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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신희님의 서재입니다.

흔한 양판소 세계에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판타지

장손신희
작품등록일 :
2020.04.07 05:55
최근연재일 :
2020.11.06 06:00
연재수 :
7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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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글자수 :
3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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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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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도굴과 도박 (3)

DUMMY

마법사 추궁은 간단했다. 처음에는 하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마나에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답하지 못했다.

마나에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굉장한 무례이자 모욕이기 때문에 보통은 대꾸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펠릭스는 4서클 마법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드마스터 상급이라는 실력과 하즈킨 공작의 귀족 손님이라는 신분 앞에선 역정을 낼 수 없었다.

펠릭스는 귀족 자격으로 엄중히 하나씩 짚으며 주사위에 담긴 속임수에 대해 말했다. 원리, 활용 방법, 원하던 결론까지. 도박장에 방문해서 큰돈을 가져간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들 모두 기사나 마법사였고, 도박장에선 추궁하지 못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었던 상황을 타파했다.


"남작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뭘, 자네들이 정직하게 장사했던 덕분이지."


도박장 사람을 이끌고 도심을 들쑤셨지만, 치안대가 별다른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기 치는 도박이 아니라 순전하게 운에 맡긴 곳이라 엄연한 유흥시설로 여겨진 덕분이다.

펠릭스는 차례대로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들을 보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말씀하신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벌써? 생각보다 빠르군."

"남작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도박에 빠진 녀석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체스터가 컵을 살살 흔들며 주사위가 6이 나오게끔 세공하는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던 펠릭스가 고개를 돌려 노름판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펠릭스가 요청한 건 크게 두 가지. 실력 있는 도굴꾼 또는 고용 가능한 마도사를 찾아달라고 말했다. 전제조건은 도박 빚으로 고생하는 사람.


"다섯 명 정도 골라왔습니다. 보시죠."

"준비성도 철저하지."


주인장이 건넨 문서를 차근차근 읽는 펠릭스의 눈에 유독 시선을 끄는 인물이 보였다. 10대 중반 정도 되는 연령에 물경 4천 골드를 빚진 인물. 다른 네 명은 기껏해야 200에서 500골드 정도였는데, 액수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펠릭스가 노름판 주인에게 묻자 답하길.


"원래는 집단이었습니다. 6인 파티였는데 다섯 명이 사기 행각을 들켜 치안대에 잡혔고, 혼자 위층에서 자다가 빚을 뒤집어썼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박꾼이 아니었다는 소리군."

"그건 아닙니다. 사기만 안 쳤지, 도박을 즐기던 건 확실합니다. 그쪽 주인에게 들어보니 일찍 잔 이유가 전날에 밤새 도박해서 그렇다더군요."


6인 파티의 면모를 살펴보니 퇴역기사 하나, 편력기사 둘, 돈이 궁했던 마법사 하나, 숲지기 출신 궁수 하나였다. 당사자는 몰락한 중산층 집안의 자식. 마법사가 던전 지도를 가져와 파티를 모집했고, 퇴역기사를 리더 삼아 네 명이 모였다고 한다.

하즈킨까지 오기는 했으나 우기 때문에 탐사 시기를 놓쳐 마을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술과 도박에 끌려 탕진하자 마법사의 제안으로 사기를 기획했다, 라는 전개. 너무 대놓고 주사위를 조작한 탓에 치안대가 나섰고, 현장에서 바로 구속됐다.

퇴역기사와 두 편력기사는 노잡이로 팔렸고, 마법사는 공작 아래에서 스크롤 제작에 평생 썩어야 했다. 숲지기는 발목 인대를 끊고 개척촌 행. 공작가에서 소정의 포상금까지 받았으나, 손해를 메꿀 수는 없었다. 체포 과정에서 공간확장 돈주머니가 찢어져 소멸해버린 탓이다.

고로 손해액의 나머지 액수인 4천 골드를 사기행각이 가담하지 않은 인원에게 뒤집어 씌웠다.


"상황은 알지만, 너무들 하는군."

"잃은 돈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요. 그나마 양심이 있는 녀석이라 망정이지, 다른 곳이었으면 매음굴에 팔았을 겁니다."

