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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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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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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셔플 & 딜 (3)

DUMMY

5일차 경매에서는 농지와 산림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쟁에 나섰다. 여태껏 에이커당 1골드도 되지 않았던 평균가격이 갑자기 껑충 뛰어서 10~15골드에 육박했다.

사델라 공작의 딸이 직접 통신을 걸어온 시점에서 눈치챈 게 있는 펠릭스였기에, 농지와 산림 확보를 멈추고 다른 시설을 적당히 구매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꿨다.

통신실 안에서 경매를 지켜보는 펠릭스 옆에 술친구 먹은 통신 마법사가 같이 앉아있었다.


"사델라 공작이 테루아 공작을 돕는 이유 말입니까?"

"그래. 오슬레아 동쪽 끝에 있는 사델라 공작이 서쪽 끝의 테루아 공작을 돕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펠릭스의 질문에 통신 마법사는 머리를 굴려 만족할만한 답을 찾았다. 통신 담당이라 정보 접근에 쉬운 데다가 딱히 비밀도 아니었던 까닭이다.


"지난 10년 동안 테루아 공작령 일대가 난리였잖습니까?"

"아, 그랬지. 공작이 군주된 도리를 수행 못 했으니 원정한다는 걸 알리지 않고 움직였었어."

"그동안 남쪽은 배를 만들고 섬을 개척하느라 난리였고 말입니다."

"음···, 무슨 말인지 알겠군. 지금껏 양보해온 대가를 받아가는 셈이다?"

"역시 바로 깨달으셨군요. 맞습니다."


의심에 불과했던 펠릭스의 짐작에 도장이 찍혔다. 트렐라드 변경백령뿐만 아니라 오슬레아 북서부는 테루아 공작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의로 방치되었고, 혼란을 수습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슬레아 대왕국이 대양과 해양거점 마련에 안간힘을 기울인들 영주된 도리로서 휘하 봉신의 어려움은 도와주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걸 지금까지 내버려둬 온 것이 고의였고, 지금 그 대가를 받아가려는 것이 지세트의 이권이라면 말은 되었다. 테루아 공작령의 위신이 곤두박질쳤고, 체면이 크게 손상됐으니까. 이 정도는 받아야 수지타산이 맞긴 했다.

거기에 딴지를 건 사람이 펠릭스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테루아 공작님께서 뜻을 추진하시려고 한들, 오슬레아의 기본 대전략은 마게트 왕국 견제니까요. 해양거점 확보에 남작님께서 나서신다면 테루아 공작님의 손을 들어줄 필요가 없지요. 중립을 지킨 것만으로도 도리는 지켰으니까요."

"말은 되는군."


통신담당 마법사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키펠 왕국과의 협상이 아무런 진척 없이 과거의 조약에서 조금 나아진 정도로 끝난다면, 오슬레아 대왕국의 마게트 왕국 포위망은 다소 부실해지긴 했어도 유지되는 셈이었다.

거기에 이 사달을 만든 펠릭스를 잠깐이나마 남방으로 돌려 해양거점 확보를 한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이고, 공작의 딸 다르멜이 어제 펠릭스에게 그 어떤 협박이나 경고 없이 저자세인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델라 공작령은 마게트 왕국의 동맹국인 란가스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펠릭스의 심기를 거슬리거나 나쁜 인상을 준다면, 사델라 공작령의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적을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튼 괜히 거액을 제시하며 날 구슬리려고 한 게 아니었네.'


배경을 알고 어제 대화를 되짚어보니 다르멜의 인내심이 두드러졌다. 부친을 대신해 테루아 공작령에게 빚을 갚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앞으로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펠릭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인내심.

통신담당 마법사는 펠릭스가 입을 닫자 눈치를 보고, 수정구 너머를 바라보았다. 수십만 골드를 호가하는 경매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흐르는 상류층의 유희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1년 내내 일해서 봉급으로 600골드 정도 받는 게 고작인 삶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매물들이 하나같이 영 아니군."

"괜찮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매매가가 모두 시세 절반도 안 되는데요."

"이런 경매에 돈을 쓰면 나중에 힘들어. 정복자의 권리로 사들이는 거지, 상인의 시선으로 사들이는 게 아니야."


