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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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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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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 (2)

DUMMY


태양이 눈으로 덮인 대지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기고 지평선 뒤로 사라져버린 무렵, 멀락 추기경은 무벤의 중앙 수도원 입구에 멀뚱히 서 있었다.

멀락 추기경은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 앞에 있는 집배원을 바라보았다. 그 집배원은 북부의 다른 모든 집배원이 그렇듯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멀락은 집배원의 얼굴에서 희미한 피로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멀락은 슬그머니 집배원 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집배원이 타고 온 게 분명한 썰매와 카니쿨라들이 있었다. 집배원의 썰매답게 카니쿨라들은 덩치가 상당히 컸다. 그 덩치 큰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혀를 내뺀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멀락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집배원들은 절대로 카니쿨라가 혀를 내뺄 정도로 달리지 않는다.

그야 북부의 집배원들은 대륙에서 가장 바쁜 자들이긴 하다.

특히 이 시기의 북부에선 더더욱 그렇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아무리 직업 정신이 투철한 집배원도 썰매를 끌 수 없는 날씨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북부 사람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때문에 이 시기가 되면 북부인들은 갑자기 먼 친척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나게 되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기의 집배원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카니쿨라들이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상했다.

집배원들은 결코 카니쿨라가 혀를 내뺄 만큼 몰아붙이지 않는다.

물론 그들 직업의 특성상 카니쿨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역시 효율성에 있다.

카니쿨라를 혹사시키면 당연히 하루 동안의 이동 거리야 늘어난다. 그렇지만 결국 다음날이 되면 카니쿨라들은 퍼지거나, 며칠 동안 앓아 눕고 만다.

결과적으로 보면 훨씬 짧은 거리를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멀락이 의문을 느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멀락은 도대체 이 집배원이 어떤 사정으로 이토록 열심히 달려왔는지 궁금해졌다.


"테오도르 추기경님이 맞으십니까?"


멀락이 열심히 썰매를 관찰하고 있었을 때 집배원이 다시 한 번 물어왔다. 그제서야 멀락은 자신이 대륙에서 가장 바쁜 인간을 붙잡아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멀락은 미안함을 느끼며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게 주시면 테오도르 추기경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저는 그와 함께 있었고, 소포를 받고 나면 곧바로 그의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니까요."


집배원은 '그럼 직접 나와서 받으면 되지 않냐'에 해당하는 표정으로 멀락을 바라보았다. 멀락은 집배원의 오해를 십분 이해했다. 곧 멀락이 변명하는 투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테오도르 추기경은 현재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가 직접 받으러 나오는 것은 무리입니다."


"...수도원 분들이 언제나 견실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벌써 주무신단 말입니까?"


집배원은 그렇게 말한 뒤에 멀락 뒤편을 바라보았다. 수도원 내부에선 아직 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가 졌다곤 하지만 어차피 해가 일찍 지는 계절이다. 어떻게 봐도 도저히 잠들 만한 시각은 아니었다. 집배원이 말을 이었다.


"잠시만 일어나셔서 소포를 받으신 뒤에 다시 주무시는 것은 안됩니까? 수취인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 저희들의 원칙이라서요."


"그것이... 깨울 수가 없는 종류의 잠이라 그렇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그건 깨울 수 없는 잠입니다. 졸려서 잠든 것도 아니고, 피곤해서 쓰러진 것도 아닙니다. 아니, 뭐가 됐든 도중에 깨울 수는 없습니다."


집배원이 이제 완연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어서 멀락은 다시 황망히 말했다.


"이것은 교단에 깊게 몸 담지 않은 분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튼 테오도르 추기경은 당장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 시점에 멀락은 이만 대화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집배원을 위해서였다.

둘은 쭉 수도원의 입구에 서 있었다. 자신이야 수도원 안으로 훌렁 들어가버리면 끝이지만 집배원은 숙소를 찾아 무벤을 배회해야 할 것이다. 멀락은 집배원을 위해 대화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겠군요. 당신들이 어떤 경우에도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은 북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럼 아무래도 내일 본인이 수취하는 것이..."


"알겠습니다."


"예?"


집배원이 결코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멀락은 약간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집배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소포를 맡기겠습니다. 꼭 테오도르 추기경님께 전해 주십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넨 제안이지만, 사실 멀락은 집배원이 그 제안을 수락할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집배원들의 원칙은 교단의 내부 규율 만큼이나 엄격하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의 원칙은 간단하다.

소포는 반드시 수취인 본인이 직접 수령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다.

만약 그럴 수 없는 경우 날짜를 다시 지정한 후 소포는 다시 조합으로 반송된다.


사람들이 집배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도 바로 이 원칙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북부의 집배원들이 지독하게 성실하고, 우직하며, 도무지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족속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인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북부에서 도시 간의 소포 배송은 아무리 짧아도 몇 날 며칠은 걸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집배원들은 그렇게 힘들게 배송한 소포를, 단지 수취인 본인이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합으로 반송한다.

