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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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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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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올 요새 (1)

DUMMY

배보다 더 큰 돛을 단 쾌속선으로 며칠을 이동해서 도착한 티올 요새 근방. 빠른 해류가 섬을 몰아치는 탓에 대형 선박은 역행도 못 할 정도로 항해가 어려웠다.

선장은 바다에서 대기하다가 신호 스크롤이 반응하면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을 남기고 해안가에서 멀어졌다.


"저길 기어 올라가는 것도 모자라 반나절 버텨야 한다굽쇼?"

"그래. 못하겠으면 말해라. 너도 내가 버틸 테니."

"꼭 그렇게 말을 해야 속이 시원합니까?!"

"곱게 말해서 네가 알아들으면 나도 이렇게는 말 안 하지."


펠릭스는 준비해온 밧줄로 본인과 네리카, 일레이자 허리를 고정했다. 흔들려도 문제가 없게끔 2m 간격을 잡았고, 허리뿐만 아니라 가랑이와 어깨까지 둘러 만에 하나 흔들리더라도 뒤집히는 일은 없도록 적당히 헐겁더라도 묶는 부분은 단단히 고정했다.


"좀 부끄러운데요···."

"떨어지고 싶으면 느슨하게 해주지."

"으으···."


엄한 부위가 강조되는 것 같은 고정 방법이라 일레이자는 거부감을 드러냈다. 파도가 암초에 부딪혀 튄 물방울이 해안에서 30걸음 떨어진 거리에서도 얼굴에 닿자 불만은 입안으로 쏙 사라졌지만 말이다.

펠릭스가 눈치를 살피니 네리카도 말은 안 했지만, 적잖게 부담스러운 분위기였다. 괜히 시간을 오래 끌었다가 이상한 말이 나올 것 같아 펠릭스는 손가락을 몇 번 튕겨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떠드는 건 여기까지. 지금 바로 간다. 배고프면 육포라도 꺼내서 씹어."

"···볼일은?"


반 박자 늦은 체스터의 질문. 펠릭스는 인상을 쓰고 잠깐 생각해 보았다. 사타구니에 밧줄을 집어넣은 상태인데 볼일이 생기면 해결할 수 있는가? 바지를 입은 상태에서?


"······."

"······."


잠깐 침묵. 잠시 머리를 굴리던 펠릭스는 네리카와 일레이자의 어깨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만에 하나 노폐물이 생기면 방광에 모이지 않고 마나가 불태워 없앨 수 있도록 최소한의 방어가 가능하도록 안배했다.

체스터는 그걸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게 다 경험이지, 뭐···. 나 먼저 갑니다."

"그래라."


체스터가 먼저 암초를 밟으며 절벽으로 향했다. 자갈 해안에 곳곳의 바위가 거슬렸지만, 절벽이 시작되는 부분은 자를 대고 선을 그은 것처럼 명확했다. 절벽이 파도를 못 버티고 무너지면 그 부분이 깎여 자갈 해안이 되니까. 반대로 말하면 무너지지 않은 곳은 아직 안전했다.

툭 튀어나온 부분은 손으로 잡고, 움푹 들어간 부분에 발을 넣으며 천천히 옆으로 움직인다. 해가 뜬 직후라 잘 안 보였지만, 신성력의 축복으로 별 어려움 없이 절벽을 타는 체스터.

그걸 본 펠릭스가 손과 발에 마력을 둘렀다. 그리고 절벽에 푹.


"···?"


옆에서 지켜보던 일레이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분명 화강암 계열의 단단한 돌이었는데 그걸 잼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것처럼 손을 쑤셔 넣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레이자가 놀라거나 말거나 펠릭스는 네리카에게 말했다.


"내가 손발 넣은 부분을 정확히 따라서 와. 옆에도 말해주고."

"네."


펠릭스는 아직 수직은 안 되는 가파른 절벽을 탔다. 앞서가던 체스터는 아직 멀쩡했고, 기사 훈련을 받던 네리카도 괜찮았지만, 일레이자는 죽을상이었다. 험하게 구른 경험이 있어 일반인보다 지구력이 좋기는 하나, 암벽 등반은 근력과 지구력 둘 다 필요했다.


"네리카. 그리고 일레이자. 아래로 내려가라. 손이 아니라 다리와 허리를 써."

"예?"

"내가 위에서 지탱하겠다. 반듯하게 서서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해."


간단한 손짓으로 어떻게 하라고 손짓하고서 펠릭스는 위쪽으로 올라갔다. 가만히 기다리던 네리카는 펠릭스의 설명에 따라 자세를 바꿨다. 로프 강하할 때의 자세를 유지하자 허리에 힘이 실리긴 했지만, 상체는 편해졌다.

