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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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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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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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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다면기 (11)

DUMMY

무수한 나비들이 매구의 손 부분에 몰려들었다.

매구는 요염하다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손길로 길버트의 하체를 쓰다듬었다.

이어서 길버트의 상체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옆에서 보자면 그 장면에는 남편 위에 쓰러진 과부와 같은 처연함이 있었고, 동시에 색정광 같은 야릇함이 있었다.


길버트 위에 거의 일자로 몸을 포갠 채, 매구는 길버트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어서 붉은 혀를 내빼 즐겁다는 얼굴로 길버트의 뺨을 핥기 시작했다.

마치 맛있는 것을 먹기 전에 미리 핥아보는 것 같은 그런 동작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 주변을 맴돌던 나비들의 움직임이 점점 현란해졌고, 또 급박해졌다.


한참 뺨을 핥던 메구가 이번에는 가만히 길버트의 얼굴을 응시했다.

곧 매구는 길버트의 입술 쪽으로 자신의 주둥이를 가져다 댔다.

마침내 매구의 주둥이 끝이 길버트의 입술에 닿으려던 순간, 갑자기 매구가 비명을 질렀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인간 여성과 쉽게 구분되지 않을 그런 비명 소리였다.


매구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매구의 옆구리에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물론 단검이 제 스스로 날아 들어 박혔을 리는 없다.

단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것은 루나였다.

매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몇번이나 눈을 껌뻑대며 자신의 옆구리와 루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매구가 루나의 반대 방향으로 풀쩍 뛰었다.

격한 움직임에 단검이 쑤욱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매구는 루나와 몇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풀쩍풀쩍 뛰면서 이동했다.

마침내 둘 사이가 꽤 멀어지자, 매구가 한 손으로 옆구리를 누르며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루나를 쏘아보았다.

매구의 주둥이가 씰룩거렸다.

주둥이에서 기묘하고 야릇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나...를...?"


루나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얼마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네 개나 되는 꼬리를 가지게 되면 말도 할 줄 알게 되는 모양이군. 그보다 이렇게 늦게 나타날 만큼 신중을 기했다면 내게도 더 신경을 썼어야지. 약간 미안한 감정이 들긴 하는군, 나는 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너도 이 일이 유익한 경험이 됐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앞으로 관심 있는 남자를 유혹할 때는, 그 남자 옆에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잘 확인하도록 해. 여자의 질투심은 언제나 무서운 법이야."


매구는 루나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귀를 여러 번 쫑긋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매구의 옷 위로는 초록의 피가 빠르게 번져가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주변 가득 퍼져있던 나비가 전부 매구의 상처 부위로 몰려들었다.

맴돌던 나비들이 그렇게 몰려가자, 주변의 풍경이 점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상쾌한 숲 공기에 루나는 정신이 약간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상처를 매만지던 매구가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루나를 마주 본 채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숲으로 다시 들어갈 셈인 듯했다.

루나는 말없이 매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매구는 마침내 숲 안쪽으로 완전히 진입했다.

어둠 속에서 매구의 붉게 타오르는 두 개의 눈이 루나를 응시했다.

빛나는 눈 속에 증오가 서려 있었다.


"위...선자... 너는... 평..생을.. 그렇..게.. 살...수는..없..다."


루나는 빙긋 웃었고, 매구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홱 돌리고 숲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매구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루나는 몸을 돌렸다.

남자를 유혹하는 요괴도 사라졌고, 마을의 풍경도 원래의 숲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소녀는 아직도 우두커니 서서 루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나는 바닥에 있는 피 묻은 단검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소녀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간결한 동작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아."


임종의 순간에 내뱉은 것 치고는 볼품없는 말이었다.

소녀의 목이 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졌다.

용케 목 없이 서 있던 소녀의 몸이 잠시 휘청이다가 끝내는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사방으로 피가 솟구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살과, 피와, 뼈는 소녀의 목이 분리되는 순간 곧장 나비로 변했다.

매끈하게 잘린 단면에서 생겨난 무수한 수의 나비들이 매구가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 날갯짓에 맞춰 달빛이 이리저리 반사됐다.

만약 누군가 멀리서 봤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야 말 것 같은 그런 장면이었다.


루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심히 자신이 몸과 분리 시킨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소녀의 머리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애정과 회오 같은 것이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맞아, 그때도 이런 식이었어. 언니는 잔해에 깔린 채 바둥거리고 있는 나를 주저 없이 벴지.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그보다 약간 억울한 걸, 같은 손에 두 번이나 죽게 되다니 말야."