"허."


개척촌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은 다양하다. 사치품을 공급하거나, 욕구를 풀 수단을 공급하거나. 성별과 종족, 연령을 가리지 않고 '약자'를 밀어 넣어 험지에서 고생하는 개척민의 의욕을 증진시키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도박장 주인이 그런 이유로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생존자라서 개척촌에 팔지 않았다고 한다.


"은근히 부추기는 걸 보니 내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것 같군."

"하하하···. 티 많이 났습니까?"

"보면 알지."


펠릭스는 다른 네 명의 글도 잠깐 보았다. 20대, 30대 등 연령층은 한창 활동하기 좋았지만 하나같이 소소했다. 빚이 있기는 하지만 도굴 한번 잘 해내면 금방 해방될 수 있는 액수. 하지만 4천 골드는 도굴 한 번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대박이 난다면 모를까.

그러니 이번 일에 동원하고도 당분간 데리고 다니기에 충분했다.


"데려와."


* * * *


주사위에 열중하는 체스터는 1층에 두고, 펠릭스와 네리카는 도박장 2층에서 몰락한 중산층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알지만 직접 듣는 게 확실하다.

도박장 주인과 다른 도박장 주인이 펠릭스 뒤에서 분위기를 잡았고, 펠릭스 혼자 의자에 앉아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일레이자에요."

"파티 구성원 실력이 꽤 좋았는데, 넌 무슨 역할이었지?"

"어···, 이것저것이요. 던전 발굴할 때 토굴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대 세우는 간격 정하기나 밧줄 길이라던가 등불 기름 관리라던가···."

"잡무였군."

"으윽."


중산층이라고 표현이 뭉개졌지만, 학자 집안일 가능성이 컸다. 파티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맡고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보조 활동을 수행하려면 머리가 뛰어나야 했다. 던전 발굴 관련이니 마법사가 할 수 없는 학문 계통 담당이라는 소리.

그러나 무력이 없는 까닭에 짐꾼이나 허드렛일까지 도맡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하인처럼 부려진 덕분에 범죄에 얽히지 않았다.


"너는 4천 골드를 갚아야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생각해둔 계획 있나?"

"그, 하녀나 시녀로 들어가서 밑천을 마련하면···."

"상황 파악이 안 됐군."


학식을 검증하고 신분을 보장해서 일손이 부족한 부유층을 찾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가진 게 많은 가문이 급하게 사용인을 구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사용인의 친척이나 추천을 받아 고용하기 일쑤. 생판 관계없는 외부인이 영입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농번기처럼 갑자기 일손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 십 년 넘게 눈도장을 찍으며 좋은 인상을 줘야 겨우 가능성이 열린다.


"저를 어떻게 하시려고···?"

"조만간 싸울 일이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서 머리 좋은 녀석이 필요해. 기왕이면 전투능력이 있는 편이 좋았지만,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니 너를 사기로 했다."

"······."


하나하나 트집 잡던 상대방이 주인이었다는 걸 깨달은 일레이자는 얼굴이 창백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펠릭스 등 뒤에 선 도박장 주인과 또 다른 험악한 남자가 노려보는 것도 있었지만, '팔린다'라는 현실이 비로소 피부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어깨를 움츠린 채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남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자 마치 아기 새를 보는 것 같았다.


"네리카. 나는 내려가 볼 테니 잘 달래 놔. 주인장. 쟤 목욕하게 물 좀 받아두고."


펠릭스는 지시를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갔다. 네리카에게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일레이자를 달래라고 해놓고, 펠릭스는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신성력을 이용해서 주사위를 조작해 은근히 돈을 따내는 체스터가 보였다. 수준급 도발로 상대방을 자극해 돈을 뜯어내는 실력이 장난 아니었다.


'소란 부리지 마라니까 말 진짜 안 듣네.'


결국 펠릭스는 체스터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주사위를 조작해서 체스터의 돈을 모조리 뜯어내서 도박장 사람들에게 돌려주었다.


* * * *


해가 저물 무렵.


"진정 됐나?"

"···네."

