고 달려오는 모습을 본 토비는 그것이 어쩌면 그 마을 만의 특별한 환영 풍습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관례나 풍습이 있을 리 없다.

홉스가 바로 열 걸음 정도 앞까지 다가왔을 때 비로소 길버트와 리버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챘다.

길버트가 허리춤의 장검을 그리고 리버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두 남자가 정말로 그것을 휘둘러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자 그보다 한발 앞서 콥스가 소리쳤다.


"막아!"


콥스의 명령에 식당 안의 장정들이 우르르 홉스에게 몰려들었다.

혹여 홉스가 사내들에게 낫을 휘두를까 싶었던 길버트는 약간 아찔한 감정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우려와 달리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홉스의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한 것 같았다. 홉스는 오직 루나만을 주시하고 있었고, 루나를 향해서만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덕에 제압은 쉬운 편이었다. 남자들은 홉스를 때려눕힌 뒤 홉스의 손에서 낫을 빼앗아 식당 한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양손을 뒤로 제압 당한 채 바닥에 엎어진 홉스는 그 상태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홉스는 살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루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여자는 안돼! 죽여라. 나를 막을 게 아니라 저 년을 죽여! 이리 와라 내가 죽여줄 테니!"


콥스는 못 볼 꼴을 보였다는 듯 낭패한 얼굴로 일행을 바라본 뒤 남자들에게 손짓했다. 곧 한 사내가 홉스의 입을 틀어 막았다. 사내들은 그대로 홉스를 질질 끌고서 식당을 벗어났다.

상황이 종식된 후 식당에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소란은 끝났지만 누구 하나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콥스가 조용히 다시 원래 자리에 착석했다. 콥스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모처럼 흥겨웠던 분위기가 전부 식어버렸군요."


길버트는 미간을 좁혔다.


"저 홉스라는 분이 당신의 형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원래는 촌장직을 맡을 정도로 똑똑한 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보셨다시피 마을의 여자들만 보이면 낫을 들고 죽이려 달려듭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멀쩡한 사람이 한 순간에 그렇게 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혹시 짐작 가는 이유 같은 것은 없습니까?"


콥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정적. 콥스는 갑자기 길버트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콥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내내 반달 모양으로 보기 좋게 휘어져 있던 콥스의 눈은 이제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평평하게 바뀌어 있었다.


"짐작 가는 부분이라. 글쎄요... 꼭 아셔야겠습니까?"


"예?"


길버트는 당혹감을 느끼며 콥스를 바라보았다. 콥스는 확실히 술을 마실 때완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작은 변화에 길버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길버트가 다시 뭔가 물어보려던 순간, 불현듯 사기가 박살나는 소리가 식당 가득 울렸다. 식당은 잠잠했고, 때문에 그 소리는 모두의 귀에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길버트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버의 발치에 깨진 술잔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리버는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실수로 놓쳐버렸네요."


콥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식당 안으로 험상궂은 사내들이 여럿 들이닥쳤다. 콥스와 사내들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리버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깨진 술잔을 수습하고 있었으므로 그 상황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리버가 다시 몸을 세웠을 때는 주변의 모두가 리버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버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어- 잔을 깨뜨려서 죄송한데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것 까지야... 아..! 혹시 이게 중요한 잔이었다면 제가 보상할게요. 그러니까..."


콥스는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콥스는 자상하게 말했다.


"아니요.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그쯤에는 식당의 분위기가 확실히 이상하게 바뀌어 있었다. 우르르 몰려왔던 사내들은 어느샌가 콥스의 곁에 나란히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작은 짐승을 사냥할 때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위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길버트가 사태 파악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을 때, 콥스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탁자 위에 있던 술잔 하나를 들었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콥스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길버트님이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은 정말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특히 당신이 술에서 나는 향이 익숙한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는, 솔직히 말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내용만 놓고 보자면 홉스의 말은 칭찬에 가까웠다. 하지만 식당 안의 분위기와 홉스의 표정, 그리고 그의 어조로 놓고 봤을 때 그것은 결코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길버트는 콥스가 무슨 의도로 말을 내뱉고 있는지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술을 너무 마신 탓인 것 같았다.

그때 콥스가 매만지고 있던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대로 한잔을 비운 콥스는 술의 독기에 얼굴을 찡그렸다. 콥스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신 말처럼 참 좋은 향이지요. 맛도 썩 괜찮습니다. 이 재료는 호르체와 함께할 때에 특히나 진가를 발휘합니다."


길버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그쳤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음? 당신이 조금 전에 묻지 않았습니까. 호르체에 무엇을 섞었느냐고. 그래서 알려드리려는 거지요. 저는 호르체에 페룬 뿌리를 달여 만든 액을 섞었습니다."


"페룬 뿌리라면... 혹시 의사들이 사용하는 것 말입니까?"


콥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길버트를 응시했다.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예 뭐 그렇지요. 페룬 뿌리는 의사들이 자주 씁니다. 그렇다면 길버트씨. 혹시 의사들이 어떤 경우에 페룬 뿌리를 쓰는지도 알고 계십니까?"