루나는 그 날을 떠올렸다.

자드에게서 도망쳐 마을로 돌아갔을 때, 마을은 이미 전부 불타있었다.

살아있는 인간은 건물 밑에 깔려있던 이 이름 모를 소녀 뿐이었다.

그때 루나는 도저히 살 가망이 없어 보이는 그 아이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 아이가 실제로 편하게 느꼈을지는 루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사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편해졌다는 것이었다.

루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니, 넌 억울하지 않아. 하지만 그 모습을 빌린 김에 멋대로 단정 짓고 싶다면 그렇게 해. 실제로 그때 나는 숨통을 끊으면서 잠깐은 그 아이가 억울해 할 거라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그래 동정했지. 하지만 그건 비참한 삶을 연명하지 않게 도와준 처사였어. 감사를 받아 마땅해. 아마 그 애도 결국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여전히 냉랭하구나. 평생 그렇게 행동하면 어떤 남자도 질려버리고 말 걸. 내가 보기엔 말야, 방금 전 도망친 요괴보다 언니 쪽이 남자들에게 훨씬 인기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의 마지막쯤에 가서 소녀가 유쾌한 표정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루나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관심 없어. 사실 나는 여자를 더 좋아하거든. 그보다 이제 그만 떠들고 들어가. 그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건 건 실수였어. 지금 네 모습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분노만 증폭 시키니까."


뎅겅 잘린 소녀의 머리에서 다시금 얕은 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어서 소녀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른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역시 강하구나. 하지만 결국 네게도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한 말처럼, 천성의 나약함이란 어차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그러니 부정하려 하지 마. 네 말처럼 나는 너니까. 네가 나를 아는 만큼, 나도 너를 알 수 있어. 우리는 내면의 나약함을 잘 알고 있지. 언젠가는 버틸 수 없는 날이 올 거라는 점도. 물론 너는 그 날이 왔을 때의 해결책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라르토 루나. 너는 그 누구보다 현명하니까."


"...멍청하긴, 해결책 같은 건 없어."


"끝까지 자신을 속이는군. 좋아 지켜보겠어. 네가 언제까지 짝을 찾지 않고, 또 출산을 하지 않는지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을 거야. 다가오는 모든 것을 베어버려도 과거는 베어버릴 수 없는 법이니까. 과거는 잠시 잊혀질지언정 결코 사라지지는 않잖아?"


그 말이 끝났을 때 즈음엔 소녀의 몸통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루나는 어째서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루나는 마침내 어떤 사실에 대해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한 것과 동시에 소녀는 자신이 퇴장할 시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녀가 쓰게 웃었고, 루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꺼져."


머리는 사라졌다.

부지불식간에 나비로 변한 소녀의 머리가 숲 안쪽으로 날아갔다.

나비들이 날아가는 장면을 바라보던 루나는 문득 자신이 지독하게 지쳐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체는 버틸만했지만 지나치게 혹사 당한 정신 쪽은 이제 그만 쉬게 해달라며 아우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루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과거와 현재를 바쁘게 오간 탓에 정신은 자신이 있어야 할 정확한 위치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대로 움막에 들어가 잠들고 싶었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아직 한밤중이었고, 매구가 남자들에게 완전히 미련을 버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루나는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길게 고심하던 루나의 시야에 불현듯 세 남자의 뒤 편에 있던 어떤 식물이 포착됐다.

루나는 망설이지 않고 식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야영을 준비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그곳에는 오피디아 군락이 있었다.

루나는 군락을 관찰했다.

환경에 따라 성분이 바뀌는 그 식물은 개화 시기마저 제각각이다.

다행히도 몇몇 개체에 꽃이 피어 있었다.

루나는 무심한 태도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활짝 핀 꽃 몇 송이를 꺾었다.


꺾어낸 꽃들을 움켜쥐고서 루나는 원래 있던 위치로 돌아갔다.

모닥불 옆에 앉은 루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의 위치로 추측해봤을 때 해가 뜨자면 몇 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루나는 자신의 손에 들린 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 적당해 보이는 하나를 골라 입 안에 집어 넣었다.

잘근대며 씹자 꽃이 뭉개지며 그 속에서 진액이 나왔다.

적당히 쓰고, 또 적당히 달콤했다.

밤이 소리 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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