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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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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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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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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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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기 (12)

DUMMY

길버트는 고심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상당히 이상하다고 볼 수 있는 아침이었다.

길버트는 자신이 어째서 멀쩡한 움막을 놔두고 흙바닥에서 자고 있었는지, 또 어째서 바지춤이 반쯤 내려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길버트가 고민에 빠진 채 자리에 멀뚱하게 앉아 있자, 어느새 일어났는지 리버와 토비가 하품을 하며 다가왔다.


다가온 두 사람의 표정을 관찰한 길버트는 약간 안도했다.

리버와 토비의 표정으로 봐선, 지금 느끼고 있는 의아함이 혼자만의 것은 아닌 듯 싶었다.

세 사람은 멀뚱히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

곧 토비가 지극히 의문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뭐야. 너도 리버처럼 여기서 잠들었던 거냐? 나야 맨 바닥이 편하다지만 너희들은 왜 굳이 이런 곳에서 자고 있었냐?"


"...모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피로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보다 어젯밤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아무래도 식사 도중에 잠든 것 같습니다만... 혹시 리버군과 토비군은 어젯밤 일이 기억납니까?"


토비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음, 그러고 보니 전혀 기억나질 않는데? 그런데 말이야. 이상한 꿈을 꾼 것 같기는 해. 너희들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지는 꿈이었지. 그 외에도 뭔가 격한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그 쪽은 기억이 나질 않는군."


토비의 말에 리버가 놀라며 끼어들었다.


"어라? 토비 당신도요? 사실 저도 비슷한 꿈을 꿨는데요."


리버와 토비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눈썹을 모으며 길버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길버트는 약간 멋쩍은 느낌을 받으며 대답했다.


"...사실 저도 비슷한 내용의 꿈을 꿨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숲 자체가 기이하게 뒤틀리는 꿈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비들이 몇 마리 날아다녔던 것 같기도 하군요."


"맞아! 나비였어! 너도 꿨군! 그 때가 마지막 기억이었어. 웬 젠장 맞을 나비들이 우르르 날아온 순간부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그보다 세 명이 같은 꿈을 꿀 수가 있는 건가요?"


세 남자가 어젯밤 있었던 기이한 현상에 열띤 토론을 벌이려던 찰나 루나가 불쑥 뒤에서 나타났다.


"빨리도 일어 나는군."


그때까지 루나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던 세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리버가 물었다.


"혹시 너도 같은 꿈을 꿨어?"


"꿈을 꾸긴 했지. 하지만 너희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꿈이었어. 그보다 길버트..."


"예?"


"오늘 하루의 여정은 네게 맡겨야 할 것 같군. 어차피 무벤까지 가는 길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그렇기야 합니다만..."


말하던 도중 길버트는 루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루나는 핼쑥해져 있었고, 마치 며칠 밤을 꼬박 샌 사람처럼 퀭한 눈을 하고 있었다.

길버트가 그 사실에 대해 질문하려 했을 때, 루나가 먼저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네가 안내 해. 난 이만 자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깨어날 때까지..."


말을 끝 맺지 못하고 루나가 앞으로 허물어졌다.

리버가 황급히 쓰러지는 루나를 부축했다.

리버의 품에 쓰러진 루나는 연체동물 같이 흐느적대며 완벽히 리버 위에 몸을 포갰다.

세 남자는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 상태로 꽤 시간이 흘렀다.

루나는 최초의 허물어짐 이후로 어떤 미동도 없었다.

갑자기 리버가 루나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뭔가 불행한 상상을 떠올린듯한 얼굴로 루나의 코 앞에 얼른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은 쉬고 있어요. 죽은 건 아니에요."


"이놈아, 어제까지 멀쩡했던 인간이 갑자기 죽긴 왜 죽냐! 그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여태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길버트는 지나칠 정도로 당황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밤새 고민이라도 하다가 잠을 설친 것 아닙니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길버트는 두 사람의 격렬한 반박에 부딪혔다.

토비와 리버는 롭스 산맥을 가르는 여정 도중 루나가 보여줬던 어이없을 정도의 체력을 길버트에게 열렬히 설파했다.

그 기세가 너무 살벌해서 길버트는 약간 질리는 기분을 받으며 대꾸했다.


"...알겠으니 그만 말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밤새 무슨 일이 있긴 했던 모양입니다. 다만 기억이 나질 않으니 추측은 어렵겠군요. 그보다 루나양이 제게 여정을 일임했으니 오늘 하루의 일정을 짜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아무튼 무벤으로 향하는 저희들의 여정은 지체될 수 없는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길버트는 바닥에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길버트는 그 나뭇가지를 이용해 흙바닥에 커다란 모래시계 같은 것을 그렸다.

대륙 지도였다.

길버트는 지도 안에 동그라미 몇 개를 그린 후 설명했다.


"무벤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윌, 패트릭 영지를 거치는 것입니다. 도중에 길도 잘 닦여 있으니 말을 몰기에도 수월할 테고, 긴 여정이니 보급의 문제도 신경 써야겠지요. 음, 그렇지만 저희들이 쫓기고 있다는 점이 문제군요. 그럼 이 경로를 최대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말을 몰 수 있을 만한 숲길을 찾아보자면... 이렇습니다."


길버트가 나뭇가지로 어느 한 지점에 선을 주욱 그었다.

롭스 산맥과 중간에 위치한 영지의 사이를 따라 그려진 구불구불한 선이었다.