펠릭스는 탁자 위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청동잔이라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흔들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통신실 안을 울렸다. 펠릭스 옆 마법사와 통신구를 조율하는 마법사가 긴장하며 목을 움츠렸다.


'내가 여기에서 욕심을 버리고 조금만 가져가면 저쪽도 내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건 파악하겠지. 내 세력이 없는데 괜히 싸워봐야 손해를 피할 수 없어. 가뜩이나 조만간 남쪽으로 귀양 가면 통제도 안 될 텐데. 척을 지면 두고두고 곤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만용을 부릴 수 없다. 오히려 협조를 받아내야 한다면 모를까.

입을 닫고 경매를 지켜보던 펠릭스는 와인을 들이켰다. 입천장을 텁텁하게 만드는 포도주는 혀끝에서 씁쓸함을 자아내다가 사라졌다. 취기에 정신을 잃으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할 텐데, 마력을 품은 몸은 해독능력이 워낙 좋아 어지간해서는 취하지 않았다.

5일차 경매에서 펠릭스가 구매한 건 고작 합계 40만 골드 가량의 도서관과 고고학 연구동뿐이었다.


'보자, 내가 확보한 책만 17만 권 정도 되나?'


당장 수익을 거두기 어려운 매물은 펠릭스의 독차지나 다름없었다. 지세트 백국의 귀족이 국외 도피할 때 챙기지 못한 예술·공예품이나 미술품 등은 다른 경매 참가자가 사들였으나 도서, 유물 같은 물건은 펠릭스가 가져갔다.

농지와 산림은 5일차가 되어서야 경쟁이 붙었지만, 도서나 연구자료는 여전히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책은 무겁고 부피가 커서 옮기기 어려운 물건이고, 연구자료는 학파가 달라서 시점과 중점이 다르니 참고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싼값으로 매수할 수 있었다.

6일차 경매도 이번처럼 시시하게 끝날 거라고 예상하며 돈을 확인해 보았다.

밑천으로 모은 170만 골드는 어느덧 1,300만 골드까지 불어나 있었다. 이 금액은 펠릭스만의 것이고, 카난리아프의 투자자는 오롯이 170만 골드로 사들인 농지의 세금을 받아간다. 시세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구매했으니 본전을 넘는데 80년이면 충분했다.


'역시 농사는 돈이 안 돼. 국가지원금이 없으면 덤빌 수 없지.'


한국에서 농업과를 나온 펠릭스는 입맛을 다셨다. 이곳의 식료품 가격대는 상당히 낮았다. 짐승과 몬스터가 날뛰는 동네인데도 농부의 삶은 가혹하기만 했다.

양판소 세계관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지구였다면 농부들이 피땀 흘리며 품종을 개량해 더 나은 곡식을 수확하려 했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사제가 땅을 축복하거나 풍작을 기원하기만 하면 흉작을 당하진 않았다. 지력이 소모되지 않으니 휴농지는 필요 없고, 자연히 농부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농부보다 사제의 입김이 더 센 것이다.


'이러면 인간의 시대를 열겠다는 내 계획의 현실성이 좀 많이 떨어지긴 해.'


인간이, 정확히는 유럽이 어째서 카톨릭을 걷어차고 인본주의를 내세우는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는가. 카톨락이 타락했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세계의 종교는 절제심이 대단했다. 신이 다수라서 그런 것인가, 신성력으로 증명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인가, 진실로 신실하니까 그런 것인가.


"란소스 남작님. 반대쪽에서 통신이 끊어졌습니다."

"아, 경매가 끝났군."


펠릭스가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5일차 경매가 막을 내렸다. 사전에 전달받은 매물 명단 중에서 구매할 수 있었던 건 고작 2개.

이 정도면 충분한 양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에 통신실을 써야 하므로 마법사에게 용돈을 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 * * *


- 대화의 창을 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저녁 식사가 끝나고 어둑해진 밤. 다시 밀담이 성사되었다. 다르멜은 감사를 건넸고, 펠릭스는 오만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견해 차이가 전적으로 드러나는 첫 만남.


"······."


짧게 답한 펠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할 말은 없으니 먼저 용건을 꺼내라는 압박.