융통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 집배원은 멀락에게 소포를 맡긴다고 말하고 있었다.

멀락은 두 가지 경우일 거라 생각했다.

이 집배원이 유독 융통성이 넘치는 집배원이거나, 혹은 자신이 다분히 잘못된 상식을 가지고 있거나.

멀락은 확인차 한번 더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정말 제가 수취해도 되겠습니까? 당신들의 원칙은 매우 엄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이 경우엔 발신자가 미리 부 수취인을 지정했습니다. 그럼 확인차 묻겠습니다. 당신은 멀락 추기경님이 맞으십니까?"


멀락은 황당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수취인 두 명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지는 않았다. 아마 이 고지식한 집배원은 부 수취인이 있음에도 조합의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예 맞습니다. 제가 멀락입니다."


"다행이군요."


집배원은 멀락의 가슴 부근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제서야 멀락은 자신이 신분패를 목에 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집배원은 처음부터 멀락이 부수취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멀락이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느끼자마자 집배원이 소포를 건넸다. 소포는 반큐빗 정도 되는 정육면체의 상자였다. 멀락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묵직한 것이 생각보다 꽤 무게가 나가는 상자였다. 멀락은 질문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온 소포입니까?"


"북부의 머리에서 왔습니다. 발신인은 스칼님입니다."


"스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테오도르 추기경이 알고 있다면 분명 저도 알고 있는 인물일 텐데..."


집배원이 멀락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멀락은 집배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집배원은 '내가 발신자와 수취인의 자세한 신상과, 그 둘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까지 알아야 하느냐'에 해당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멀락은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멀락은 겸연쩍게 말했다.


"...방금 말은 혼잣말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집배원이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의 옆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큰 소라 껍데기 같은 것이었다. 북부에서 소포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티팩트였다.

집배원은 그 소라 껍데기 같은 것을 멀락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대며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받으신 분의 성함과, 소포를 확실히 받았다고 말해주시면 됩니다."


"무벤의 중앙 수도원에 거처하고 있는 멀락 추기경입니다. 스칼님이 보내신 소포는 확실히 건네 받았습니다."


집배원은 아티팩트를 거두었다. 잠시 꼼지락거리며 그것을 조작하던 집배원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제대로 저장됐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다른 작별의 말은 없었다. 집배원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자신의 썰매로 향했고, 이어서 무벤의 시가지 쪽으로 천천히 썰매를 몰았다.

홀로 남게 된 멀락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매서운 바람이 멀락의 얼굴을 스쳤다.

몸을 한 번 소스라친 멀락은 곧 멍청하게 수도원 입구에 계속 서 있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묵직한 상자를 양 손으로 끌어 안은 채 멀락은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멀락은 걸었다. 테오도르가 있는 방은 수도원의 가장 안 쪽에 있었고, 걸어서 가자면 꽤 시간이 걸렸다.

걷는 내내 멀락은 상자의 내용물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에 멀락은 그 소포가 어떤 촌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소포의 주 수취인은 테오도르 추기경이었다. 멀락은 테오도르가 대륙 각지에서 이런 류의 소포를 얼마나 많이 받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테오도르의 인맥이 광범위하다거나, 친지가 많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테오도르가 유명하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대륙의 인사들 중 테오도르 추기경의 현위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테오도르 추기경은 피오의 다음 대주교가 거의 확실시되는 인물이다.

잘 보여서 나쁠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테오도르와의 끈을 만들 수만 있다면 권력을 쥘 수 있다. 대륙의 수 많은 인사들은 테오로드에게 황금을 보냄으로써 미리 끈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한 끝에 멀락은 그 가정을 파기해버렸다.


"북부의 머리라."


다른 곳이면 몰라도 그곳에서 촌지를 보내올 리가 없었다.

땅에 발을 딛는 횟수와 멀락의 궁금증은 정확히 비례하며 동시에 커졌다.

마침내 멀락은 테오도르가 잠든 방 앞에 도달했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문을 열 것 같았던 멀락이 뚝- 움직임을 멈췄다.

상자와 손잡이를 계속해서 번갈아 보던 멀락이 이내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멀락은 테오도르가 있는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바로 옆 창고로 상자를 가지고 들어갔다.

바닥에 먼지가 수북했지만 멀락은 개의치 않고 자리에 주저 앉았다.

멀락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의 포장은 단순한 것이어서 여는데 특별한 도구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열 수 있다는 점이 멀락의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멀락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상당히 우스운 짓거리임을 인정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내진 소포를 몰래 뜯어보는 짓이라니. 심지어 자신은 누구보다 신실해야 할 추기경의 자리에 있었다.

한참 동안 상자를 응시하던 멀락은 결국 상자의 잠금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호기심과 더불어 기묘한 불안감이 멀락의 몸을 휩싸기 시작했다.

멀락은 상자를 열었다. 멀락은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날 하루 먹었던 것을 전부 바닥에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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