곧바로 그 질문에 대답하려던 길버트는 순간 머리가 꽉 조여오는 듯한 느낌을 받고서 입을 다물었다. 길버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과 음식들은 점점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길버트는 콥스가 말했던 약초에 대해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가 힘들었다. 사고는 한여름 해무처럼 붙잡으려 할수록 자꾸만 흩어지기만 했다. 길버트는 여기저기로 비산하는 정신을 힘겹게 그러 모으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페룬 뿌리는... 의사들이 수술 전 환자들을 마비시키려 쓰는 것이지... 그걸 알고 술에 섞었다면, 콥스 당신은 처음부터 우리들을..."


"정말이지 당신의 지식은 끝이 없군요. 솔직하게 말해서 탄복했습니다. 아주 정확합니다."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여태 잠자코 있던 토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쭉 앉아 있던 탓에 토비는 일어서자마자 한번 휘청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자세를 똑바로 잡은 토비는 위협하듯 그르렁대며 콥스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 듣자 하니 아무래도 영 불순한 목적이 있는 것 같군. 하지만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인데."


"설마요. 당신을 잊을 리가 있습니까. 당신은 잊고 있기엔 너무 특출난 덩치잖습니까."


"그럼 얘기가 빠르지. 잘 들어라 이 자식아. 네가 무슨 목적이건..."


기세 좋게 콥스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딛은 토비는 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길버트는 바로 옆에서 쿵- 하는 커다란 소리와 식기들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길버트는 토비 쪽으로 시선을 보내려 했지만 곧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식하지 못한 새 목은 이미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길버트는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렸다. 옆을 바라보자 토비가 바닥에 쓰러진 채 기절해 있었다.

길버트가 소리를 지르려 했을 때 다시 한번 쿵- 쿵- 하는 짤막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길버트는 이번에는 굳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애쓰지 않았다. 소리는 각각 리버와 루나 쪽에서 들려왔다. 길버트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콥스가 길버트 앞으로 다가왔다. 콥스는 바닥에 쓰러진 세 사람을 보며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했다.


"정말이지 너희들은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대여섯 잔을 마신 순간 뻗어버렸을 텐데 말이지. 특히 저 아돌프는 혼자서 거의 한 통을 비워버렸지. 이것 참 놀라운 일이야.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술자리 내내 조마조마했다고. 인간에겐 여러 번 시험해봤지만 그야 당연히 아돌프에겐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신은 내편이었군."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거요? 원하는 것이 돈이라면 주겠소."


콥스는 대답 대신 길버트의 얼굴 바로 옆으로 상체를 숙이고서 빙그레 웃었다. 길버트가 보기에 그것은 어지간히도 비뚤어진 웃음이었다.


"아, 물론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돈도 갈취할 거야. 하지만 돈 같은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지. 우리가 받아내고 싶은 것은 따로 있거든."


그렇게 말하고서 콥스는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던 루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루나의 팔은 뻣뻣하게 경직된 채 힘없이 콥스에게 휘둘렸다. 루나의 상태를 확인한 콥스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이 여자는 마침 목욕을 한 직후이니 따로 씻길 필요는 없겠군. 데려가서 준비해 놔."


덩치 큰 남자 한 명이 루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남자는 그대로 루나를 자신의 어깨에 거꾸로 둘러메고서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루나...양..."


길버트는 흐려지는 정신과, 위아래와 양옆이 터무니없이 쪼그라든 세계 속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금방이라도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콥스를 바라보았다. 콥스는 여전히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길버트는 욕설을 내뱉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혀는 토막 난 고기처럼 이미 조금의 감각도 없었다. 굳이 혀 뿐만 아니었다. 길버트는 자의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부위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번, 이전과 비슷한 쿵- 하는 소리가 식당에 울렸다.

길버트의 시야가 낮아졌다. 길버트는 자신의 바로 코 앞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호두 껍질을 바라보았다. 지독하게 느려진 사고 탓에 길버트는 그 호두 껍질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엎어졌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콥스가 다시 중얼거렸다.


"이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지만, 정말 아쉽게 됐어. 당신네 일행 중 저 여자가 없었다면 좋았을 테지. 만약 당신들이 전부 남자였다면. 그래, 우리는 어쩌면 즐겁게 떠들고 마시면서 유쾌한 하룻밤을 보낸 뒤 헤어졌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여자가 끼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여자는 안되거든."


콥스는 그 뒤로도 무언가 말했지만 길버트는 더 이상 콥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로처럼 꼬여버린 정신 속에서 길버트는 문득 별채에서 봤던 광경을 발견해 냈다.

당시에는 어째서 그 방적 공장을 보며 이질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았다. 그 공장의 모습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길버트는 아득한 심정으로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했다.

그때 콥스가 한 손을 위로 치켜들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좋은 꿈 꾸라고. 뭐,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콥스는 들었던 손을 내리쳤다. 길버트는 뒷목이 부서지는 감각을 받았다. 물론 정신도 마비된 탓에 그것이 정확한 감각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눈이 완전히 감기는 순간, 길버트는 모든 것을 꺠달았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던 묘한 이질감. 어업을 하고 돌아오는 남자들. 양들의 수와 방적기의 수. 별채.

길버트는 자책했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만한 징조가 있었다면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후회는 언제 하더라도 너무 늦는 법이다. 그것이 길버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길버트의 사고가 완전히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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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행마 (3) 23.12.08 16 1 13쪽
82 행마 (2) 23.12.08 14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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