다르멜은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뜸을 들였다. 말할 듯 말 듯 묘한 분위기를 끌었다. 상대방에게 없던 조바심도 끌어낼 수 있으며, 반응을 살필 수 있는 짧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태도였다.

협상 자체에 큰 흥미가 없던 펠릭스로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입을 다물며 눈을 직시했고, 다르멜은 펠릭스의 나른함을 눈치챘다.


'하지만 어째서? 지세트의 식량자급 능력을 독점하고 새로운 왕가와 피를 섞어 국왕으로 들어갈 속셈이 아닌가?'


현시점에서 오슬레아 상층부는 펠릭스가 장차 백국의 왕을 노리고 있다며 파악하고 있었다. 지세트의 모든 것을 매물로 올리는 경매에 참가하겠다는 선언이나, 트렐라드 변경백의 강력한 추천 등을 조합해보면 나오는 가장 유력한 결론이었던 까닭이다.

장차 카팔라 제국이 동진을 시도하면 방파제 역할을 해줄 국가가 필요한데, 지세트 백국이 제격이었다. 강한 무력을 가진 소국이 필요하고, 오슬레아 대왕국이 기간트 골렘과 부양선을 공여하며 무력동맹을 맺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우국으로 삼을 수 있다.

한 번 배신한 알카탄 공국에 이런 역할을 맡긴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키펠 왕국은 카팔라 국경과의 거리가 오슬레아보다 멀었다.


'노리는 게 뭐지? 무엇을 위해 농지와 산지를 산 거야?'


다르멜은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목표를 찾으려고 했으나 뾰족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돈이 궁하다면 어제 제안한 매각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팔지 않았다면 다른 노림수가 있다는 건데,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뭘 해도 이득이었던 펠릭스였고, 멀리 돌아다녀야 하는데 괜히 척지기 싫어서 좋을 게 없으니 계속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나은 제안을 고르려는 펠릭스의 자세는 다르멜의 천적과도 다름없었다. 협상이라는 건 손뼉이 맞아야 할 수 있는 행위. 한쪽이 손에서 힘을 풀었으니 소리가 나려면 반대쪽이 있는 힘껏 휘둘러야 가능하다. 지금 두 사람이 꼭 그 짝이었다.


- 남작님께선 이번 경매에 별다른 흥미가 없으신 것 같던데, 책을 좋아하십니까?

"관심은 있지. 이런 게 궁금한가?"

- 돈보다 책을 좋아하시는 분께선 현명하기 마련이니까요. 남작님의 지혜를 제가 따라가지 못하는 걸 보니 아직 공부가 부족함을 통감합니다.

"천재로 명성이 높으면서 자자하면서 겸손이 과하군. 테루아 공작에게 무엇을 빚졌길래 이렇게 나를 번거롭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 ······.


펠릭스의 심드렁한 말에 다르멜의 미소가 처음으로 굳었다. 아주 잠깐에 불과한, 움찔거리는 정도였지만 마주 보고 있던 펠릭스의 눈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라도 긁었나. 하기 싫은 일인가 보지?'


느긋하게 기다리던 펠릭스는 그걸 보고 한 마디 더 던졌다.


"계승권이 걸렸나?"

- ······.


다르멜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정곡이 찔린 것처럼 안면근육이 움직여야 유지할 수 있는 미소가 사라지고 부자연스러운 표정만 남았다.

테루아 공작은 본인 영지를 제물로 바쳤고, 그 덕분에 사델라 공작은 바다라는 영역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제물의 값어치가 높은 만큼 사델라 공작이 내야 할 대가도 크다.

사델라 공작은 본인의 공작위를 내걸었다.


"테루아 공작님에게 많은 이득을 준 사람이 높게 평가될 것이고, 사델라 공작님은 후계자를 고를때 그 조건을 무겁게 다루겠지."

- ···날카로우십니다.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일 텐데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게 있지 않나?"

- ······.


다르멜은 팔짱을 끼며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머리가 굴러가는 게 겉으로 보일 정도.

펠릭스는 여기에서 가볍게 수를 던졌다.


"좋아. 당신이 바라는 농지에 산림까지 얹어서 모두 주지."

- ···!

"당신은 나에게 뭘 어디까지 줄 수 있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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