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조회수 :
9,882
추천수 :
230
글자수 :
391,305

작성
20.09.03 06:00
조회
49
추천
0
글자
11쪽

귀환 (1)

DUMMY

펠릭스의 귀환은 일출 즈음이었다. 펠릭스가 사라져 군영지가 다소 소란스러웠긴 했지만, 당사자의 해명으로 큰 문제로 번지진 않았다.


그리고 근처에서 길을 잃은 용병, 엘드레드를 구출했다고 하자 소란은 이유를 찾은 탓에 누그러졌다. 근처에 개척지는 없었지만, 유적을 탐사하는 조사단은 종종 있었다.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전멸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엘드레드는 조사단의 생존자로 처리되었고, 펠릭스의 보증이 있어 간단하게 신분을 보장받았다.


"너덜너덜하군요."

"왜, 융통성 있는 처리잖아."

"신분증도 없고, 보증인도 없고. 전멸된 조사단이 근처에 있는지 조금만 조사해도 나오는 게 아닙니까."

"없어. 이런 시대라는 거지."

"어휴."


엘드레드의 한탄에 펠릭스는 단칼로 선을 그었다. 주신 샤메드의 축복으로 마나가 충만하던 시기에는 어지간한 사람은 마력을 활용할 수 있어 다양한 활동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샤메드의 휴식기였다.


마나 농도는 옅어졌고, 그에 비례하여 마력을 품은 사람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 정도만 과거와 비슷한 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나의 저하로 신의 숫자 자체가 줄어들었으므로 사제 또한 전체적으로 감소했다고 볼 수 있었다.


"부양선은 언제 온답니까?"

"모르지. 오늘 오후에서 내일 아침 사이가 아닐까."


체스터가 주사위를 굴리며 물었다. 할리자노크로 돌아가려면 부양선이 와야 하는데, 시간이 다소 지체된 상태. 본래라면 당일 정오 즈음에는 도착했어야 한다.


펠릭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다음 차례인 일레이자가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한 뒤 주사위를 굴렸다.


"보드게임이라는 건 꽤 사치스러운 놀이였다고 들었습니다만···."

"시간과 돈이 남아돌면 사치가 아니라 여흥에 불과하지."


네리카와 일레이자, 체스터가 하는 보드게임은 블루마블. 주사위를 굴려 말을 옮기고, 가진 돈을 활용해 농토나 광산 등을 사들이며 상점, 상단, 상회 순으로 확장하여 돈을 더 받아내 상대방을 파산으로 유도하는 것.


숫자만 계산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돈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세 명 모두 교양을 익혔으므로 할 수 있는 여흥이기도 했다.


'뭐 때문에 돌아오라고 했는지, 궁금해지게 하는군.'


의견을 반대하고, 부양선도 제때 오지 않았다.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뭔가 뒤에 숨기는 게 있다는 의심만 들었다.


그 의심은 할리자노크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면회 거부?"

"죄송합니다, 남작님. 와병 중이신지라···."

"혼수상태가 아니라면 대화 정도는 가능하지 않나?"

"사제 말씀으로는 안정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하즈킨 공작이 앓아누웠다.


펠릭스를 일부러 만나지 않으려고 등을 돌린 게 아니라면, 지극히 공교로운 타이밍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공작을 진단했다는 사제를 물어보니, 한 번 만나본 경험이 있는 네레이드 교단의 주교였다.


안면이 있기도 했고, 도움을 줬던 경험이 있기에 주교와의 만남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저주라고?"

"그렇습니다, 각하. 사흘 전, 누군가가 공작 각하께 심각한 저주를 걸었습니다."


부양선의 운용은 전적으로 공작의 손에 달렸다. 마나석을 대량으로 먹어치우는 기물인 까닭에 돈을 결제하는 공작이나 재무 담당이나 가능. 주교의 말을 들어보니 부양선이 하루 늦을 만했다.


펠릭스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주교에게 물었다.


"누가 걸었는지 짐작되십니까?"

"남쪽 야만인의 짓이겠지요. 과거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척을 취소하고, 대륙으로 돌아갔지요. 그러므로 할리자노크에는 온갖 성물을 배치하여 저주가 침입할 수 없도록 결계를 만들었는데···. 송구합니다."

"괜찮습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을 못 막은 게 아니라, 야만인이 교활한 수법으로 수를 쓴 것이니 고개를 드십시요."


펠릭스는 하즈킨 공작에게 내심 사과했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판타지라면 마법 외에도 주술도 있는 법.


두 사람은 두런두런 안부를 물었다. 펠릭스는 딱히 말할 게 없었지만, 주교는 꺼내는 이야기마다 가공되지 않은 정보로 가득했다.


