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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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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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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셔플 & 딜 (4)

DUMMY

펠릭스는 아주 간단한 견주기를 선보였다. 현대의 협상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블러핑이었다.

상대방이 원하는 건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며, 아쉬운 게 없으니 최대한 많이 우려내는 특유의 협상 방식이었다. 상대방의 정보를 완벽하게 확보하지 못하면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지나치게 넓어지면서 좁아진다.


- 뭘 원하십니까?

"글쎄. 말하지 않았나? 얼마나 줄 수 있느냐고."

- ······.


다르멜은 펠릭스의 블러핑을 어떻게든 받아치려 했으나, 완고한 태도에 알고도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당하니 복수하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다.

거래할 생각이 아예 없다면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이런 식으로 거래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


-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는 데요.

"흥."


다르멜은 도도한 표정을 보여주며 구혼자를 걷어차는 오만함을 엿보였다. 가당치도 않다는 분위기였지만, 그것이야말로 펠릭스에게 가당치 않았다.

절로 나온 콧소리를 뒤로하고. 펠릭스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분위기를 바꿨다.


"내가 원했던 답이 나오나 했더니, 비슷하면서도 다르군."

- ···다르다?


지금까지 젊은 남성에게 협력을 부탁하면 당연히 나오던 이야기가 혼인이었다. 공작가 직계라는 배경, 적령기라는 연령대, 아름다운 외모까지. 뭐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다.

약간 충격받았으나 이상할 건 없었다. 상대방은 소드마스터 상급이고, 다른 분야에서 자신과 비슷한 위치였다. 열렬한 구혼을 받는 건 피차일반이니 아쉬울 게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 까닭이다.

펠릭스는 진정한 다르멜에게 하나씩 조곤조곤 말했다.


"우선 전제를 짚어볼까. 왜 내가 사들인 땅이 필요하지?"

- 제가 계승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섭니다.

"너는 그렇겠지. 테루아 공작은 왜일까?

-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서지요.

"옳다."


테루아 공작은 본인 영지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카팔라 제국이 동진하면 어차피 사라질 서쪽 끝보다 새로운 곳에 영지를 만드는 게 이득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건 공작의 판단. 그런 결단이 불가능한 중소 영주는 도적을 방어하고 난민을 수습하느라 여러모로 피폐해졌다.

어째서 통치자로서의 권위가 중요한가? 명령을 듣게 하려면 절대적인 상하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봉건제에서 상하관계란 어디까지나 계약에 따른 협조였지, 조건 없는 충성은 없었다. 테루아 공작은 영주를 보호할 의무를 내팽개쳤고, 이것은 영주가 공작에게 충성할 이유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충성하지 않는다면 크게 2가지 문제가 생긴다. 군대와 세금이다.


"알카탄 공국이 침묵한 시점에서 테루아 공작은 영지를 경영하는데 적투성이고, 소비를 감당하려면 소득이 필요하지. 그럼 이건 무엇을 의미할 것 같나?"

- 적대적인 영주의 약화를 의미하겠군요.

"잘 아는군. 내 후견인이신 트렐라드 변경백님이 불리해져. 그런데 이걸 단순히 천만 골드를 받는다고 덮을 것 같나?"


펠릭스의 말을 듣자 다르멜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타당한 이유였으니까.

그렇기에 펠릭스는 패를 던졌다.


"그러니까, 농지도 산림도 주지. 뭘 줄 수 있나? 줄 수 있는 게 있을 텐데."

- 어렵군요. 죄송합니다만 드릴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있지. 당신의 미래."

- ···?


다르멜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거래품목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곧 얼굴을 가다듬었지만, 일순간 보인 멍한 표정은 인간미로 가득한 것이었다.

펠릭스는 수정구 너머로 그 표정을 보고 묘한 귀여움을 느꼈다.


'이게 그 갭모에인가 하는 그거냐.'

"이건 판돈이다. 네 미래에 거는 도박이지."

-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어리석은 도박입니다. 제가 저의 미래를 팔 것 같습니까?

"넌 아닐 지도."