"다행이군. 못 받아들이겠다고 난리를 쳤으면 환불했을 텐데."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일레이자는 전형적인 도시 아가씨 분위기였다. 험한 일을 하느라 손이 좀 상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피부는 부드러웠고 눈매도 동글동글했다. 가문이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꽤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살았을 외견이었다.

방구석에 엎드려 뻗친 체스터를 힐끔 쳐다보던 일레이자는 펠릭스가 손톱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자 시선을 바로잡았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건 지도였다.


"지도 읽을 줄 아나?"

"네, 조금은 알아요."

"그거 다행이군."


이 세계의 지도는 정교함이 없었다. 랜드마크를 기준으로 그려지는 게 일반적이라 수학능력보다는 직관성이 더 중요했다.

5서클에 비행 마법이 있고, 부양선도 있는 까닭에 굳이 정교한 지도가 필요 없었던 까닭이다. 직접 확인하면 되니 축적 계산에 머리 아프게 몰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의 목적지는 티올 요새다. 거기에 잠입해서 최종적으로는 점거해야 돼."

"점거···? 기사이신가요?"

"기사? 아,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 나는 펠릭스 란소스 오브 텔로드, 남작이다. 소드마스터고, 공작의 의뢰를 받아서 요새를 무력화해야 한다."


펠릭스의 소개를 들은 일레이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했으나, 뒤에 서 있던 네리카가 허리를 받쳐 일으켜 세웠다.


"기절할 정도로 놀라운가?"

"아, 아니요."

"그럼 왜 그런 거지?"

"제 가문이 소드마스터님의 선택으로 몰락해서···."

"음, 그런 일이 있었군."


나름 가문이라고 부를 정도로 뿌리를 내린 집안이 단번에 망한 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소드마스터의 변덕이라면 가능성 있었다. 소드마스터는 경지가 낮은 하급이라도 애지중지 다루는 전력이니 기분을 위해 가문 하나둘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트라우마가 드러났지만, 이제 와서 그걸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 펠릭스는 손가락을 튕겨 주의를 끌었다.


"정신 차려라. 지금 너는 그런 걸 생각할 처지가 아니야. 네 가치를 내게 증명해라. 평생 내 아래에서 일하고 싶진 않겠지?"

"네!"

"넌 닥치시고."


눈치 없이 거수하는 체스터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억 소리를 흘리며 뒤로 고꾸라졌다.

체스터의 허당 짓거리가 웃겼는지 일레이자가 풋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1980년대 코미디에서나 먹힐 법한 몸개그와 바보짓이었으나 그게 통하는 시대라면?


'흠, 나중에 이걸로 여비는 벌 수 있겠군.'


서커스가 떠올랐지만, 곧 머리에서 지웠다. 코미디라는 건 심력 소모가 커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체스터가 이마를 싹싹 비비며 자리에 일어서고, 네리카의 부축 없이 홀로 선 일레이자. 펠릭스는 넷만 있는 방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전투를 하러 가는 거다. 적당히 긴장해. 요새 동쪽 절벽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대기하다가 달이 떠오르면 올라갈 거다. 내 허리에 끈을 묶어서 둘을 매달 거다. 체스터, 너는 혼자고."

"···무슨 계획이 그래요?"

"녀석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접근해야지. 낭떠러지에서 침투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 못 할 거다. 하지만 그러려면 도구를 다루는 게 능숙한 사람이 필요해. 성벽의 취약한 부분을 찾을 수 있는 지식이 있는 사람."


펠릭스는 일레이자를 바라보았다. 해안 쪽에도 성벽이 있고, 절벽이라는 위태로운 지반에서 힘으로 허물어 큰 충격을 줄 필요는 없었다. 약한 부분만 간단하게 파고들면 될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흔들림 없는 주장에 세 명은 긴장했다. 겨우 4명으로 요새를 함락시키러 간다고 하니 긴장이 안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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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티올 요새 (2) 20.08.09 52 2 11쪽
53 티올 요새 (1) 20.08.06 56 1 12쪽
» 도굴과 도박 (3) 20.08.04 65 1 12쪽
51 도굴과 도박 (2) 20.07.29 68 2 11쪽
50 도굴과 도박 (1) 20.07.27 69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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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개척지를 향해 (1) +1 20.07.22 72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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