일레이자가 네리카의 도움으로 자세를 잡는 걸 보고서 펠릭스는 요새로 다가갔다. 서서히 수직으로 경사가 변하는 시점부터 펠릭스가 체스터를 앞질렀고, 정오가 조금 넘는 시간이 되어서야 요새 아래에 도착했다.


"죽을 것 같아···."

"그 지경이 돼도 입은 가볍군."

"끄으으···."


볼멘소리를 하려던 체스터였지만, 두 팔만으로 천장에 매달리는 게 버거워 턱을 꽉 물었다. 펠릭스를 보고 요령을 알아내서 손에 신성력을 휘감아 바위에 쑤셔 넣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아 결국 악력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체스터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는데, 펠릭스 아래에 매달린 두 사람은 바람 따라 대롱대롱 흔들리느라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겨우 2m에 불과한 밧줄이었으나 바닷바람이 워낙 강해서 문제였다. 크게 흔들리진 않았으나 계속 흔들리는 탓이다.


"곧 작전 시작한다. 정신 바짝 차려."

"좀 쉬었다가 하면 안 될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형님 나 죽어요."

"어림없는 소리. 가당치도 않다."


체스터가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펠릭스는 거리낌 없이 일몰 직전 특유의 보랏빛 검붉은 하늘이 펼쳐지자 팔을 바위에서 빼서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서도 휴식은 필요했다. 반나절 내내 흔들림에 시달린 네리카와 일레이자의 멀미 때문이었다.


'초소가 없군. 바다는 경계가 소홀한 건가? 바람이 강하게 부는 절벽이라 여길 기어 올라올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지?'


낭떠러지와 성벽의 간격은 30m에 불과했다. 뒤쪽에도 성벽을 쌓은 거로 보아 방어태세를 갖출 수는 있으나 전시가 아니라 평시라서 삼엄하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이번 공격이 중요한 이유였다.


"으윽, 손이야."

"축복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모양이지?"

"그렇게 핀잔을 줄 거면 좀 도와주던가···."


체스터가 구시렁거렸다. 펠릭스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채비를 끝냈다. 검과 약간의 경갑이 전부였지만.

그러나 두 사람은 아니었다. 멀미에 시달린 네리카와 일레이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예 일어나지 못했다.


"체스터. 넌 여기에 남아서 둘을 지켜라."

"네?"

"힘들다는데 끌고 다닐 순 없지. 쉬어라. 성벽 안쪽 보지 말고. 먼 곳을 보는 게 멀미를 진정시키는 데 나을 거다."


펠릭스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세 명을 성벽 밖에 세워두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생명체가 아니라 인형이라 생각하기로 했던 펠릭스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목적을 위한 평판 관리 때문에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평판을 관리할 사람이 셋에 불과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셋 모두 넉다운 상태. 그러니 이번에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뛸 장소가 마련되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한 번 살펴봐야겠어.'


지세트의 코프타 평원에서 벌인 골렘 결투는 얼떨떨했고, 알카탄의 펙시스 공략은 의무에 집중하느라 어중간하게 매듭지은 감이 있었다.

펠릭스는 이곳 티올에서 시험해보기로 했다. 체스터는 말을 안 듣고 엿볼 게 뻔하니 넘어가더라도 나머지 둘은 잠자코 바다만 구경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펠릭스는 성벽을 뛰어넘었다. 중량 때문에 나무로 만든 방책에 가까웠지만, 나름 성벽이라고 하단은 돌을 깔아서 견고함을 갖춘 시설이었다. 보통 전투일 때에나 방어력을 발휘하겠지만.

껑충 뛰어서 안에 들어온 펠릭스는 주위를 살폈다. 내부는 곳곳에 모닥불을 피웠고, 해가 저물기 전에 등불을 붙여놔서 무척 환했다.

성벽을 넘은 펠릭스를 본 병사가 뭔가를 외치려 했지만, 펠릭스가 즉시 돌멩이를 던져 머리를 박살 냈다. 성벽을 넘기 직전에 바닥에서 주운 엄지손가락 정도의 자갈은 총알처럼 쇄도하여 두개골을 깨트렸다.

좌우에서 경쾌한 퍽 소리가 울리며 몸이 모로 쓰러져 바닥에 쓰러졌다.


'대략 천 명이라고 했었지.'


펠릭스는 손 속에 정을 두지 않았다.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내가 주인공인 무대의 인형이야. 잘 만들어진 피조물일 뿐!'


