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 한국계 다나카 히로시
15시간의 비행. 젊고 건강한 에리카에게도 만만치 않다. 보스턴에서 새벽 1시 반에 이륙한 직항편이 나리타 공항에 착륙한 것은 날짜가 바뀌어 다음날 오후 5시였다.
아버지가 태어난 일본 땅에 에리카가 발을 딛는 것은 네 번째이다. 학생시절에 한 번, 그리고 FBI요원으로서 세 번째. 그 세 번 모두가 폭력조직과 관련되는 일이다.
저녁의 나리타공항은 한산하고 활기가 없다. 정말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20년이 있었나? 버블이 한창이던 때에 본 나리타와는 전혀 딴판이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퇴근시간이어서 정체가 심하다. 비몽사몽 간에 두 시간을 차에서 흔들리고 호텔에 체크인 했을 때, 중요한 이메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어틀랜틱 시티의 Tanaka Holdings가 보낸 FedEx의 발송처 정보가 곧 입수된다는 것. 민간기업인 FedEx의 팔을 비틀어 정보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는 코토우스키의 설명이 붙어 있다.
* * *
“민감한 사건을 맡았군.”
다음 날 아침 찾아 간 미국 대사관에 주재하는 FBI요원 베이커의 첫 마디였다. FBI에서 위조화폐 분야의 전문가로 오래 일한 그는 부인이 일본인이어서 동경에서 은퇴를 할 생각이라고 한다.
“에가와 요원이 이미 일본의 조직 폭력에 관하여 보고서까지 작성한 터이니 잘 알겠지만, 일본의 폭력 조직은 사양길에 들어선 지 오래 됐어. 그 흐름 속에서 폭력 조직이 기업화, 화이트 컬러화 하고 있잖아.”
“맞아요.”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자들도 기업화한 폭력 조직으로 보나?”
“제 느낌으로는 이들이 순수한 폭력 조직도 아닌 것 같아요.”
“동감이야. 내가 나설 계제는 아니어서 가만히 있었지만.. 전문 폭력 조직이라면 피해자의 시체를 어설프게 강에 던지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지요..?”
베이커의 말을 듣는 에리카의 눈이 빛난다.
“내가 다루었던 화폐 위조범들도 사람을 꽤 죽이거든.. 전문가라면 시멘트로 시체를 굳혀서 바다에 버리는 등.. 더 완벽한 조치를 취했겠지..”
“맞아요. 저도 그들이 프로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어요.”
“아니면.. 프로인데.. 현장에서 의견 차이가 있거나.. 경황이 없었거나..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거나..”
“참고할게요.”
“시체가 버려졌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의 CCTV, 그리고 탐문 조사 등은 다했나?”
“FBI 보스턴 오피스가 곧 시작할 거에요. 상부의 명령으로 경찰의 조사가 중단되었잖아요.”
“수사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소중한 시간을 많이 잃어 버렸어.”
* * *
일본의 3대 호텔의 하나라는 오쿠라 호텔은 전반적으로 실내가 어둡고 옹색하다. CIA 헨더슨 요원이 소개한 리차드 정을 만나기로 한 오쿠라 호텔의 바에 갔을 때,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실내에 시가 냄새가 너무 강하다고.
둘은 시내를 걷기로 한다. 일본 중앙정부의 관청가인 가스미가세키를 뚫고 30분 정도 걸으니 멀리 황궁이 보인다.
“Tanaka Trading에 대해서 좀 알아 봤어요.”
“고마워요. 본인의 일도 바쁠텐데.”
“좀 이상하네요.”
“뭐가요.”
“고베시에 그 이름을 가진 회사는 없어요.”
“그럼.. 우리가 헛 것을 쫓은 거..?”
“그런 것도 아녜요.”
“무슨 말인지..”
“고베시에 존재하는.. 아니 존재하던 기업가로서 다나카 히로시라는 사람은 작년 봄에 죽었어요. 그리고 Tanaka Trading이라는 회사도 고베에는 없고.. 다나카 히로시가 가지고 있던 미국의 모든 법인의 모든 지분은 그 아들에게 양도되었어요.”
“아들이라면 다나카씨?”
“아니에요. 다나카씨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어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다나카 히로시의 또 다른 이름은 김광수예요?”
“네..? 그러면 한국인?”
“정확히 말하면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은 한국계 영주권자..”
“그러면 아들의 이름은?”
“본명 김성구, 일본명 다나카 노리오.”
“다나카.. 아니 김광수씨는 돈이 많았던 모양이지요.”
“오사카를 포함한 간사이 지역의 한국계 중에는 손꼽히는 부호였어요. 그 재산은 이제 아들에게 넘어갔지만..”
“그럼 그들이 하는 사업은 무엇인가요?”
“많아요. 거의 그룹이니까. 시작은 전당포와 부동산이었어요. 최초로 만든 기업다운 곳이 신용금고. 제3금융권이었지만 실속과 규모를 갖춘 곳이었어요. 태산신용금고라고..
“그럼 미국에 있는 법인들의 소유권이 모두 아들 김성구에게 이전된 것인가요?”
“그건 조사를 안 해 봐서 모르겠어요. 다만 내게 정보를 준 일본 경찰에서는 아직 거기까지는 손을 쓰지를 않았을 거라고..”
“그렇다면 김성구씨가 아버지의 모든 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건가요?”
“거기까진 알 수가 없지요. 일본 경찰의 말로는 원래 시작부터 김광수씨와 친한 친구들 사이의 동업조합 비슷한 것이라고 해요.”
이때 에리카의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액정에는 주소가 하나 들어있다.
고베시 중앙구 오노하마 19
다나카창고 ㈜
“보스턴에서 연락이 왔어요. 어틀랜틱 시티에 있는 Tanaka Holdings에서 FedEx 우편을 보내는 발송지에요.”
에리카는 이 말을 하며 액정의 주소를 리차드 정에게 보여준다. 그 주소를 자신의 스마트폰에 입력해 본 그는 눈살을 찌푸린다.
“터프한 곳이에요.”
“그야 항만의 바닷가 창고 지대일 테니까..”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거에 고베지역의 야쿠자들 사이에 항쟁이 있을 때에는 대개 여기서 누가 죽느냐의 결판을 내곤 했어요.”
한 시간을 걸은 두 사람의 발길은 어느새 천황이 사는 황궁과 동경역 사이의 넓은 광장에 이르렀다. 바람이 스산하고 차다.
“여자 혼자 쑤시고 다니기에는 좀 터프한 곳인데..”
“별로 겁은 안나요.”
“겁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눈에 띠일 거라는 거죠.. 일본 말이 유창하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동행하면 어떨까요? 회사에 휴가를 내고 순수하게 개인적인 취미로 하는 걸로..”
에리카가 리차드 정의 얼굴을 정색을 하고 쳐다 본다. 그늘이 있는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말을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고, 그가 혹시 발설을 한다면.. 의도치 않게 악용되어 잡음을 일으킬 수도 있다.
리차드 정이 이를 간파했는지 웃으며 말한다.
“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경험해서 CIA 안에서 동아시아 전문가로 우뚝 서고 싶어요. 에가와 요원처럼..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가면 도움이 될 일본 형사가 있어요.”
에리카는 그를 믿기로 했다.
“좋아요. 그럼 내일 11시에 저기 동경역에서 만납시다.”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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