"상인과 마찰이 잦았다?"

"익스퍼트 기사를 다수 영입하신 공작 각하께서 개척지를 확대하는 데 필요한 물자와 노예를 주문하셨지요. 그러나 단기간에 대량을 주문하시며 가격은 크게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납품 안 하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일방적 관계도 아니고."


공작이라고 하여 늘 협상에서 우위에 선 건 아니었다. 다만 상품을 대규모로 구매, 소비하는 고객이라 선택권이 넓은 정도였다. 강제성은 전혀 없었다.


개척지에 들어가는 물자 역시 상인이 안 팔면 공작은 살 수 없었다. 반대로 개척지에 물건을 안 팔면 쫄딱 망할 상인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일종의 공생관계인 셈.


"공작 각하께선 급할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량을 대거 늘리시면서 말씀하셨다는군요. 안 팔면 안 파는 대로 상관없다면서. 그게 상인의 심기를 자극한 것 같습니다."

"아아. 어떤 상황인지 짐작되는군요."


공작은 소위 '갑의 횡포'를 부렸다. 펠릭스가 익스퍼트 기사를 대거 확장하며 여유가 생기자 굳이 상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개척지 확대에 열을 올리지 않는 기존 정책과 맞물려 단가를 후려친 것이다.


물자가 모이면 좋고, 안 모여도 좋은, 그런 상태. 그러므로 상인을 과하게 압박하였을 가능성이 지대했다. 하즈킨 공작령에서만 수출하는 열대작물 관련 사업을 안 건드렸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돈을 아껴서 배를 구매하려고 하셨습니까?"

"정확합니다. 본토의 조선소와 접촉하셨지요."

'좀 적당히 해 먹지.'


하즈킨 공작이 공급 다변화와 물가 안정을 위해 벌인 건 알았지만, 자신의 편도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른 건 명백한 실책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믿는 게 있었을 테지만, 당사자가 저주로 쓰러졌으니 연합전선이 흐지부지되었을 거란 예측은 당연한 결론.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하즈킨 공작을 동정한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어디까지나 거래 상대였고, 이 복잡한 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네레이드 주교는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의 신을 따르는 주교라서 그런지, 상인과 관련이 좀 있나보군.'


평소라면 몰라도, 거대한 섬인 까닭에 배가 없으면 교류가 안 되는 상황. 상인이 네레이드 교단에 바치는 헌금의 액수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공작이 무너진 지금. 하즈킨에서 공작을 대신해 구심점을 자처할 수 있는 펠릭스의 의중을 알아낸 주교는 한숨 덜고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전보다 점잖아졌더군요."

"이런 식으로 조용해질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펠릭스가 주교와 독대하고 있을 때, 일행은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네리카는 사제의 도움을 받으며 책을 읽고, 체스터는 명상, 일레이자와 엘드레드는 마왕침공 이전 시대상을 놓고 대화했다.


난동 부리는 체스터와 주위에서 어쩔 줄 모르던 네리카, 만 기억하던 네레이드 주교였다. 바뀌어도 너무 달라지니 일견 당혹스러웠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체감하고 펠릭스에게 고개 숙인 쪽에 가까웠지만, 당사자가 입을 다물었으므로 주교로서는 모를 일.


"앞으로 어찌 지내실 생각이신지?"

"빠르게 해주(解呪)가 된다면 계속 이곳에 머무르겠으나, 공작님이 못 일어나신다면 본토로 올라가 봐야겠지요."


펠릭스는 하고자 한다면 할 일이 넘쳐흘렀다. 다만 지금까지 던전 답파라던가 위업을 세우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걸 지휘할 사람이 없다면,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굳이 하겠다면 전번에 받았던 문서를 챙겨서 다음 목표로 삼을 수는 있었다. 그러기 싫을 뿐. 모험가로서 명성을 얻는 건 분명 흥미진진한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미지의 존재가 품은 미지의 힘과 지식이 매력적이긴 했다. 세상의 비밀을 하나씩 밝힌다는 건 즐거운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생각은 네카에나와 나눈 말 덕분에 접을 수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미래에 모험왕 또는 대모험가 칭호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정치를 배워볼까. 세력을 일구려면 경영도 알아야 할 거고. 이것저것 많이 필요하지.'


가장 필요한 것은 권위였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공적. 전쟁에서의 공적도 좋고, 경제에서의 성적도 좋고, 경영에서의 치적도 좋다. 뭐가 됐건 업적이 필요했다.


그런데 던전을 발굴하면서 얻는 권위라고 해봐야 대단한 건 없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압도적일 수는 있으나, 범용성이 작았다.