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씌우고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세상의 근본인 마나로 만들어진 예리한 칼날은 서릿광처럼 미세하게 반짝였지만, 빛의 대가는 막대한 압력이었다.

허공이 절구에 찧어진 떡처럼 뭉개지면서 빛을 아주 잠깐 가둔 결과가 미세한 빛. 잠깐 반짝이고 사라졌지만, 빛이 사라진 직후는 허공을 뭉갠 힘이 방출된 시점이었다. 전방으로 부채꼴 모양의 압력이 역장을 만들어냈다.

갑작스러운 기압 변화를 이기지 못한 횃대나 건물이 폭탄 맞은 것처럼 휘날렸다.


'검풍. 되네. 이래야 양산형 판타지답지!'


가능성을 본 펠릭스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침입자가 나타났다고는 생각 못 하고 뜬금없는 자연재해가 발생한 것으로 여겨 얼떨떨하게 하늘을 쳐다보는 먼 거리에 있는 자들을 향한 검풍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식한 휘두르기가 아니었다. 마나 블레이드를 그대로 담아보았다. 마나를 움직여 마나 블레이드를 휘두른 직후 떼어냈다. 마나 블레이드 때문에 대기압이 뒤틀렸고, 직전에 전방으로 방출했던 것이 이번에는 마나 블레이드를 싣고 터져나갔다.

클레이모어를 터뜨리듯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마나 블레이드의 파편. 선이 아니라 면을 공격하는 방식에 하늘을 보던 이들 수십 명의 몸에 구멍이 뚫려 즉사했다. 마나 블레이드의 파편답게 아주 깔끔한 공기구멍을 내주었던 까닭이다.


'잡몹 전용 광역기네. 사정거리는 100m 정도인가.'


검격을 두 번 휘두르고서야 펠릭스를 발견한 야만인들이 소리를 질렀다. 전투태세로 돌변한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대적을 각오한 이들을 향해, 정확히는 공격하라고 소리를 지른 화려한 야만인을 향해 펠릭스가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파편이 아니라 온전하게 그믐달처럼 완만한 곡선형 마나 블레이드가 방출되었다. 직진으로 돌진한 마나 블레이드가 마치 자에 대고 칼을 그은 것처럼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원딜은 되는데 관통력이 너무 좋아서 문제네.'


참지 않고 힘을 과시해본 펠릭스는 일말의 통쾌함을 느꼈다. 그 정체는 해방감.


'재밌다!'


다시 검을 휘둘렀다. 검압을 연료 삼아서 비행하는 마나 블레이드가 사람 수십 수백 명을 허수아비처럼 베어버리자 희열이 올라왔다.

피와 뼈에 취한 펠릭스는 마나를 움직여 염력으로 땅을 들어 올렸다. 암반 위의 얇게 깔린 흙이 높게 솟아올랐다. 펠릭스가 손바닥을 뒤집자 어린아이가 목욕탕에서 물을 뒤집은 것처럼 흙이 뒤집혀 야만인 머리 위로 쏟아졌다.

검을 쥐지 않은 왼팔을 크게 휘두르고 앞을 향해 내리쳤다. 고층빌딩이 기우뚱 허물어지듯 힘 덩어리가 펠릭스가 가리킨 방향을 짓뭉갰다. 사람 수십 명과 건물 십수 채가 납작하게 변했다.


'아, 근데 계속하다 보니 노가다 하는 느낌이 좀 있다.'


기습으로 허를 찔렀고, 밤이라 어둠 속이므로 반격을 받을 걱정도 없었다. 곳곳에서 비명과 절규만 울리자 굉장히 거슬렸다.

펠릭스는 검을 거두고 생존자를 바라보았다. 긴 천으로 몸을 두르고 끈으로 허리를 묶은, 고대 그리스·로마 스타일의 간단한 복장이었다. 열대지역이라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옷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옷이 간단한 대신 장신구는 몹시 화려했다. 바늘로 세공한 것처럼 정밀하고 규칙적인 문양을 불어넣었다.


'번거롭군.'


개미들이 산개해서 도망치는 걸 일일이 무릎을 허리까지 올리면서 힘차게 밟아 죽이면 힘들기 마련.

펠릭스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양손을 자유롭게 휘둘렀다. 팔의 움직임에 맞춰 마나가 요동쳤다. 일렁이는 마력 두 개가 서로 충돌하며 터진 충격파가 사람의 생명력과 충돌해 일그러졌다.

곳곳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티올 요새의 거주자 모두 살충제를 맞은 벌레처럼 경련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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