펠릭스는 모두 말하지 않았지만, 다르멜은 나머지 말을 알아차렸다. 다르멜이 팔지 않는다면 다른 경쟁자에게 팔아넘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소드마스터 상급이 보증하는 상품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의미했다. 사기당하지 않는 매물은 참가희망자와 가격이 상승한다. 이걸 털어놓는다는 건 펠릭스가 누구에게 팔아도 지지 않는 거래임을 의미했다.


'테루아 공작과의 정치전에 불필요하게 끼어들어야 하잖아!'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이유는 이러했다. 다르멜이 공작위 계승자가 되면 펠릭스는 차기 공작에게 생명줄을 판 셈이 되고, 계승자가 되지 못하면 공작 가문의 본가 출신을 죽을 때까지 부려 먹을 권한을 산 거래가 된다. 뭘 해도 이득.

다르멜은 진중하게 고민했다. 이걸 받지 않고도 계승권 싸움에서 이길 방법이 있는가?


'······.'


없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테루아 공작은 초토화한 본거지에서의 권위와 활력을 가지려 했다. 지세트의 매물은 그 제물과 희생양으로 최적이었다. 알카탄을 거쳐 구매하기만 하면 대대손손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수수료 정도는 떼어줘야겠지만, 배신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공국이 거액을 받아갈 수는 없다.

그럼 이번 경매에서 가장 값싸게 가장 많이 사들여야 했다. 그게 테루아 공작이 바라는 바였다. 그런데 펠릭스는 단신으로 가장 수익성 낮은 매물을 반 이상 먹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농지와 산림은 재건비용이 당장 필요한 영주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테루아 공작에겐 달랐다.

그 점에 집중해보니 펠릭스의 반응이 명명백백했다.


'어차피 그렇게 넓은 땅은 란소스 남작이 혼자 관리할 수 없어. 트렐라드 변경백이 행정관을 확대해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관리를 포기한다면 얘기는 다르겠지. 세금을 적게 거둔다고 하면 반발할 농부는 없을 거고, 자발적으로 충성할 거야. 거기에 몬스터를 유인해서 습격이라도 하면···.'


다르멜은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생각한 점은 '저 작자를 적으로 삼아도 무방한가?'였고, 나온 대답은 '아니다.'였다.

오슬레아 대왕국에 있어 소드마스터 상급이라는 존재는 갈망 그 이상의 염원이었다. 8서클 대마법사를 둘이나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말로 쓰이는 소드마스터 상급의 부재는 지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난을 삼키게 하였다.

약 80년 전 마게트 왕국의 이셰르 슈벤타트가 지휘하는 군대가 오슬레아 대왕국의 주력군을 분쇄했을 때는 국가가 발칵 뒤집혔다는 말로도 부족한 패닉에 빠졌다고 했다. 최신형 기간트 골렘 수십 기를 밀어붙여도 2세대 뒤처진 구형 기간트 골렘을 이길 수 없었다.

화물선으로 사용하느라 각지에 퍼져있던 부양선을 끌어모아 강습병단을 꾸렸고, 간신히 마게트 왕국의 수도 인근에 상륙에 성공함으로써 전쟁 전 국경선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10대 소드마스터 상급을 국왕 폐하와 공작님들이 포기할까? 아냐, 절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럼 이 거래는···.'


간단했다. 후계자로 지목받으면 그만이었다. 공작위를 받기만 한다면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다. 테루아 공작과 대치해야 한다는 부담만 빼면, 완벽한 거래였다.

다르멜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펠릭스는 속으로 웃었다. 이런 배짱이 먹힐 정도로 편한 세계라니. 웃지 않을 수 없다.


- ···받겠습니다.

"좋아.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지. 공증인 있나?"

- 내일 아침에 카난리아프로 대리인을 보내겠습니다.


결단을 내린 시점부터 진행은 바람처럼 빨랐다.

다음날 카난리아프에 사델라 공작가에서 집사가 텔레포트로 넘어왔고, 계약서를 완성했다. 펠릭스 란소스 오브 텔로드가 구매한 지세트 일대의 모든 농지와 산림을 넘겼고, 그 대가로 다르멜 오트갱 오브 사델라의 미래가 담보로 잡혔다.

이 시점에서 펠릭스는 6일차 경매를 포기하고 곧장 트렐라드 변경백에게 연락했다.


- 잘하는 짓이다. 이걸 노렸던 거냐?