'다행인 점은 내가 날뛸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 정도···인가. 엄청 태평한 시기는 아니라서 다행이긴 해.'


지세트 백국을 정벌할 때 기간트 골렘으로 결투를 연속으로 벌여 승리했다는 타이틀은 꽤 오래 갔다. 그 일 덕분에 펠릭스의 기량이나 용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더군다나 펙시스를 함락하는 일로 공적도 쌓았다. 대인전은 물론 지휘능력도 검증되었다는 것. 마게트 전선에 가더라도 카난리아프처럼 트로피 신세는 면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병사가 없으므로 지휘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퀸으로 이리저리 구르지도 않는다.


'60년···도 아니지. 전쟁을 70년 동안 준비한 나라의 국민이라 전쟁에 대해 아주 모를 순 없으니까.'


6월만 되면 학교에서 호국보훈의 달이라며 자주 보여주는 온갖 다큐멘터리. 거기에 유년기 특유의 선망과 몰입이 더해지면 전쟁사에 파고드는 사람도 나온다. 펠릭스가 그중 한 명.


한국사에서 시작해 세계사로 확대될 즈음에 할머니의 조언을 따라 농경이라는 가업을 잇느라 과하게 몰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수준만 하더라도 문외한보다는 천지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각하?"

"아. 이런. 죄송합니다. 잠시 넋을 잃었군요."


상념에서 깨어난 펠릭스가 사과했다. 네레이드 주교는 허허 웃더니 책 한 권을 건넸다.


네레이드의 가르침이 적힌, 네레이드 교단의 성경이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인연이 된다면 찾아뵙지요."


그 말을 끝으로 만남은 끝났다. 펠릭스는 성당 밖으로 나가 엘드레드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뭔가 있었지?"

"예. 성물을 만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상인 녀석들, 음흉하기는."


펠릭스는 공작의 계산을 역산해 보았다.


그 결과 카난리아프에서 했듯이 일종의 무게감으로 상인들이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억눌러야 했다. 여차하면 바로 진압할 수 있도록.


하지만 상인은 뻔질나게 드나들던 성당에 접근하여 회유했거나 직접 접촉했거나 해서 성물을 조작했다. 그 틈을 노리고 저주가 난입.


'저주도 마법의 일종이라면 내가 나서서 해제할 수 있는데. 나설 이유가 없네. 마법사로 위장했다면 모를까···.'


마음을 다잡은 펠릭스는 괜한 오지랖 없이 선을 그었다. 공작은 호기를 이용하지 못했다. 펠릭스에겐 그 정도에 불과한 일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장기휴재 공지 20.11.17 42 0 -
공지 업로드 시간 20.05.17 94 0 -
73 합류 +1 20.11.06 36 1 15쪽
72 국외 정쟁 (3) 20.11.02 26 1 15쪽
71 국외 정쟁 (2) 20.11.01 28 1 15쪽
70 국외 정쟁 (1) 20.10.31 31 1 15쪽
69 정리 실패 20.10.27 32 1 15쪽
68 유격대 소탕 (5) +1 20.10.23 36 1 11쪽
67 유격대 소탕 (4) 20.10.06 33 1 11쪽
66 유격대 소탕 (3) 20.10.06 35 1 12쪽
65 유격대 소탕 (2) 20.10.05 36 0 12쪽
64 유격대 소탕 (1) 20.10.02 41 0 11쪽
63 전장의 변화 20.09.30 45 0 12쪽
62 귀환 (2) 20.09.28 37 2 11쪽
» 귀환 (1) 20.09.03 50 0 11쪽
60 지하묘지미궁 베린 (6) 20.09.01 46 1 13쪽
59 지하묘지미궁 베린 (5) 20.08.26 48 0 12쪽
58 지하묘지미궁 베린 (4) 20.08.24 49 0 11쪽
57 지하묘지미궁 베린 (3) 20.08.19 44 3 11쪽
56 지하묘지미궁 베린 (2) 20.08.15 50 2 12쪽
55 지하묘지미궁 베린 (1) 20.08.13 54 1 11쪽
54 티올 요새 (2) 20.08.09 52 2 11쪽
53 티올 요새 (1) 20.08.06 56 1 12쪽
52 도굴과 도박 (3) 20.08.04 64 1 12쪽
51 도굴과 도박 (2) 20.07.29 68 2 11쪽
50 도굴과 도박 (1) 20.07.27 68 2 12쪽
49 개척지를 향해 (2) 20.07.24 74 2 12쪽
48 개척지를 향해 (1) +1 20.07.22 72 3 11쪽
47 셔플 & 딜 (4) 20.07.14 80 2 12쪽
46 셔플 & 딜 (3) 20.07.09 74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