그 후에도 몇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유심히 지도를 살펴보던 토비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리의 여정에 대해서 굳이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간단한 방법이 있잖냐. 네가 길잡이니 그냥 앞장 서서 걸어라. 우리 둘은 네 뒤를 따를 테니. 그럼 되겠지."


시원한 대답이었고 리버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세우고 난 뒤 세 남자는 분주히 움직였다.

늦게 일어난 탓에 아침을 해결할 여유는 없었다.

곧바로 출발하기로 합의한 세 남자는 곧장 말을 데려와 재갈을 물렸다.

길버트와 토비가 말 등에 훌쩍 올라 탔을 때, 리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 저기 잠시만요. 두 사람 다 잊고 있는 것 같은데요. 루나는 어떡하죠? 게다가 저는 혼자서는 말을 못 모는데요?"


"과연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흐음 잠시, 그건 생각해보니 꽤 어려운 문제입니다. 일단 루나양을 다시 깨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말처럼 루나양이 잠든 것이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면 뭔가 다른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걸 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루나양은 무녀고 우리는 그녀의 사정을 모릅니다.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해 저희들이 섣불리 접근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토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해결책을 제시했다.


"내가 안고 타면 그만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 굳이 고삐를 쥘 필요도 없겠지. 몇 시간 정도라면 충분히 한 손으로 안고 갈 수 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비는 여태 양 손을 놓고 말을 타는 재주를 보여 왔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토비가 내놓은 것은 명쾌한 해결책처럼 보였지만, 상황은 그다지 명쾌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여태 토비의 명령을 한번도 거부하지 않았던 말이 루나를 태우자마자 미친듯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토비는 말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니까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잡아먹겠다는 식으로 마구 으르렁댔다는 말이다.

하지만 위협에도 불구하고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루나를 태우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길버트가 토비와 같은 주장을 하며 루나를 자신의 말에 태우겠다고 나섰다.

길버트의 승마술은 우수했고, 따라서 토비만큼 여유롭진 않겠지만 루나를 안고 타는 것에 무리는 없었다.

그리고 길버트의 말 역시 루나에게 자신의 등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 남자는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짧은 토론이 끝난 후에 최종적으로 대두된 의견은 두 가지 정도였다.

먼저 루나의 요력에 말이 겁먹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여태까지는 잘만 태우고 다녔다는 토비의 반박으로 금세 무산되었다.

다음으로는 토비와 길버트의 말이 유달리 인간 여자를 혐오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그럴듯해 보였다.

실제로 루나를 원래 그녀가 타고 있던 말에 올려놨을 때는 거부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참 생각에 골몰해 있던 리버가 말했다.


"저기 혹시, 그냥 둘을 태우긴 무거워서가 아닐까요?"


잠시 정적.

토비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에서 내린 뒤 자신의 말에 루나만 올려 보았다.

말은 반항하지 않았다.

이어진 길버트의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버트가 허무한 얼굴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때론 정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을 간과했군요. 하긴 생각해보면 토비군은 지나치게 무겁고, 저도 무장을 하고 있으니 일반적인 인간보단 훨씬 무거울 겁니다. 그 상태에서 루나양의 무게까지 더해지면 말들이 부담을 느낄만 하지요."


길버트의 말이 끝나고 시간이 잠시 흐른 후에, 두 남자가 묘한 표정으로 리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곧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리버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저요? 안돼요...! 저 혼자서 타는 것도 벅찬데 자고 있는 사람을 태우고 타라니요. 한 손으로 루나를 붙잡고 타는 건 토비 당신이나 길버트씨만 가능한 재주라고요."


"아뇨 마침 좋은 기회입니다 리버군. 인간은 언제까지나 타인에게 기대기만 해선 제대로 성장할 수 없어요. 게다가 모름지기 인간이란 위기 속에서 가장 큰 성장을 하는 법입니다. 무벤까지는 먼 여정이 될 테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승마술을 몸에 익혀 놓도록 하죠.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정답은 가까이에 있는 것 같군요."


"네? 정답이 가까이에 있다니요?"


리버가 되물었고, 길버트는 대답 대신 근처에 즐비하게 있던 넝쿨을 가리켰다.

길버트의 뜻을 이해한 토비가 즉시 행동에 나섰다.

넝쿨이 있는 곳으로 뛰어간 토비가 그중 긴 것들을 마구잡이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남자와 루나는 여장을 끝마칠 수 있었다.

토비와 길버트는 어제와 같은 평범한 채비였고, 리버의 경우에는 조금 특이한 채비였다.


리버는 양 손으로 고삐를 쥔 채 루나를 등에 업고 있었다.

사실 이 경우에 업고 있다는 표현은 조금 어색하다.

현재 루나의 양 팔은 리버의 목에 깊게 둘러진 채로 넝쿨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고 몸통과 다리, 얼굴 또한 여러 겹의 넝쿨로 리버의 여러 신체 부뷔에 꽁꽁 묶여 있었다.

처음에 그냥 몸통만 묶으면 되지 않냐고 길길이 반항하던 리버는, 승마 도중 팔다리나 고개가 너풀거리면 위험하다는 말에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것은 새끼 나무늘보가 제 어미 등에 폭 안겨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말 위에서 고삐를 쥐고 있는 리버는 울상을 짓고 있었고, 나머지 두 명은 그런 리버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두 남자의 호쾌한 웃음 소리가 퍼진 후에 길버트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자, 갈 길이 머니 그만 지체하고 어서 출발합시다!"


길버트가 박차를 가했고 세 필의 말이 천천히 움직였다. 네 사람은 무벤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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