"얻어걸린 거죠. 여기까지 잘 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으니까요."


펠릭스는 트렐라드 원정군의 원활한 재정지원을 위해 장기간 수입을 거둘 수 있는 매물을 골랐다. 이런 거래가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변경백 역시 단기간의 소액보다 장기간의 거액이 낫다고 판단해서 펠릭스의 판단을 믿어주었다. 그런데 더 장기적인 안전을 담보로 받아왔다.


- 이번 일을 정치적으로 두고두고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다행이긴 하군. 그리고 돈도 얻었고.

"천만 골드 정도면 괜찮겠죠?"

- 다들 배당금 받을 거고. 네 배당금을 나눠준다고 말하면 불만은 생겨도 보일 녀석은 없겠지. 하지만 네 돈인데 괜찮냐?

"상정하던 걸 못 드리기도 했고. 당분간 남쪽 섬에서 지낼 테니 관리도 못 할 거라서요. 잘 써주십쇼."


배당금으로 먹은 1,400만 골드 중에서 카난리아프에게 빌린 돈 170만 골드의 대금으로 줄 340만 골드와 여윳돈 60만 골드를 제한 천만 골드를 모두 트렐라드 변경백에게 넘기겠다고 말했다.

60만 골드만으로도 충분히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혼자 지낸다면 말이다.


- 그나저나 아직 경매하는 도중 아니냐? 대화하고 있어도 돼?

"6일차 매물은 제대로 된 게 없고, 경쟁자가 셉니다. 소식 듣고 찾아올 사람도 많을 거고, 그거 목적으로 비싼 걸 몰아넣었으니까요. 제가 낄 경매는 아닙니다."

- 마나석이나 마법서 같은 것들이니 기사인 네게 절실하진 않다만···.


가장 중요한 건 6일차 경매의 소득은 경매장이 독식한다는 점이었다. 경매장의 수익은 지세트 왕가의 것. 그러니 굳이 참가해서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1~5일차 경매는 국외 도피한 귀족들의 재산이었지만, 6일차 경매는 전대 왕가의 재산이며 땅이나 예술품처럼 가치가 변동하는 품목이 아니라 항상 비싼 품목이었다. 마나석, 마법서, 검술서처럼 누구에게나 유용한 것들.

펠릭스는 검술서에 혹했으나 예상된 가격이 20만 골드라는 말에 기겁하며 손절했다. 아무리 궁금해도 20만 골드나 내면서 호기심을 해결하기는 싫었다. 기간트 골렘 외장값 한 세트가 8만 골드였으니, 과수요가 도를 넘었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몸조심해라.

"예."


트렐라드 변경백과의 통신을 끝내고, 펠릭스는 등받이에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다.

다행히 천만 골드로 당장 해갈할 수 있는 목돈을 건넸고, 사델라 후작의 후계자를 끌어들여 장기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테루아 공작의 자질에 계속 의혹을 걸면서 압제를 정면에서 분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계승에 밀린다면?


'내가 빌어야지 뭐.'


그 상황에서는 펠릭스의 단독 활동이 된다. 테루아 공작은 어떤 반발도 없이 지세트 방면에서 꾸준히 들어오는 세금을 등에 업고 강압적인 통치를 휘두를 수 있다.

그럴 땐 펠릭스가 나서야 했다. 그 시점에서 사델라 공작의 직계인 다르멜은 펠릭스의 수족인 상태이고. 사델라 공작위 계승의 결정권을 가진 테루아 공작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품진 있진 않을 것이다. 키펠이 제시할 카드를 모조리 쳐내는 전략이 다르멜의 작품이고, 테루아 공작 견제에 활용할 수 있다.


'십중팔구 안 되겠지만.'


테루아 공작이 이번 뒷거래를 눈치채지는 못하겠지만, 펠릭스가 구매한 매물을 가져온 다르멜에게 큰 공적을 가져왔다고 인정하진 않을 것이다. 저평가하며 떨어트리려 할 것이 뻔했다.

명백한 트렐라드 소속원에게 매물을 가로챘다면 이득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의심도 생긴다. 어떻게 가져왔는가, 이걸 설득하지 못하면 공적은 무력해질 것이다.


'어떻게 돼도 난 손해 없지.'


이것이 협상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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